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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단비
    이단비 33(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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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올림픽 개막식때 시청 지붕위 발레리노가 선보인 기술, 탕 리에

    화제가 됐던 2024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 발레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무용수 기욤 디오프(Guillaume Diop, 2000~)가 파리 시청의 지붕 위에서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발레 무용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해 내한 공연 <지젤>에서 한국 관객들과 큰 기쁨과 추억을 함께 나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내한 공연 후 커튼콜에서 깜짝 승급 발표를 통해 파리오페라발레단 최초로 흑인 에투알(수석무용수)이 되었다.무용수가 공연을 통해 입지가 바뀐다면 운동선수는 경기를 통해서 그렇다. 사격의 김예지 선수, 탁구의 신유빈 선수, 펜싱의 오상욱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도 수많은 선수들이 스타덤에 올랐다. 기욤 무용수도, 이 선수들도, 그들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닐 텐데 이쪽의 세계에서 저쪽의 세계로 자리가 옮겨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하루아침이지만 이 무용수와 선수들의 삶에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 길이었을 것이다.발레의 동작 중에는 이 모습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을 옮겨주고, 발과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스텝이 있다. 탕 리에(temps lié)이다. 탕 리에는 무게중심이 되는 발로 바닥을 지그시 누르듯 내려놓고, 다른 쪽 발은 발끝을 푸앵트(포인트) 상태로 하고 다리를 쭉 펴서 몸의 앞쪽이나 뒤쪽, 혹은 옆쪽으로 내려놓고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무게중심을 갖고 있던 다리를 플리에 해서 다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즉, 무게중심과 몸의 중심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이다. 언뜻 보기에는 몸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으로 보이지만, 이때 축이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골반과

    2024.09.06 14:54
  • 사랑과 파격으로 첫 문을 열어젖힌 서울시발레단

    사랑 앞에 속절없다. 한국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자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세 번째 공공 발레단. 모두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중압감 앞에서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울시발레단이 선택한 건 역시 사랑이었다.사랑이야말로 모두의 빗장을 열고 결계를 풀어낼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발레단은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모티브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관객에게 ‘사랑의 묘약’을 뿌렸다.묘약의 방향은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실험보다는 환상적인 연출로 향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창단 공연이라는 의미와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라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지를 시선을 사로잡는 미장센으로 드러냈다. 1막의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대한 백색 날개, 2막의 사랑과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사랑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긴 회랑과 계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판타지는 환상적인 연출로 어른거린다.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는 절규하고, 또 이별의 상처를 안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사랑의 실타래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불장난을 조장하는 요정 퍽은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함께 숨 쉬는 존재로 탈바꿈했다.퍽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한 안무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한다. 1부에서 요정 퍽의 고뇌는 2부의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용수, 상처(broken heart)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각 1부와 2부의 장면을 이끌고 연결하는 중심축이

    2024.08.25 17:43
  • 사랑과 파격으로 첫 문을 열었다…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사랑 앞에 속절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자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세 번째 공공 발레단. 모두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중압감 앞에서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울시발레단이 선택한 건 역시 사랑이었다.사랑이야말로 모두의 빗장을 열고 결계를 풀어낼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발레단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모티브로 관객에게 ‘사랑의 묘약’을 뿌렸다.    묘약의 방향은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실험보다는 환상적인 연출로 향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창단 공연이라는 의미와 컨템퍼러리발레단이라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지를 시선을 사로잡는 미장센으로 드러냈다. 1막의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대한 백색 날개, 2막의 사랑과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사랑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긴 회랑과 계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판타지는 환상적인 연출로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는 절규하고, 또 이별의 상처를 안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사랑의 실타래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불장난을 조장하는 요정 퍽(puck)은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함께 숨 쉬는 존재로 탈바꿈되어 있다.퍽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한 안무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한다. 1부에서 요정 퍽의 고뇌는 2부의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용수, 상처(broken heart)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각 1부와 2부의 장면들을 이끌고 연결하는 중심축이 된다.&nb

