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문화부에서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공연예술 전반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ksoohyun@hankyung.com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연으로 뭉친 사이엔 고유의 유대감이란 게 존재한다. 합(合)이 중요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핏줄로 맺어진 실력파 앙상블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유다. 영국 출신의 2중주 팀 스콧 브라더스 듀오도 그중 하나다. 닮은 외모 때문에 종종 쌍둥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3년 터울 형제다. 형 조너선 스콧(45)과 동생 톰 스콧(42)으로 이뤄진 이 듀오의 주 종목은 건반악기. 친숙한 피아노부터 대형 성당이나 교회에서 봤을 법한 파이프 오르간, 인도의 전통 악기로 이름부터 낯선 하모니움까지. 다양한 건반악기 조합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편곡·작곡 활동까지 이어가면서 매 공연 새로운 음향으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다. 해외에선 이미 유명 인사다. 2007년 개설한 유튜브 채널의 전체 조회수는 6500만회를 웃돈다. 그중 오르간으로 연주한 바흐 'G선상의 아리아' 영상의 누적 조회수는 730만회를 넘어선 상태다. 스콧 브라더스 듀오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다음달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리사이틀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음악회는 언제나 재미있어야 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연주 철학이다. 공연을 앞두고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스콧 브라더스 듀오는 “음악은 언제나 신선하고 생동감 넘쳐야 한다"며 "우리가 매일 새로운 악기 조합과 작품을 고민하고, 색다른 연주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이유”라고 했다. "같은 악기, 같은 방식으로 같은 곡을 반복하는 연주론 만족할 수 없어요. 우리가 제대로 즐길 수 없다면 청중 또한 그 에너지를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겁니다." (조너선 스콧) 오랜 기간 호흡하면서 서로 돋보이고
영국 출신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59)의 이름 앞엔 한 몸처럼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노래하는 인문학자’ 또는 ‘박사 테너’다. 음악 전공생이 아닌 케임브리지대에서 철학 석사,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문학자’ 출신의 성악가라서다. 옥스퍼드대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가 테너의 길을 걷게 된 건 1993년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독일 출신 유명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눈에 들며 성악가로 데뷔한 ‘늦깎이’였지만, 그의 남다른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데뷔 3년 만인 1996년 그라모폰 솔로 보컬상을 차지하며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보스트리지는 이후 그래미상, 그라모폰 베스트 솔로 보컬상 등 국제적 권위의 상을 모조리 휩쓸면서 당당히 세계 정상급 테너 반열에 올라섰다. 보스트리지가 한국을 찾는다. 다음달 9~22일 열리는 세종솔로이스츠 주최 음악 축제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보스트리지는 첫날 서울 거암아트홀에서 ‘음악, 인문학으로의 초대’란 주제로 인문학 강연을 열고, 닷새 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등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 그의 시그니처 레퍼토리인 벤자민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을 들려준다.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그는 “음악은 인간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는 무언가”라며 “인간과 인간적이지 않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또는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
135년 역사의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는 빈필하모닉 베를린필하모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악단 중 하나다. 웬만한 실력으론 명함도 못 내미는 이 악단에서 한자리 꿰찬 한국인 연주자가 있다. 제2바이올린 제2부수석인 이재원(37·사진)이다.다음달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RCO 내한 무대에 함께 오르는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보다 RCO가 만들어내는 연주와 소리, 그 안에 담긴 고유의 가치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연주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단원들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내거든요. 그렇게 무대에서 모두가 같은 감정과 에너지로 통일될 때 엄청난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때가 청중이 감동하는 순간이란 걸 아니까요.”한국에서 태어난 이재원은 여덟 살 때 프랑스로 이민을 갔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와 독일 퀼른에서 공부한 그는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 객원 단원, 서울시립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부수석 등을 거쳤다. 한국인 최초로 RCO에 입단한 건 2015년이다.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동료들의 실력에 깜짝 놀란다고 했다. “다들 정말 연주를 잘해요. 다른 연주자의 솔로를 듣다가 소리 내는 것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요. 제게 영감을 주는 특별한 존재가 동료들입니다.”그는 이번 공연을 이끄는 명(名)지휘자 파비오 루이지에 대한 기대도 드러냈다. 루이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수석지휘자, 빈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등 굵직한 이력을 쌓아온 이탈리아 출신 명장이다.“루이지는 음악 앞에서 진실한 지휘자예요. 사소한 음표 하
방탄소년단(BTS)에 앞서 미국 빌보드차트 정상을 차지한 한국 음악가가 있다. 2012년 데뷔 음반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으로 아이튠즈 클래식 차트,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에 오르며 세계가 주목하는 피아니스트로 부상한 임현정(1986~)이다.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프랑스 콩피에뉴 음악원, 루앙 국립음악원을 거쳐 16세 때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앙리 바르다 사사)에 최연소로 입학하면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실력파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린 건 2009년 스위스 바젤 음악회에서 앙코르로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영상이 유튜브에서 수십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다. 이를 계기로 2012년 세계적 클래식 레이블인 EMI와 정식 계약한 그는 해외 유수 악단과 협연하며 국제 무대에서 활약해왔다.임현정이 한국을 찾는다. 그는 다음달 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과 3번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김수현 기자
