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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연봉제에 반대해온 서울 지하철 노조의 파업에 서울시가 직접 개입하면서 파업 자체는 끝났다. 출퇴근길을 담보로 삼은 것이기에 지하철 노조의 파업은 모든 시민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철도 공항 학교 등 공공노조의 파업이 현대자동차 등 민간 기업의 파업보다 좀 더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서울시가 성과연봉제 시행 문제를 향후 노사가 협의해 결정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성과연봉제는 2010년 상반기부터 정부가 대표적인 공기업 개혁 과제로 추진해온 것이었다. 그런 개혁 과제를, 그토록 도입에 강하게 반대해온 노조와 협의(합의)해 시행하라고 한 것은 레토릭이요, 모순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일었다. 공기업 경영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부의 개혁조치를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방해한 상황이 돼버렸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일단 파업을 끝내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며 “성과연봉제를 공공기관에 무리하게 도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오히려 정부를 비판했다. 중앙 정부와 지자체가 정면으로 맞선 꼴이다. 성과연봉제는 임직원의 업무 성과에 맞춰 임금을 차별화하겠다는 것으로, 일을 잘하고 더 한 사람에게 더 주는 제도다. 이를 가로막는 서울시와 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공기업을 제재하려는 정부의 대응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찬성중앙 정부는 서울시가 명백히 노조편을 들면서 파업 사태에 개입한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파업이 풀린 것은 다행이지만 성과연봉제 도입에 제동이 걸려버린 것에 대한 걱정은 더 커졌다. 서울메트로 등 지방공기업에 대한 정책을 담당하는 행정자치부, 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개혁을 총괄 지휘하는 기획재정부,
지난 4월 총선 직후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경고가 무섭게 맞아떨어졌다. 여소야대가 확정되자 무디스는 국가신용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발표문을 냈다. ‘한국 국회는 종종 교착상태에 빠졌다’며 노동개혁 등이 지연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때 피치도 ‘핵심 구조개혁이 어려워졌다’며 정치리스크를 제기했다. 밖에서 더 정확했다.근 열흘간 국회의 극한 투쟁은 그 예측 그대로였다. 당사자들은 그 투쟁이야말로 열심히 하려다 보니, 아니 실제로 열심히 한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정기국회 파행은 명백히 파업이었다. 어제부터 국정감사를 재개한다지만 그들의 ‘정상화’란 것에 큰 기대도 걸기 어려울뿐더러 그런 합의를 곧이 믿다가는 바보가 된다. 입법부 수장이 형사고발당하고, 여당 대표는 초유의 단식 농성을 벌였다. 정치가 투쟁, 농성을 쉽게도 한다?무섭게 적중한 무디스·피치 경고한국적 노동 전통이 국회에서도 일상화되면서 정치가 노동투쟁판같이 된 것이다. 문제가 다분한 장관해임안이었고, 안건 상정 과정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했다. 그래도 여당 대표가 목숨까지 내건 결단이었다면 지금쯤 뭔가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나. 정치의 9할이 말이라 했는데, 여야 공히 허언(虛言)의 정치에 매달린다. 열흘의 헛싸움보다 이제부터 어떤 법을 마구 찍어낼지가 더 무섭다.이런 판에도 정치를, 국회를 신뢰할 수 있을까. 국회가 조롱거리가 안 되고, 정치가 희화화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해진다. 정치가 붉은 띠 맨 노동운동처럼 된 결과다. 대국민 사죄를 해야 하는 의장이, 공당 대표가 리더십 라인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대조적으로 노조의 정치 행보는
한국에서 미래형 과학농업 시도가 위기에 처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간척지인 전북 새만금에서 과학농업을 하겠다는 LG CNS가 신사업계획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굳힌 것이다. LG그룹 계열의 이 회사가 농업분야에 진출하면 농민 피해가 커진다는 농민단체들의 반대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농민 편을 드는 국회와 사실상 방관해온 정부의 무책임도 한몫했다. LG CNS는 농민의 반발을 의식해 처음부터 농작물 재배·생산에는 참여하지 않고 생산품도 전량 수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회사는 한발 더 나아가 농작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농업 관련 기자재를 공급하겠다는 사업계획도 처음부터 충분히 알려왔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설명회조차 보이콧했고, 이 회사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해왔다. 국회의원까지 나서 농민 편을 들자 LG CNS는 과학농업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유통회사 어드밴스트인터내셔널그룹 등과 함께 3800억원을 투자해 새만금에 76만㎡의 토마토 및 파프리카 농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은 수포가 될 판이다.○ 찬성LG CNS와 농업의 산업화를 주장하는 쪽은 ‘스마트 팜’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한다. 노동력 감소와 수입 농산품 공세에 시달리는 농촌을 살리려면 대규모 자본 투자와 신기술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농업에서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중국 등지로 수출을 통한 활로도 뚫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일본만 해도 자동차를 만드는 도요타와 금융그룹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이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쌀농사를 짓고 수출까지 한다.스마트 팜은 정보통신기술(ICT)을 활
국민MC 송해는 구순에도 현역이다. 여전히 마이크만 잡으면 청산유수인 그가 노래도 잘하는 이유를 ‘아재 개그’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되겠다. 순전히 이름 덕이다. 언제나 ‘송(song, 노래)해!’다. 해주예술학교에서의 성악공부를 기본기로 그는 26년째 일요일 낮 전국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시골 오일장날 분위기의 ‘전국노래자랑’이 국민 여흥 프로그램으로 장수하는 것도 그의 진행솜씨 ...
명산대찰(名山大刹)이란 말 그대로 한국의 큰 산들은 다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다. 절의 정식 이름도 산과 합쳐져야 완성된다. 가야산해인사, 지리산화엄사, 설악산신흥사, 내설악백담사라고 정문격인 일주문 현판에 커다랗게 새겨져 있지만 기실 일주문에는 문짝도 없다. 웅대한 가람도 그저 산의 일부라는 의미겠다. 도심의 사찰도 이런 작명법을 따른다. 서울 강남의 수도산봉은사는 야트막한 뒷산의 옛이름을 그대로 이었다. 옛 도심 종로의 조계사도 &lsq...
천재는 만들어지나, 태어나나? 천재연구의 출발점이자 논쟁거리다. ‘99% 노력과 1% 영감으로 탄생한다’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대로라면 천재는 만들어진다. 반면 ‘천재 집안(가계)에서 천재가 나온다’는 19세기 영국의 천재연구자 프랜시스 골턴에게라면 유전적 요인이 결정적이다. 발명왕 에디슨의 말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오로지 노력으로 큰 업적을 이뤘다는 성공담도 많다. 하지만 우생학을 파고든 유전학자 골...