    2024.08.25 12:55
  • 좋은 와인에 테루아가, 발레엔 땅의 기운 받는 '아 테르'가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여름은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시인 이육사(1904∼1944)가 포도알 안에 독립투사로서의 전설과 꿈을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이 뜨거운 계절이 지난 후에 얻을 수확을 기다리며 각자의 열망과 꿈을 담는다. 은유가 아닌 직관적으로 포도가 알차게 영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와이너리 관계자들일 것이다. 내리쬐는 햇볕 한 줌, 내리는 비 한 방울에 울고 웃는 건 그게 포도, 와인의 맛과 품질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때를 벗어나 비가 내리면 그 해의 와인의 품질과 향미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들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게 테루아(terroir)이다. '테루아'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하는 테르(terre)에서 유래된 만큼 좁게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와인 관계자들은 토양의 상태와 기온이나 강수량, 일조량 등 기후, 지형은 물론, 포도나무를 둘러싼 미생물과 동식물 같은 생물들, 포도 재배 방식과 와인 양조 방식 등 와인을 만드는 활동까지 통틀어 테루아라고 부른다. 어쨌든 와인의 맛과 풍미는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테루아는 아주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특히 지금처럼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는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지중해 지역이 와인으로 유명한 건 작열하는 태양 덕분일 것이다. 와인 신생지로 각광받는 아르헨티나, 칠레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들은 고른 기후변화를 보여주기 때

    2024.08.01 00:01
  • 하늘에서 원을 그려보는 거야, 여름의 초록 공기를 가르며

    계절은 온도계의 숫자보다 코끝에 닿는 공기로 먼저 느끼게 된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 따뜻한 기운이 바람에 실려 오듯이, 여름이 시작되는 지금, 새들과 벌레들의 노래가 공기를 타고 창가로 날아온다. 발레는 ‘공기’와 관련이 깊다. 공기의 정령이 등장하는 <라 실피드(1832)>에서는 최초의 포인트슈즈(토슈즈)가 등장하기도 했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살랑살랑 가벼운 움직임과 춤의 호흡이야말로 발레의 매력이다.발레는 하늘로 향하는 춤이기 때문에 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동작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렇게 발과 다리 혹은 몸통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동작들을 통틀어 ‘앙 레르(en l'air)’라고 부른다. 공기(air)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기 중에, 공중에’라는 뜻을 갖고 있는 용어이다.앙 레르의 대표적인 동작은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이다. 한쪽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다른 쪽 다리를 서 있는 다리와 직각이 되게 든 채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롱드(rond)'는 라운드(round), 즉 원을 그린다는 뜻이고, ‘장브(jambe)’는 다리라는 뜻이다. 뜻 그대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동작인 것. 이 동작에서는 들고 있는 다리가 앙 레르 상태이다.하지만 이 동작에서 정작 중요한 지점은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아니라 동작을 수행할 때 허리와 골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중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다리를 들어도 허리선과 골반 높이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발레의 여러 동작들은 높이 뛰고, 높이 들

    2024.07.01 11:15
  • 피렌체와 발레 사이에 꽃이 있다, 낭만적 결말은 아니더라도

    “준세이, 약속해 줄래? 나의 서른 살 생일은 피렌체 두오모에서.” “그래, 약속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중에서일본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가 함께 집필해서 1999년에 출간한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영화로도 제작돼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에 영화 개봉 20주년을 맞이해서 재개봉되기도 했고, 올해는 24주년 특별판 책이 출간되기도 할 정도로 이 로맨스는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릿속에 새겨 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책 속에서 주인공 준세이가 독백하던 것과는 달리.사랑했지만 헤어진 두 사람, 준세이와 아오이. 언젠가 두 사람은 약속했다.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고. 그 둘이 만나기로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을 갖고 있다.피렌체라는 이름의 어원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꽃’이라는 의견이 있다. 피렌체는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레의 꽃씨를 뿌린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혼담이 이뤄진 게 발레의 시작점이 됐기 때문이다. 1533년, 메디치 가문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가 프랑스의 왕 앙리 2세(Henri II, 1519~1559)와 결혼을 하면서 가져