한국인 특유의 한(恨)을 우리가 가장 잘 표현하는 것처럼, 오직 그 나라 사람만이 제대로 불러낼 수 있는 정취란 게 있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도, 작품을 깊이 분석한 지휘자도 그 나라 음악가가 아니면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고유의 감성 말이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 나라의 ‘전설’ 드보르자크 작품으로 꽉 채운 공연을 들고 온다는 소식에 “진짜가 온다”는 반응이 쏟아진 이유다.지난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는 드보르자크가 쓴 연주회용 서곡 3부작 중 ‘사육제’ 서곡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비치코프는 소문대로였다. 엄격한 지시와 통제로 악단을 몰아붙이기보다는 연주자 스스로 노래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 덕에 체코 필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두터운 보헤미안 톤이 완연히 살아났다.이어 무대에 오른 인물은 소니 클래시컬과 전속 계약(월드와이드)을 맺은 첫 일본인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였다. 그가 들려준 곡은 드보르자크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빌렘 쿠르츠 편곡 버전).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솔로라기보다는 악단과 동등한 선상에 선 동반자에 가까운데, 후지타는 드보르자크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감미로운 음색과 유연한 터치로 풍부한 양감을 만들면서도 악단과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았다. 다만 셈여림 폭과 강세의 정도를 키우면서 긴장감을 유발해야 하는 순간까지 유려한 흐름을 유지해 다소 밋밋하다는 인상을 남겼다.마지막 작품은 체코인으로서의 애국심과 투쟁 정신을 독일 음악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이
한국인 특유의 한(恨)은 우리가 가장 잘 표현하는 것처럼, 오직 그 나라 사람만이 제대로 불러낼 수 있는 정취란 게 있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도, 작품을 깊이 분석한 지휘자도 그 나라 음악가가 아니라면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고유의 감성 말이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 나라의 '전설' 드보르자크 작품으로 꽉 채운 공연을 들고 온다는 소식에 “진짜가 온다”는 반응이 쏟아진 이유다. 지난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어둡던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첫 곡은 드보르자크가 쓴 연주회용 서곡 3부작 중 ‘인생’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사육제’ 서곡이었다. 비치코프는 소문대로였다. 엄격한 지시와 통제로 악단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기보다는 연주자들이 스스로 노래할 수 있도록 일종의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주는 섬세한 지휘를 선보였다. 그 덕에 체코 필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두터운 보헤미안 톤이 완연히 살아날 수 있었다. 관현악의 장대하고도 정감 어린 선율과 트라이앵글, 탬버린, 심벌즈 등 특색 있는 타악기들의 활기 넘치는 리듬은 시종일관 예민하게 조형됐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인물은 소니 클래시컬과 전속 계약(월드와이드)을 맺은 첫 일본인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였다. 그가 들려준 곡은 기교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주하기 까다로운 데 비해 효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대에 잘 오르지 않는 드보르자크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빌렘 쿠르츠 편곡 버전)이었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솔로라기보단 악단과 동등한 선상에 서서 악상을 함께 발전시키는 동반자에 가까
“포디엄은 더 이상 노장(老將)의 전유물이 아니다.”26세 청년 클라우스 메켈레가 지난해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차기 수석지휘자로 임명됐을 때 세계 클래식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륜이 쌓여야만 잡을 수 있다”던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신예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메켈레의 실력과 잠재력을 아는 사람들은 RCO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수순’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메켈레는 2020년 노르웨이 명문악단인 오슬로필하모닉 수석지휘자 자리에 올랐고 이듬해엔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됐다. 지난해부턴 RCO의 예술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핀란드 출신의 ‘클래식계 아이돌’인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는다. 오는 28일과 30일 오슬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이끌기 위해서다. 메켈레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휘자는 작곡가를 대신해 그의 음악을 현실로 갖고 오는, 작곡가를 위한 일꾼”이라며 “그래서 지휘자는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메켈레가 본격적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한 건 12세 때부터다. 시벨리우스음악원 예비학교에 입학해 거장 요르마 파눌라에게 배웠다. 파눌라는 에사 페카 살로넨, 사카리 오라모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을 길러낸 인물이다.메켈레는 이번 공연에서 ‘올 시벨리우스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28일 경기 고양아람누리에서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을, 3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시벨리우스 ‘투오넬라의 백조’와 교향곡 5번을 들려준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재닌 얀센 협연)은 두 공연 모두에서 연주된다.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 자리를 두고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이 있다. 빌렘 멩겔베르크, 마리스 얀손스 같은 지휘 거장들이 이끌어 온 135년 역사의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다. 2008년 영국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을 제치고 세계 1위로 꼽은 악단이다. 웬만한 실력으론 명함도 못 내미는 이 콧대 높은 악단에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국인 연주자가 있다. RCO의 제2바이올린 제2부수석인 이재원(37)이다. 다음달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RCO 내한 공연에 함께 오르는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란 수식어보다 RCO가 만들어내는 연주와 소리, 그 안에 담긴 고유의 가치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연주할 때마다 벅차올라요. 단원들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내거든요. 한 음도 허투루 연주하는 법이 없죠. 그렇게 무대 위에서 모두가 같은 감정과 에너지로 통일될 때면 엄청난 만족감을 느껴요. 그때가 바로 청중이 감동하는 순간이란 걸 본능적으로 아니까요.” 이재원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여덟 살 때 프랑스로 이민 가면서 인생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와 독일 퀼른에서 공부한 그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객원 단원, 서울시립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부수석 등을 지내면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경력을 탄탄히 쌓아왔다. 한국인 최초로 RCO에 입단한 건 2015년이다. 유럽에서 동양인 연주자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럽에서 살아서 그런지 동양인이란 이유만으로 힘든 일을