97세의 김형석 전 교수가 최근에 또 책을 출판해 화제가 됐다.《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내면서 한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익장, 노당익장(老當益壯)이 2000년 전 중국 후한 때부터 쓰인 표현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늙는다는 게 절대 기준은 없다. 미켈란젤로가 불후의 대작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나이나 칸트가 《판단력 비판》으로 3대 비판서를 완성한 때 모두 66세였다. 그 시대로는 상당한 고령이겠지만 이런 인류의 스승에게 누가 ‘늙음’과 ‘노인’을 언급이나 하겠나.기업도 그렇다. 무수한 회사들이 명멸하지만 혁신하는 기업들은 길게 간다.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고 커가는 기업은 성숙할수록 더 큰 성과도 낸다. ‘기업도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124세 기업 GE가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도전 중이라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19세기 말에 설립된 미국 간판 기업의 무한 변신이랄까. GE가 벤처정신을 다진 계기가 흥미롭다. 항공기 제트엔진에 센서를 붙여 데이터를 수집하려 했으나 소프트웨어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 2011년 연구센터를 만든 뒤 2020년까지 세계 톱10 소프트웨어 회사가 된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산업용 인터넷 시장을 잡자’는 전략이 수립된 것이다.GE가 거둔 기술과 경영의 혁신 사례를 찾아보자면 끝도 없다. 이 회사가 상품화한 수많은 과학기술은 인류의 전기시대 개척사, 에너지 발전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전의 잭 웰치와 현직 최고경영자(CEO) 제프리 이멜트로 대변되는 GE 경
한국의 노동시장 계층은 카스트 제도와 닮았다. ‘4계급’의 견고한 수직구조부터가 그렇다. 앞쪽 대기업 정규직에서 맨 뒤 칸 중소기업의 비정규직까지 엄격히 분리된 설국열차같다. 고용노동부의 임금 통계를 보면 극명하다. 전체 근로자의 10%인 대기업 정규직을 100으로 봤을 때 대기업 비정규직은 62다. 이들의 비중은 2%에 그친다. 중기 정규직 임금은 52 수준, 이 그룹이 절반을 넘어 57%에 달한다. 네 번째 계급인 중기 비정규직 임금은 35로 더 떨어진다. 근로자의 30%가 여기에 속한다.100:62:52:35 길잃은 노동개혁골품화된 노동시장을 실례로 보자. K자동차의 원·하청 임금구조(2015년, 노동연구원)는 현실의 단면이다. 성골·진골격인 본사 원청 직원의 평균 연봉은 9700만원, 사내하도급은 5000만원이다. 1차 협력사 직원은 4700만원으로 뚝 떨어진다. 중견기업이 다수인 1차 협력업체 내 사내하도급은 3000만원이다. 대개가 중소기업인 2차 협력사는 2800만원, 이곳의 사내하도급은 2200만원에 불과하다. 성골에서 6두품을 거쳐 1두품으로 내려오는 1500년 전 신분 구조와 맞아떨어진다. 출산 지원, 은퇴 후 복지 등까지 감안하면 통상 격차는 더 벌어진다.임금은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어서 단순 비교나 평가에는 위험도 있다. 또한 사적 계약의 영역인데다 경영의 본질에 해당돼 기업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철 지난 노동 법규에 기댄 강성 노동세력의 정치투쟁에 따른 왜곡된 분배구조라면, 해당 기업을 넘어 연관 산업과 전체 경제에 걸림돌도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이 무시되고, 특정 노동계층이 일감까지 전횡하는 시스템이라면 국가적 개혁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나 남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이 서울에서도 있었다. 1870년대 러시아 젊은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혁명사상이 50년이 지나 이 땅에선 문맹퇴치, 귀농운동 형태로 시도됐다. 1920년대의 농촌계몽 활동이 그런 운동이었다. 1970~80년대 이후 한국 대학생들의 농활, 공활의 연원도 여기에 닿는다.정치 한다는 이들의 소위 민생투어라는 것을 보면 한 시대 전 계몽활동의 묘한 코스프레가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바랑 하나 짊어지고 만행(萬行)에 나선 구도자의 진지한 모습도 덧대진다. 하나의 이미지 정치랄까. 대중에게서 잊혀지는 게 두려워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는 이류 연예인들의 행태와도 닮았다고나 할까. 노출의 방식이 조금씩 다르고, 메시지 전달 기법에서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큰 선거라도 앞두면 여야 정치인들이 경쟁을 벌인다.엊그제 민생투어에 나선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밀짚모자 쓴 사진이 지면에 실렸다. 시동을 건 곳은 세월호의 팽목항이었다. 지난달에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 달 가까이 히말라야 투어를 하고 왔다. ‘천리행군을 떠나는 심정으로 비우고 채워서 돌아오겠다’던 그는 극빈국 네팔과 부탄에서 뭘 배웠을까.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그랬다. 몇 년 전 정치계획표가 빗나가자 미국행을 택했다. 한때 그의 멘토 정치인이 “미국에서도 대표적 부촌인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의 숲길을 산책하며 국민의 고통이 느껴졌겠습니까”라며 쓴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다시 화제가 된 미국길이었다. 2007년 대선에서 패한 정동영 후보도 이듬해 몇 개월간 미국으로 나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비 때마다 외유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일찍부터 올빼미형 인간(night guy)이라고 했다. 백악관 입성 후에도 새벽 2시까지 안 잔다고 한다. 그런데도 저녁 식사 후 먹는 것은 물과 아몬드뿐이라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그가 먹는 아몬드가 6개도, 8개도 아닌 7개라는 게 흥미롭다. 매일 꼭 7개라는 것에서 임기 말 백악관 공보팀의 이미지 전략도 배어나지만 대통령의 밤은 관심거리가 될 만하다.