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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선언' 전문(前文)에는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일어나가며…'란 대목이 나온다. 골자만 추리면 '시대를 일어나가다'이다. 이 부분은 금세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4월27일 남북한 분단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판문점 선언’의 여운이 이어지고 있다. ‘열려라! 우리말’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 정치적 의미에 있지 않다. 선언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북한말투’가 관심사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남북한 간 선언문을 조율하면서 그리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도 이런 경우 자구 하나라도 꼼꼼히 따지는 것이 상례일진대 북한말투가 걸러지지 않은 채 우리에게 공개된 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일어나가며’는 ‘일궈 나가며’란 뜻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이 흐르면서 말글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북한말투라고 해도 뜻만 통하면 되지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데가 여러 곳 있다. 같은 우리말을 쓰면서도 표현이 어색한 것도 어찌할 수가 없다. 선언문에 투영된 북한말투를 통해 남과 북의 어법 차이를 살펴보자.전문(前文)에는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일어나가며…’란 대목이 나온다. 골자만 추리면 ‘시대를 일어나가다’이다. 이 부분은 금세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남에서 쓰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우선 ‘일어나가며’가 가능하기 위해선 기본형 ‘일어나가다’ 또는 ‘일다’가 있어야 한다. 일단 ‘일어나가다’란 단어는 남북한
'탄신일'보다는 '나신날' '오신날'이 더 맛깔스럽다. 어감상으로나 조어법상으로나 그렇다. 쉽고 친근한 표현이 우리말을 살찌운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다.부처님오신날(22일)을 앞두고 거리에는 벌써 연등이 걸렸다. 이날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는 그동안 석가탄신일이었다. 이를 줄여 석탄일 또는 불탄일이라고도 했다. 달리 초파일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석가탄신일을 명절의 하나로 부르는 이름이다. ‘초팔일(初八日)’에서 음이 변한 말이다. 정부에서 2017년 입법예고를 거쳐 10월10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함으로써 비로소 부처님오신날이 공식 명칭이 됐다. 고유명사화한 말이므로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쓴다는 점도 기억해 둬야 한다.탄신일은 ‘생일+일’ 같은 겹말 표현불교계에서 이날을 ‘부처님오신날’로 바꿔 쓴 지는 꽤 오래됐다. “1960년대 조계종이 지나치게 민속화된 불탄일에 대한 불교적 의미를 복원하고, 한자어로 돼 있는 불탄일·석탄일을 쉽게 풀이해 사용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다”는 게 불교계의 설명이다(‘한국세시풍속사전’). 여기서 ‘한자어 명칭을 쉽게 풀어 쓰자’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1968년 봉축위원회에서 부처님오신날을 쓰기로 결의했다(법보신문 2017년 10월10일자)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딱 반세기 전 일이다. 쉽고 친근한 말, 대중에게 다가가는 말에 눈뜬 당시 불교계의 ‘우리말 순화운동’(?)이 자못 선구적이었다고 할 만하다.‘탄신일’은 조어법상으로도 바람직한 말이 아니다. ‘탄신(誕辰)’으로 충분하다. 어른한테는 생일이라 하지 않고 생신(生辰)이라고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
'갑질문화'도 신중하게 써야 할 말이다. '갑질'이란 단어는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갑'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접미사 '-질'을 붙여 '갑질'이란 말을 만들었다.문화가 넘치는 시대다. 웬만한 말에 갖다 붙이면 다 ‘OO문화’가 된다. 문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고도로 추상화된 단어다. 개념적으로도 좁은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주변에서 문화가 아닌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써도 되는 말일까?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갑질문화’도 그런 점에서 들여다볼 만하다. 찬찬히 보면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강간문화, 조폭문화 등 아무데나 갖다 붙여‘미투 운동’이 한창 보도될 때 일각에서 ‘강간문화’가 튀어나왔다. 영어로는 rape culture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이 낯설지만 영어권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용어다. 1970년대 미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쓰기 시작해 단행본과 영화로도 많이 소개됐다. ‘강간문화’란 말은 인류역사와 강간의 사회적 환경을 조명한 학술적 개념에서 비롯됐다. 이 말을 쓰려면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갑질문화’도 신중하게 써야 할 말이다. ‘갑질’이란 단어는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갑’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접미사 ‘-질’을 붙여 ‘갑질’이란 말을 만들었다. ‘-질’은 노름질, 서방질, 싸움질 같은 데서 보듯 주로 좋지 않은
같은 국민끼리 '저희 나라'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저희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심리적으론 그러고 싶겠지만 이치상 맞지 않는다.우리가 ‘저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를 낮춰 이르는 말이란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런 관점에서 ‘저희 나라’의 문법성 논란이 꾸준히 있어 왔다. 핵심은 국가 간에 이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하냐에 모아져 있다. 지난해 말에는 대통령 부인과 외교부 장관의 ‘저희 나라’ ‘저희가~’ 발언이 알려져 인터넷상에서 논쟁이 일기도 했다.외국인에겐 써도 어법상 문제없어전통적으로 국가 간에는 ‘우리나라’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뤄왔다. 국립국어원의 <표준화법해설(1992)>에서 “나라를 표현할 때는 언제나 ‘우리나라’로 해야 한다”고 설명한 것도 그중 하나다. 언중 사이엔 그 이유로 ‘나라마다 존엄성을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리의도, ‘올바른 우리말 사용법’)이라는 시각이 꽤 설득력 있게 알려져 있다.‘저희’ 용법을 이해하려면 그 근원인 ‘우리’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우리’는 세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①단수로 쓴 우리다. “우리 집은 대전에 있어.” “우리 아내는 명품을 너무 좋아해.” 이때의 ‘우리’는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실제로는 ‘나의’의 뜻인데 이게 집단화해 ‘우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어법은 수사학의 ‘일반화’ 기법과 비슷한데, 우리말에선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쓰인다. 둘째는 진짜 복수형으로 쓴 &