    2024.05.31 14:24
  • 서희의 줄리엣, 깃털처럼 날아올라 비장하게 추락했다

    사랑일까, 아닐까. 발레 <지젤(Giselle, 1841)>의 1막에서 지젤은 데이지 꽃의 꽃잎을 한 장씩 뜯으며 알브레히트와 자신의 만남이 사랑인지, 이뤄질 수 있는지 운명을 점친다. 차마 남은 꽃잎 한 장을 떼지 못하는 건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는 숨겨놓은 꽃잎을 들이밀며 지젤의 마음을 달래는 센스를 발휘하지만 안타깝게 이 사랑은 배신과 죽음이라는 결과를 맺는다. 지젤의 손에 남겨졌던 그 꽃잎은 운명의 소용돌이를 예고하는 징표이자 복선이었던 것이다.  1965년 케네스 맥밀런(Kenneth MacMillan, 1929~1992)은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을 안무하면서 비슷한 복선을 숨겨놓았다. 흔히 사랑은 그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은 확인되는 순간 사랑은 폭발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1막의 발코니 파드되가 그 부분이다. 어떤 버전의 발레 작품이라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함께 이 발코니 파드되는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다.케네스 맥밀런은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로미오의 키스를 받고 행복한 마음이 복받쳐 발코니 위로 달려가 로미오를 향해 손을 뻗는 줄리엣. 로미오도 줄리엣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맞닿지 않는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운명의 복선이 되기 때문이다. 케네스 맥밀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단도로 자신을 찌른 줄리엣이 로미오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지만 끝내 그 손을 잡지 못하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 죽음을 맞이하도록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면에서 비극의 감정을 분출시키고 연결시킨 것이다.  수많

    2024.05.13 14:08
  • 4월은 잔인하게 비틀거렸다, 마치 '그랑 파 디브레스'처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영국 시인 T.S.엘리엇 (T.S.Eliot, 1888~1965)의 대표작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시구이다. 4월의 찬란함과 강한 생명력을 T.S.엘리엇은 ‘잔인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학창 시절 ‘잔인한 4월’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야 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이 계절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그 찬란함, 그 잔인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달인 것을 깨달았다.우리나라에서 이번 4월의 가장 큰 이슈는 뭐니 뭐니 해도 선거이다. 각자의 정치적 색깔과 입장이 다르다 보니 선거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울고 웃었고, 그 현장에는 죽음의 고통과 새로운 의지가 교차하고 얽히는 모습을 읽었다. 4월, 선거 안에 흐르는 정반대의 감정선을 지켜보고, T.S.엘리엇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 다른 에너지가 공존하는 발레 동작을 떠올리게 된다. 그 동작은 ‘그랑 파 디브레스 (grand pas d’ivresse)’이다. 이 동작은 19세기 고전발레부터 등장했던 것은 아니고 발레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과 표현이 확장되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움직임이자 용어이다.언어 그대로 뜻풀이를 하자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동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 동작에서 생명을 느끼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 동작과 용어는 발레에 등장하게 되었을까.개인적으로 이 비틀거리고 죽어가는 동작에서 생명력을 느낀 건 프랑스의 저명한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 (Angelin Preljocaj, 1957~)가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만든 <스노우 화이트 (Snow White,

    2024.04.30 11:16
  •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와 꽃망울처럼 활짝, 소테(Sauté)

