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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얌치머리 같으니….” “이 얌통머리야!” “이런 얌체를 봤나.” 이런 표현도 많이 쓰지만, 이 가운데 정상적인 표현은 ‘얌체’뿐이다. 나머지 둘은 불완전한 표현이다. 이들은 모두 한자어 ‘염치(廉恥)’에서 온 말이다.지난 호에서 ‘싸가지’가 쓰이는 용법에 관해 살펴봤다. 요약하면, “그 사람 싸가지야”라는 말은 어법적으로 허용된, 바른 어법이 아니다. 불완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싸가지 없다”라고 해야 하는데 뒤의 부정어를 생략한 채 ‘싸가지’를 의인화해 쓰는, 의미 변화 중에 있는 말에 불과하다. 이 ‘싸가지 없음’이 아주 심해지면 ‘밥맛없음’이 된다. 이때의 ‘밥맛’도 ‘싸가지’와 비슷한 쓰임새를 보인다.‘얌체’는 ‘얌통머리 없는 사람’‘밥맛’은 글자 그대로 ‘밥에서 나는 맛’ 또는 ‘음식이 입에 당기어 먹고 싶은 상태’를 나타낸다. ‘밥맛(이) 좋다’거나 ‘밥맛(이) 있다/없다’라고 한다. 그 가운데 ‘밥맛 없다’를 붙여서 ‘밥맛없다’라고 한 단어로 쓰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아니꼽고 언짢아 상대하기가 싫다’란 뜻이 된다. ‘밥맛’의 본래 의미를 잃고 새로운 말로 바뀌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입말에서 “걔 정말 밥맛이야”라는 말도 쓴다. 이때의 ‘밥맛이다’는 ‘밥맛없다’와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인데, 이런 말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원래 “밥맛없어”라고 할 것을 뒤의 부정어를 버린 채 변형된 형태로 쓰는 것이지만 아직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칠칠맞다’는 ‘칠칠맞지 못하다’와 의미가 반대이므로 반드시 구별해서 써야 한다. ‘칠칠맞지 못하다/칠칠치 못하다’를 쓸 자리에 이를 쓰면 의미상 틀린 말이다.지난 몇 회에 걸쳐 부정어와 어울려 쓰이는 말과 함께 우리말의 의미변화 사례들에 관해 살펴봤다. 그중에서도 부정어가 생략되는 현상은 특이한 용법이라 할 만하다. ‘주책없다/주책이다’ ‘엉터리없다/엉터리다’ ‘안절부절못하다/안절부절이다’ ‘우연하다/우연찮다’ 같은 게 그런 범주에 드는 말들이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다음 같은 표현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주로 ‘칠칠맞지 못하다’로 쓰여“에이, 칠칠맞은 사람 같으니….” “너 왜 그리 칠칠맞냐?” “그는 행실이 좀 칠칠맞아.” 이게 무슨 말일까? 문맥으로 봐서는 누군가를 탓하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 상대방이 만약 ‘칠칠맞다’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매우 흡족해할 만한 말이다.‘칠칠맞다’를 이해하려면 우선 ‘칠칠하다’를 알아야 한다. ‘칠칠하다’는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단정하다’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란 뜻이다. 애초 나무나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에 이 ‘칠칠하다’의 본래 뜻이 남아 있다. 물론 지금도 그리 쓰이는 말이다.이 말이 의미가 확대돼 ‘단정하고 야무지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는 주로 ‘못하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함께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lsq
관용구로 “감투(를) 썼다”고 하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감투의 본래 의미를 알고 나면 서술어로 ‘쓰다’가 온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한자어인 줄 알고 있는 이도 많은데, 우리 고유어다.지난 호에서 ‘주책’과 어울린 말의 변화 과정을 살펴봤다. “주책은 본래 주착(主着)에서 온 말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주착은 버리고 주책으로 통일해 쓴다. 그것이 만드는 말 가운데, 줏대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해서 실없는 것을 과거엔 ‘주책없다’라고만 썼는데 지금은 ‘주책이다’도 함께 허용했다. ‘주책맞다, 주책스럽다’도 표준어가 됐으며, 다만 ‘주책 떨다, 주책 부리다’는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써야 한다”는 게 요지다.원래 ‘모자’를 가리키던 말주착이 주책으로 바뀐 것처럼 우리말에는 한자말이 형태를 바꿔 표준어가 된 게 꽤 많다. 가령 초생(初生)달이 변한 ‘초승달’, 음(陰)달이 변한 ‘응달’도 모두 같은 경우로 뒤의 바뀐 말이 바른 말이고 앞의 것은 비표준어다. 설마(雪馬)가 썰매로, 이어(鯉魚)가 잉어로, 침채(沈菜)가 김치로, 고초(苦椒)가 고추로, 염치(廉恥)가 얌치로, 그게 또 한 번 바뀌어 얌체로, 지룡(地龍)에 접미사 ‘-이’가 붙어 지렁이로 바뀐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그런데 주책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는 데는 이설이 있다. 언론인이자 한글학자이신 고 정재도 선생은 ‘주책’이 본디부터 쓰던 고유어인데 억지로 한자를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접떨다(욕심을 부리며 추하고 염치없게 행동하다), 주체스럽다(짐스럽고 귀찮다) 따위가 토