'사의를 표하다'는 곧 '고맙다고 하다'이다. '사죄의 뜻을 전했다'라고 하지 말고 바로 '사죄했다'라고 쓰면 된다. 그것이 우리말다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정치·외교적으로 쓰이는 ‘유감(遺憾)’은 말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의미적 모호성이 특징인 이 말이 일상적 상황에까지 퍼져 다양한 기존 어휘 사용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실언어에서 유감이 쓰이는 영역은 꽤 넓다. ‘아쉽다, 안타깝다, 안쓰럽다, 서운하다, 섭섭하다, 언짢다, 불만스럽다’ 등 섬세하게 구별해 써야 할 말들을 대신한다. 심지어 ‘미안하다, 사과하다, 사죄하다, 죄송하다, 송구하다’ 등 용서를 구하는 말을 써야 할 때도 ‘유감’이 자리를 차지한다.유감·입장은 얼버무릴 때 쓰기 편한 말우리는 이미 ‘입장(立場)’에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일본에서도 잘 쓰지 않는 이 말이 들어와 대체한 우리말이 꽤 많다. ‘처지, 견해, 의견, 태도, 형편, 생각, 주장, 방침, 상황…’ 등 문맥에 따라 달리 쓸 말 10여 가지를 ‘입장’이 대신한다.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라고 해야 할 때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식으로 써서 우리말을 망가뜨리기도 한다.입장처럼 유감도 모호하게 쓰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모호함은 어휘적·통사적 양쪽으로 실현된다. 우선 어휘적 측면에서 ‘유감’은 지난호에서부터 살폈듯이 일반적 상황에서 사과의 의미로 써서는 안 될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마음에 차지 않고 서운한 감정이 남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다른 하나는 통사적 차원
우리가 알고자 하는 유감은 '遺憾'이다. 남길 유(遺), 섭섭할 감(憾)이다. 즉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표준국어대사전)을 말한다.‘미투 운동’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와중에 우리말 ‘유감’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사과한다고 말한 속에, 또는 이를 보도하는 언론 표현에 자주 등장한다. 대개 이런 투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한다.” 그런데 썩 자연스럽지가 않다. 사과의 진정성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이유는 ‘유감’이란 말의 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본래 쓰임새는 서운하다는 뜻‘유감’의 정체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유감을 한자로 써 보라고 하면 자칫 ‘有感’ 정도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말이고, 우리가 알고자 하는 유감은 ‘遺憾’이다. 남길 유(遺), 섭섭할 감(憾)이다. 즉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표준국어대사전)을 말한다. 한마디로 ‘섭섭하다’ 또는 ‘언짢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감정(憾情·이 역시 感情과 구별해야 할 말이다)이 있다는 뜻이다. “너, 나한테 유감 있냐?”라고 하면 “나한테 불만 있냐?”는 뜻이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 말에 사과의 의미를 담아 쓰기 시작했다. 유감의 감(憾)은 ‘대단히 강하게 느끼는(感) 감정(心)’이란 뜻을 담았다. 기쁨보다는 한스럽고 분한 감정에 나타나는 느낌을 말한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해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
평창패럴림픽에서 인기를 끈 '손모아장갑' 같은 대체어는 의미도 살아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점잖은 표현이라 좋다. 또 다른 대체어인 '엄지장갑'과 함께 일상어로 자리잡도록 힘을 모을 만하다.2013년 9월 SBS 새 월화드라마 ‘수상한 가정부’ 제작진은 방영을 앞두고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작진은 좀 특별한 해명을 했다. “제목에 쓰인 ‘가정부’라는 말이 이 직업군을 비하하는 것으로 여겨질지 몰랐다”며 “논란이 되는 부분은 가사도우미나 가정관리사라는 말로 순화해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는 가정부라는 제목으로 인해 방영 전부터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가정관리사협회로부터 항의를 받았다.의미 살리고 표현도 점잖아‘일정한 보수를 받고 집안일을 해 주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은 사전적으로 가정부 또는 파출부다. 하지만 통계청의 한국표준직업분류에 따른 공식 명칭은 가사도우미다. 사전에 오른 정식 ‘단어’는 아니다. 여성단체에서 가정부와 파출부를 비하어로 지목하자 이를 대체한 용어로 쓰고 있는 것이다.그런 배경에는 우리말에서 ‘-부’가 험하고 힘든 일이나 직업군에 많이 쓰인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광부, (공사장)인부, 청소부, 접대부, 간호부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중 청소부는 청소원을 거쳐 (환경)미화원이 됐다. 간호부 역시 간호원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간호사로 불린다. 이들이 애초부터 비하어여서 바꾼 게 아니다. 사회적 인식 변화에 따라 좀 더 점잖게 부르는 말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사회 발전에 따른 언어의 분화·진화인 셈이다.‘장님→시각장애인’ 등