    "3월은 정원에서 가장 바쁜 달, 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달이다. 그렇게 애써 공들여 해 놓았는데 살을 에이는 꽃샘추위가 와서 애를 끓인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3월 중에서카렐 차페크처럼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달력으로 볼 때 3월은 틀림없는 봄이지만 여전히 겨울과 봄이 주도권을 놓고 뒤척이며 다툼하는 달이라는 사실을. 기온은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 변신을 하지만 그래도 3월이면 봄의 기운이 솟기 시작하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눈을 뜨기 시작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 경칩(驚蟄)에도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발레에서도 경칩의 이미지를 닮은 동작이 있다. 바로 소테(Sauté)이다. 발레에는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다양한 점프 동작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테로 통칭된다. 바닥에서 발을 떼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든 동작은 소테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해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천상의 춤, 발레. 그래서 소테는 가장 발레다운 동작이다.턴아웃된 두 발의 뒤꿈치를 서로 맞붙이고 무릎과 허벅지가 옆으로 향하는 1번 자세에서 위로 솟구치듯 점프하거나 두 발을 포갠 5번 자세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통 소테라고 부르는데, 턴아웃된 두 발을 양옆으로 어깨너비만큼 벌리는 2번 자세에서 뛰어오르거나, 아라베스크 자세로 펄쩍 뛰어오르는 것도 소테이다. 팔짝팔짝 뛰어오르는 그 동작은 봄을 맞이한 개구리처럼 신이 나고,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이제 막 땅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새싹처럼 기특하고, 나뭇가지 위에서 반짝 꽃잎을 펼치는 벚꽃처럼 화사하다. 그 에너지에는 생명력이 있다.

    2024.04.01 10:24
  • 폭발적 점프 '그랑 제떼'는 보통 몇번 미끄러진 다음에야 온다

    오고 있던 봄이 눈길 위에 미끄러졌다. 2월 말, 서울에서는 58년 만에 폭설이 내렸고, 강릉에는 70센티미터의 눈이 쌓였다. 쌓인 눈 속에서 이제 기지개를 켜려던 새싹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눈이 봄을 기다리는 하얀 소식인 걸 알고 있다. 빙판 위에서 부쩍 줄어든 마찰력. 발레에서도 이런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들은 발레 < 지젤(Giselle, 1841) > 2막에서 윌리들의 수장, 미르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물 흐르는 듯이 무대 위에서 이동하는 미르타의 모습은 마치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를 가로지는 것처럼 아무런 마찰력을 느낄 수 없다. 그 동작은 부레(bourré). 오른발과 왼발을 끊임없이 바꾸며 발걸음을 잘게 부서서 걷되, 머리와 어깨는 전혀 미동이 없기 때문에 관객의 눈에는 눈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미동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부레는 귀신인 윌리들에게 가장 잘 맞는 동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레 외에 실제로 미끄러지는 움직임을 표현한 발레 동작이 있다. 글리사드(glissade)이다. 글리사드는 단어 자체가 '미끄러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두 다리와 발을 포갠 자세에서 한 다리를 뻗어서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밀어서 이동하다가 순간적으로 두 다리를 무릎까지 완전히 뻗는 모습을 보이고, 이어서 나머지 다른 한 다리를 미끄러지듯이 밀고 와서 두 다리와 발이 포갠 자세로 마무리한다.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동작이 수행되기 때문에 글리사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동작은 바닥에 거의 붙어서 하기도 하고 바닥에 몇 인치 떨어져서 점프 상태로

    2024.02.29 09:09
  • 빈의 2월은 왈츠의 시간... '춤의 샛별들'보러 3천만원 티켓도 매진!