‘피 묻은 피아노’.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찍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에 붙은 짧은 문구다. 환한 조명에 눈부시게 반짝여야 할 피아노의 하얀 건반은 핏자국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을 낳은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5).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도 연주를 강행하다 이렇게 됐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브론프만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다 마친 뒤에야 그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뗐다.“청중을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인 손 부상에도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당시 그가 한 대답이다.‘피의 명연(名演)’으로 클래식 애호가들을 울린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이 한국을 찾는다. 다음달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지휘 파비오 루이지) 내한공연의 협연자로 서기 위해서다.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최정상 악단이다.지난 22일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브론프만의 연주 철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손에서 피가 나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든 연주자는 연주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불편하다고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됩니다.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인데 좋은 연주를 못 보여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부
'피 묻은 피아노'.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찍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에 붙은 짧은 문구다. 이날 환한 조명에 눈부시게 반짝여야 할 피아노의 흰 건반 곳곳엔 이리저리 튄 핏방울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마치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의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5).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그가 연주를 강행한 게 이런 결과를 낳았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도 브론프만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선보이고 나서야 그는 무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청중을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이었던 손 부상에도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가 한 답이다. '피의 명연(名演)'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이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파비오 루이지 지휘)의 내한 공연에서 협연하기 위해서다.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최정상 악단이다. 22일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브론프만의 연주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손에서 피가 나도, 옆에서 아무리 혼란스러운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나도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연주에 몰두해야 합니다. 연주할 때만큼은 어떤 고통에서도, 어떤 불편에서도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
지난 19일 경기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3주기 추모 음악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 관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삼성가(家)와 삼성 사장단, 지역 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무대에 젊은 남성이 올랐다.주인공은 유럽 전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사진). 서울 예술의전당 등 전용 콘서트홀에서 표를 사고 입장한 관람객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그가 특정 기업의 기념식 무대에 오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2016년부터 이어온 삼성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이듬해 한국에서 연 갈라 콘서트를 삼성이 후원한 게 계기였다. 삼성은 같은 해 열린 호암상 기념행사에서 관례적으로 해온 신라호텔 만찬을 26년 만에 없애고 조성진 독주회로 대체했다.이런 인연으로 조성진은 2020년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을 때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조성진은 올해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인재 제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제정한 ‘삼성호암상’ 예술상의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됐다. 홍 전 관장은 지난해 10월 이 회장과 LG아트센터를 찾아 공연을 관람할 정도로 ‘조성진 팬’으로 알려져 있다.이날 음악회 무대엔 삼성으로부터 악기 후원을 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 비올리스트 이해수, 첼리스트 한재민·이원해 등도 함께 올랐다. 전날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특별 공연이 마련됐다. 이 선대회장은 생전 백건우의 해외 연주 활동을 후원한 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이 나란히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조성진은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고, 임윤찬은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손잡고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에서 주목해야 할 건 두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으로 같다는 점. 