청와대 오찬이나 만찬 행사도 언뜻 산해진미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칼국수를 유달리 좋아하던 김영삼 대통령 때는 청와대 오찬 후 식사를 다시 해야 했다는 인사도 있었다. 몇백명씩 참석하는 해외의 국빈만찬에서 식어버린 말고기에 손이 안 가 늦은밤 영빈관에서 김치 얹은 라면을 먹고서야 잠들 었다는 대통령도 있었다.늘 먹는 식사지만 한끼라도 놓치면 하늘까지 살짝 노래지는 게 보통 사람의 몸이다. 50년간 매일 한끼만으로 생활했다는 작고한 망명객 황장엽 씨나 김동길 전 교수 같은 이들에겐 기벽이 느껴진다. 식사만큼 규칙성 반복성 동일성의 원리 같은 게 적용되는 생활영역도 없다. 그래서 아침밥만큼은 국까지 곁들여야 한다는 이들은 매일 꼭 챙겨먹는다. 반면 아예 건너뛰는 쪽은 영양학자들이야 뭐라든 본인 패턴의 균일성 유지가 나름의 건강법이다.소식(小食)이냐, 포만감이 들 때까지냐에도 정답은 없다. 미식가면서 대식가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때 유세일정을 마치면 그 나이에도 먼저 찾는 게 야식이었다니 그게 본인만의 체력 보강책이었다. 그래도 소식과 장수를 결부시키는 연구는 적지 않다. 어제 나온 100세 이상 고령자 통계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전국의 상수(上
대도시의 행정조직은 나라마다 많이 다르다. 서울에는 25개 자치구(區)가 있지만 뉴욕은 5개 버러(borough)로 나눠진다. 도쿄는 23개 구로 구성돼 있다. 신주쿠·시부야 같은 지명이 그렇다. 자치 방식도 제각각이다. 가령 맨해튼 브루클린 같은 뉴욕의 버러에는 구의원이 없고 구청장만 선출한다. 파리와 베를린에는 구청장이 없지만 구의회는 있다.한국에서도 구청은 도시 내 자치행정과 생활 민주주의의 중요한 축이다. 물론 구청이라고 다 같은 구청은 아니다. 종로구·해운대구처럼 광역단체 아래는 ‘자치구’인 데 비해 고양시 덕양구, 성남시 분당구는 단순 ‘행정구’다. 자치구라야 예산의 편성·집행권과 함께 구의회도 두고 행정 조례를 직접 만든다. 말 그대로 자치를 한다. 인구 4만5000명의 부산 중구는 전국에서 제일 작은 미니 구지만 행정 권한에서는 인구 100만명이 넘는 수원·고양과 같은 급이라는 불균형 문제도 있다.시·군·구 중에서는 수원의 불만이 제일 클 것 같다. 주민이 122만명에 달하고, 4개의 행정구까지 있는 대도시다. 그래도 기초 지자체다. 인구감소로 올 들어 120만명 아래로 떨어진 울산광역시의 5개 자치구·군과 같은 지위다.이런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재작년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의 심대평 위원장이 광역시의 구의회를 없애고,구청장도 시장이 임명하도록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안’을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도를 폐지하고 시·군·구를 2~5개씩 묶어 60~70개의 행정단위로 개편하자는 안도 여러차례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고려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행정구역의 기득권과 국회의
“90살이 돼 60살 아들 노인대학 입학시켜주면, 그때가 부모 구실 끝!” 소주잔을 나누던 옛 친구들의 얘기는 결국 자식 문제였다. 정치는 환멸, 사회 꼴도 온통 못마땅한 나이가 된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살펴봐주나’로 옥신각신하다 나온 얘기였다. 대학만 보내면 지원 끝이라고 하던 친구는 벌써 입을 닫았다. 60세라야 독립? 고(高)실업, 비(非)혼인, 저(低)출산 시대의 희비극이다.캥거루족 코쿤족 니트족 프리터족, 표현도 다양하다. 3포였던 N포세대가 이젠 7포세대라고 한다. 젊은이를 표로 계산하는 정치꾼들의 청춘 마케팅이 이런 현상을 사회적 트렌드로 굳힌 측면도 있다. 준비 없이 맞게 된 장기 저성장 시대가 온실 속 화초마냥 커온 젊은 세대들을 의존적 싱글족의 신인류로 만들었다.80조 저출산 대책, 잘못된 처방초식남과 골드미스의 범람은 경제 활력 저하와 결코 무관치 않다. 올 들어 4월까지 결혼 건수는 9만4200건, 11년 만에 10만건 아래다. 신생아는 14만7900명, 월별 통계가 나온 2000년 이후 최저다. 초혼 평균 연령도 남 35.8세, 여 32.7세다. 10년 새 2.4세나 올라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저출산 문제를 풀겠다며 최근 10년간 정부가 쏟아부은 예산만 물경 80조원이다. 그런데도 효과가 없다. 기존 정책을 다 바꿔야 할 상황이다. 물론 적정 인구를 출산에만 기댈 필요는 없다. 이주자를 받아들여도 된다. 고령층의 생산활동 또한 계속 길어진다.그래도 아들딸들이 결혼을 않는, 못하는 이유는 잘 살펴봐야 한다. “남자가 결혼 않는 이유요? 돈이 없어서죠.” “여자요? 남자가 돈이 없어서죠.” 우리 사무실 인턴의 설명이 영 썰렁개그는 아니다. 결국 경제가, 사회 전
한국의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9위다. 다소비 구조 못지 않게 96%를 수입하는 해외의존도는 더욱 취약점이다. 석유비중이 제일 높다. 석유는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에서 선적한 다음 수만리 분쟁의 바다를 무사히 통과해야 파이프를 내릴 수 있다. 가격 변동보다는 때로 국제 안보지형의 변화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남중국해도 한국의 주요한 원유도입 루트다.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반도, 필리핀과 보르네오로 둘러싸인 한반도 6배(125만㎢)의 이 바다에 긴장의 파고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대표적인 국제 분쟁지역으로 꼽힌다.남중국해에 분쟁의 파고가 높아진 것은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 때문이다. 이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많다. 모래 사(沙)자가 들어가는 난사, 중사, 서사, 동사 군도라는 이름처럼 작은 모래 섬들이거나 해저의 산호초다. 경제력만큼이나 군사력도 꾸준히 키워온 중국이 이 섬들에 인공시설물들을 설치하면서 영유권 다툼에 불을 지피고 있다. 베트남 등 관련국과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막대한 해저자원과 수산자원에다 전략적 가치를 감안하면 어느쪽도 쉽게 양보하기가 어렵다.맨 위쪽 동사군도와 필리핀에 근접한 중사군도는 간조 때에나 일부가 드러나는 산호 암초지대다. 그래도 중국 대만 필리핀 3국이 권리를 다투고 있다. 파라셀 군도라고 하는 서사군도에는 우물도 있다. 서사군도의 동쪽 섬만 장악해 왔던 중국은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 막바지였던 1974년 당시만 해도 베트남 관할이었던 서쪽 5개 섬까지 차지해버렸다. 지금은 하이난섬과 연계된 관광지로 개발 중이다.지금 분쟁지역은 난사군도다. 베트남도 ‘쯔응사군도’라는 고유의 이름을 내세우며 이곳만
