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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과 과음으로부터 간장을 보호한다'는 컨셉트로 약명을 짓기 위해 고심하던 강신호의 뇌리에 반짝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학 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 홀에서 보았던 박카스 신상(神像)이었다. 더구나 박카스는 추수와 술의 신이 아니었던가."국내 제약업 사상 최장수 · 최대 판매액이란 신화를 쌓아올린 동아제약 드링크제 '박카스'. <동아제약 70년사>는 1960년 상표명 '박카스'의 탄생 순간(제조허가)을 이렇게 전한다.하지만 그 박카스도 처음부터 날개 돋친 듯 팔린 것은 아니다. '박카스정'이란 이름으로 1961년 시중에 처음 선보였을 땐 알약 형태였다. 겉에는 당분이 든 얇은 막을 입혔다. 당의정(糖衣錠)이란 것이었다. 알약 중에서도 불쾌한 맛이나 냄새를 피하고 약물의 변질을 막기 위해 표면에 당분을 입힌 정제를 당의정이라 부른다. 그런데 불행히도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의 당의정 만드는 기술은 변변치 않았다. '박카스 당의정'이 시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당의정이 녹아내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반품사태로 어려움에 직면한 동아제약은 제품을 앰플 형태로 바꿔 '박카스 내복액'을 내놓았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963년 마시기 편한 드링크 타입 제품 '박카스D'가 나오면서 드디어 신화창조의 서막이 올랐다.'박카스D'는 1964년 단숨에 드링크제 부문을 평정해 판매액 1위로 올라섰다. 동아제약은 그 여세를 몰아 1967년 제약업계 1위로 발돋움했다. 이후 동아제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약업계 정상을 놓치지 않았다.<동아제약 70년사>에 따르면 동아제약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박카스'를 작명한 사람은 창업주 강중희씨의 장남인 강신호 현 회장이다.
첫째 입음법이란 것은 여느 남움직씨에 입음 도움줄기 '히' 또는 '기'를 더하여 입음(被動)을 만드는 법을 이름이니라. … 둘째 입음법은 '하다 따위 움직씨'의 남움직씨에 쓰이는 법이니: 곧 '하다 따위 움직씨'를 입음으로 만듦에는,'하다'에 대하여 입음의 뜻을 나타내는 제힘움직씨 '되다''받다''당하다'의 줄기 '되''받''당하'를 그 '하다'의 '하' 대신에 갈아 넣어서 만드는 법을 이름이니라. … 셋째 입음법은,여느 움직씨나 '하다 따위 움직씨'나를 물론하고,또 제움직씨와 남움직씨를 물론하고 모든 움직씨의 껌목법 어찌꼴 'OO아'(또는 OO어,OO여)에 도움움직씨(補助動詞) '지다'를 더하여 입음을 만드는,두루 통하는 법이니라.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우리말 문법의 토대를 닦은 대학자이다. 그가 <우리말본>(1937년)에서 체계화한 주요 이론 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올 정도로 국어학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 그 중 하나가 우리말 입음법(피동법)이다. 그는 한자어로 된 문법 용어를 모두 고유어로 바꿔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령 위에 나오는 남움직씨는 타동사,도움줄기는 보조어간,움직씨는 동사,제움직씨는 자동사,껌목법(지금의 '감목법')은 자격법,어찌꼴은 부사형을 바꾼 말이다.1955년 개정판(정음사 간)에서 인용한 그의 입음법 정리는 요즘의 눈으로 읽기엔 어려움이 있겠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우리말 피동 표현을 만드는 방법엔 세 가지가 있는데,첫째 타동사에 '히/기' 등을 붙이는 방법,'~하다'형 동사에서 '하다' 자리에 '되다/받다/당하다'를 넣는 방법,타동사 어간에 '-어(아)지다'를 붙이는 방법 등이라는 것이다.이정택 서울여대 교수는 한 글에서 최현배 선생의
"나는 쓸개 없는 개그맨입니다." 지난 9월 인천시 송도파크호텔에서 열린 한 자선모임에 참석한 개그맨 이아무개 씨가 인사말을 했다. 며칠 전 급성 담낭염으로 수술받은 자신을 우리말 속담에 빗대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담낭염은 담석이나 종양 등이 원인이 돼 담낭(膽囊)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인데,심해지면 맹장처럼 떼어내기도 한다. 한자어 '담낭'에 해당하는 우리 고유어가 '쓸개주머니'이다. 쓸개는 간에서 분비되는 쓸개즙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곳으로,음식물이 들어오면 쓸개즙을 내어 소화를 돕는 일을 한다.국어학자인 심재기 교수는 '쓸개'를 '쓰+ㄹ+개'의 구성으로 설명한다. '쓰다(苦)'의 어간에 관형형 어미 '-ㄹ'과 명사형 접미사 '-개'가 붙은 것으로 본다. '쓸개'라는 말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담즙이 매우 쓰다는 데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쓸개'는 한의학에선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해소하며 자양강장에 탁월한 효능을 갖는 약재로 쓰인다. 대표적인 게 '웅담(熊膽)'인데,글자 그대로 곰의 쓸개다. 쓰디쓴 이 곰의 쓸개즙을 상품화해 덕을 톡톡히 본 곳이 대웅제약이다. 이 회사의 전신인 대한비타민에서 1961년 시판하기 시작한 간장약 '우루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무명이던 이 회사를 한때 국내 3대 제약사의 하나로 키운 것이다. 대한비타민은 1978년 아예 사명을 곰 '웅'자를 써서 대웅제약으로 바꾼 데 이어 지속적인 곰 마케팅을 펼쳐 '웅담의 회사'란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심어줬다.하지만 일상생활에선 쓸개가 이런 생물학적 의미보다 '줏대(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나 '정신'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지난 36년간 우리 교육을 지배해 온 가치는 '평준화'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엔 은연중 평준화는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이 자리잡았습니다. 그 환상을 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어요. "김정래 부산교대 교수(교육철학)는 교육문제를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틀에서 천착해 온 대표적인 논객 중 한 사람이다. 좌파적 시각이 뿌리 깊은 우리 교육계에서 때로는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경쟁'을 주문해 왔다. 국가 주도의 획일적 교육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해 온 그가 최근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원장 김영용) 의뢰로 '고혹 평준화 해부'를 펴냈다. '고혹(蠱惑)'은 주역에서 빌려 온 용어로 선대의 그릇된 점을 고쳐 나간다는 의미이다. 평준화가 도입된 1973년 당시 교육계 선배들이 잘못 마련해 놓은 정책의 폐단을 시정하고 해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 사회 거대담론 중 하나인 평준화 정책이 도입된 배경 및 해악 등을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평준화 정책이 어떤 폐단을 가져왔고 또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입증한 첫 종합보고서인 셈이다. 시장주의 교육학자가 보는 평준화의 병폐는 명쾌하다. 그는 "학교 선택은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인데 국가가 나서서 강제 배정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국가권력이나 교육당국이 학교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그릇된 신념에 빠져 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평준화란 말은 '평형'과 '기준'을 지향한다는 뜻인데,이는 곧 교육을 국가 개입과 통제를 통해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이라며 "자유사회의 미덕인 '경쟁'을 원천