한 작품을 두고 완전히 다른 색채와 해석을 선보일 조성진 임윤찬의 연주를 불과 2주 간격으로 만나볼 기회란 얘기다. 이들의 음악 세계를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는 필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1806년 그의 귓병이 급속도로 악화하던 때 쓴 작품이다. 작곡가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던 난청 진단에 좌절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운명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직 예술, 그것만이 나를 붙들었다. 죽음이여 올 테면 와 보라. 나는 용감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中)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 쓴 것처럼 베토벤은 예술가로서 식지 않는 창작열과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이어갔다. 그로부터 10년간 치열하게 작곡 활동에 매달렸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4번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5번 ‘운명’ 등 베토벤의 수많은 명곡이 쏟아진 이 시기를 ‘걸작의 숲’이라 일컫는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베토벤이 쓴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활기찬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베토벤 작품에 흔히 기대할 만한 투쟁적인 성격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당시 요제피네란 여인과
삼성이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에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 추모 음악회를 연다. 이 자리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등 삼성 총수 일가가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계열사 사장단도 총출동한다. 이번 추모 음악회 무대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오른다. 삼성가(家)와 조성진이 인연을 맺은 건 2016년부터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이듬해 한국에서 연 갈라 콘서트를 삼성이 후원한 게 계기였다. 삼성은 같은 해 열린 호암상 기념행사에서 관례적으로 이어왔던 호텔신라 수상자 만찬을 26년 만에 없애는 대신 조성진을 초청해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2020년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을 때는 조성진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조성진은 올해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의 인재 제일, 사회 공익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제정한 상인 삼성호암상 예술상의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됐다. 홍 전 관장은 지난해 10월 이 회장과 LG아트센터를 찾아 조성진의 공연을 관람할 정도로 ‘조성진 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전날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특별 공연이 마련됐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지난해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세계적 명문 음반사 데카(Decca)와 레코딩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1929년 영국서 설립된 데카는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등 전설적인 음악가들의 명반을 남긴 클래식 레이블이다. 유니버설뮤직 산하 레이블 데카는 19일 "임윤찬과의 레코딩 전속 계약 체결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미팅을 진행한 끝에 이루어졌다"며 "임윤찬의 데카 공식 데뷔 앨범은 내년 봄에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톰 루이스 데카 공동 회장은 "임윤찬은 현재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클래식 아티스트”라며 “그를 데카로 데려오기 위해 큰 노력이 필요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의 콘서트 티켓은 단 몇 초 만에 매진되는데 이것이 현재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며 "한 시대에 한 번 나올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임윤찬이 우리 데카를 선택해 줘서 기쁘다"고 덧붙였다. 임윤찬은 “데카는 그간 수없이 많은 전설적인 음악가들과 함께 일해왔다. 그렇기에 음악가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레이블”이라고 했다. 그는 “음악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리라 다짐했다. 앞으로도 오직 음악만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라며 “내 음악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왔다. 이 바람이 관객들에게 닿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도미닉 파이프 데카 레이블 디렉터와 헬렌 로저스 총괄 프로듀서는 “우리는 임윤찬과 함께 데카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한다. 이는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탁월한 것이 무
180년 전통의 세계 최정상 관현악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7일과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오른다. 이번 내한 공연의 지휘봉은 러시아 볼쇼이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명지휘자 투간 소키에프가 잡는다. 협연자로는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이 나선다. 빈 필하모닉은 7일 생상 피아노 협주곡 2번(랑랑 협연)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을, 8일 베토벤 교향곡 4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1842년 창단된 빈 필하모닉은 ‘황금빛 사운드’를 들려주는 악단으로 유명하다. 오케스트라는 고유의 음색과 음향을 유지하기 위해 빈 오보에, 빈 호른, 로터리 트럼펫, 로터리 튜바, 슈넬라 팀파니 등 19세기 빈에서 개발됐거나 쓰인 악기를 그대로 사용한다. 바그너, 브람스, 리스트, 베르디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이 객원 지휘자로 지휘봉을 잡았고 한스 리히터, 구스타프 말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세기의 명장들이 상임지휘자로 빈 필하모닉을 이끌었다. 빈 필하모닉은 1954년부터 상임지휘자 제도를 폐지하고 단원들이 선출한 객원 지휘자가 악단을 이끄는 체제를 두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등 거장들이 빈 필하모닉과 호흡을 맞췄다. 이번 내한 공연을 이끄는 소키에프는 라 프랑스 툴루즈 카피톨 국립 오케스트라, 러시아 볼쇼이 극장 음악감독 등을 지낸 명장이다.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포디엄에 정기적으로 오르면서 명성을 쌓았다. 2009년엔 한국에서 주빈 메타의 자리를 대신해 빈 필하모닉과 손을 맞추면서 눈도장을 찍었다.