‘주책’은 본래 한자어 ‘주착(主着)’이 변한 말이다. 주착은 ‘줏대가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해 흔들림이 없다’란 뜻이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의미와 형태가 모두 변했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주착’을 버리고 ‘주책’으로만 쓰게 했다.흔히 쓰는 말인 ‘주책’은 우리말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의미와 형태가 변하고 규범적 용법도 달라지는 등 중요한 문법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음 문장에서 괄호 안의 표현 중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그 양반도 참 (주책없다/주책이다/주책맞다/주책스럽다/주책을 떤다/주책을 부린다).’부정어와 어울려 쓰던 말 ‘주책’답부터 말하면 지금은 모두 맞는 표현이다. ‘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는 틀린 표현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이 지난 4월 표준국어대사전 수정 정보를 공개했다. 모두 34개 항목에 대해 표제어를 추가하거나 풀이를 보완했는데, 그 중에는 ‘주책’과 관련해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우선 그동안 사전에서 다루지 않던 ‘주책맞다’와 ‘주책스럽다’를 단어로 인정해 표제어로 올렸다. ‘-맞다’와 ‘-스럽다’는 접미사로서, 어떤 말 뒤에 붙어 ‘그런 성향이나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해준다. ‘궁상맞다/능글맞다/방정맞다/쌀쌀맞다/익살맞다/청승맞다/앙증맞다’ ‘복스럽다/걱정스럽다/자랑스럽다/거북스럽다/조잡스럽다’ 등 수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우리말을 풍성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이다. 접미사가
우리말에서 ‘가지다’가 쓰이는 용례는 너무나 다양하다. ‘가지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열 가지 이상 의미용법이 나온다. 그만큼 쓰임새가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뜻하는 바를 드러내는 적확한 말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휴양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우리 언론들은 이를 ‘세기의 담판’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두 정상은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과 무역 불균형 등 현안에 대한 집중 논의를 가졌다.’ ‘두 정상은 전날 만찬을 가진 데 이어 확대 정상회담과 업무 오찬을 가졌다.’이들 문장에 공통적으로 쓰인 서술어 ‘가지다’는 대표적인 영어말투다. 국어학자들 사이에 이런 지적이 나온 지 꽤 오래됐지만 여전히 기사문장에서는 이 말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만큼 한번 새겨진 글쓰기 습관은 바꾸기 힘들다는 얘기도 된다.‘하다, 열다, 치르다’ 등 서술어 많아어떤 주체가 ‘(회의/행사 따위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영어의 ‘have’ 동사를 직역한 것이다. 이 경우 우리말법은 ‘열었다’ 쯤인데, 영어에 워낙 익숙해져 있다 보니 ‘가지다’라는 술어를 무심코 많이 쓴다는 게 국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물론 영어식 표현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다. 우리말 체계에 없는 말이라든지 또는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다.하지만 이미 우리말에 있는 것이라면 굳이 가져다 쓸 이유가 없다. 고릿적부터 써오던 말이 가장 자연스럽고 친숙한, 그럼으로써 소통에 더
‘국립국어원은 이번 신조어 책자 발간과 관련하여 일련의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 2007년 10월12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평소와 다른 공지문이 하나 올라왔다. 발단은 그 유명한 ‘놈현스럽다’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네티즌은 우리말 접미사 ‘-스럽다’에 주목했다. 시작은 ‘검사스럽다’였다. 출...
“공병우를 찾아라.” 1951년 부산은 전쟁 통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해군사령부에 안과의사 공병우를 찾는 긴급 수배령이 떨어졌다. 마침 동래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공병우 선생이 찾아가자 손원일 해군 제독은 대뜸 타자기 얘기를 꺼냈다. 선생은 이태 전 독자적으로 한글 타자기를 개발해 놓았다. 최초의 고성능 한글 타자기였다. 타자기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주요 전략무기였다. 작전명령이...