"나는 지금 일본에서 생산된 나이롱실을 한국으로 수입해 직조업자에게 공급하고 있지만 곧 나이롱실을 한국에서 만들겠습니다. 우리가 죽어라고 일해서 남의 나라 장사만 시켜주어서 되겠습니까?"지금의 코오롱그룹을 세운 고 이원만 명예회장(1904~1994)은 한국에 나일론사(絲)를 들여와 화섬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그가 처음 나일론을 접한 것은 1952년 말,일본에서 삼경물산을 세워 사업하던 시절이다. 그는 한눈에 나일론이 요샛말로 '대박'거리임을 알아봤다. 이듬해 그는 일본으로부터 나일론 원사를 들여와 독점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좀 더 큰 데 있었다. 1953년 대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가 "곧 '나이롱실'을 한국에서 만들겠다"고 공언한 다짐은 1957년 한국 최초의 나일론 제조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실현됐다. 그 회사 이름이 '한국나이롱주식회사'다.당시의 '나이롱'은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나일론'이다. 제대로 된 외래어표기법이 없던 시절에 '나일론(nylon)'을 일본식으로 읽은 말이었다. 이렇게 이 땅에 들어온 '나이롱'은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우리말에도 몇 가지 그 흔적을 남겼다.대표적인 게 환자가 아니면서 환자인 척하는 사람을 익살스럽게 이르는 말인 '나이롱환자'이다. 지금은 '나이롱'이란 말을 안 쓰지만 '나이롱환자'는 당당히 사전에 올라 있는 정식 단어다. "보험금을 노리고 교통사고 환자 행세를 하던 나이롱환자가 경찰에 구속됐다"처럼 쓰인다.'나이롱환자'에서 나이롱은 '사이비'란 뜻으로 전의돼 쓰인 것이다. 그리 된 까닭은 나일론이 인조섬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볍고도 질긴 그래서 좋은 '나이롱'이지만 전통적인 천연
"우리말에서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에는 '이,히,리,기' 따위의 접미사를 이용한 것과 '-어지다'를 이용한 방법,'-되다/-당하다/-받다' 따위를 이용한 방법들이 있다. 이는 영어의 수동태와는 다른 것으로 예전부터 우리말에서 흔히 사용해 온 방법이다."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하는 <새국어소식> 2002년 10월호에서 이대성 선임연구원은 우리말 피동 표현 '-되다'를 둘러싼 일부 왜곡된 주장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어지다'와 '-되다'가 영어의 유입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영어에 이런 표현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영어 투이므로 사용을 삼가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되다'는 '하다'와 더불어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다. 그 주된 기능은 자동사로 쓰이는 것이다. '어른이 되다' '일이 제대로 되다' '걱정이 되다' 같은 게 그런 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 말을 동사나 형용사로 만드는 접미사 구실('가결되다/사용되다/거짓되다/참되다' 등)을 하는가 하면 보조용언으로도 쓰인다. 보조용언으로 쓰이는 '되다'는 동사나 형용사의 '-게' 활용형 밑에 덧붙어 '그 상태나 행동대로 이루어짐/어떤 상황이나 사태에 이름' 등의 뜻을 나타낸다. 가령 '곡식이 알차게 되다/일이 깔끔하게 되다/밥을 먹게 되다/형님 댁에서 지내게 되다'와 같이 쓰인다.'되다'의 이 같은 다양한 기능은 잘만 활용하면 우리말 표현을 풍성하게 해주지만 자칫 남발하다 보면 되레 어색한 표현을 만들기 일쑤다. 대표적인 게 본용언만으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거나 능동형을 써도 되는 곳에 불필요하게 '
"문제가 되는 피동표현에는 우선 능동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을 피동으로 표현한 것이 있고,피동사에 다시 '-지다'를 첨가하는 등 이중피동의 표현을 한 것 등이 있다. 이러한 피동표현의 애용은 발상의 전환을 가져 온다. 그리하여 오늘날 국어의 표현은 주체적 표현이라기보다 객체적 표현,'위장된 객관'의 표현을 많이 보인다."원로 국어학자인 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6년 열린 한 학술모임에서 외래말투에 물든 우리말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우리말 피동 표현 가운데 <보험회사의 일방적 약관 시정돼야 // '高분양가' 세무조사 확대될 듯> 같은 것을 오류 유형의 하나로 제시했다. '시정해야/ 확대할 듯'처럼 능동형으로 써야 할 곳을 굳이 피동형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지적은 다른 토론자가 발표한 다음 문장을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가) 논문은 섀튼 교수에 의해 주도적으로 작성됐다.(나) 논문은 섀튼 교수가 주도해 썼다.㈎는 피동문이고 ㈏는 능동문이다. 우리말을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에 비해 ㈏가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토론자는 다만 피동문도 그 나름대로의 미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반드시 버려야 하는지는 의문이란 말을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하다'와 '-되다'는 글의 품격을 가르는 요소이다. '-하다'형으로 이뤄진 글은 주체와 객체가 분명해지고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반면에 '-되다'형이 많이 쓰인 글은 주체가 객체에 가려져 논지가 흐려지고 문장 전개도 어색해진다. 접미사 '-되다'는 '하다'가 붙을 수 있는 명사에 쓰여 그 말을 자동사로 만들어준다(예:걱정되다/생략되다/사용되다 등). 즉 '
"'건강하다'라는 형용사는 명령형이나 청유형 어미와 결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건강하십시오' 따위의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게 맞는 것이죠?그런데 학교 선생님께서 생일 같은 날엔 어른들께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다고 하시는데 과연 이런 비문법적인 표현에 예외가 있는 걸까요?""보통 명령이나 권유를 나타내는 '-(으)세요' '-(으)십시오'는 동사와만 결합한다고 보지만,'행복하다' '건강하다' 등의 형용사와는 예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화자의 바람을 나타내는 상용 표현의 하나로서 '건강하세요' 등을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이때 쓰인 '-(으)세요' '-(으)십시오'에 명령이나 권유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건강하세요' 표현 전체를 인사 표현의 하나로 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가나다' 코너에 오른 질의 답변 가운데 하나다. 이 내용은 국립국어원이 우리말의 용법을 상당히 유연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 가나다'는 현재 우리말과 글의 올바른 용법에 대해 연평균 3만5000여 건의 질문이 들어올 만큼 성장했다. 그 가운데에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같은 말에서는 진화하는 우리말 어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덕담으로,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하는 말로 '건강해라' '건강하세요' 같은 표현이 있다. 이때 '~해라' '~하세요/하십시오'는 명령형인데,일반적으로 형용사는 동작성이 없는 말이라 명령형 청유형 의도형 등으로 쓸 수 없는 게 우리말의 원칙이다. 