1990년대 초까진 장님이 소경의 높임말이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에도 낮잡는다는 뜻이 없었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92년 펴낸 <조선말대사전>도 마찬가지다.“KBS 방송심의위원회의 케이윌 ‘최면’ 방송불가 판정을 적극 환영한다. 소속사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을 벙어리에 비유한 것일 뿐’이라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대중가요를 접하는 수많은 시민과 청소년들은 ‘벙어리’란 용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청각장애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비하용어를 사용할 우려가 있다.”1990년대 말 사회적 인식 변화 반영2009년 11월 7일 한국농아인협회에서 발표한 성명서의 한 대목이다. 지난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말에서 장님이나 귀머거리, 벙어리 같은 말은 일종의 ‘금기어’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 용어를 장애인 비하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권 인식이 커지면서 호칭어(또는 지칭어)에 대한 인식도 함께 바뀌었다. <표준국어대사전>(1999)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2009) 등의 풀이가 그렇다. 두 사전은 이들 용어를 ‘~을 낮잡는(얕잡는) 말’로 풀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연세한국어사전>(1998)은 좀 다르다. ‘낮잡는 말’이란 표현이 없다.애초부터 이들이 낮잡는 말로 쓰인 게 아니라는 점은 다른 사전에서도 확인된다. 1961년 나온 <국어대사전>(민중서림)을 비롯해 <국어대사전>(금성출판사, 1991),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1992) 등 1990년대 초까진 장님이 소경의 높임말이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에도 낮잡는다는 뜻이 없었다. 북한 사회과학출
패럴림픽은 '옆의, 나란히'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패러(para-)'와 올림픽이 결합한 말이다. '올림픽과 나란히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018 평창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의 장외 주인공을 꼽으라면 한글과 우리말을 들을 만하다. 올림픽 휘장과 메달을 비롯해 대회장 곳곳에 한글 자음 ㅍ과 ㅊ을 형상화한 문양을 새기거나 내걸어 한글의 아름다움을 한껏 알렸다. ‘손모아장갑’도 눈에 띄었다. 무심코 써온 ‘벙어리장갑’을 순화한 대체어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패럴림픽이란 용어도 우리에게 ‘말의 진화’란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장애·비장애 가르지 않는 세상 염원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인식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그 전에는 장애자로 많이 불렸다. 서울올림픽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표기는 장애자올림픽이었다. 장애자란 말 자체에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말을 다소 낮춰 부르는 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즈음이었다. 이후 1989년 장애자복지법을 전면 개정한 장애인복지법이 나오면서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공식용어로 등장했다.이번 대회에선 한걸음 더 나아가 패럴림픽이 자리 잡았다. 패럴림픽은 ‘옆의, 나란히’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패러(para-)’와 올림픽이 결합한 말이다. ‘올림픽과 나란히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네이버 두산백과). 애초 하반신 마비를 뜻하는 패러플리지아(paraplegia)와 올림픽의 합성어였으나 점차 다른 장애가 있는 선수들도 참가함에 따라 의미가 바
말을 할 때 정교한 구별이 필요하다. 속담에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우리말의 발전, 나아가 논리적·합리적 사고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연임하게 됐다. 언론들은 지난 3월3일자에서 이 소식을 전했다. 한은 역사에서 총재가 연임한 경우가 드물어 이 뉴스는 더욱 화제가 됐다. 김유택 전 총재(1951년 12월18일~1956년 12월12일)와 김성환 전 총재(1970년 5월2일~1978년 5월1일)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사례라고 한다. 이것을 짧게 “이 총재 연임은 김유택, 김성환 전 총재 이후 세 번째다”라고 말할 수 있다.‘이전/이후’는 기준 시점 포함해언론사에 따라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한 곳도 있었다. “이 총재 연임은 김유택, 김성환 전 총재 이후 처음이다.” 이는 맞는 것일까? 어찌 보면 두 사람이 연임한 뒤로는 처음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에서 ‘처음’과 ‘세 번째’는 분명히 다르다. 둘 중 하나는 틀린 표현이지만 현실언어에서 우리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두루뭉술 섞어 쓰는 경향이 있다.‘이전(以前)/이후(以後)’와 ‘전/후’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가령 “그는 2010년 이후 새벽 운동을 시작했다”라고 하면 2010년부터라는 뜻일까? 아니면 2011년부터를 뜻하는 것일까? 이전/이후는 ‘기준이 되는 때를 포함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2010년부터 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전/후’는 기준이 되는 때를 포함하지 않는다. ‘2010년 후’라고 하면 2011년부터를 가리킨다.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개념에 대한 이해는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합
우리 맞춤법은 형태주의를 기반으로 해 표음주의를 절충했다. 한글 맞춤법은 총칙 제1항에서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했다.지난호에선 ‘한라산-한나산’의 사례를 통해 우리말 적기 방식인 표음주의와 형태주의의 차이를 살펴봤다. 표음주의란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뜻이다. 형태주의란 소리와 상관없이 같은 단어는 언제나 같은 형태로 적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말을 적는 규칙인 한글 맞춤법은 표음주의일까? 형태주의일까? 한글이 소리글자(표음문자)이니 맞춤법도 표음주의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한글맞춤법은 형태·표음주의 절충우리 맞춤법은 형태주의를 기반으로 해 표음주의를 절충했다. 한글 맞춤법은 총칙 제1항에서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때 ‘어법에 맞도록 함’이란 단어 기본형을 밝혀 적는다는 뜻이고, 그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그 바탕에서 표준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도록 한 게 현행 맞춤법의 원리다.표기를 자주 틀리는 말 중 하나인 ‘얽히고설키다’를 통해 구체적인 방식을 알아보자. 이 말을 ‘얽히고?히다’ ‘얼키고설키다’ 식으로 잘못 쓰기도 한다. 두 단어인 줄 알고 띄어 쓰는 경우도 흔하다. 우선 ‘얽히고’는 ‘얽다’를 어원으로 한 피동형(얽히다)임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발음은 [얼키고]로 나지만 적을 때는 원형을 살려 ‘얽히고’로 한 것이다(형태주의). 이에 비해 뒤따르는 ‘설키다’는 어원을 찾을 수 없다. 우리말에 ‘?다’ 또는 ‘설키다&