‘내일을 향해 쏴라’는 할리우드의 고전 중 고전이다. 대부처럼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다. 흔한 권선징악적 해피엔딩도 아니다. 궁지를 전전하는 삶이지만 여유와 유머, 잘 짜여진 낭만이 있다. 무엇보다 부초 같은 은행 강도의 도주에는 페이소스가 있다. ‘머리 위로 빗방울은 하염없이 떨어지고…’라는 기타 반주의 주제곡도 팝의 클래식이다. 황금콤비 중 구변 좋은 늙은 은행털이 폴 뉴먼은 떠났고, 로버트 레드포드도 이젠 팔순이다.금고 강도 정도는 한국 영화에서도 흔하다. 현금수송차량 습격은 현실에서도 상습적이다. 도둑 세계의 수익만으로 보면 은행 강도가 상도둑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잡히지만 않는다면’ 그렇다. 실은 떼이지만 않는다면 ‘돈장사’가 제일 남는 장사라고도 했다. 금융업에선 문자 써서 ‘리스크 관리’라고 하지만 떼일 위험에 대한 대응기법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다.세상이 변하니 은행 강도 역시 진화하고 있다. 선인장 뒤에 숨어 역마차를 기습하던 총잡이들은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지능범으로 바뀌었다. 결국 ‘은행 중의 은행’ 중앙은행 전문 털이범까지 나타났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이 미국 중앙은행(Fed)에 맡겨둔 자금이 해킹으로 털린 것은 지난 2월이다. 100일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털린 돈 1억100만달러(약 1200억원) 중 스리랑카로 간 2000만달러는 되찾았지만 필리핀으로 이체된 8100만달러는 행방불명이다. 이 돈이 두 개 이상의 카지노에서 베팅칩 구입에 쓰였다는 정도만 파악됐다. 역마차 시절 낭만 강도나 중앙은행을 공격한 초특급 해커나 기껏 도박장부터 찾는 모양이다.국제 해커들은 9억5100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와 ‘삶의 목표는 행복 추구다’는 완전히 다르다. 일부러 불행을 추구하는 이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삶의 목표라든가 인간 존재의 이유가 행복 추구라고 하면 비약을 넘어 심각한 오류다. 인생의 목표가 더 많은 행복이라는 이도 있겠지만 삶의 지향점이 행복 추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이도 많다.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자도 있고, 그냥 ‘던져진 존재(게보르펜하이트)’라는 실존철학적 관점도 있다. 도쿠가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단한 길로 보는 이들도 상당할 것이다. 행복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면 쾌락지상주의자나 마약쟁이도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좋다.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문제는 국가가 나서 행복을 개인 삶의 목표인 양 설정하는 것이다. ‘네 삶이 행복해지도록 다 해주겠다’는 극단적인 체제가 공산국가다. 물론 국가가 강요하는 행복, 가짜 행복이다. 간섭과 통제의 다른 이름이다. 행복은 그런 추구를 하지 않는다는 자유까지 포함해 본질적 자유권에 속한다. 복지 국가론도 이 점을 놓친다. 개인의 행복을 국가가 규정하고, 확보해 주겠다는 의욕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겉만 따온 가장된 포퓰리즘이다.행복 추구는 개인의 '자유권'국가가 제공하겠다는 관급 행복에는 끝도 없다. 재원이 유한하니 자칫 불만만 키울 것이다. 평등해질수록 작은 불평등을 더 못 참는, 그런 본성만 자극하게 된다. 결국 시민의 자립의지를 좀먹고, 의타심만 키운다.박근혜 정부조차 관제 행복의 틀에 갇혀 있다. 행복주택, 국민행복기금, 국민행복제안센터에 이어 이번엔 행복센터(행정복지센터)다.
은행 같은 금융회사들은 이른바 ‘면허사업’이다. 국가가 보증하는 ‘금융기관’이 되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한다. 일반 제조업이나 다른 서비스업보다 금융업에 대한 정부 규제가 좀 더 촘촘해지는 현실적인 이유다. 금융의 중요성도 규제 근거는 된다. 선진국도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의 7~8%에 그치지만,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면 하루아침에 국가 경제가 무너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 규제가 대체로 강화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그래도 규제는 역시 규제다. 총체적으로 과감한 규제 혁파를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는 위기 예방론 주장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자연히 한쪽에서는 정보기술(IT)혁명 시대에 부합하는 금융 개혁을 촉구하고 반대쪽에서는 급증하는 가계부채와 심화되는 통화전쟁 파장을 심각하게 우려한다.《위기는 다시 온다》는 이런 근본적인 딜레마를 이론적·역사적으로 천착한 책이다. 저자는 “금융 역사는 사실상 금융위기의 역사”라고 규정한다.“자본주의 200년 역사에서 금융위기가 없었던 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5~30년뿐이었다”(조지프 스티글리츠), “제2차 대전 후 금융 위기를 겪지 않은 나라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단 4개국뿐이었다”(라인하르트-로고프)는 서구 사례를 인용하며 금융위기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미국 금융의 위기였다. 한국도 ‘IMF 외환위기’라는 지독한 금융위기를 겪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부도 사태를 여덟 번이나 맞았다.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왜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책