가령 무심코 '항상 예쁘거라' '우리 모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아.""정치인들이 당리당략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어린이가 위험에 처해질 상황을 가정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우리말에서 '지다'라는 단어가 기여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지다'의 주기능은 물론 동사이다. 가령 '낙엽이 지다/얼룩이 지다' 등에서와 같이 자동사로 쓰이거나 '신세를 지다/책임을 지다/빚을 지다'처럼 타동사로 쓰인다.하지만 '지다'의 진정한 공헌은 접미사나 보조용언으로 쓰일 때 나온다. 앞에 놓이는 말과 어울려 품사를 바꿔주는 등 새로운 역할을 갖게 함으로써 부족한 우리말 어휘를 메워준다. 우선 접미사로 쓰인 '지다'는 명사를 형용사(예:'기름지다/멋지다/값지다/건방지다' 등)나 동사('빚지다/그늘지다')로 만들어준다. 보조용언으로서의 '지다'는 형용사에 붙어 그 말을 동사로 바꿔준다. '예뻐지다/좋아지다/젊어지다/'빨개지다' 따위가 그런 것이다. 또 '이루어지다/나누어지다'처럼 동사에 붙을 때는 피동 의미를 갖는 말을 만든다. '지다'의 이런 다양한 기능은 주로 용언(동사 · 형용사)의 어미 '-아(어)' 밑에 쓰여 그 말에 기동(起動) 또는 피동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지다'는 이같이 많은 기능을 갖고 있어 우리말을 풍성하게 해주긴 하지만 자칫 남용되거나 오용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피동형을 중복으로 쓰는 오류이다.가령 '나뉘어지다'란 표현을 많이 쓴다. 이 말은 '나뉘+어+지다'의 결합이다. '나뉘'는 다시 '나누+이'의 구성이다. 타동사 '나누다'에 피동어미 '이'가 붙어 피동사 '나뉘다'가 됐다. 여기에
염라대왕은 저승사자에게 18만년이나 장수를 누려온 동방삭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저승사자는 동방삭을 잡으려고 용인 땅에 왔으나 그의 형체를 알지 못해 잡을 도리가 없자 한 가지 꾀를 냅니다. 동방삭이 호기심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저승사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제 발로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날부터 저승사자는 숯내에서 검은 숯을 빨래를 하듯 빨기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숯을 열심히 빨고 있는 저승사자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왜 숯을 물에 빨고 있느냐"고 묻자 "숯을 희게 하기 위해서 빨고 있다"라고 하자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물에다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순간 저승사자는 "이 자가 동방삭이가 틀림없구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동방삭을 사로잡아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저승사자가 숯을 빨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탄천'이라 했다는 전설입니다.'탄천 안내문'은 하천의 유래와 관련해 전해져오는 설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탄천(炭川)은 길이 약 35㎞의 하천으로,용인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성남을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류이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약 25㎞ 구간이 성남시의 중심부를 지난다. 그래서 성남시에서는 몇 년 전부터 지역설화인 '삼천갑자 동방삭과 탄천 이야기'란 동화책을 제작 배포해 지역 문화교육에 활용하는 외에도 매년 '탄천페스티벌'을 개최해 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 때면 탄천을 주 무대로 종합문화예술축제가 열렸다.그런데 지금은 탄천이란 한자말에 밀려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경관이 빼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한다. 가는 곳마다 마음 가득 다가오는 비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아무리 봐도 끝이 없는 절경에 황홀할 지경이다."한 인터넷매체가 보도한 이 글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행기의 도입부이다. 쉽게 씌어 읽기는 쉬우나 상투적인 표현들이라 독자들의 눈을 그리 오래 잡아 두지는 못한다는 게 단점이다. 찬찬히 읽다보면 어색한 부분도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라 할 만하다.문제가 되는 부분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라는 곳이다. 자연이 빚어낸 절경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상황인데 뜬금없이 '오금을 저리게 한다'라고 하니 이상한 것이다. '오금이 저리다'란 표현은 관용구로,'저지른 잘못이 들통 나거나 그 때문에 나쁜 결과가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다'란 뜻이다. '거짓말 한 게 탄로 날까봐 오금이 저렸다' 같은 문장이 전형적인 쓰임새다. 그래서 '오금이 저리다'의 자리에는 다른 말로 '조마조마하다/애가 타다/마음을 졸이다' 등을 쓸 수 있다. 빼어난 자연 경관을 보면서 조마조마하거나 애가 탈 사람은 없을 것이다.관용구란 특정한 말들이 어울려 본래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확장된,새로운 의미로 굳은 표현을 말한다. 그러면 '오금'은 본래 무슨 뜻이기에 '저리다'와 어울려 이 같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오금은 얼어붙기도 하고 때론 쑤시기도 한다. '오금아 나 살려라'란 말이 있는 걸 보면 이 오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처럼 다양한 쓰임새로 우리 언어생
"말은 '생각의 집'이기 때문에 참다운 우리말에 담아야 참된 우리 생각일 수 있다. 참다운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담아내야 우리 삶을 밝히는 학문이 된다. (중략) 앞장서는 사람이 있어야 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생겨나고,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생겨나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서 큰마음을 먹고 마침내 '문학'도 '말꽃'으로 바꾸어 써보기로 한다."평생을 우리말 살리기에 이바지한 국어교육학자 김수업 우리말교육대학원장(70)은 2002년 저서 <배달말꽃>을 펴내면서 '말꽃'이란 말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경상대 국어교육과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대구가톨릭대 총장,문화관광부 국어심의회 위원장 등을 지낸 사람이다."'말꽃'은 '문학'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이지만 예로부터 써 오던 것이 아니라 요즘 나타난 말이다. 놀이(희곡),노래(시),이야기(소설) 같은 것을 싸잡아 '문학'이라 부른다. 놀이 · 노래 · 이야기 같은 것은 '말의 예술'인데,(중략) '말로써 피워낸 꽃'이니 '말의 예술'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말꽃은 새말이지만 이미 이야기꽃,웃음꽃 같이 정다운 말들이 형제처럼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다." 그는 2006년 9월 한 신문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쓰는 말 '말꽃'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냈다.그의 토박이말 살려 쓰기 작업은 '말꽃'뿐만 아니라 시를 노래말꽃으로,소설을 이야기말꽃으로,희곡을 놀이말꽃으로 바꿔 쓰는 등 거침이 없었다. 심지어 '예술'은 '삶으로 피워낸 꽃'이란 의미에서 '삶꽃'으로 쓰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이 같은 일련의 실험을 두고 우리말 학계를 비롯해 여러 관련 단체 등에선 잔잔한 호응과 함께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도 동시