우리가 아는 '한라산(漢拏山)'은 북에선 '한나산'이라고 한다. 한자 拏는 '붙잡을 나'자로, '나포(拿捕: 붙잡아 가둠)' 할 때 쓰인 글자다. 拿는 拏의 속자(俗字: 획을 간단히 해 더 널리 쓰이는 글자)다.평창동계올림픽은 선수들의 열전 못지않게 북한의 음악공연도 화제였다. 삼지연관현악단은 강릉과 서울에서 두 차례 공연을 통해 ‘노래련곡(연곡)’ ‘락엽(낙엽)’ 등 다양한 노래를 선보였다. 비록 공연의 정치적 의미와 논란에 가려 부각되진 않았지만 거기엔 간과해선 안 될 게 하나 있었다. 달라진 남북한 말과 글의 일부가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기회가 됐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가곡으로 알려진 ‘백두와 한나는 내 조국’은 주목할 만하다. 애초 이 노래를 몰랐던 사람일지라도 문맥으로 보아 ‘한나’가 ‘한라산’을 뜻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한나산은 본음, 한라산은 속음우리가 아는 ‘한라산(漢拏山)’은 북에선 ‘한나산’이라고 한다. 한자 拏는 ‘붙잡을 나’자로, ‘나포(拿捕: 붙잡아 가둠)’ 할 때 쓰인 글자다. 拿는 拏의 속자(俗字: 획을 간단히 해 더 널리 쓰이는 글자)다. ‘한나산’이 변해 지금의 ‘한라산’이 된 것이다. 이런 것을 속음(俗音)이라고 한다. 속음이란 한자 음을 읽을 때, 본음과는 달리 일부 단어에서 굳어져 쓰이는 음을 말한다. ‘六月’이나 ‘十月’을 육월, 십월이라 하지 않고 유월, 시월로 읽고 적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우리말에는 이처럼 한자어 발음이 변해 굳은 게 꽤 있다. 그중에서도 희로애락(喜怒哀樂, 희노애락
우리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 '호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상은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을 말한다.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이는 누구였을까? 정대일이란 사람이 있었다. 조금 과장하면 조선팔도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실존 인물은 아니다. 가공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될 수 있었을까? 후대로 오면서 부풀려졌겠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이름이 부고(訃告)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護喪(호상) 丁大一(정대일)’로 쓰였다.상주 대신해 장례 절차 진행신문들은 지난 주초 ‘제약 1세대’로 알려진 정형식 일양약품 창업주의 별세 소식을 크게 전했다. 이와 함께 일양약품의 부고 광고를 게재했다. 이 부고는 요즘 보기 드물게 토씨 정도만 빼고 죄다 한자로 작성됐다는 점이 특이했다. 한자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가는 때라 이를 제대로 읽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중 하나로 쓰인 ‘護喪’도 눈에 띄었다. 이 말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우리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 ‘호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상은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은 시절이 달라져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직접 주변에 부고를 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건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식은 졸지에 ‘죄인’이 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곡(哭)을 하고 문상객을 받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그래서 양반가에서 상을 치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역할이 호상
화살을 쏠 때 시위에 화살을 걸어 힘껏 당기는데, 이걸 '켕긴다'고 한다. '켕기다'는 본래 '단단하고 팽팽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연줄을 힘껏 당겨 단단히 켕기는 것이다.한 해를 시작하는 즈음엔 누구나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진다. 그럴 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화두로 즐겨 올리는 말이 ‘해현경장(解弦更張)’이다. 낡은 줄을 걷어내고 새 줄을 팽팽하게 맨다는 뜻이다. 사사로이는 초심을 잃지 않고 각오를 단단히 할 때 꺼내드는 말이다. 정치적·사회적으로는 묵은 제도를 개혁해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쓴다.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인 동중서가 널리 인재를 등용하려는 무제(武帝)에게 올린 글에서 유래했다.시위 한껏 켕기는 마음가짐이 말은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는다는 그 의미도 새겨야 하지만 우리말과 관련해서도 살펴볼 게 꽤 있다. 현(弦)은 본래 활시위를 말한다. 시위란 활대에 걸어서 켕기는 줄이다. 화살을 쏠 때 시위에 화살을 걸어 힘껏 당기는데, 이걸 ‘켕긴다’고 한다. ‘켕기다’는 본래 ‘단단하고 팽팽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연줄을 힘껏 당겨 단단히 켕기는 것이다. 잔뜩 긴장을 하면 목줄기가 뻣뻣하게 켕기기도 한다. 여기서 쓰임새가 넓어져 ‘마음속으로 찜찜한 게 탈이 날까 봐 불안스럽다’란 뜻으로도 쓰이게 됐다. ‘거짓말한 게 켕겨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할 때의 그 ‘켕기다’다. 지금은 이 말을 이렇게 더 많이 쓴다.상현달(上弦-), 하현달(下弦-) 할 때도 이 ‘현’이 쓰였다. 순우리말로는 모두 반달이다. 이에 비해 쟁반같이 둥근, 꽉 찬 달은 온달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보름달이다. 달은 그
'잘생기다'가 동사라고 해서 '잘생겨지는 중이다' '잘생겨라' 같은 표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잘생기다'는 형태상 동사에 해당하지만 전형적인 동사의 특징을 갖추지는 않았다.지난 4일 국립국어원이 올해 3분기 표준국어대사전 정보수정 사항을 공개했다. 그중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은 단연 ‘잘생기다’였다. 품사를 형용사에서 동사로 바꿨다. 누리꾼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웃했다. ‘잘생기다’에 동작성이 있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 아닌가? 이게 의문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잘생기다’를 동사로 분류해 왔다.의미는 품사 가르는 기준 안 돼국어에서 품사를 분류하는 기준은 단어 의미와 형태, 기능이다. 이때 의미는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 객관적으로 품사를 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그보다 형태와 기능을 중심으로 살핀다.‘잘생기다’를 형용사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의미가 동작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낸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즉 동작성이 있으면 동사, 상태나 성질을 나타내면 형용사라고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안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늙다’는 동사일까 형용사일까? 대부분은 ‘늙다’가 동작성보다 상태의 의미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형용사로 보면 될까?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동사다. “너, 그렇게 고민 많이 하면 빨리 늙는다” 같은 데서 보듯이 동사의 대표적 활용 지표인 ‘-는다’가 가능하다.‘잘생기다’도 마찬가지다. 의미상으로는 상태를 나타내지