     매년 2월이면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Wiener Staatsoper)에서는 ‘유럽 사교계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왈츠(Waltz) 무도회, 빈 오페라 볼(Vienna Opera Ball)이 열린다.1935년부터 시작된 이 무도회는 발레와 오페라 공연이 펼쳐지는 건 물론,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만 17세 이상의 신예들이 춤으로 인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도회 전에 벌어지는 오프닝 행사는 늘 주목받는다. 40만~3천만 원에 달하는 비싼 티켓을 사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권위 있는 문화행사로 자리잡았다. 올해 행사는 2월 8일로 예정돼 있다.   베버, 쇼팽, 라벨 등 여러 작곡가들이 매력적인 왈츠 곡들을 내놓았지만, ‘왈츠’라는 단어를 들으면 왈츠의 황제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빈 오페라 볼에서도 해마다 빼놓지 않는 건, 100쌍이 넘는 신예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에 맞춰 왈츠를 추며 오프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이다. 이들을 데뷔턴트(Debutants)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이 부분이 춤과 음악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한껏 뽐내는 자리일 것이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커플들이 함께 춤추는 다양한 바로크댄스들이 사랑받았지만, 18세기에 등장한 왈츠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바로크댄스들은 남녀가 손을 잡고 추는 정도였지만 왈츠는 파트너와 서로 부둥켜안고 추기 때문에 한때 외설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남녀가 서로 안고 추는 최초의 춤이란 점 외에 왈츠의 큰 특징 중 하나는 4분의 3박자의 리듬에 맞춰 추는 춤이라는 점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

    2024.01.30 14:03
  • 발레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느림의 미학, '아다지오'

    전보(電報, telegraphy)가 사라졌다. 태어난 지 138년 만이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도, 자녀를 낳았다는 소식도,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사람들은 전보의 몇 자를 놓고 울고 웃었다.한때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던 전보가 세월의 흐름에 속도를 잃어버리고, 5세대 이동통신 5G가 땅을 접고 시간을 접는 축지법의 마술을 부리는 시대. 빠른 것은 아름다운가. 느린 것은 시대의 뒷전인가.  돌아보면 발레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데는 빠르고 강렬한 움직임 못지 않게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아다주'(adage) 또는 '아다지오'(adagio)가 중요하다. 프랑스어로는 아다주, 이탈리아어로는 아다지오라고 부르는데 음악에서도 느린 템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발레는 다른 어떤 춤보다 몸의 가용범위를 극한으로 확장시켜 사용하기 때문에 곡예에 가까운 기술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발레의 기술과 필요한 근육, 유연성의 정점이 빛을 발하는 건 빠르게 돌고 뛰고 나는 동작이 아니라 느리게 움직이는 아다지오에서다.천천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 몸과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음악의 박자와 흐름과도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는지. 아다지오를 출 때 훈련의 세월은 물론 이런 뮤지컬러티(musicality), 즉 음악성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점 때문에 발레 클래스 중 바 훈련 이후 진행하는 센터 클래스에서는 아다지오를 제일 먼저 한다. 다리를 데벨로페해서 들 때도 높이보다는 얼마나 천천히 들어 올리고 얼마나 그 상태로 잘 버티느냐는 중요하다. 아라베스크나 에티튜드 상태로 돌 때도 얼마나 천천히 흔들림 없이 돌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그래야만 음악 안에서

    2023.12.29 10:23
  • 롤드컵의 레전드 '페이커'의 멘탈훈련, 발레의 이 동작과 똑같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처음으로 e스포츠 대회의 거리 응원전이 열렸다. 매년 수억 명의 관중들을 동원하며 일명 ‘롤드컵’이라고도 불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을 초대형 전광판으로 중계한 것이다. 그 덕분일까.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작년에 이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번 대회 우리나라 대표로 출전한 e스포츠팀 T1은 7년 만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팀의 '간판 스타' 페이커(이상혁) 역시 또 한 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페이커가 롤게임에서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비운다고 페이커 스스로 밝히는 것을 보면 독서가 10년째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준 게 아닐까 싶다. 현재 페이커가 읽은 책 목록은 SNS를 통해 공유될 정도로 화제이기도 하다. 이 뉴스를 듣고 발레의 데벨로페(développé) 동작을 떠올렸다. 차근차근 몸의 기초공사를 완성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데벨로페는 '발전된, 확장된, 펼쳐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양 다리를 턴아웃한 상태에서 한 다리를 축으로 세우고, 다른 다리는 무릎을 굽혀 발끝으로 축으로 세운 다리의 복숭아뼈, 종아리, 무릎을 순차적으로 지나다가 마지막 순간 움직이던 다리의 무릎을 펴면서 높이 드는 동작이다. 그 순간, 들어 올린 다리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높이로 확장되기 하기 때문에 이 동작에 데벨로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 다리는 세우고, 다른 다리를 든 상태에서 완벽하게 몸의 균형을 이뤄야 하는 동작이다. 그때 움직이는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 데벨로페 드방(développé devant), 뒤로 뻗으면 데벨로페 데리