"저는 지금부터 '나의 대통령'인 부시 당선자와 함께 이번 선거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부시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신의 가호를…." 2000년 12월13일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앨 고어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한 시간 뒤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조지 W 부시 당선자 측에선 "고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 정치권과 미국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두 후보 간 '고부갈등'이 한방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언론들도 '고부갈등 접고 부시호(號) 출범' 식으로 이를 전했다.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고부갈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부갈등은 아니었다. 우리 언어체계에서 '고부갈등'이라고 하면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 위치와 견해,이해 차이 등으로 인해 생기는 충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미국에서 일어난 '고부갈등'을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을 줄인 말로 썼다. 개표 과정과 결과의 신뢰성을 두고 두 후보 간에 법원 판결까지 가는 반목이 일어나자 말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우리 신문들이 이를 '고부갈등'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예전부터 써오던 '고부(姑婦) 갈등'에 빗대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에서 머리글자만 따서 새로 만든 말이다. 물론 우리 언론은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고어와 부시의 대결'이란 의미에서 '고부대결'이란 말을 만들어 써왔다. 수사학적으로는 절묘한 동음이의어 수법인데,글쓰기에서도 이런 수사학적 표현은 글에 '긴장감'을 가져와 설득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부갈등'이나 '고부대
올해 장마는 전국 곳곳에 게릴라성 폭우를 동반하면서 예년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나마 매년 발생하던 태풍은 아직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큰 피해를 주지 않아 다행이다. 8월 초에 있었던 태풍 '모라꼿'은 중국 상하이 부근에서 소멸했지만 그 영향으로 8월 11~12일 경기도 동두천 지역에 355㎜의 폭우를 뿌리는 등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리기도 했다.태풍 '모라꼿'은 2000년 세계기상기구 산하 태풍위원회에서 정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태풍의 공식 명칭 140개 가운데 하나이다. 140개의 이름은 남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 필리핀 태국 등 태풍 영향권에 있는 14개 회원국에서 각각 10개씩 내어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개미,장미,미리내,노루,제비,너구리,고니,메기 등 부르기 쉽고 친근한 이미지의 단어들을 제출해 사용하고 있고 북한도 기러기,도라지,갈매기,소나무,버들 등 10개가 있다. 따라서 한글로 된 국제적인 태풍 이름이 20개 있는 셈이다. '모라꼿'은 태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에메랄드를 뜻하는 말이다.태풍은 지역에 따라 동남아시아권에선 타이푼(typhoon),인도양 부근에선 사이클론,미국 동남부 해안지방에선 허리케인 등으로 불린다. '윌리윌리'는 호주 동북부에서 발생하는 태풍을 가리켰으나 최근엔 이 지역에서도 사이클론이라 부르기도 한다.크건 작건 태풍이 상륙하거나 비껴가기만 해도 대개 엄청난 폭우를 동반하는데,그런 경우 보통 '수마(水魔)가 할퀴고 지나가다'란 표현을 단골손님처럼 쓴다. 그리고 거기에 흔히 따라붙는 말에 '초토화(焦土化)'라는 게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쓰기엔 적절치 않은 점이 있다. '초토'는 말 그대로 '불
'나는 내일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중략)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江)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강 건너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중략) 나는 지금 그 강가에서 나를 건네 줄 사공을 기다리고 있다. 내 귓가에는 느릿느릿 저어오는 그의 노 소리가 들린다.'이문열의 장편소설 '레테의 연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1983년 초판이 나온 이후 지금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이문열이 여성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문제작이다. 그는 연애와 결혼 사이의 거리를 망각의 강인 '레테'에 비유해 일기 형식으로 작품을 풀어나갔다.올해는 유난히 유명인들의 죽음이 많은 것 같다. 국내에서만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2월 타계한 데 이어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와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이들은 모두 사후에 '레테의 강'을 지났을 것이다.'원조 마린보이'로 통했던 조오련씨가 8월 4일 심장마비로 타계하자 한 신문은 그의 죽음을 <'아시아 물개' 레테의 강 건너다>라고 전했다. '레테(Lethe)'가 죽음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는 것은 그 어원과 관련이 있다. '레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후 세계의 강으로,죽은 사람의 혼이 명계(冥界)로 가면서 건너야 하는 큰 강 5개 중 하나이다. 망자는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고 전생의 번뇌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망각의 강'이라고도 불린다.영어에서도 'the Lethe'라고 하면 (저승에 있다는) 망각의 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관용어로 'the river of oblivion'이라 해도 같은 말로써 레테를 가리키는 것이다. '레테'가 신화에 나오는 강 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의 60세 이상 노인 2417명을 표본으로 조사한 '노인생활 실태조사'에 따르면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사는 독거노인은 전체의 11.9%,자녀와 따로 사는 부부 노인은 29.1%로 전체 노인 인구의 41%가 독립가구로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1995년 1월15일 한 신문이 보도한 이 기사에는 지금은 제법 많이 쓰이는 '독거노인'이란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말은 그리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종합뉴스DB인 '카인즈'를 통해 보면 1990년 이후 '독거노인'이 단어로 쓰인 첫 기사는 1994년 3월16일 H신문으로 나타난다.