원로 언론인 박용규 선생은 한자와 우리말에 두루 해박했다. 은퇴한 뒤에도 집필 등을 통해 후배 기자들에게 말과 글의 소중함을 깨우쳤다. 그가 별세하기 3년 전인 2002년 초 한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봐 자네, 어제 취임한 검찰총장이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그 곁불이 틀린 말 아닌가?” “누군가의 옆에 빌붙어 불을 얻어 쬐는 짓은 안 하겠다는 뜻이니 곁불이 맞...
‘최순실 정국’으로 세상은 어수선해도 어김없이 연말은 다가온다. 매년 이맘때면 관록 있는 가수들의 디너쇼가 열린다. 올해로 가수 생활 57년째인 이미자 씨 역시 송년 무대를 준비하는 대표적 가수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엘레지의 여왕’이 그것이다. 엘레지(elegy)는 슬픔을 노래한 악곡을 말한다. 우리 정서에도 잘 맞아 황혼의 엘레지, 해운대 엘레지 등 수많은 엘레지가 있다...
“조류독감이라 하지 말고 조류인플루엔자라고 써 주세요.” 국내 대표적 닭고기 외식업체인 제너시스BBQ의 윤홍근 회장은 2005년 11월 ‘조류독감’과의 싸움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것은 용어와의 싸움이었다. 관련 산업 협회장을 맡아 언론사 등을 찾아 업계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류독감이라는 말이 사람이 걸리는 독감을 연상케 해 닭고기, 오리고기 소비 위축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쓰는...
학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일지사를 설립한 고(故) 김성재 선생은 한국 출판계의 거목이었다. 그는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51년 학원사의 전신인 대양출판사에 입사하면서 평생의 업이 된 출판에 발을 디뎠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에서 중학생용 학습참고서 제목을 사내 공모했어요. 대부분 ‘최신’ ‘모범’ ‘표준’ 등이었는데 저는 ‘간추린’이란 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8월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일이다. 반 총장은 54회 생일을 맞은 오바마에게 ‘上善若水(상선약수)’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생일 선물을 받고 싱글벙글 웃는 오바마 모습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돼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액자 한 귀퉁이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글자가 더 있었다. ‘奧巴馬(오파마) 總統(총통)’, 오바마 대통령을 가리키는 중국 표기다...
#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4월 초 영국 런던에서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열렸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奧巴馬: 오바마의 중국식 표기)가 따로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을 중국 신문들은 ‘후아오회(胡奧會)’라고 소개했다. 성(姓)인 오바마에서 첫소리 ‘아오’를 가져다 말을 만들었다. # 2000년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는 조지 W 부...
#2007년 12월.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는 곧바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꾸렸다. 인수위는 언론사에서 쓰는 ‘당선자’란 표기에 주목했다. ‘놈 자(者)’보다는 ‘사람 인(人)’을 쓰는 게 격이 좀 높아 보였다.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등에서 ‘당선인’이란 말을 쓴다는 점도 명분으로 제시됐다. “앞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1월18일 정부의 규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다. 그 첫 항목 ‘규제의 일반 원리’에 공공언어 사용 기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규제를) 알기 쉽고 일관되고 평이한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미국에서 ‘쉬운 언어 쓰기 운동’이 나타난 것은 1960년대다.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시작했다. 어렵게 작성한 공공문서로 ...
1935년 1월 초 충남 아산 온양온천에서 표준어 사정을 위한 첫 회의가 열렸다. 우리말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는 자리라 분위기는 엄숙했다. 회의 도중에 ‘강아지’와 ‘개새끼’가 맞붙었다. ‘개의 새끼’를 가리키는 두 말이 표준어 자리를 놓고 세 싸움을 벌였다. 뜻이 같으면 어느 하나를 표준어로 삼아야 했다. 사정위원 간에 갑론을박이 팽팽하자 다수결로 결정키로 했다. “...