포디엄은 더 이상 노장(老將)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해 ‘세계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차기 수석지휘자로 임명된 스물 일곱 살의 '젊은 거장' 클라우스 메켈레만 봐도 그렇다. 서른도 채 안 된 젊은 지휘자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직함만 세 개다. 2020년 24세에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 자리에 올랐고, 그 이듬해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까지 꿰찼다. 지난해부턴 RCO의 예술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하는 핀란드 출신 천재 지휘자 메켈레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다. 오는 28일과 30일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이끌기 위해서다. 2021년 오슬로 필하모닉, 2022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내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 영향으로 모두 불발됐다. 그가 생각하는 지휘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일까. 메켈레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휘자는 언제나 음악적으로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며 "지휘자는 작곡가를 대신해 그의 음악을 현실로 가지고 오는, 작곡가를 위한 일꾼"이라고 했다. "리허설에서 보여주는 모든 해석과 움직임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해요.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진실한 모습을 보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죠." 메켈레가 본격적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한 건 12살 때부터다. 시벨리우스 음악원 예비학교에 입학해 핀란드 지휘계의 거장 요르마 파눌라에게 지휘를 배웠다. 파눌라는 에사 페카 살로넨, 사카리 오라모, 수잔나 멜키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을 길러낸 전설적인 인물. 메켈레는 “파눌라는 그 누구에게도 어떻게
2010년 23세 나이로 일본 센다이 국제 콩쿠르,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의 이목을 끈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 화려한 기교와 우아한 음색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아온 한국계 독일인 연주자 클라라 주미 강(1987~)이다. 주미 강은 세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네 살 때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 예비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고, 이듬해 함부르크 심포니와 협연하며 데뷔했다. ‘바이올린 신동’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2009년 서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위, 하노버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거머쥐면서 존재감을 키웠다. 이후 그는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럽 유수 악단과 협연하며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왔다.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 국제적 명성의 음악가들과도 꾸준히 호흡해오고 있다. 지난해엔 영국 굴지의 클래식 매니지먼트사인 인터무지카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세계적 음악가 반열에 올라섰다. 앞서 주미 강은 뤼베크 음대(자카르 브론 사사)를 거쳐 줄리아드 음악원(도로시 딜레이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김남윤 사사), 뮌헨 국립음대(크리스토프 포펜 사사)에서 수학했다. 그는 오는 11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 협연자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연주자에겐 ‘음악 인생의 동반자’ 같은 작곡가가 꼭 한 명씩 있다. 악보만 봐도 그의 생애가 그려지고, 손이 부르트게 연습해서라도 그의 작품만은 제일 잘 연주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끓는 그런 작곡가 말이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가 극찬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34·사진)에겐 러시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그런 인물이다. 2017년 미국 밴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그에게 한국인 최초의 우승을 안겨준 작품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그가 라흐마니노프 음악으로 주요 레퍼토리를 채운 전국 리사이틀 투어를 여는데 클래식 애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난 15일 경기 평촌아트홀은 그의 연주를 기다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보다 사흘 앞선 무대였다. 1부는 클래식 음악의 뿌리라고 여겨지는 바흐 음악으로 채워졌다. 라흐마니노프와의 구조적 밀접성을 보여주겠다는 선우예권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첫 곡은 브람스가 왼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바흐의 ‘샤콘’이었다. 선우예권은 오른손을 등 뒤에 올린 채 오로지 한 손으로 건반을 간결히 끊어치면서 바흐의 선율을 명료하게 그려냈다. 왼손만으로 섬세하게 밀도를 조율하다가도 돌연 강한 터치로 뼈대가 되는 음을 소리의 표면 위로 튀어 올리는 그의 연주는 바흐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곡은 바흐의 건반을 위한 파르티타 2번. 선우예권은 유연한 손 움직임으로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에 담긴 생동감을 펼쳐냈다. 피아노 음색은 우아하면
연주자에겐 '음악 인생의 동반자' 같은 작곡가가 꼭 한 명씩 있다. 악보만 봐도 그의 생애가 그려지고, 손이 부르트게 연습해서라도 그의 작품만은 제일 잘 연주하고 싶단 욕심이 들끓는 그런 작곡가 말이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가 극찬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34)에겐 러시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그런 인물이다. 2017년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그에게 한국인 최초의 우승을 안겨준 작품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그가 라흐마니노프 음악으로 주요 레퍼토리를 채운 전국 리사이틀 투어를 여는 데 클래식 애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난 15일 경기 평촌아트홀은 그의 연주를 기다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보다 사흘 앞선 무대였다. 1부는 클래식 음악의 뿌리라 여겨지는 바흐의 음악으로 채워졌다. 라흐마니노프와의 구조적 밀접성을 보여주겠단 선우예권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첫 곡은 브람스가 왼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바흐 ‘샤콘’이었다. 선우예권은 오른손을 등 뒤에 올린 채 오로지 한 손으로 건반을 간결히 끊어치면서 바흐의 선율을 명료하게 그려냈다. 왼손만으로 섬세하게 밀도를 조율하다가도 돌연 강한 터치로 뼈대가 되는 음을 소리의 표면 위로 튀어 올리는 그의 연주는 바흐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곡은 바흐의 건반을 위한 파르티타 2번. 선우예권은 유연한 손 움직임으로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에 담긴 생동감을 펼쳐냈다. 피아노 음색은 우아하면서도 따뜻했고, 소