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게 '동거'이듯이 '혼자 삶 또는 혼자 지냄'이란 뜻의 '독거'는 원래 있던 말이다. 이 말이 다른 한자어 명사 '노인'과 결합해 '독거노인'을 이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독거노인은 이후 고령화 사회의 진행과 핵가족 가속화가 맞물리면서 급속히 늘어나 표준국어대사전(1998년)에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인'으로 풀이돼 올랐다.하지만 '독거노인'이 단어로서의 지위는 얻었지만 '독거(獨居)'라는 한자말 자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게 아니다 보니 곧바로 순화의 대상에 올랐다. 그래서 나온 게 '홀로 사는 노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문제를 담고 있었다. 독거노인을 순화한 말 '홀로 사는 노인'은 단어가 아니라 구이기 때문에 독거노인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말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다. '독거노인'이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년이 지난 2005년 이후 '홀로노인'이 간간이 쓰이기 시작했다. 애초의 '홀로 사는 노인'에서 가운데 수식어를 없애고 합성어처럼 만든 말이 탄생한 것이다. 이 말은 요즘 제법 많
우리말 속에서,특히 신문 · 방송 언어 등 제도권 언어의 틀 속으로 '대략난감'이 들어온 데는 방송 드라마의 힘이 컸다. 2006년 1월 문화방송에서 새 드라마로 선보인 '궁'은 숱한 화제를 몰고 왔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면'이란 가상의 설정으로 때 아닌 '입헌군주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대략난감' '졸라' 등 당시 인터넷상에 머물던 신세대 용어를 과감히 정규 방송 프로그램에 올려,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이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 MBC 새 드라마 '궁'이 인터넷 통신언어로 논란이 됐다. 여고생 주인공 등 신세대 배우들이 남발하는 '불끈' '대략난감' '므흣' '졸라' 등 인터넷 용어가 안방극장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2006년 1월 13일)'언어의 실험장'인 인터넷에서 우리 네티즌들은 새로운 말 만들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지만 그 가운데 지속적인 쓰임새를 보여 살아남는 것은 실제론 그리 많지 않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종합뉴스DB인 '카인즈'를 통해 보면,'대략난감'은 드라마 '궁' 이후 급속도로 단어의 형태를 갖추고 언론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이 확인된다. 그 전만 해도 신문에서 이 말은,# 이날 뉴욕증시의 움직임은 여러모로 실망스럽다. 전날 장 막판 극적으로 형성됐던 상승 모멘텀이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 요즘 젊은층 표현을 빌리자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다. (2004년 5월 14일)#'연예인 눈썹 테러?' 일부 네티즌이 국내 톱스타들의 눈썹을 지운 사진을 만들어 우스갯거리로 삼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최근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이 눈썹 없으면 대략 난감'이라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적자생존이라고 합니다.에디슨은 발명왕이기 전에 메모왕이었어요.그가 죽은 뒤에 연구실에서 발견된 메모가 무려 35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메모의 중요성에 관해 얘기하면서 갑자기 ‘적자생존’이란 말을 썼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적자생존’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돼 멸망한다’는 뜻인데…. 아무리 예나 지금이나 메모하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쳐도 그렇다고 적자생존이라 하기엔 어색한 문맥인데…. 이런 의문은 그의 이어지는 설명에서 곧 풀렸다. 그는 ‘적자생존’을 본래 단어의 뜻이 아닌,‘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새로운 의미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왕에 있는 단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새로운 뜻을 부여하는 방식은 넓은 의미에서 칼랑부르(동음 이의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와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이런 ‘말 비틀기’ 수법은 ‘고진감래(고생을 진탕하면 감기몸살이 온다),박학다식(박사와 학사는 밥을 많이 먹는다),만사형통(만사는 형을 통해 이뤄진다)’ 식으로 무궁무진하게 만들어 쓸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일부 ‘사오정(사십오 세 정년)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같은 말은 사회상을 반영해 제법 지속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경우는 넓은 의미에서 신어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본래 수사학에서 전형적인 칼랑부르는 가령 국사(國史) 교육이 제대로 안 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國史인가 國死인가’ 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1920년대 초 동인지 <폐허>를 통해 문단에 허무주의 시를 소개한 공초 오상순은 특히 평생을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해 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가 살면서 단 한 가지 욕심(?) 낸 것은 바로 담배였다. 하루에 보통 아홉 갑을 태웠다는 그는 심지어 결혼식 주례를 보면서조차 담뱃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오상순이 하루에 피운 담배 아홉 갑은 낱개로 치면 무려 '180개비'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이 '개비'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 '개피' 또는 '가치'와 서로 단어로서의 세력 다툼 속에 있으면서도 유독 '개비'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비'나 '개피' '가치'는 사람에 따라 여전히 '180개피'에 익숙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180가치'란 말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정상적인 단어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개비'뿐이다. 여기에서도 남북한 간 표준어를 다루는 유연성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이나 기름한 토막의 낱개'를 나타내는 것으로 남한에선 '개피'나 '가치'는 모두 틀린 말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작가치,성냥가치,담배 세 가치' 따위의 말은 인정되지 않는다. '개피'를 써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자리엔 오로지 '개비'를 써야 하는 것이다.이에 비해 북한에선 '개비'와 '가치'를 함께 쓴다. 그래서 '성냥개비'라 해도 되고 '성냥가치'라 해도 맞는 말이다. 이는 문화어(남한의 표준어에 해당)를 사정할 때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말은 모두 단어로 받아들인 결과다. 반면 남한에서는 비슷한 뜻을 갖는 단어가 여러 가지일 경우 그 중 많이 쓰이는 단어 하나만을 표준어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담배 한 가치'는 '