17세 청년 고은에게 6·25전쟁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고향 군산 마을에서 좌우익의 보복학살을 직접 목격하면서 참혹함에 치를 떨었다. 전란이 일어나던 해 10월 어느 날 그는 산 너머 마을에 사는 시인 전옥배를 떠올렸다. 황폐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찾아간 그를 전옥배 시인은 말없이 바라만 봤다. 냇둑을 따라 함께 10리길을 내려갔다. 만경강 하구에 다다를 즈음 사방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맞은편 강 언저리에는 불빛이 어...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개혁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 30여년간 이어온 군사정권을 종식했다는 뜻에서 ‘문민정부’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게 ‘역사 바로 세우기’다. 하지만 이내 깊은 고민에 빠졌다. 5·18광주사태를 재조명하면서 그 뿌리인 12·12사태에 맞닥뜨렸다. 일명 ‘12·12’는 1979년 12월12일 ...
“요즘 ‘(병)따개’라고 쓰는 말을 예전엔 ‘오프너’나 일본말 ‘센누키’라고 했습니다. 애초 정부에서 순화 작업을 하면서 제시한 말은 ‘마개뽑이’였는데, 그리 호응받지 못했어요. 대신 누군가가 쓰기 시작한 따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이지요.” 2004년 남기심 당시 국립국어원장은 한글날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 우리말 순화의 어려움을 털...
“‘님’은 계장님이나 면장님에게만 붙는 말이 아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에게도 붙고 임금님과 하느님에도 붙는, 가장 높은 존경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이 나라 대통령‘님’에도 그 딱딱한 ‘각하’ 대신에 쓰였으면 좋겠다.” 1978년 한창기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는 뿌리깊은나무에서 ‘각하’란 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슬 퍼런 유신 치하 시절이었...
국감(국정감사)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년 이맘때면 국회는 정부 부처 전반에 걸쳐 감사를 벌인다. 엄숙한 현장이지만 굵직한 이슈만 다루는 게 아니다. 우리말도 ‘단골메뉴’ 중 하나로 올라 공방이 벌어진다. 2014년엔 ‘사랑’ 뜻풀이를 놓고 국립국어원장이 곤욕을 치렀다. “우리말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데, 국어원이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정의당 J의원이 비판의 목...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소설 중 하나다. 이효석은 이 작품을 1936년 10월 월간 <조광>을 통해 발표했다. 당시 제목은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 그가 장돌뱅이 허 생원을 통해 그린, 산허리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도...
“사위님은 곡을 자주 써서 만인이 부르는데 나도 그런 노래를 하나 남겼으면 해요.” “좋습니다. 시가 있습니까?” “음….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시가 마음에 든 28세 청년 음악가 금수현은 즉석에서 가락을 적어갔다. 15분 만에 곡이 완성됐다.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가곡 ‘그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주옥같은 노랫말...
2011년 8월22일은 한여름 더위의 끝자락이었다. 이날 국어심의회는 표준어 39개를 새로 확정했다. 그동안 음지에 있던 ‘짜장면’과 ‘먹거리’ ‘개발새발’ ‘손주’ 같은 말이 비로소 양지로 나왔다. ‘지리하게’ 이어지던 무더위뿐만 아니라 국민의 말글살이에서도 갑갑증을 한방에 날려버린 결정이었다.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88년은 우리 말글사에서 주목해야 할 해다. 이 해에 조선어학회에서 ‘맞춤법통일안’(1933년)과 ‘조선어 표준말모음’(1936년)을 내놓은 이후 우리말 규범에 최대 폭의 개정이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말 ‘지리하다’가 사라졌다. 표준어로 ‘지루하다’만 쓰게 하고 ‘지리하다’는 버렸다. 공식적으론 ‘지리하다’가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언어에도 인수합병(M&A)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있던 말이 발음이 바뀌어 세력이 훨씬 커지면 그것 하나만을 표준어로 본다. ‘지루하다’가 ‘지리하다’를 집어삼킨 배경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이 흡수통합은 다소 미진한 구석을 남겼다. 두 말의 쓰임새가 좀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늦가을 비가 밤새 지리하게 내렸다”, “수년째 ‘박스피 장세’가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다” 같은 말은 지금도 많이 쓴다. 이때 ‘지리하다’는 ‘질질 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지겹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의미 중심은 ‘오래 끈다’는 데 있다. 이에 비해 ‘지루하다’는 ‘따분하고 싫증나다’는 데 방점이 찍힌 말이다.우리나라 사전의 개척자로 불리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5’가 얼마 전 예고편을 공개했다. 미국에서 내년 초 방영할 예정이라 한다. 2007년 국내에서도 방송돼 ‘미드 열풍’을 이끈 이 드라마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특히 천재 건축가로 나온 주인공 스코필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네티즌은 그에게 ‘석호필’이란 한국식 이름을 붙여줬다. 발음의 유사성을 살린 감각적인 작명이었다.