6일이 임시공휴일로 정해지자 일각에선 즉흥적이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최소 한두 달 전에 결정했어야 놀 계획을 세우고, 어디 예약이라도 할 게 아니냐는 논리였다. 일견 그럴 듯도 했다. 하지만 추가로 노는 날까지 미리 정해두면 황금연휴 나흘 동안 모두 국내에 있을까. 또 한 번 인천공항만 북적대진 않았을까. 정부의 의도는 국내 소비 확충, 즉 내수를 조금이라도 살리자는 것이었다. 물론 임시휴일이 겉으로 드러난 대로 상공회의소가 임박해 건의한 것인지, 정부의 ‘배후조종’인지부터 확실치도 않지만….갑자기 나흘의 보너스를 접한 직장인들 고민이 만만찮게 됐다. 요령 좋은 이들은 벌써 4, 9일까지 연차휴가로 선점했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교통과 숙박은 어떻게? 맛집탐방은 어디를?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운 고민이다.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을 바라보면 얇은 지갑이 펑크날 판이다. 애들도 선물이라면 “신형 스마트폰!”이라는 시대다. 더구나 고령화 세상, ‘양가부모구존(兩家父母俱存)시대’다. 부모님들 선호선물 1위가 현금이 된 지도 오래다.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무서운 5월이요, 황금연휴는커녕 고민의 연휴가 될 판이다.안 그래도 5월엔 이런저런 기념일이 많다. 1일 근로자의 날을 거쳐 14일 석가탄신일도 이틀 쉰다. 15, 16일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정의 달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부부의 날(21일)도 어쩌자고 토요일이다. 5·18도 있고, 31일 바다의 날까지 이런저런 기념일이 무려 13일이다. 그만큼 챙길 데도 많아졌다. 정부나 경제단체가 권유하지 않아도 돈을 쓰게 돼 있다.5월 초는 우리만 노는 것도 아니다. 중국도 노동
정년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에서 타협의 산물이다. 강자의 욕심에 대한 억제선이면서 약자에겐 기회를 더 주는 효과도 있다. 근대국가 이후 중산층이 두터워진 것도 정년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공직의 경우 종종 정년은 임기라는 형태로 변형된다. 선출 권력은 그렇게 통제된다. 반대로 공직의 임기 보장은 더 센 권력으로부터 보호장치도 된다. 그래서 임기의 유무는 권력 분점의 평가 기준도 된다.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직의 정년이 확인된다. 시대 변화에 따라 대통령직의 이 정년도 조정될 수 있지만, 쉽지 않다. 헌법 개정 사항이다. 단 5년으로 정책의 성과도 내고 좋은 제도의 씨도 서둘러 뿌린 뒤 은퇴해야만 한다. 6년인 대법원장 역시 연임 불가다. 대법원장에 70세 은퇴 규정까지 둔 걸 보면 국회와 행정부 간섭은 배제하되 정신의 건강을 중시한 것 같다. 공직의 임기, 즉 정무직 정년은 국가 운영에서 다양한 시행착오의 결과이면서 정치적 타협물일 테지만 나름의 로직도 갖는다.4년 한번이면 역량 충분히 발휘국회의원은 어떤가. 300명이 저마다 헌법기관이라며 저토록 힘주는 국회말이다. 임기 4년은 분명한데 현실적 정년은 아니다. 대통령처럼 단임 규정도, 대법원장과 대법관처럼 70세라는 연령 정년도 없다. 정년에서도 역시 국회다. 문제는 여야 할 것 없이 ‘노인정치’의 폐단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이다. 의원 정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노인정치란 절대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다선 혹은 소위 중진이라는 ‘직업 국회의원’들이 보여주는 퇴행정치라는 점부터 분명히 해두자.대학교수에 맞춰 65세로, 양보해도 대법원장처럼 70세로 국회법에 정년을 못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경쟁률이 2000 대 1에 달했다는 분석이 있다. 보통 33명 뽑는데 평균 6만3000명이 응시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부실한 행정체계와 기록문화를 볼 때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영 터무니없는 숫자만은 아닐 것이다. 정조 때는 11만명이 응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공개채용 일자리가 과거 외엔 딱히 있을 리도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케케묵은 왕조시대 과거와 현대국가의 공무원 임용을 동일시할 수야 없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 속성은 있다. 공복이란 말대로 ‘공무원은 국민을 섬긴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공부문은 역시 갑(甲)이다. ‘공시족(公試族)’이 사전에 등재될 정도이고, 그 숫자가 점증하는 배경에는 이런 요인이 존재할 것이다.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완장에 대한 동경’이랄까…. 모든 주기가 짧아져 가는 긴장된 이 세상에 경쟁이 적고 정년보장도 탄탄하다는 점도 메리트다.그렇더라도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서 민간의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 공시족이 급증하는 것이라면 정말 큰 문제다. 9급직으로 올해 4120명을 채용하는 데 22만2650명이나 몰렸다. 54 대 1의 사상 최고 경쟁률이다. 채용인원이 지난해보다 420명 늘었지만 공시족은 더 많이 증가했다.공시족은 청년실업률 통계까지 좌우할 지경으로 비중이 커졌다. 2월 청년실업률이 12.5%로 역대 최악이라는 엊그제 통계청 발표를 두고 벌어진 일종의 ‘통계 잡음’도 공시족 때문이었다. 그냥 시험준비만 하면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자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원서를 내면 구직활동자가 돼 실업통계에 들어간다. 지난 1월 말 마감된 9급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로도 재미를 못 느낀다면 더 이상의 미드(미국 드라마)는 없다고들 했다. 누명 쓴 형을 구하는 천재 동생의 구출작전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했다. 2005년 시작 때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자 2009년까지 시즌 2, 3, 4가 이어졌다. IPTV로 매회 500원씩 지불하면서도 도중에 끊질 못해 밤을 샌 국내 팬도 적지 않았다. 반전에 반전은 기본이고, 과학과 공학의 전문지식도 흥미를 배가시켰다. 동원된 작가만 100명에 달한다는 얘기가 과장만은 아니었다.