한 개비 길이 7㎝×20개비×4갑=560㎝,이것이 하루치 길이요. 560㎝×365일-2044m,이것이 또 1년치 길이요. 2044m×70년=14만3080m,즉 143㎞. "선생님,이건 서울은커녕 추풍령에도 못 미치겠는데요."(구상 편,<시인 공초 오상순>,자유문학사)1920년 창간된 <폐허>는 이듬해 2호로 단명했지만 <창조> <백조>와 더불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퇴폐주의 문예 동인지이다. 그 <폐허>를 이끈 이 중의 한 명인 공초 오상순은 각종 기행으로 당대에 숱한 일화를 남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담배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붙이기 시작한 담배를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놓지 않았다는 오상순을 앞에 두고 부산 피란 시절 어느 물리학자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계산을 했다. 평생 피우는 담배 길이가 얼마나 될지가 화제가 돼 나온 일화다.그런데 실은 그의 하루 흡연량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시인 공초 오상순>에서 회고한 대로라면 그는 보통 하루에 180여 개비를 태웠다는 것이다. 20개비들이 담배 아홉 갑을 피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돌아가시기 전 반년 정도를 함께 기거하며 모신 제자가 직접 목격담을 풀어놓은 것이니 믿을 만한 수치인 셈이다. 하기야 오상순이 <폐허> 동인이자 당대의 주당이었던 수주 변영로와 어느 날 밤 한강에 뱃놀이를 갔는데 손에 쥔 것은 단지 술 몇 병과 담배 두 보루(20갑)였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들은 그렇게 술에 취하고 담배에 전 채 휘영청 밝은 달을 벗 삼아 밤새워 문학을 논했다고 한다.오상순의 담배에 얽힌 일화를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이 얘기
"어떤 모든 원천징수세도 A사가 부담한다."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의 중재판정부는 2009년 6월 서울에서 300억원대의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를 둘러싼 분쟁에 판정을 내렸다. 국내 건설 대기업 A사와 항만 준설 하청을 맡은 유럽 기업 B사 간의 이 세금 분쟁에서 A사가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계약서 문구에 담긴 조사 '-도'였다.B사에서는 "한국어 조사 '도'는 '또한(also)'이라는 의미이니,'원천징수세 또한 A사가 부담한다'는 뜻인 만큼 원천징수세 아닌 다른 세금도 A사가 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A사 측은 "한국어에서 '어떤 ~도'는 강조의 의미를 담은 것이란 점에서 '또한'과는 다르다"며 "문제의 문구는 원천징수세만 부담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팽팽히 맞선 두 주장은 결국 중재판정부가 A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승패가 갈렸다.세금 300억원을 놓고 한판 붙은 이 분쟁의 향방을 가른 것은 다름 아닌 조사 '도'였다. 이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가져오는 것은 의외의 아주 작은 결함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말에서 조사 '-도'는 체언이나 부사어,연결어미 등의 뒤에 붙어 특별한 의미를 더해주는 기능을 한다. 특히 주격,서술격,목적격,보격,관형격,부사격,호격 등 문장 안에서 일정한 자격을 나타내는 격조사와 구별해 보조사라 부른다. 보조사는 여러 조사 중에서 일정한 격을 띠지 않는 것을 따로 분류해 가리키는 말이다. 특수조사라고도 한다. 가령 '-도'의 경우 주격이나 목적격 등 하나의 격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주격도 됐다가 목적격도 됐다가 하는 식으로 여러 개의 격으로 쓰인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에서는 주격
# 우리 사회는 우울하다. 사교육과 부동산 문제는 이미 OO에 들어간 듯하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이 땅을 떠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지난 정권들이 전염시킨 불법파업 폭력시위,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뿌리 뽑아야 할 OO에 든 병이다.고질병이 되다시피 한 우리 사회의 병폐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 두 대목은 신문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들이다. 우리말에 '어떤 병이 고치기 힘들 정도로 몸속 깊이 들다'란 뜻으로 쓰이는 관용구가 있다. 'OO에 들다'란 꼴로 쓰이는 이 말은 나아가 개인의 특정한 버릇이나 사회 현상 따위가 뿌리 깊이 배거나 만연돼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불치병에 걸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때의 OO에 해당하는 말이 '고황(膏亡月 )'이다.'고황'은 사실 우리 몸의 특정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자 풀이는 '염통 밑 고,명치끝 황'으로,심장과 횡격막 사이를 가리킨다. 한의학에선 예부터 고황을 신체의 아주 깊은 곳으로 보았는데,병이 이곳까지 미치면 치료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린 것을 가리켜 '고황에 들다'란 말이 생겼다. '고질(痼疾)'도 비슷한 말이다. 이는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오래 되어 바로잡기 어려운 나쁜 버릇'이란 뜻으로 쓰인다.고황은 또 딱히 신체의 병에만 쓰이는 말은 아니다. 병이 고황에 들었으되,그 병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좇는 마음의 병이라면 그것을 '천석고황'이라 한다.'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초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지낸들 어떠하리오/하물며 샘이나 돌,즉 자연을 사랑함이 깊은 병이 된 것을 이제와
1930년대 '시인부락'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서정주와 김동리는 연배도 비슷해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하루는 술이 거나해진 김동리가 "어젯밤 잠이 안 와서 지었다"면서 자작시 한 편을 읊었다.끄트머리에 가서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서정주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하겠네."말 못하는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운다는 표현에서 내심 탁월한 서정미를 느낀 것이다.그러자 김동리가 말했다."아니,나는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이라고 썼는데…."2008년 1월 한 신문의 칼럼을 통해 소개돼 제법 알려진 이 일화는 시적 표현과 산문적 발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잘 인용된다.시인이자 우리말 연구가인 우재욱 선생은 이 얘기를 좀 다른 각도에서 소개한다. 누군가가 '꼬집히면'이라 말했을 때 다른 사람은 '꽃이 피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말에서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말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엔 잘못 쓰는 말이 세력이 커져 오히려 본래의 말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글씨를 끌쩍끌쩍 써온 게 영 정성이 없어 보인다." "새로 산 만년필로 몇 글자 끄적끄적해 보았다." "심심해서 연습장에 깔짝깔짝 낙서를 했다."'끌쩍끌쩍/끄적끄적/깔짝깔짝.' 이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모양이나 움직임을 흉내 낸 말이다. '아장아장','엉금엉금','번쩍번쩍' 등과 같은 의태어이다. 우리말에는 의성어 의태어가 발달해 섬세하고도 다양한 어감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음상의 차이로 변화를 주기 때문에 비슷한 형태의 말 사이에는 헷갈리기 쉬운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일상에