'현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한국을 찾는다. 오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27일 경기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리는 KBS교향악단 공연의 협연자로 오르기 위해서다. 이번 공연에서는 악단의 음악감독 피에타리 잉키넨이 지휘봉을 잡는다. 길 샤함은 이번 공연에서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KBS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춘다. 화려한 기교와 열정에 찬 서정을 특징으로 하는 이 곡은 길 샤함의 시그니처 레퍼토리 중 하나로 꼽힌다. 2부는 월턴의 교향곡 1번 연주로 채워진다. 격렬한 에너지와 우수에 젖은 선율을 지닌 이 교향곡은 잉키넨에게 특히 의미가 깊은 곡이다. 잉키넨이 세계 무대에 첫발을 내딛도록 한 기적의 작품이어서다. 잉키넨은 지난해 12월 열린 KBS교향악단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2001년 11월 월턴 교향곡 1번으로 헬싱키 필하모닉 공연 리허설에 서게 됐는데, 지휘자의 건강 이상으로 데뷔 무대까지 가질 수 있었다"며 "이를 계기로 3개월 뒤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무대에 다시 서게 됐고, 바로 다음 날부터 런던 에이전트로부터 지휘 요청이 빗발쳤다. 내게 너무나 특별한 작품을 KBS교향악단과 함께 무대에 올릴 수 있어 더없이 기쁘다"고 밝힌 바 있다. 길 샤함은 화려한 기교와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음색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 7세 때 예루살렘 루빈 아카데미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한 길 샤함은 1981년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데뷔했다. 이듬해 전설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호연을 펼친 그는 1988년 17세의 나이로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
12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450년 역사의 독일 명문 악단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현악기 수석을 맡은 연주자들이 차례로 나왔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각각 든 이들은 우아한 음색, 명료한 테크닉, 강렬한 표현력으로 드보르자크 ‘사이프러스’의 다채로운 악상을 표현해냈다.곧이어 한국인에게 친숙한 선율을 들려줬다. 밀양 아리랑 전설 속 주인공인 아랑 윤정옥의 삶을 현악 4중주곡으로 재해석한 김다연의 ‘윤정옥 아리랑’이다. 볼프람 브란들(제1바이올린), 리판 주(제2바이올린), 유스트 카이저(비올라), 클라우디우스 포프(첼로)로 구성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현악 4중주단(사진)이 한국을 찾았다.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을 시작으로 광주, 대구, 부산, 인천 등에서 열리는 이건음악회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건축자재기업 이건그룹을 세운 고(故) 박영주 회장은 1990년 이 음악회를 시작했다. 이번 공연에선 이건음악회 아리랑 편곡 공모전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윤정옥 아리랑’이 연주된다. 브란들은 “한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민요 아리랑을 우리만의 색채와 해석으로 연주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김수현 기자
12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450년 역사의 독일 명문 악단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현악기 수석을 맡는 연주자들이 차례로 나왔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를 각각 든 이들은 우아한 음색, 명료한 테크닉, 강렬한 표현력으로 드보르자크 ‘사이프러스’의 다채로운 악상을 표현해냈다. 곧이어 한국인에게 친숙한 선율이 흘렀다. 밀양 아리랑 전설 속 주인공 아랑 윤정옥(尹貞玉)의 삶을 현악 4중주곡으로 재해석한 김다연의 '윤정옥 아리랑'이었다. 볼프람 브란들(제1 바이올린), 리판 주(제2 바이올린), 유스트 카이저(비올라), 클라우디우스 포프(첼로)로 구성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현악 4중주단이 한국을 찾았다. 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을 시작으로 광주·대구·부산·인천 등에서 열리는 이건음악회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건축자재기업 이건그룹을 세운 고(故) 박영주 회장이 1990년 시작한 이건음악회는 기업이 여는 무료 클래식 공연 중 가장 오래된 음악회다. 이번 공연에선 이건음악회 아리랑 편곡 공모전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윤정옥 아리랑’이 앙코르곡으로 연주된다. 제1 바이올린을 맡은 브란들은 “아리랑이 한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요라는 걸 알고 있다”며 “이런 곡을 우리만의 색채와 해석으로 연주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첼리스트 포프는 "아리랑을 연주하는 데 책임감을 느낀다"며 "작품이 가진 문화적 중요성과 전통을 알게 되면서 더욱 잘 연주해야겠다는 사명을 갖게 됐다"고 했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현악 4중주단은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도로 10년 전 첫 호흡을 맞춘 악단이다. 이들은 이번 공연에서 드뷔시 현악 4중주 g단조와
지난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엔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100여 명의 청중이 객석이 아닌 무대에 올라가 나무로 된 단상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았고, 연주자들도 평소와 달리 객석을 등진 채로 연주를 들려줬다. 피아니스트가 페달을 밟으며 생겨나는 진동의 세기가 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느껴졌고, 첼리스트가 활을 현에 세게 내려치면서 생겨나는 송진 가루의 묘한 향이 바람을 타고 연신 코를 간질였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경계(境界)를 없애고자 2002년 서울 연희동 자택 거실에서 시작한 마룻바닥 음악회, ‘하우스콘서트’의 1000번째 공연 얘기다. 오후 8시.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이 이끄는 실내악단 ‘에라토 앙상블’의 모차르트 교향곡 1번 연주로 문을 열었다. 모차르트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작곡한 이 작품엔 신동의 발랄함과 활기가 온전히 담겨있다. 양성식은 시작부터 강한 추진력과 유려한 선율 진행으로 악단을 통솔하면서 작품 특유의 역동적인 악상을 살려냈다. 다만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와 셈여림 차이가 옅게 표현되면서 다소 평면적인 인상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선 에라토 앙상블 연주자가 26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다 보니 청중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최단 거리 세 뼘) 음향적 균형감이 깨지는 등의 한계도 있었다. 다음 무대는 올해 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1세 첼리스트 김정아의 연주였다. 15세의 조성진, 17세의 임윤찬 등 신예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하우스콘서트가 점찍은 또 하나의 클래식 샛별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연주에선 깔끔한