우리 말글 역사에는 그보다 훨씬 전에 또 다른 석호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6년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들어온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그다. 우리말에도 능통한 그가 스스로 지어 부른 이름이 석호필이다. 1970년 타계한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외래어표기법이 따로 없던 시절 우리는 외국의 인명이나 지명, 국명 따위를 한자음을 빌려 적었다. 피택고, 나파륜, 색사비아…. 알 듯 말 듯한 이들은 피타고라스, 나폴레옹, 셰익스피어를 옮긴 말이다. 조선 인조 때는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이가 태풍으로 표류하다 제주도에 상륙했다. 17세기 초다. 조선 최초의 귀화인으로 기록된 그의 한국 이름은 ‘박연’이다. 비교적 최근에는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미국 대사가 ‘박보우(朴寶友)’란 이름을 얻었다. 2006년 3월 한미동맹친선회에서 지어준 것인데, 본명을 살리면서 ‘소중한 벗’이란 뜻까지 담은 절묘한 이름짓기다.음역 방식의 외래어 표기는 우리말에서 오랫동안 위력을 떨쳤다. 아관파천의 ‘아관’은 러시아공관을 뜻한다. 아라사는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줄여서 아국(俄國)이라고도 했다. 요즘 아라사는 사라졌지만 아관파천은 화석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독립신문, 띄어쓰기를 말하다“우리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난거슨 샹하귀쳔이 다보게 홈이라. 또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떼여 쓴즉 아모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잇난 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함이라.”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사설에 나오는 대목 한 부분이다. 1896년 4월 7일 첫 호를 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글이다. 독립신문은 언론사적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국어사적으로도 두 가지 점에서 큰 획을 그었다. 우리나라 신문 최초로 순 한글을 썼으며, 무엇보다 띄어쓰기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띄어쓰기를 하는 것은 ‘누구나 보기 쉽고 말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읽기 쉽고 알기 쉽게’라는 글쓰기 원리를 생각할 때 지금 다시 봐도 선구자적 혜안이라 할 만하다.독립신문 창간사설은 2개 면에 걸쳐 실었는데, 그중 절반을 할애해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 방침 등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한국 언론의 태동기인 당시에 독립신문이 이 같은 혁신적인 기사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재필 등 창간 인사들이 우리말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화기 우리말 문법의 초석을 놓은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언문조필’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띄어쓰기는 우리 어문규범 가운데서도 비중이 매우 높은 분야다. ‘한글 맞춤법’은 모두 57개 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10개 항(41~50항)이 띄어쓰기에 관한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책 한 권 분량이 될 정도로 복잡하고 방대하다. 북한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검은돈'과 '눈먼 돈'의 차이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이달 초 폭로한 ‘파나마 페이퍼스’란 자료가 큰 파문으로 번지고 있다. 각국 유력인들의 조세 회피 의혹이 담겨 있어 전·현직 지도자들과 정치인, 유명인사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을 달구는 관련 보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어 세 개가 있다. ‘돈세탁’ ‘비자금’ ‘검은돈’이 그것이다.이들의 공통점은 정당하지 못한 돈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어법적으로도 같은 게 있다. 모두 합성어라는 점이다. 이 가운데 ‘검은돈’은 띄어쓰기와 관련해 주의해야 할 말이다. ‘검은 돈’ 식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검은돈’은 ‘뇌물의 성격을 띠거나 그 밖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주고받는 돈’을 이르는 단어다. 애초에는 ‘검은 돈’으로 띄어 쓰던 것인데, 오랫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특정한 의미로 쓰여 하나의 단어로 재탄생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1980년대 중반부터 간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글말에서 쓴 지 벌써 30여년이 됐음을 알 수 있다.‘검은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말이다. 이는 ‘속셈이 음흉한 손길, 행동, 힘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자어로는 ‘마수(魔手)’다. ‘검은손’이나 ‘검은돈’은 ‘검다(黑)’란 의미를 벗어나 단어가 된 말이다. 따라서 띄어 써서는 안 되며 항상 붙여 써야 한다. 수사적으로는 전의(轉義)에 해당하며 구체적으로는 환유 또는 은유를 거친 단어다.