감옥 설계도를 온몸에 암호로 문신해 형을 찾아들어간 동생이 마이클 스코필드(Schofield)였다. 프리즌 브레이크 열풍 때 곳곳에서 한국식으로 ‘석호필, 석호필…’ 했다. 하지만 원조 석호필은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박사다. 토론토에서 세균학을 전공해 일제 강점기인 1916년부터 세브란스 의전에서 근대 의학을 가르친 캐나다 인물이다.생전에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한 스코필드 박사의 도전적인 삶은 구한말의 실천적 지식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닮았다. 연세대의 기초를 닦은 언더우드 박사도 원음을 살린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Underwood)를 즐겨 썼다. 이 땅의 선각자요 계몽가였던 이들은 대학에서 세균학,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과학으로 전근대 미몽사회의 구각(舊殼)깨기를 시도한 것이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아간 석호필·원두우 두 코스모폴리탄의 원태생은 모두 영국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때 ‘대영제국’으로 불리던 나라의 지적 저력에 인류보편적 헌신 기풍까지 엿보인다. 세계를 제패한 힘이 단지 총포와 군함, 혹은 증기기관만은 아니었던 것
까마귀쪽나무는 높이 7m가량의 상록활엽수다. 한국의 남부 지방에서 흔하다. 일본에도 많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 품종은 아니다. 사전을 봐도 관상용으로도 심고 열매는 먹기도 한다는 평범한 소개들이다. 주로 바닷가 산기슭에서 자란다. 이 나무의 제주 말이 구럼비다. 서귀포 서쪽 해안의 강정마을에는 구럼비 바위라는 지명도 있었다. 이곳은 구럼비 해안으로도 불렸다. 구럼비 나무가 자생해서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제주의 여느 바닷가 같은 이곳에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된 것은 1993년. 무역대국 한국의 교역 물동량 중 99.7%가 바닷길로 드나들고, 그 대부분이 제주 해역을 지난다는 현실이 감안됐다. 가령 이어도 해역에 무슨 상황이라도 발생할 경우 부산에 있는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출동하면 13시간, 가장 가까운 목포에서도 8시간 걸리지만 제주도엔 군함 한 척 둘 곳이 없었다.하지만 기지 반대는 끈질겼고 집요했다. 구럼비바위 보호가 구실이었다. 제주도 해안이 실상 하나로 이어진 암반이라는 지적도, 환경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첨단공법 설득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 온갖 환경단체가 몰렸고 가톨릭 성직자까지 가세했다. 공사지 주변의 땅 소유자와 비소유자 요구가 달랐고, 어민과 해녀들 입장이 또 달랐다. 2002~2005년에만 주민간담회 언론토론회가 100차례 이상 열린 배경이다. 2006~2007년에도 주민설명회 공청회는 열 번도 더 열렸다. 노무현 정부(2007년 6월) 때 해군기지 건설이 확정됐으나 여전히 난항이었다. 결국 15개월 뒤 ‘군항+크루즈 기항지’의 민군복합형 관광항으로 절충됐다.그러고도 무수한 공사방해와 소송전, 행정대집행에 구상권 행사가 반복된 끝에 드디어 내일 준공식을
사익, 사적 이익의 강화, 개인의 권리 보호는 근대의 표상이다. 근대 민주국가가 지향해온 가치요, 피의 대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익, 국익의 극대화, 국가의 발전 같은 공동선(共同善)과 나란히 비교해 보면 얘기는 간단하지가 않다. 단지 ‘사익과 공익의 조화’란 절충이라면 너무 교과서적이다. ‘개인과 국가의 동반 발전’ 역시 핵심은 피해간 듯하다. 어떻든 국익은 중요하겠지만 그때라도 사회적 공감, 상황 자체의 합목적성이나 효율성, 적절한 보상 같은 전제하에서의 제한적 원칙에 그칠지 모른다.현대사회에서 사익과 공익의 충돌은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공리나 일방적인 원칙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서구 선진국에서조차 사익과 공익 간 조화나 우선 순위에 대한 논쟁이 부단히 일어난다. 그런 논쟁이 활발하다는 것 자체가 선진사회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진사회일수록 공익을 이유로 개인의 일방적 희생을 강제하지 않는다. 철저히 법률에 의거하고, 법원 결정에 따르고, 의회의 판단을 존중한다.애플과 미국 연방수사국(FBI)·법무부 간의 치열한 논쟁을 미국 밖에서 주목하는 것도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흥미로운 관전거리기 때문이다. 핵심은 애플이 주장하는 ‘소비자 보호’와 FBI의 ‘국가 안보’ 중 어느 쪽이 우선이냐다. 애플의 만능키 프로그램 없이는 총기 난사 테러범의 아이폰 암호를 풀 수 없다니 FBI도 영화 속의 만능 수호자는 아닌 모양이다.‘애플은 즉각 정부의 법집행에 응하라’는 압박은 트럼프 후보만의 목소리도 아니다. 영국의 FT도 ‘3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법원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다’며 팀 쿡의 잘
선거만 많으면 민주적인가. 공약 남발은 무제한의 자유권인가. 법을 많이만 만들면 성실한 국회의원일까. 대중민주주의가 붕어빵처럼 증식돼온 이면에는 이런 엉터리 민주주의 이론이 적지 않다. 선거와 관련한 주의, 주장들이 대개 포퓰리즘에서 시작해 표계산으로 원점회귀하게 마련이어서, 실은 공론(空論)인 공론(公論)들이다. 교육감까지 선거로 뽑게 된 것도 ‘선거는 선(善)’이라는 공론(空論) 혹은 오해 탓이었다. 근본 원인은 다 정치과잉으로 귀결될 것이다.누리예산 편성을 둘러싼 논란도 실은 돈 부족 때문이 아니다. 이런 소모적인 갈등 또한 근본 요인은 정치과잉에 닿는다. 곳곳에서 선출권력을 배출해 놓으니 이들이 투쟁과 독선의 갈등 증폭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과잉 정치가 통제불능의 권력을 양산해냈고, 지방 권력들까지 법의 이름으로 정치과잉을 재촉한다. 퇴행 정치의 악순환이다.교육감직선제 폐지공약 내놔라정치논리를 배제하자는 구호가 넘쳐온 교육 쪽에 얼치기 이상주의자 같은 3류 정치꾼이 몰린 현실은 분명 연구거리다. 교육감 선거가 대표적이다. 시·도와 그 의회 사이에도 온통 정치로 넘치는데 교육감까지 선거직이 되면서 저질 정치를 덧보태온 것이다. 청년배당입네 하며 엉뚱한 돈은 잘도 지출하는 와중에 누리예산이 어느날 정쟁터가 된 것은 저급한 정치가 범람한 결과다. 정치과잉은 정치 환멸을 부채질하고 우중정치를 가속화할 것이다. 과잉정치의 거품을 빼야 한다.두 달 전 교육감 선거에 대한 합헌 결정이 있었지만 직선제가 최선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직선도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교육감 직선제를 택해야만 한다는 취