지난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엔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100여 명의 청중이 객석이 아닌 무대에 올라가 나무로 된 단상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았고, 연주자들도 평소와 달리 객석을 등진 채로 연주를 들려줬다. 피아니스트가 페달을 밟으며 생겨나는 진동의 세기가 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느껴졌고, 첼리스트가 활을 현에 세게 내려치면서 생겨나는 송진 가루의 묘한 향이 바람을 타고 연신 코를 간질였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경계(境界)를 없애고자 2002년 서울 연희동 자택 거실에서 시작한 마룻바닥 음악회, ‘하우스콘서트’의 1000번째 공연 얘기다. 오후 8시.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이 이끄는 실내악단 ‘에라토 앙상블’의 모차르트 교향곡 1번 연주로 문을 열었다. 모차르트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작곡한 이 작품엔 신동의 발랄함과 활기가 온전히 담겨있다. 양성식은 시작부터 강한 추진력과 유려한 선율 진행으로 악단을 통솔하면서 작품 특유의 역동적인 악상을 살려냈다. 다만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와 셈여림 차이가 옅게 표현되면서 다소 평면적인 인상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선 에라토 앙상블 연주자가 26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다 보니 청중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최단 거리 세 뼘) 음향적 균형감이 깨지는 등의 한계도 있었다. 다음 무대는 올해 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1세 첼리스트 김정아의 연주였다. 15세의 조성진, 17세의 임윤찬 등 신예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하우스콘서트가 점찍은 또 하나의 클래식 샛별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연주에선 깔끔한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이 있다.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39·사진)이다. 그의 연주는 한번 들으면 쉬이 잊히지 않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독보적인 해석과 섬세한 표현, 명료한 타건으로 순식간에 청중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 올라프손이 바흐의 음악으로 돌아왔다. 지난 6일 명문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내놓으면서다. 이는 2018년 발표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바흐 음반이다. 이번 음반은 올라프손에게 더욱 특별하다. 10대 때부터 간직해온 꿈이 이뤄진 결과여서다. 그는 음반 발매를 기념해 보내온 글에서 “지난 25년간 이 작품을 나의 피아노 연주로 녹음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며 “나의 세계에서 바흐란 작곡가가 없다면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을 만큼, 바흐의 음악은 내게 엄청난 영감을 준다”고 했다. 바흐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주제 선율인 아리아와 이를 변주한 30개의 짧은 곡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올라프손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건반 음악 중에서도 고도의 기교와 예술성을 요하는 ‘비르투오소적’인 음악”이라고 했다. “작품을 파고들수록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죠. 이 곡은 하나의 거대한 참나무 그림처럼 웅장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가득합니다.” 그는 각 변주곡을 ‘소우주’에 빗대 표현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여러 개의 소우주가 펼쳐질 때마다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다고. 올라프손은 이 바흐 골드베르
2015년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지난해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도 1위 자리를 꿰차며 세계가 주목하는 연주자로 부상한 사람이 있다. ‘인모니니(양인모+파가니니)’ ‘인모리우스(양인모+시벨리우스)’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1995~)다. 국제적 권위의 두 콩쿠르에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정상에 오른 건 최초의 일이다. 양인모는 콩쿠르 당시 “그의 연주는 압도적이며 과도한 면 하나 없이 노래하듯 매끄럽고 자연스럽다”(핀란드 명지휘자 사카리 오라모·시벨리우스 콩쿠르 심사위원장), “직관적 능력이 뛰어난 그의 파가니니는 매혹적이며 품위 있다”(이탈리아 지휘 거장 파비오 루이지·파가니니 콩쿠르 심사위원장) 등의 찬사를 받았다. 최근엔 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취리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덴마크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해외 유수 악단들과 협연하며 세계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미리암 프리드 사사), 한스아이슬러 음대(안티에 바이타스 사사)에서 수학한 양인모는 현재 크론베르크 음악원에서 전문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양인모는 오는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 협연할 예정이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체코의 거대한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지고, 드보르자크의 피 끓는 열정이 느껴진 자리였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긴밀한 호흡과 극적인 악상 표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단단한 응집력과 음향적 입체감을 갖춘 연주는 우레와 같은 청중의 환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지난 6일 경기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얘기다. 오후 7시30분. 2021년부터 런던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를 맡아 온 에드워드 가드너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첫 곡인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 연주는 다소 불안했다. 