'긁다'는 원래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는 뜻이다. 근래에는 신용카드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됐다. '물건 따위를 구매할 때 카드로 결제하다'란 의미가 더해졌다.2018학년도 수능 국어시험 15번 문항은 어문규범 중 표준어에 대한 이해 정도를 묻는 내용이었다. 표준어와 표준발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력을 갖췄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우리말 규범은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마련하면서 비로소 체계를 갖췄다. 이를 토대로 1936년 10월28일 ‘조선어표준말모음’이 나왔다. 이들이 모태가 돼 지금 쓰고 있는 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이 틀을 잡을 수 있었다.단어는 시대 따라 의미 바뀌어표준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생성과 전파, 소멸의 단계를 거친다. ‘말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15번 문항 <보기>에 나온 ‘긁다’는 원래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는 뜻이다. 여기서 점차 의미가 확대돼 ‘남을 헐뜯다’(그 착한 사람을 왜 긁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건드리다’(긁어 부스럼)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근래에는 신용카드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됐다. ‘물건 따위를 구매할 때 카드로 결제하다’란 의미가 더해졌다(2014년). 문법 용어로 이를 의미변화(확대, 이동, 축소 등이 있다)라고 한다. ‘카드를 긁다’는 ‘긁다’에 또 하나의 용법이 추가된 것이니 의미확대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심적 쓰임새는 여전히 “등을 긁었다” 같
요즘은 임대(돈을 받고 자기 물건을 남에게 빌려줌)와 임차(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씀)를 구별 못하는 경우도 잦다. 사무실을 월세로 빌려 쓰는 사람이 "사무실을 임대해 쓰고 있다"고 말한다.최근 북한의 감염병 실태가 알려져 화제가 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사망 원인 중 설사가 20% 가까이 차지한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설사병은 만연한데 치료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설사약 잘못 먹으면 더 나와설사(泄瀉)가 심하면 그것을 멎게 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을 ‘설사약’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하나 생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설사약은 설사를 멎게 하는 약일까, 설사를 나오게 하는 약일까?사전을 찾아보면 두 가지로 나온다. 우선 설사가 날 때 이를 멎게 하기 위해 먹는 약이다. 다른 말로 ‘지사제(止瀉劑)’라고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일부러 설사를 나오게 해야 할 때가 있다. 대장내시경 등 의료적 필요에 따라 장을 비우기 위해, 또는 변비로 고생할 때 등이다. 이때 먹는 것도 설사약이다. 이를 ‘하제(下劑)’라고도 한다. 그러니 설사가 나올 때는 설명을 잘 해야 한다. 자칫 엉뚱한 설사약을 먹으면 오히려 더 심해진다. 이런 헷갈림을 방지하기 위해 설사약(설사를 멎게 하는 약)과 설사제(설사를 나오게 하는 약)를 구별해 쓰자는 주장도 일각에서 있다. 변비약이 변비에 먹는 약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우리말이 안고 있는 모호성, 중의성 때문이
이유(理由)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하는 까닭이나 근거’다. 이에 비해 원인(原因)은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적인 일이나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전 풀이로는 쓰임새를 구별하기 어렵다.지난 15일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은 대입수학능력시험까지 연기하게 하는 등 큰 피해를 불러왔다. 전문가들은 지진을 예측하기 위해선 단층 연구가 시급하다고 한다. 지구 표면을 이루는 지각은 여러 단층으로 이뤄졌는데, 이 단층들 간의 충돌이 지진의 이유로 꼽히기 때문이다. 해양판과 대륙판의 경계에 있는 일본 같은 데서 지진이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이유’는 까닭이나 구실, 핑계와 같아포항 지진을 설명한 위 도입문에는 ‘이유’가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어감은 서로 다르다. ‘지진이 잦은 이유’는 자연스러운 데 비해 ‘지진의 이유’란 말은 어딘지 어색하다. 왜 그럴까? ‘이유’와 ‘원인’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유(理由)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하는 까닭이나 근거’다. 이에 비해 원인(原因)은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적인 일이나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전 풀이로는 쓰임새를 구별하기 어렵다. 용례를 살펴보면 두 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철수가 학교에 지각했다고 치자. 선생님이 철수에게 “오늘 왜 지각했지? 지각한 이유가 뭐야?”라고 물을 것이다. 이때 선생님은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상황에서는 어떨까?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다리가
전통적으로 준말의 대표적인 사례는 '사이'가 '새'로, '마음'이 '맘'으로, '싸움'이 '쌈'으로 되는 것이다. 어떤 말의 머리글자만 따서 축약해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은행→한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같은 게 그렇다.요즘 ‘워라밸’ 열풍이 거세다. 한마디로 ‘뜨는 말’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다음 해의 소비 흐름을 예측해온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얼마 전 이 말을 제시했다. 워라밸은 ‘work-life-balance’의 첫소리를 한글로 옮긴 말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한다. 보통 영어의 준말은 머리글자를 따서 WLB 식으로 적는데, 이 말은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영어 발음의 첫소리를 한글로 옮겨 단어화함으로써 빠르게 언중(言衆) 사이에 스며들었다.다양한 준말 적는 방식 중요해져준말(또는 약어)은 둘 이상의 음절로 된 말을 줄여서 간단하게 한 말이다. 원말은 ‘본딧말’이라고 한다. 준말은 예전부터도 많이 쓰였지만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전하면서 막강한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전통적으로 준말의 대표적인 사례는 ‘사이’가 ‘새’로, ‘마음’이 ‘맘’으로, ‘싸움’이 ‘쌈’으로 되는 것이다. 어떤 말의 머리글자만 따서 축약해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은행→한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같은 게 그렇다. 약어가 발달한 영어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준말을 만들어 쓴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말뿐만 아니라 영문 약어도 흔하게 쓰여 이에 대한 규칙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규범언어에서는 이를 벗