#.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한나라당은 2월 국회가 끝나면 본격화될 권력투쟁을 겨냥한 계파모임을 부쩍 강화하고 있고,민주당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4월 재 · 보선 공천을 둘러싼 내부갈등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쟁점법안 처리'(한나라당)와 '용산참사 정치쟁점화'(민주당)와 같은,OO보다 ××에 더 관심이 많은 형국이다.지난 2월 임시국회 때 한 신문에서 보도한 이 대목은 우리 국회의 비생산적인 정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한국 역시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파적 정쟁과 권력투쟁을 일삼는 정치판의 모습을 이 신문은 한마디로 'OO보다 ××에 더 관심이 많은 형국'이라 전했다. 민생법안 등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외면하고 잇속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을 우리 속담을 빌려 표현한 것인데,OO과 ××에 해당하는 말은 '염불'과 '잿밥'이다. 본래 속담은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맡은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서 잇속에만 마음을 두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핵심어인 '염불'과 '잿밥'만 남겨두고 조금씩 변형해 쓰기도 한다. 다른 속담으로는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있다'고 해도 같은 뜻이다.그런데 두 속담 간엔 유심히 봐야할 단어가 있다. '잿밥'과 '젯밥'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이다. 두 말의 형태와 발음이 비슷한 데다,사람들이 '잿밥'보다는 '젯밥'에 더 익숙하다보니 무심코 '염불에는 맘이 없고 젯밥에만…' '염불보다 젯밥' 식으로 쓰기 십상이다.'잿밥'은 '재(齋)+밥'의 결합이며 한글맞춤법 규정에 따라 사이시옷(ㅅ)이 붙어 생긴 합성어이다. 이때 '재'는 가정에서 지내는 일반적인 제
#. 조문(弔問)은 쓰지 말고 문상(問喪)을 표준으로 한다. 조문은 일본식 표기이며 그 뜻을 풀면 '문의를 애도한다'는 말이 돼 엉뚱한 의미이다.#. 상제(喪制),주상(主喪)은 상주(喪主)를 표준용어로 한다. 이는 전통에 맞게 바로 잡는 것이다.#. 망자,망인,사자,고인 등이 함께 쓰이고 있지만 이 가운데 '고인'만을 표준용어로 삼는다. 이는 돌아가신 이를 높여 예를 갖춰 부르는 표현이다.2003년 1월 정부는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장례용어 58개를 표준화해 발표했다. 우리 말글의 쓰임새를 조사하고 표준을 정하는 정부 주무부처는 문화관광부다. 이곳 산하 국어심의회와 국립국어원에서 이 일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날 표준 장례용어를 발표한 곳은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이었다. 장례 절차와 관련된 우리말의 KS(Korean Standard)를 발표한 것이다. 말에도 KS 규격이 있나? 당시 이를 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술표준원은 KS,즉 국가 산업규격을 관장하는 곳이다. 2000년대 들어 장례산업 규모가 급속히 커지자 이에 관한 국가 산업규격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 이때 필연적으로 산업용어에 대한 규정도 뒤따르는데,이에 따라 당시 실생활에서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각종 장례용어에 대한 표준화 작업을 벌인 것이다. 거기에는 일제 강점기 이후 굳어져온 일본식 표기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왜곡된 의미를 되살린다는 명분도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날 발표된 내용 중 일본식 표기의 잔재로 지목돼 부음→부고,영안실→안치실,방명록→부의록을 표준용어로 채택한 게 그런 경우들이다.하지만 기술표준원이 제시한 표준 장례용어는 '산업규격'으로 발표된 때문인지 몰라도
지난 5월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29일 치러져 7일간의 장례절차가 모두 마무리됐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울림은 컸다. 그것은 대부분 정치 · 사회적 과제일 터이지만 그 가운데는 우리말과 관련한 숙제도 있다.가) 덕수궁 대한문에 마련된 빈소에는 이날 오후 늦게까지 조문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뒤편 봉화산 정토원엔 31일에도 조문의 발길이 이어졌다.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부터 장례를 마칠 때까지 가장 많이 쓰인 말은 아마도 '조문(弔問)'일 것이다. 그가 숨을 거둔 뒤 이어 '빈소(殯所)'가 마련되고 조문이 시작됐다. 전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자 서울의 대한문 앞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분향소(焚香所)'가 설치됐다. 봉하마을에만 100만여명이,전국적으로 400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갔다는 추산도 있다. 그런데 조문객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니,'조문'의 뜻을 곰곰 생각해 보면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조문객'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조문이란 말을 확대 해석한다 하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다.사전들은 '조문'을 '남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喪主)를 위문하는 것'으로 풀고 있다. '조문객 100만 또는 400만'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빈소와 분향소의 차이를 살펴야 한다. 두 말을 혼동해 잘못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빈소'란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방,즉 시신을 안치한 곳이다. 이에 비해 '분향소'는 향을 피우면서 제사나 예불 의식 따위를 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있는 곳,즉 빈소는 단 한 군