동굴로 밀려오는 파도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야 하는 서두에서 악단의 소리가 한데 합쳐지지 못하고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소란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또 통상 연주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진행되면서 바다의 움직임, 동물 울음소리 등 작품에 담긴 세밀한 표현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인물은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독일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였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에선 흔들리는 음정, 경직된 보잉(활 긋기) 탓에 브람스 특유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풀어내는 데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2악장부터는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현에 가하는 장력, 활의 속도 등을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때로는 울부짖는 듯한 애절한 음색으로, 때로는 웅장한 음색으로 풍부한 서정을 읊어냈다. 마지막 악장에선 유려한 활 테크닉으로 악곡 특유의 싱싱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중요 음에 비브라토를 강하게 넣어 화려한 음색을 덧
귀로 듣는 것만으로 체코의 거대한 풍광이 보여지고, 드보르자크의 피 끓는 열정이 느껴지는 자리였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치 않는 긴밀한 호흡과 극적인 악상 표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단단한 응집력과 음향적 입체감을 갖춘 이들의 연주는 우레와 같은 청중의 환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지난 6일 경기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얘기다. 오후 7시30분. 2021년부터 런던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를 맡아 온 에드워드 가드너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채 무대를 걸어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작품은 영국 스코틀랜드 연안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는 한 동굴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이었다. 첫 곡의 연주는 다소 불안했다. 밀도 있는 음향과 정교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동굴로 밀려오는 파도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야 하는 서두에서 악단의 소리가 한데 합쳐지지 못하고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소란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또 통상 연주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진행됐는데, 악상의 변화까지 급하게 이뤄지면서 잔잔한 물결에서 격렬한 파도로 변모하는 바다의 움직임,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심상 등 작품에 담긴 세밀한 표현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이어 무대 위로 오른 인물은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독일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였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테츨라프는 단단한 음색과 강한 터치로 브람스의 격렬한 악상을 토해냈다. 1악장에선 흔들리는 음정, 경직된 보잉(활 긋기) 탓에 브람스 특유의
1989년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의 대타(代打)로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무대에 올랐다가,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연주자로 떠오른 인물이 있다. 화려한 기교와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음색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현의 대가’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1971~)이다. 7세 때 예루살렘 루빈 아카데미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한 길 샤함은 1981년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데뷔했다. 이듬해 전설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호연을 펼친 그는 1988년 17세의 나이로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 자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런던 심포니 공연에서 흠결 없는 연주력을 뽐내며 당대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로 떠올랐다. 도이치그라모폰(DG), 카나리 클래식스 등 클래식 레이블을 통해 30여 장의 명반을 남긴 것 또한 그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그래미상, 디아파종상,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등 국제적인 음악상을 휩쓸면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쌓아왔다. 길 샤함이 한국을 찾는다. 그는 10월 26~27일 KBS교향악단과 바버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39)이다. 그의 연주는 한번 들으면 쉬이 잊히지 않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독보적인 해석과 섬세한 표현, 명료한 타건으로 순식간에 청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탁월해서다. 국제적 권위의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이 그를 두고 “가장 고유한 세계를 가진 음악가 중 하나”라고 극찬한 이유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하는 피아니스트 올라프손이 바흐 음악으로 돌아왔다. 6일 명문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내놓으면서다. 이는 2018년 발표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바흐 음반이다. 이번 음반은 올라프손에게 더욱 특별하다. 10대 때부터 간직해온 꿈이 이뤄진 결과라서다. 그는 “지난 25년간 이 작품을 나의 피아노 연주로 녹음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왔다”며 “나의 세계에서 바흐란 작곡가가 없다면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을 만큼, 바흐의 음악은 내게 엄청난 영감을 준다”고 했다. 바흐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작품의 주제 선율인 아리아와 이를 변주한 30개의 짧은 곡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바로크적 대위와 변주의 성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악곡의 전개에서는 바흐 특유의 치밀한 구조와 논리를 엿볼 수 있다. 건반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글렌 굴드, 로잘린 투렉, 제임스 프리스킨, 안드라스 쉬프 등 거장 피아니스트들이 명반을 남겨왔다. 올라프손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건반 음악 중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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