    2023.11.29 15:46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와 발레의 '프로미나드'가 생각나는 계절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단풍 든 잎이 남아 있다. 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희망을 걸고 잎사귀 하나를 지켜본다. 아, 그 잎이 땅 위에 낙엽지면 내 희망도 따라 떨어진다. 나 또한 대지에 몸을 던져 희망의 무덤에서 운다.”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Die Winterreise) 중 16곡 ‘마지막 희망(Letzte Hoffnung)’ 슈베르트(1797~1828)의 연가곡 중 ‘마지막 희망’에서는 노래 사이로 가을낙엽이 흩어지는 것처럼, 청년의 눈물이 흩뿌려지는 것처럼 점점히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실연한 청년이 낙엽처럼 바스라진 감정을 안고 겨울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황이 이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계절에 실연을 당하든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은 이미 겨울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이 연가곡에 '겨울나그네'라는 낭만적인 제목을 붙였는데 이 곡의 독일어 원어 제목 ‘Winterreise’에서 reise는 여행, 방랑을 뜻한다. 그래서 음악 곳곳에 여행의 발걸음이 표현되어 있다. 첫 곡 ‘안녕히’와 20곡 ‘이정표’에서 4분의 2박자로 발걸음을 표현한 것이 대표적이다. 발레에서도 여행과 산책을 표현하는 동작이 있다. 프랑스어로 ‘산책’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작 ‘프로미나드(promenade)’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프로미나드라고 말하고, ‘투르 드 프로미나드(tour de promenade)’ 혹은 ‘투르랑(tour l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투르(tour)’는 여행, ‘랑(lent)’은 느리고 완만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동작은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하고 여행하는 모양새를 담고 있다. 중심이 되는 한 다리를 축으로 서고 다른 다리를 뒤로 뻗는 동작을 ‘아라베스크(a

    2023.10.25 16:06
  • 죽음조차 아름다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객석까지 지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건물 사이에 이어진 줄 위에 천 조각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이승택의 이란 설치미술 작품이다. 그 흔들리는 움직임 속에서는 우리는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는 유치환의 시 을 떠올리게 된다. 형체 없는 자연 현상이 과연 조형화되고 미술이 될 수 있을까. 소리가 없는데 시끌벅적한 아우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질문 안에서 우리는 ‘역설’이란 단어를 읽는다. 일상의 감각 안에서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지점이 예술 안에서 경이로운 조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번에 내한한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안무작 도 온통 아름다운 역설이 가득한 무대였다. 기술이냐 표현이냐, 예술가들의 고질적으로 갖고 있는 숙제를 이번 은 완전한 합일을 통해 풀어낸다. 이 지점에서 역설의 미를 읽어내는 건, 마이요 스스로 “제 작품들은 안무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피력했지만 이런 말이 무색하게 기술적인 역량에서 어느 무용수도 제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작품의 주변인물로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감정과 캐릭터를 살려낸 점은 특별했다. 어떤 보다 적극적인 유모의 모습을 만나게 되고, 로미오의 친구들을 통해서는 짓궂은 10대 소년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아들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마담 캐퓰릿에 깊이 공감하다가, 두 젊은 연인의 시신 앞에서 로렌스 신부가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이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고 앞으로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연민을 품게 된다. 기술을 추구하거나 보여주는데 방점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동시에 감정선