'서식'은 좀 어려운 한자어다. 서(棲)는 '깃들이다, 살다'라는 뜻이다. 나무에 새가 앉을 때 붙잡는 가지란 뜻을 담은 한자다. 여기서 보금자리, 터전이란 뜻으로 쓰이게 됐다. '깃들이다'의 사전 풀이 역시 '조류가 보금자리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 살다'이다.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立冬·11월7일)을 지나면서 날씨가 완연하게 쌀쌀해졌다. 전국 곳곳에는 아직 억새와 갈대숲이 계절의 끝자락을 붙들며 늦가을 정취를 더한다. ‘화왕산 억새 서식지의 은빛 물결….’ ‘황금 물결 출렁이는 순천만 갈대 서식지….’ 이런 데 나오는 ‘서식지’란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10여년 전 ‘말짱글짱’이란 문패로 서식지의 용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엔 틀린 표현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이들도 당당히 바른 어법이 됐기 때문이다.‘서식’은 본래 동물에 쓰던 말당시 글의 일부를 살펴보자. <“강원도 정선의 한 깊은 산속, 멸종 위기 식물인 한계령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군락지와 면적은 비슷하지만 서식지 환경은 다릅니다.” 멸종 위기 식물을 강원도 산 속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한 방송사 뉴스 대목이다. 여기서 ‘서식’은 틀린 말이다. 서식(棲息)은 ‘동물이 깃들여 삶’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전통적으로 ‘서식’은 그렇게 써왔다. 1999년 나온 표준국어대사전도 마찬가지였다. 그 용례로 ‘서식 환경/서식 조사/희귀 동물의 서식을 확인하다’를 들었다. 2010년까지만 해도 국립국어원은 ‘서식’을 동물이 깃들여 삶, ‘서식지’를 동물이 깃들여 사는
국민 안전을 책임진 소방서에서 구호를 '119의 약속 Safe Korea'라고 정한 것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외국말을 구호로 쓰는 정부 부처의 '무개념'은 둘째 치고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용어'라고 지적했다.굿닥 2960표, BRT 2720표, Kiss & Ride 2570표…. 우리 국민이 반드시 바꿔 써야 할 말로 꼽은 ‘안전용어’들이다. 우리말 운동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대표 이건범)는 지난 10월7~9일 사흘간 서울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투표를 벌였다. 우리가 쓰는 안전용어 가운데 16개를 제시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골라 투표하게 했다. 공공언어에서 어려운 말을 버리고 외국어 남용을 줄이자는 활동에 앞장서 온 한글문화연대가 벌이는 ‘안전용어 다듬기’ 작업의 일환이었다.안전 위협하는 안전용어들투표 결과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은 서로 비슷했다. 새로 나오는 것, 또는 기존에 쓰던 말 가운데서도 어렵고 국적불명인 용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했다. 자동제세동기(심장충격기), EMERGENCY(비상전화), 단차(높낮이), Safe Korea(안전한 대한민국), 싱크홀(땅꺼짐), 스크린도어(안전문) 등이 뒤를 이었다.바꾸고 싶은 말 1위에 오른 ‘굿닥’은 연고, 생리대, 휴지, 반창고 등 간단한 비상약을 무료로 갖추고 있는 곳을 뜻한다. 같은 이름의 ‘병원·약국 검색 앱’을 개발한 한 업체에서 서울교통공사와 함께 지하철 등 다중이 이용하는 장소에 설치했다. 그 덕에 최근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동시에 대중의 호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됐다. ‘비상약 보관함’ 정도로 쓰면 누구나 알 수 있지 않
김장은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 '침장(沈藏)'에서 온 말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김장으로 변했다. 김장의 핵심인 '김치'도 '침채(沈菜)'라는 한자말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규범언어의 관점이다.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10월23일)이 지나면서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다. 이제 곧 입동(立冬)이다. 올해는 11월7일이다. 입동은 겨울에 들어선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정확히는 겨울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 겨울 초입에 그 기운이 일어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설 립(立)’ 자를 쓴다. 한자 의식이 약해진 요즘 이를 자칫 ‘들 입(入)’ 자를 쓴 ‘入冬’인 줄 알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24절기에 들어 있는 입춘(立春), 입하(立夏), 입추(立秋)가 모두 같은 이치로 만들어진 말이다.‘알타리무’는 표준어 경쟁서 탈락‘입동이 지나면 김장도 해야 한다’란 속담이 있듯이, 이 무렵이면 집집마다 김장 담그기에 분주하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해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이다.김장은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 ‘침장(沈藏)’에서 온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김장으로 변했다. 김장의 핵심인 ‘김치’도 ‘침채(沈菜)’라는 한자말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규범언어의 관점이다. 침채는 소금에 절인 채소라는 뜻이다. 중세국어에서 ‘팀채’ 정도로 발음하던 것이 ‘딤채→짐채→짐치’를 거쳐 지금의 김치로 굳어졌다.(‘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1995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에서 소비자에게 처음으로 김치냉장고란 것을 선보이면서 이름 붙인 ‘딤채