이처럼 둘 이상의 낱말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잊지 말자 '구K-1'2009년 1월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미디어법 등 쟁점 법안을 놓고 야당이 국회를 점거한 채 여야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날 새벽 국회사무처는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과 당직자 등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해 경위 30여명을 전격 투입했다. 농성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야당 측은 다양한 ‘폭력 기술’을 선보이며 저항했다. 육탄돌격과 멱살잡이는 초보적인 기본기였다. 목조르기를 비롯해 안면 강타, 헤드록 등 현란한 격투기 기술이 등장했다. 그중 압권은 분을 못 이긴 한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을 찾아가 탁자 위로 날아오르며 이단옆차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의 전말이다.국회 폭력은 이미 그 전부터 쇠사슬과 전기톱이 동원됐는가 하면 해머가 등장하고 나중엔 최루탄이 터지는 등 ‘조폭 수준’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즈음을 전후해 우리 네티즌은 폭력 국회의원들을 발음이 비슷한 ‘구K-1’이란 말로 빗대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퍼 날랐다. 이 말은 ‘국케이원, 구케이원, 국K-1, 국K1’ 등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파됐는데 모두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이종격투기 ‘K-1’에서 따온 것이다. ‘나라 국(國)’에 K-1을 합성해 싸움질만 하는 국회의원을 비꼰 조어다.‘국K-1’은 수사학적으로는 일종의 동음이의어(칼랑부르) 수법에 의한 말장난이다. 언론에서 만들어 쓴 ‘弗難집’(불난집: 외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빗댄 말), ‘雪雪기다’(설설기다: 눈이 많이 와 교통대란이 일어난 상황), ‘연봉錢爭’, ‘외국錢力&rsquo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우리 사회를 떠도는 정체불명의 말들 (2)지난 2월 청년 실업률이 12.5%를 기록했다고 통계청이 발표했다. 1999년 실업자 기준을 바꾼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 사회에 ‘최악의 청년 실업난’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청년 실업난 심각하다’ ‘청년실업난 해소, 전문대학에 답 있다’ ‘실업난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그런데 여기에는 옥에 티가 하나 있다. ‘실업난’이 그것이다.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비논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난(難)’은 명사 아래 붙어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식량난, 전력난, 구인난 등처럼 무언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나타낸다. ‘-난’ 앞에는 구체적인 어려움의 대상이 온다. 식량이 부족하면 식량난, 전력이 부족하면 전력난이다. 사람을 구하는 게 어려우면 ‘구인난’이다. ‘인력난’이란 말도 쓰는데 이는 좀 더 넓은 의미다. 반대로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면 ‘구직난’이다. 이를 달리 취직이 어렵다는 의미로 ‘취직난’ 또는 ‘취업난’이라 해도 된다.이들은 모두 결합이 가능한 표현이다. 그런데 ‘실업+난’은 좀 이상하다. 실업이란 ‘일자리를 잃거나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그 자체로는 ‘-난’과 결합하기 어렵다. 의미적으로 공기(共起)하는 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구직난’ 또는 ‘취업난’이라 해야 할 것을 잘못 쓴 것이다. 굳이 ‘실업’을 살리고 싶다면 ‘실업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우리 사회를 떠도는 정체불명의 말들 (1)“한우고기가 수입산 소고기보다 맛을 좋게 하는 물질 함량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은 소고기 맛을 결정하는 물질 함량을 분석한 결과 한우고기가 수입산보다 단맛과 감칠맛을 좌우하는 성분이 많고 신맛과 쓴맛을 내는 성분은 적었다고 밝혔다.”최근 농촌진흥청에서 한우고기의 품질 우수성을 입증한 보도자료를 하나 냈다. 국내 소고기 시장 개방으로 늘어난 수입 제품과 국내산 한우고기의 맛과 품질 차이를 처음 객관적으로 밝힌 것이기에 여러 언론에서 이 자료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하지만 우리말 관점에서는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부실한 자료였다. ‘수입산’이란 정체불명의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우리 농산물이 수입산보다 좋은 이유’ ‘값비싼 수입산 새우’ ‘국산 대 수입산 맥주 전쟁’…. 우리말에 ‘수입산’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여기저기 가져다 쓰는 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이 세계 각국과 무역협정 협상을 벌이면서 신문에 가장 빈번히 오르내린 용어는 아마도 FTA(자유무역협정)일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 눈에 익숙해진 표현이 ‘수입산’이다.하지만 ‘수입산’이란 말은 들여다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미적으로 매우 비논리적인 단어다. ‘-산(産)’은 어디에서 산출되거나 생산된 물건임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한국산, 미국산, 일본산처럼 쓴다. ‘수입산’은 국산 또는 국내산에 대응하는 말로 쓰는 것 같은데, 수입이란 ‘외국의 물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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