'사망 별세 운명 영면 작고 타계 서거 붕어 승하 소천 선종 입적 열반….''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당사자로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23일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을 '서거(逝去)'로 전했다. '서거'는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주로 대통령이나 그에 버금가는 공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인간의 생로병사 가운데 하나인 죽음을 나타내는 말은 이처럼 많지만 그 중 흔히 쓰이는 말은 사망 별세 타계 운명 작고 정도이다. 이들도 실은 글말에서나 자주 쓰일 뿐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는 입말로는 대개 '죽다'나 '돌아가시다'이다. '돌아가시다'는 '죽다'의 높임말이면서 동시에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어떤 말이 충격적이거나 어감이 좋지 않을 때 듣는 사람을 자극하지 않도록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사학적으로 완곡어법이라 한다. 우리말에는 '죽음'을 이르는 말이 많기도 하지만 특히 이 완곡어법에 해당하는 다양한 표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쓰임새를 보이는 게 '세상을 뜨다/떠나다'이다.'뜨다'는 '자리를 뜨다' 식으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다는 뜻인데,이 말이 '세상을 뜨다'처럼 쓰이면 '죽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 된다. '떠나다'도 마찬가지로 '죽다'의 또 다른 완곡어이다. '떠나다'는 어원적으로 '뜨다+나다'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죽다'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어는 '가다'이다. '억울하게 간 넋을 위로하다' '젊은 나이에 간 친구를 회상하다'처럼 쓰인다. '눈을 감다'를 비롯해 '저승에 가다''이승을 떠나다''불귀의 객이 되다''황천 가다''졸하다''몰하다' 따위가 모두 '
# 암 투병 중이던 수필가이자 영문학자 장영희 서강대 교수(57)가 지난 9일 낮 12시50분 별세했다.태어나자마자 1년 만에 찾아온 소아마비,그로 인해 두 다리를 못 쓰면서 살아가며 겪은 세 차례의 암 선고.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사지 멀쩡한 사람들에게 밝은 내일의 메시지를 전했다. 장영희 교수가 세상과 작별한 다음날 신문들은 일제히 그가 '별세'했음을 알리는 부고 소식을 실었다.# 얼마 전 '영원한 문학소녀'이자 명수필가였던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때론 아프게,때론 불꽃같이.' 그의 삶 자체가 자전적 에세이의 제목 그대로였다. 이튿날부터 이어진 그의 추모 글에서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세상을 떠났다'고 표현했다.우리말에서 '죽음(死)'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는 '죽다'이다. '죽음'의 당사자는 대개 윗사람일 터이기에 일상적인 구어에서는 이를 높인 말 '돌아가시다'를 많이 쓴다. 삶과 죽음은 인간사에서 가장 원초적인 문제이듯이 우리말에는 이 '죽음'을 가리키는 말들이 꽤 많다.고유어에서 부터 한자어까지,직접적으로 죽음을 나타내는 말에서부터 다른 말을 빌려 완곡하게 드러내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죽다'를 한자어로 하면 '사망하다'이다. 한자어가 지배한 우리 옛말에서는 특히 '별세(別世)/운명(殞命)/영면(永眠)/작고(作故)/타계(他界)/서거(逝去)/붕어(崩御)/승하(昇遐)' 등 여러 한자어들이 있어 경우에 따라 각기 달리 '죽음'을 표현해 왔다.유교 문화의 반영인지는 몰라도 이 말들은 대부분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고 사람에 따라 쓰는 말을 구별했는데,그런 점에서 이것들은 일종의 계급어이다.'별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
"닭고기나 돼지고기 소비 급감을 막기 위해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을 각각 우리나라에서만 AI,SI로 줄여 쓰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지금은 '신종 플루'로 통용되는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전 세계적으로 한창 퍼져나갈 때 한국의 전병률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이 한 말이다.그의 얘기는 우리 사회의 언어 현실 하나를 무심코 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 말 속엔 언어학적으로 '약어'에 관한 중요한 이론 하나가 담겨 있다. 약어가 어휘화하는 순간 그 약어는 실체를 가리고,내용보다는 그 말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AI(avian influenza)가 그런 경우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해 맹위를 떨친 '조류 인플루엔자(鳥類-)'는 '닭,오리 따위와 같은 가금류와 야생 조류 등이 걸리는 급성 바이러스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판에 단어로 올랐다.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이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께,초기에는 '조류독감'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가금 인플루엔자'란 말이 함께 쓰이다가 '가금(家禽: 닭,오리,거위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이란 단어 자체가 요즘 잘 쓰지 않을뿐더러 어려운 한자어이다 보니 2004년께부터 자연스레 '조류 인플루엔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닭,오리 등의 소비가 급감하면서 양계농가의 피해가 막심해졌다.그래서 주로 쓰이기 시작한 게 영문 약어 AI다. 이 말이 주는 효과는 외형적으로 조류나 인플루엔자를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실제 내용인 병든 닭이나 오리 등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켜주는 데 있다.이번 '신종 플루'도 AI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막판에 한 단계 더 나
# "굴뚝산업이란 표현을 쓰지 말아주세요." 2000년 4월. 당시는 벤처 열풍이 한창 불던 때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펴 온 정보기술(IT)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벤처기업이 태어날 정도로 모든 게 '벤처'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 방송 등 언론사 앞으로 한국기계산업진흥회 명의의 협조문 한 통이 날아들었다. '기계 산업인 일동'이란 이름으로 보내 온 협조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굴뚝산업'이란 용어가 산업현장의 경영자와 근로자들을 힘 빠지게 하고 있으니 다른 표현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국민 여러분,OIE에서는 멕시코인플루엔자(MI)가 돼지와 전혀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아닙니다. 멕시코인플루엔자(MI)로 불러주십시오." 2009년 4월30일.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가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이날 한국의 농협중앙회 및 대한양돈협회 등은 공동으로 이 인플루엔자의 이름이 잘못 알려졌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두 경우는 모두 말에 담긴 이데올로기의 힘이 실제 우리 언어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굴뚝산업'이든 '돼지 인플루엔자'든 사람들은 '말'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데,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어에 담긴 '관점(point of view)' 때문이다. 당시 기계산업진흥회 측이 주장한 '굴뚝산업'이란 말의 문제점은 벤처 산업에 비해 뒤처진 산업,환경을 오염시키는 산업,내실이 없고 덩치만 큰 산업,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산업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굴뚝산업'이란 2000년 당시 붐을 이루던 벤처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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