올해 한글날은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격인 ‘조선말 큰사전’ 완간 60돌이기도 했다.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지난 9일은 571돌을 맞은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이를 반포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지금의 한글날이다.10월은 우리말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은 달이다. 우선 올해 한글날은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격인 ‘조선말 큰사전’ 완간 60돌이기도 했다.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사전의 출발이 일제 강점기이던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면서 비롯됐으니 28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은 사전 원고우리말 지식의 보고인 큰사전 편찬 과정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통일된 맞춤법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게 1933년 10월이다. 이어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속에 어렵사리 꾸려오던 편찬작업은 1942년 10월 들어서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학자·후원자 등 30여 명이 체포, 구금되고 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당시 원고는 16만여 어휘를 풀이까지 마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었다. 일제는 이 원고에서 ‘조선’ ‘임진왜란’ ‘무궁화’ 같은 우리 민족성을 드러내는 말의 설명을 놓고 꼬투리를 잡았다. 또 ‘경성’은 풀이가 긴데 &ls
차례(茶禮)와 제사(祭祀)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에서는 다르다. 차례는 명절을 맞아 돌아가신 조상을 공경하는 전통예법이다. 이에 비해 제사는 고인의 기일에 맞춰 음식을 바치는 의식으로, ‘기제사(忌祭祀)’를 가리킨다.추석이 다가오자 차례상을 준비하는 주부들의 손길도 빨라지고 있다. 올 추석은 10월4일이다. 음력으로 치면 8월 보름날이다. ‘보름’이란 (음력으로) 그달의 열닷새째 되는 날을 가리킨다. 월인천강지곡(1449)에 ‘보롬’으로 나오니 비교적 형태를 유지한 채 500년 이상을 이어온 셈이다. 명절과 관련한 말들은 조상 대대로 써온 생활어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헷갈리고 자주 틀리는 말이 꽤 있다.염불에선 ‘잿밥’, 제사에선 ‘젯밥’보름날 중에서도 달이 유난히 크고 둥글게 뜨는 날을 따로 ‘대보름’이라고 했다. 우리말에는 명절로서의 대보름이 두 개 있다. 일반적으로 ‘대보름날’이라고 하면 정월 대보름(음력 1월15일)을 가리킨다. 우리 조상들은 이와 구별해 추석을 ‘팔월대보름’이라 하여 설에 버금가는 명절로 지냈다.이날은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따위의 음식을 장만해 차례를 지낸다. 이 차례(茶禮)를 제사(祭祀)와 혼동하는 경우가 꽤 있다. 차례와 제사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에서는 다르다. 차례는 명절을 맞아 돌아가신 조상을 공경하는 전통예법이다. 이에 비해 제사는 고인의 기일에 맞춰 음식을 바치는 의식으로, 정확히는 ‘기제사(忌祭祀)’를 가리킨다. 추석에는 송편을 준비하는 데 비해 제사 때 올리는 밥은 ‘메’라고 한다는 것도 알아둘 만하다.‘잿밥&rs
중국인들은 가을이 되면 언제 오랑캐가 침입해 올지 모르니 미리 이를 경계해야 했다. 거기서 나온 말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다. 가을(秋)이 깊고(高) 변방(塞)의 말(馬)이 살찌는(肥) 시절이니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지난주는 추분(9월23일)을 앞두고 막바지 늦더위가 이어졌다.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기 때문에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져 산에는 단풍이, 들녘엔 오곡이 무르익어 갈 때다. 그래서 예로부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풍요로운 가을, 활동하기 좋은 시절을 상징하는 말이다.오랑캐 침략 경계한 ‘추고마비’가 원말이 말이 지금 같은 뜻으로 쓰이기까지에는 곡절이 있다. 천고마비의 유래는 《한서(漢書)》 ‘흉노전’이다. 중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중원(中原)’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중원은 황허 중하류 유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해 예로부터 문명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지금의 허난성을 중심으로 산둥성, 산시성(陝西省) 일대를 가리킨다. 허난성의 낙양(뤄양), 산시성의 장안(지금의 시안) 같은 천년 고도가 한가운데에 있다.하지만 중원 북방은 척박한 땅이었다. 말 타고 수렵생활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유목민족의 터전이었다. 그중에 흉노족은 몽골고원에서 활약한 기마민족인데, 사납고 거칠기가 그지없었다. 이들은 넓은 초원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말에게 풀을 먹이며 말을 살찌웠다.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 그 힘 좋고 날
'노천'의 한자는 '이슬로(露)'이다. 이를 자칫 '길로(路)'로 착각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한데에 있어서 이슬을 맞고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절묘한 작법이다.지난 9월7일은 절기상 백로(白露)였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다음에 든 백로는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하는 때다. 곧이어 추분(秋分·9월23일)이 되면 이때부터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진다. 백로는 글자 그대로 ‘희고 맑은 이슬’이라는 뜻이다. 이맘때가 되면 새벽녘 풀잎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이슬이 맺히는 온도를 ‘이슬점’이라고 한다. 대기 온도가 낮아져 수증기가 응결하기 시작할 때의 온도다. 우리가 잘 아는 ‘어는 점(빙점)’, 즉 물이 얼기 시작할 때의 온도인 섭씨 0도가 되기 전이다.노숙은 순우리말로 ‘한뎃잠’노점상(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 노숙인(길이나 공원 등지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 노천극장(한데에 임시로 무대만 설치해 만든 극장)….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이런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풀이에 힌트가 있다. 모두 ‘한데’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한데는 주위를 둘러봐도 가리거나 덮을 게 아무것도 없는 곳을 말한다. 즉 집 바깥인 것이다. 한자어로 하면 ‘노천(露天)’이다. 노천극장을 비롯해 노천카페, 노천강당, 노천탕 같은 게 있다. 모두 한데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노천’의 한자가 ‘이슬로(露)’라는 점이다. 이를 자칫 ‘길로(路)’로 착각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한데에 있어서 이슬을 맞고 하늘을 볼