교육부가 내년도 대학등록금 인상률을 1.7% 이내로 제한했다. 고등교육법에 매년 산정, 고시하도록 돼 있는 ‘대학 등록금 인상률 산정방법’에 따른 것이다. 최근 3년간 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1.1%)의 1.5배 이내로 묶는 규정에 따라 1.7%라는 통제선이 나왔다. 교육부는 한발 더 나아갔다. 내년에도 등록금 인하를 ‘유도’하고, 최소한 동결로 ‘권고’한다는 방침을 세웠다.말이 권고지, 정부가 동결로 간다는데 맞설 대학은 없다. 당장 떡 나눠주듯 하는 교육부의 재정지원사업을 무시할 수 있는 대학은 거의 없다. 대학별 특성화사업, LINK사업, BK21사업 등 온갖 보조금 프로젝트의 평가·선정에 등록금 인상여부 항목을 넣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정원 승인권은 꺼낼 일도 못 된다. 대학들은 그렇게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왔다.정부 가격통제, 대학발전 막아많은 대학생이 학비 때문에 고통을 겪는 현실은 잘 안다. 학업에 전념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이 또한 수급문제는 도외시한 채 대학과 학생 수만 늘려온 정부의 잘못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등록금이라는 서비스가격에 직접 개입하고 통제하면서 스스로의 부실정책에 대한 반성문이라도 쓰고 있는 것인가. 그런 정책적 반성으로 비쳐지진 않는다. 한편으로는 대학을 마구 허가하고 한편으로는 정원을 임의로 통제해온 이 모든 게 관의 당연한 임무라고 믿듯이 학비 책정 또한 정부의 고유 권한이요 의무라는 도그마에 마냥 갇힌 것일지 모른다.가격 통제는 정당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효과도 없는 정책이다. 대학의 수준을 높이고 학생들이 더 나은 고등교육을 받게 하는 것과는 반대의 길이다. 얼
‘라플란드’를 아시는지?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 이곳과 인접한 러시아의 서북부 등 유럽 대륙 최북단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유럽의 청정지대인 이곳은 체코의 보헤미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처럼 개성 만점의 힐링 휴양지다. 무엇보다 광활하고 넓다. 한반도의 두 배만큼인 40만㎢에 달하지만 거주 인구는 많지 않다.끝없는 침엽수림과 거울 같은 호수, 강들이 이어진다. 그대로 마셔도 되는 1급수인 설원의 강물은 한겨울 눈 속에서도 얼지 않은 채 힘차게 흐른다. 생동감과 박력이 넘친다. 하늘로 곧게 쭉쭉 치솟은 눈 덮인 겨울나무들은 북구의 미녀들을 닮았다. 늘씬하고 하얀 자태가 꼭 그대로다. 숲 사이로 가늘게 펼쳐진 도로는 수시로 순록들이 점령하곤 한다.◆유럽의 변방에서 휴양지로 변모라플란드를 방문하지 않고는 북극권의 추위도, 지구라는 푸른 별의 청정함도 얘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곳의 오로라는 지구의 신비를 더해준다.순록을 키우고 사냥과 어업으로 살아온 ‘라프족(族)의 땅’이래서 라플란드였다. 라프족 외에도 눈덮인 숲 지대는 소수 민족의 터전이었으나 정확한 인구통계도 없다. 유럽에 속한다지만 그만큼 아직은 오지다.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으로, 극한 지대로만 여겨졌던 라플란드가 현대인의 휴양지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핀란드 영역 내 로바니에미의 산타클로스 마을도 그중의 한 곳이다. 스웨덴에 속하는 라포니안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최근에는 핀란드가 관광상품으로 북위 65도 이북의 북부지역 개발과 홍보에 매우 적극적이다. 여름에는 백야현상이 이색 체험이고, 겨울은
동양의 판타지 서유기에서 저팔계(猪八戒)가 없었다면 해학과 골계미는 반감될 것이다. 돼지 두상에 단순하고 우직한 낙천가가 저팔계란 캐릭터다. 이름부터가 ‘돼지 저(猪)’자다. 낙천성은 작가적 감정이입의 소산이겠지만, 단순 우직만큼은 돼지의 이미지와 잘 겹친다. ‘저돌적(猪突的)’이란 말을 연상해봐도 그렇다.돼지를 나타내는 한자는 여럿이다. 돈(豚)자는 돈육, 양돈 등으로 쓰인다. 간지 가운데 을해, 계해년의 해(亥)자는 12지지를 구성하는 돼지다. 60갑자 중 해자가 들어가면 돼지띠다. 시(豕)자는 돼지의 형태를 그린 원시적 상형 문자다. 시심(豕心, 욕심 많고 부끄러움은 없는 돼지 같은 마음), 맹자의 시교수축(豕交獸畜, 사람을 짐승처럼 다루다) 같은 말이 있다.때로는 탐욕과 우직으로, 때로는 풍요와 낙천으로 이미지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하지만 돼지야말로 오랜 가축이다. 수필가 찰스 램이 ‘돼지고기를 논함’에서 인류가 구운 육류를 처음으로 먹은 계기를 저 아득한 고대 중국으로 설정한 것도 그래서 더욱 그럴듯하다. 날고기만 먹던 인류가 돼지우리에서의 실화로 구워져버린 고기를 처음 먹게 된 상황을 묘사한 램의 글도 풍자였다.음식의 기호에 우열이 있을 리 없지만, 돼지고기가 최고라는 사람들도 많다. 돼지고기 선호는 예부터 중국에서 유별났다. 황제에게 부드러운 돈육을 올리기 위해 수유부의 젖을 먹였다는 기록까지 있다. 식물성, 동물성 가리지 않는 특유의 잡식성 때문에 육질이 좋다고도 한다.외양은 비슷하지만 멧돼지는 통상적인 집돼지와 다른 과(科)다. 과가 다르면 교배가 안 되지만, 멧돼지와 집돼지는 교배는 된다. 다만 그 새끼들은 2세