    2023.10.14 13:59
  •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플리에'...여기에 발레의 모든 게 녹아있다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땅을 살살 파보면 엄지손가락만큼 두툼한 싹눈과 가녀린 새싹, 알알이 여물어가는 구근을 발견하게 된다. ‘봄이 여기 숨어 있네’라는 생각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이 칼럼의 모티브가 된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의 저서 중에서 10월 편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는 보통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10월은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무언가를 거둬들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원가로 살았던 카레 차페크에게 10월은 다음 해에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 식물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다음 해 정원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시작점인 것이다. 발레에서 ‘봄이 숨어있는’ 동작은 ‘플리에(plié)’라고 볼 수 있다. 플리에는 프랑스어로 ‘구부리다’, ‘접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말 그대로 무릎을 구부려서 내려갔다 올라가는 동작이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초보적인 동작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발레를 배울 때 제일 처음 접하게 되고, 발레 클래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동작이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플리에 동작이 어렵다거나 혹은 중요하다고 인식하지 않지만 발레를 배우면 배울수록 전혀 다른 점을 깨닫게 된다. 플리에를 가장 처음 배우는 건 쉬운 동작이여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동작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발레는 다른 춤과 달리 호흡을 위로 쓰고,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는 춤이다.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이 '과학 머리'가 발달된 사람들을 통해서는 비행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2023.09.28 23:42
  • 가을에 쓰는 사랑 편지만큼 아찔한 감성, '파드되 리프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은의 시와 김민기의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계절이 왔다. 가을은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쓰기 좋은 공기와 온도를 품고 있다.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기도 하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이 저물어 버리기도 한다. 요즘은 우체국 앞에서 서성이거나 창문가에서 편지를 쓰는 일보다는 휴대폰 창을 열어 숫자 1이 사라졌는지 확인하고, 차마 보내지 못할 수많은 말들을 적었다 지우며 서성이는 일이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가을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고 마음을 담은 문장을 적어 보내고 싶은 계절인 건 변함없다. 발레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담아 편지를 쓰는 게 작품 전체를 이끄는 중요한 장면인 작품이 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존 크랑코(John Cranko, 1927~1973)의 안무작 이 그렇다. 시골 마을에 잠시 내려온 도시 남자 오네긴을 보고 반한 순박한 아가씨 타티아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반했을 때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우리의 모습을 타티아나의 표정과 몸짓에서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다. 고백의 편지를 쓰던 타티아나는 급기야 거울 속에서 오네긴이 나타나 함께 춤추는 환영에 휩쓸린다. 바로 이 장면에서 사랑이 이뤄질 거라는 타티아나의 환상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두 사람의 리프트 장면이 연출된다. 타티아나가 오네긴의 손끝에 앉아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구름 위에 앉아서 떠다니는 것 같은

    2023.08.27 09:44
  • '고양이 걸음' 파드샤의 앙증맞은 매혹은 벗어날 수 없어

    신화나 전설, 동화 속에 등장하는 몇몇 동물들은 신령한 능력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에서는 대표적으로 꼬리 아홉 달린 여우, 구미호가 그렇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방(하이랜드)과 북유럽에서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알려진 고양이, 카트시(Cat Sí)에 대한 전설이 있다.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의 동화 에 등장하는 바로 그 고양이이다. 샤를 페로는 발레와 인연이 깊은 프랑스의 동화작가이다.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1890)’와 ‘신데렐라(Cinderella, 1948)’는 모두 페로의 동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완성된 고전발레에는 여러 형식이 있는데, 줄거리와 전혀 상관없이 여흥과 재미거리로 넣는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도 주요한 형식이다. 샤를 페로의 동화 속 주인공들은 디베르티스망에 종종 등장한다. 특히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3막 결혼식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늑대와 빨간 두건의 춤도 페로의 동화 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장화신은 고양이도 이 장면에는 등장하는데, 암컷 고양이에게 반해서 쫓아다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보통 백조가 발레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고양이야말로 발레와 잘 어울리는 동물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고양이의 움직임이 중력을 거스르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여기저기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요정이나 다름없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발레에서는 고양이의 움직임에서 따온 동작도 있다. 바로 파드샤(pas de chat)이다. 프랑스어로 샤(chat)는 고양이로, 파드샤는 ‘고양이 걸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파드샤는 공중에서 고관절과 무릎이 양