얼마 전 살충제 파동으로 달걀이 품귀 조짐을 보이자 중간 유통상인들의 '사재기'가 불거지기도 했다. 사재기는 한자어 '매점매석'을 순우리말로 순화한 말이다.지난 호에선 ‘입도선매(立稻先賣)’에 담긴, 지난 시절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살펴봤다. 입도선매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말이 ‘매점매석(買占賣惜)’이다. 얼마 전 살충제 파동으로 달걀이 품귀 조짐을 보이자 중간 유통상인들의 ‘사재기’가 불거지기도 했다. 추석을 앞두고는 각종 제수용품의 사재기가 단속 대상이 되곤 한다. 사재기는 한자어 매점매석을 순우리말로 순화한 말이다.어려운 한자어에서 쉬운 우리말로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이 지은 풍자소설 ‘허생전’에는 이 매점매석이 중요한 대목으로 나온다. 주인공 허생원은 남산골 다 쓰러져가는 초옥에서 글만 읽던 선비다. 부인의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그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돈벌이’에 나선다. 도성 안 갑부에게서 1만 냥을 빌린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국의 ‘길목’ 분석이었다. 경기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안성 땅에 주목한 허생원은 그곳에 터를 잡은 뒤 삼남(충청·전라·경상)에서 올라오는 과일류를 싹쓸이해 쟁여놓았다. 얼마 뒤 나라 안에 과일이 품귀를 빚자 그제서야 과일을 풀어 열 배 가격으로 되팔았다. 시쳇말로 ‘떼돈’을 번 것인데 그 수법이 바로 매점매석이었다.허생원은 “겨우 만 냥으로 나라 경제를 흔들었으니 이 나라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겠구나!” 하고 탄식했다. 박지원은 허생원을 통해 매점매석의 폐해와 함께 당시 보잘것없는 나라 경제를 비판하고 양
‘입도선매(立稻先賣)’는 지난 시절의 용어로, 궁핍한 농촌생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서 있는 벼를 먼저 파는 일’을 뜻한다. 예전에 돈에 쪼들린 소작농들이 벼가 여물기도 전에 헐값에 미리 판 데서 생겼다.우리 사회의 청년실업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포세대’니 ‘고용절벽’ 같은 말은 이미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국립국어원 운영)에 올라, 여차하면 단어로 자리 잡을 태세다. 하지만 취업난 속에서도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분야 전공자들의 몸값은 날로 치솟고 있다고 한다.‘궁핍한 농촌’ 상징하던 말“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한국 이공계 인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수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경력이 없어도 일단 입도선매하고 보는 식이다.”기업에서 미래산업을 이끌 고급 두뇌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때 쓰인 ‘입도선매’는 좀 묘한 단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말을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으로 설명한다. 이 풀이는 입도선매하는 주체가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한자로는 ‘팔 매(賣)’자가 들어간 ‘立稻先賣’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한 대목이 그 용법을 잘 보여준다. “잘 여물었으면 제값을 받고 팔아야지 그렇게 ‘입도선매’ 모양으로 넘길 것이면, 무얼 바라고 공을 들입니까?”(표준국어대사전 용례)입도선매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전까지 농촌경제에 극심한 폐해를 끼쳤다. 당시
초토화는 본래 화재를 당하거나 폭격 따위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현장을 나타낼 때 적합한 말이다. 수재(水災)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 대신 문맥에 따라 ‘쑥대밭’이나 ‘아수라장’ 따위를 쓰는 게 좋다.한여름을 달구던 불볕더위도 한풀 꺾여 이제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느낌이다. 처서(處暑·8월23일)를 앞두고 있으니 절기상으로는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다. 올여름은 늦게까지 이어진 장맛비로 지역에 따라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물난리를 겪기도 했다. 그럴 때 무심코 잘못 쓰기 쉬운 말 중에 ‘초토화’를 놓칠 수 없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충북지역 초토화.” “호우 피해로 초토화된 농경지.” “최악의 폭우로 기록된 충북 청주지역은 하루에만 3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초토화됐다.”‘초토’는 불에 타 그을린 땅태풍으로 폭우가 휩쓸고 지나가거나 집중호우로 홍수가 져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흔히 ‘수마(水魔)가 할퀴고 지나가다’란 말을 쓴다. 그리고 거기에 습관적으로 따라붙곤 하는 말이 ‘초토화(焦土化)’다. 하지만 이 말은 물난리로 피폐해진 곳에 쓰기엔 적절치 않은 점이 있다. ‘초토(焦土)’란 글자 그대로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자 焦가 ‘(불에)그을리다, 불타다’를 뜻한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초미(焦眉)의 관심사’란 게 있는데, ‘아주 다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눈썹(眉)에 불이 붙었으니(焦)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랍고 애가 타는 상황일지 짐작이 간다.마찬가지로 초토화
무더위는 ‘물’과 ‘더위’가 어울린 말이다. 물기를 머금은 더위, 즉 습도와 온도가 높아 끈끈하게 더운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오랫동안 비도 없이 불볕더위만 계속되면 ‘강더위’다. 이때의 ‘강-’은 한자말 강(强)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다.초복이 지나면서 한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리고 불볕더위로 인한 피해도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복더위 찌는 날에 맑은 계곡 찾아가/ 옷 벗어 나무에 걸고 풍입송 노래하며/ 옥 같은 물에 이 한 몸 먼지 씻어냄이 어떠리.” ‘해동가요’를 펴낸 조선 영조 때 가객 김수장의 시조다. 여기에는 선조들이 즐기던 지혜로운 피서법이 담겨 있다. 이른바 ‘탁족(濯足)’이다. 맑은 계곡을 찾아 옥 같은 물에 발을 담그며 무더위를 잊는 탁족은 우리 민족에게 고래부터 내려온 ‘자연친화적’ 여름나기였다.무더위는 ‘물+더위’가 어울린 말‘탁족만리류(濯足萬里流)’란 중국 서진(西晉)의 시인 좌사가 쓴 시에 나오는 말이다. 만 리를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단순히 피서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품에서 세속에 찌든 마음의 때까지 씻는다는 뜻이 담겼다. 김수장의 시조는 이 ‘탁족만리류’를 멋들어지게 읊어낸 작품이다. 시문에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부채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고상한 선비들은 ‘탁족만리류’란 시구가 적힌 합죽선으로 시원한 계곡 바람을 일으켜 무더위를 쫓으면서 풍진세상을 함께 경계했다. 피서를 즐기면서 교훈도 담은 셈이다.푹푹 찌는 더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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