베이징이 중국 대륙의 중심이 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긴 역사로 보면 중국의 고도(古都)는 역시 시안(西安)이다.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등 13개 고대 왕조가 도읍을 삼은 곳이다. 중국에 고도 시안이 있다면 일본에는 교토(京都)가 있다. 일본의 경주라고나 할까.분지인 교토 일대는 한반도와 대륙에서 건너간 이주민에 의해 일찍부터 도시가 개발됐다고 한다. 토지의 개척과 관개로 농업생산성이 높아졌고, 양잠과 견직 산업도 발달했다. 일본사에서 고대 말기에 해당하는 ‘헤이안시대(794~1185)’를 연 유서 깊은 지역이 바로 교토다. 유적만 봐도 옛 교토의 위상은 짐작된다. 왕궁도 그렇지만 금각사와 은각사, 청수사(기요미즈테라)는 지금도 일본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절과 신사가 2000여개나 남아 있다.일본의 대표적인 학술과 문화, 관광의 도시가 교토다. 하지만 이 도시를 더 유명하게 하는 것은 단연 교토 기업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 경영자의 진두지휘로 수십년 이상 한 분야에서 기술개발로 승부를 거는 독보적인 회사들이 교토 일대에 적지 않다. 교토식 경영이란 경영학 교과서가 나왔을 정도로 일본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철저한 기술 기반 기업들이다. 올해 국제 산업계의 최대 빅 뉴스로 꼽힐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사건도 교토 기업이 아니었으면 그냥 묻혔을지 모른다. 배출가스의 성분을 처음 측정한 웨스트버지니아대 연구소와 이를 토대로 조작사실을 밝혀낸 미국 환경보호국의 계측시스템이 바로 교토 기업 호리바제작소 제품이었다.이곳에는 40개에 달하는 대학에다 연구소도 많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물리학에서 배출한 교토대
평양 중심부의 대동강변이 예부터 경치는 좋았나 보다. 강기슭의 길고 야트막한 금수산에서 보는 능라도 일대 풍광이 좋다는 옛 기록들이 남아 있다. 제일 높은 게 95m인 봉우리 몇 개가 서로 잇달려 둥글둥글 솟아 있는 게 마치 피어오른 모란꽃 모습이라 해서 이 야산은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린다.‘북한판 소녀시대’니 ‘K팝 모방’이니 하는 평가를 받았던 모란봉악단이 이 지명을 따 창단된 게 2012년이었다. 김정은의 등장과 함께 그의 지시로 활동을 시작해 화젯거리도 많았다. 수려한 용모에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화려한 의상, 세련된 율동은 기존의 북한 가수와는 딴판이었다. 전해진 선발 기준부터가 얘깃거리였다. 예술가 양성기관인 금성학원과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이고, 6급까지 나뉘는 예술인 등급에서 1급, ‘165㎝, 50㎏’ 조건은 기본이며, 악단활동 중엔 결혼도 연애도 금지돼 있으며…. 북한식 걸그룹이 갑자기 뜬 것은 김정은 시기의 상징적 단면이 될 만도 했다. 핵과 기아, 결국 강성 아니면 극빈으로 비쳐온 대외이미지를 부드럽게 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모란봉악단이 또 한 번 관심을 모은 것은 2013년 10월 이후 갑자기 공연소식이 끊기면서였다. 소위 전승절, 노동당기념일 등 주요행사 때마다 선보였던 공연이 근 반 년간 무소식이었다. 그즈음 실력자 장성택이 처형됐다. 모란봉악단 단장이 ‘음란 동영상 스캔들에 연루됐다’는 소문도 이때 나돌았다. 호사가들의 분석과 논평이 이어졌지만 ‘은둔의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도 없다. 이들의 컴백공연은 주요 연주자가 바뀐 채 번쩍번쩍하던 무대의상 대신 군복풍의 제
공무원의 덕목 중 무엇이 최우선일까. 전문지식, 성실과 헌신? 다 좋다. 행정은 완전 독점의 영역이어서 업무 역량 비교도 쉽지 않다. 인성은 더욱 판단이 어렵고, 엄밀한 의미에선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굳이 한 가지를 꼽는다면 ‘법의 수호’, 특히 헌법적 가치의 수호가 아닐까. 역사교과서 개정에서 드러난 교육부의 미흡한 역량도 근본은 이 문제다. 왜곡된 교과서가 어제오늘 문제도 아니었건만 헌법 수호라는 공무원 최고의 책무를 방기해오다가 논란을 가중시킨 것이다.국기·국가 부인하는 공무원도공직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내가 속한, 공직 인사를 연구하는 포럼에서 공개된 사례를 소개한다. 국회의원 4명, 인사혁신처장 등이 함께하는 이 포럼에서 몇몇 공직 인사 개선안이 발표됐다. 주제발표에 이어 토론자로 나선 공무원 K국장의 말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고, 애국가 제창을 않겠다는 공무원까지 있다.” ‘북조선공화국’의 당원 관료가 돼야 할 이가 정부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 공무원조차 솎아낼 수 없을 정도로 공직의 신분을 과보장한다는 게 문제다.인사혁신처가 보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경쟁 분위기 도입도 좋다. 전문성과 청렴도 제고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헌법을 파괴하려는 이를 공직에 둔 채로는 다 부질없다. 보수 교육과 검증은 이래서 중요하다. 일부 신입 사무관의 좌편향 의식이 심각하다고 인사처 간부들이 걱정만 할 일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직에서 먼저 확실히 해둬야 한다. 신입들도 몇 년이면 중견이라고 힘주고, 다시 몇 년이면 금세 리더로
규모는 작지만 늘 좋은 평판을 유지해온 어린이집 원장 L씨가 보육 외에 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은 규제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직접 설계 주문한 원목 미끄럼틀로 생긴 업무도 그중 하나다. 박봉의 자기 월급만큼인 구입비가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아이들이 신나 하는 게 보람이었다. 그런데 행정 지도인가, 현장 점검인가 구청에서 다녀간 뒤 새 일이 추가됐다. “예쁘다!”고 했던 구청 직원은 가로·세로·높이 규격보고를 요구했다. 며칠 후엔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그 다음은 미끄럼틀 안전교육 이수 요구였다.끝도 없는 지도, 지침, 방침, 계획, 가이드에 의무 사항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안전교육 미이행 시 과태료도 만만찮았다. 이리저리 교육장을 수소문해 네 시간짜리 교육을 받으러 갔다. 자동차로 30분 걸렸으니 어린이집은 다섯 시간 원장 부재 상황이 됐다.5만원낸 잡담수준 4시간 교육정작 가관은 교육장이었다. 탈 없이 써온 실내의 작은 미끄럼틀에 대한 안전은 사실 원장들이 더 잘 안다. ‘전문 강사’의 건성건성 안전론은 30여분에 그쳤다. 그러더니 안전과는 상관도 없는 낡은 비디오를 켰다가 “이러려고 바쁜 원장들 끌어모았냐”는 항의를 받고 말았다. 그래도 정해져 내려오면 무조건 시간은 때워야 하는 게 한국식 행정이다. 강사는 잡담으로 시간을 채웠다. 강사가 당한 사기극 등등으로 네 시간 붙잡아둔 안전교육 수강비도 5만원이나 됐다. 안전 교육은 이것 외에도 연중 수시로 진행된다. 앞서 전기설비점검도 비슷했다. 무슨 공사라는 독점검사기관에서 나와 출입구 쪽 차단기 한 번 보고 5만원 받아간 게 전기안전 강화책의 실상이었다. 안전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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