    2023.07.25 10:44
  • 7월엔 붉은빛 루비를…조지 발란신 '주얼스' 속 카프리치오!

    카프리치오(capriccio).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나 변덕을 뜻하는 이 이탈리아어는 음악에서 주요한 언어로 쓰인다. 특정한 형식없이 자유롭고 활기차게 표현되는 음악을 뜻한다. 그래서 작곡가의 창의적인 면모와 진짜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기상곡(綺想曲, 奇想曲)으로 불리는데 두 가지 한자로 표기되는 이유도 카프리치오 음악이 갖고 있는 화려한 아름다움과 독창성 때문일 것이다. 전자는 화려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고, 후자는 기이하다는 의미를 강조한 말이다. 여러 카프리치오 중에 이고리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는 발레와 만나 그 독창적인 매력이 더 빛을 발한 곡이다. 원래 스트라빈스키가 발레를 위해 작곡한 곡은 아니지만 그의 예술적 동지이자 평생 우정을 나눈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이 자신의 발레 작품 안에 이 음악을 썼다. 그 작품은 뉴욕에서 첫 선을 보인 . 이 작품은 , , 세 파트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보석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그대로 춤으로 표현됐다. 발레의 동작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갖고 있되 특별한 줄거리 없이 보석이라는 테마와 음악이 갖는 이미지를 춤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신고전주의 발레, 네오클래식 발레로 불리는 작품이다. 조지 발란신 중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New York City Ballet 조지 발란신 중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New York City Ballet 각각의 보석마다 다른 음악에 사용됐는데 이 세 가지 보석 중에 스트라빈스키의 는 어떤 보석과 만났을까. ‘기이하고 독창적인 음악’이란 뜻의 카프리치오와 가장 매칭이 잘 되는 보석은 역시 붉은 루비일

    2023.06.26 16:23
  • 장미꽃처럼, 로즈 아다지오의 애티튜드(attitude)

    거리마다 장미꽃이 활짝 피고 그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기 좋을 햇살이 알맞게 내리쬐고 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는 5월 14일을 ‘로즈데이’로 지칭하고 있고, 6월 1일의 탄생화는 장미이다. 장미는 시인의 뮤즈이다. “소년이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야! 장미가 말했네: 너를 찌를 테야!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여러 작곡가들의 손에서 음악으로도 탄생한 ‘들장미(Heidenröslein)’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쓴 시로, 그의 자전적 고백이기도 하다. 괴테는 20대 때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사랑에 빠졌고, 그때의 기억과 마음을 이 시로 남겼다. 들에 핀 싱싱하고 빨간 장미 같은 소녀를 본 소년은 욕망에 휩싸이고, 그 소유의 의지와 유혹을 향해 장미로 상징된 소녀는 가시로 위협하는 척 하면서 자신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한 소년이 보았네, 들에 핀 장미”로 시작하는 들장미의 노래는 알고 보면 사랑에 대한 욕망과 불안감이 점철된 남녀가 주고받는 밀어이자, 사랑의 티키타카였던 것이다. 괴테의 ‘들장미’ 안에 나타난 것처럼 장미의 가시는 이중성을 안고 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날선 칼날인 동시에 ‘나를 잊지 말아요’를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된다. 발레에도 장미의 가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 있다. 장미 가시에 찔려 100년 동안 잠든 공주의 이야기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90)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가 음악을 작곡했고,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1819~1910)가 안무를 맡아 탄생한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

    2023.05.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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