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언젠가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를 선물 받은 국민은 잔치 분위기에 들썩이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한강 작가는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출판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새내기로서 이번 수상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만큼 흥분되고 설레며 벅차오르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강 작가를 수상자로 이끌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근원은 무엇인가. 작가가 살아왔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꼭 거쳐올 수밖에 없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철수와 영희의 소환지나가다 길모퉁이의 헌책방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70~80년대 출간되었던 그림책들과 국어 교과서를 찾아보았다.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 묻는 헌책방 사장님에게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요.”라고 하자, 눈썹을 씰룩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신다. 빨간 노끈에 묶인 교과서를 내 앞에 척척 내려놓으신다. 축축하고 눅눅한 곰팡내와 오래된 종이 향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검은 먹을 사용하여 일필휘지로 그려내려 간 별주부전의 토끼와 거북이의 역동적인 모습부터 네모 가방을 메고 바른 자세로 인사하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까지 책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질서한 헌책들 사이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공간. 코끝을 자극하는 습한 오래된 냄새는 잊히고 점점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옛 교과서를 볼 때는 우리 반의 철수와 영희, 교실의 냄새, 운동장의 모래 냄새들
릴리펏 여행기<걸리버 여행기>하면 떠오르는 것은 작은 소인들이 걸리버를 둘러싸고 줄과 못으로 머리카락까지 바닥에 고정해 놓은 그림이다. 어렸을 때 책을 볼 때마다 소인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인국 사람들이 줄지어 음식을 가져다주고, 전쟁이 났을 때도 바다에 성큼성큼 걸어 나가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는 멋진 걸리버의 모습에 매료되었었다.<걸리버 여행기>의 원작을 만나기 전에는 말이다. 내가 보았던 어린 시절의 소인국 임금님의 모습은 흰 수염에 왕관을 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작에 묘사된 소인국의 황제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외모는 강인하고 남자다우며, 오스트리아 사람처럼 아랫입술이 두툼하고, 콧마루가 우뚝하고, 피부는 올리브 빛이다. 자세가 꼿꼿하고, 몸과 팔다리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모든 동작이 우아하고 몸가짐이 당당하다. 당시 황제의 나이는 한창때를 지난 28세 9개월로, 대략 일곱 해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대체로 승승장구해 왔다.” 소인국의 황제는 다른 소인들보다 키가 컸으며 젊고 멋진 남성이있다. 걸리버 여행기 원작을 보며 철저하게 속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각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내가 어릴 적 읽고 상상해 왔던 <걸리버 여행기>와는 판이하였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은 걸리버의 손톱 만큼 정도였다.어느 날 아이의 반 친구 어머니가 연락하였다. 플레이 데이트를 하자며 주소를 보내주었다. 초대된 키즈 카페의 이름을 보고 흥미로웠다. ‘릴리펏’. 오스트리아 사람처럼 아랫입술이 두툼하고 강인한 그 멋진
‘88 올림픽의 자부심! 스텔라 88’아버지는 새벽 일찍부터 마른걸레를 들고 나가신다. 어제도 백수메리(白壽메리: 속옷 및 잠옷 의류 제조업 '쌍방울' 기업의 제품)에 땀이 다 젖을 정도로 정성스레 닦아놓은 스텔라 88에 먼지라도 앉을세라 서두르시는 참일 테다. 현관 앞에는 형형색색의 보자기로 꽁꽁 싸맨 추석 선물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 가지런히 놓여있다.6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손가락을 빨고 있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받은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실 바닥에서 이불을 껴안고 뒹굴뒹굴하고 있다. 어제 목욕탕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힘차게 때를 밀어주셨는지 등이 아직도 따끔따끔하다. 추석 명절 전이면 온 가족이 목욕탕에 가서 세신을 한다. 덕분에 동네 친구들도 그곳에서 만나 서로 눈을 찡긋하고는 한다.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멀디먼 지도 끝자락에 닿아있는 곳. 외가댁까지 가는 동안 보게 될 산과 나무, 논밭을 생각하면 벌써 차를 타기 전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듯했다.바리바리 많은 짐을 모두 싣고 아버지의 귀한 스텔라 88에 올라탔다. 어머니는 가는 길에 들을 애청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들을 착착 준비해 보닛에 올려놓으시고, 동생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출발과 동시에 다리 한쪽을 내 무릎에 척하니 걸쳐놓았다.국토대장정매년 우리 가족의 추석 명절의 시작은 그러하였다. 7시간... 9시간... 막히면 막히는 대로 뚫리면 뚫리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그 옆으로 드리워진 논밭, 산등성이를 구경하다가 지칠 때면 도착하고는 했다.외가댁에 갈 때마다 우리나라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꼈다.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면 ‘거의 다 왔다.&rsqu
▪ 장면: 파리 카페 레 뒤 마고(Les Deux Magot) 카페▪ 인물: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F. 스콧 피츠제럴드▪ 시간: 1925년 8월 10일 18:33분§ 헤밍웨이: 이런! 매우 덥군! 그래도 파리의 여름은 멋지지. (물을 한 잔 들이켜며) 파블로, 요즘 아주 흥미로운 일이 있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그림책 이야기를 쓰고 있어. 어떻게 하면 글과 그림이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 중이야. 넌 멋진 화가이니까,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길 바라!§ 피카소: 흥미롭군, 헨리. 그림책이라... (잔을 옆으로 옮기며) 나는 항상 그림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보완해 주길 원해. 중요한 건, 글이 모든 걸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 거야.§ 피츠제럴드: 나는 예술적 감각보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어. 헨리, 네 문체는 아주 간결하고 강렬하지. 이런 스타일이 그림책에도 어울릴까?§ 헤밍웨이: 맞아, 스콧. 그게 문제야. 내 글은 간결하지만, 어린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설명적이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파블로가 말한 대로, 그림이 많은 걸 상상할 수 있게 한다면 내 스타일대로 좀 더 간결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피카소: 맞아. 예를 들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색상과 형태, 그리고 인물의 표정까지. 한 장면이 천 마디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지. § 피츠제럴드: 그렇다면 캐릭터 설정도 중요하겠군. 나는 종종 세밀한 심리 묘사에 집중하곤 했는데, 어린이들에게는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캐릭터가 필요할 거야. 캐릭터들이 그들의 성격을 바로 드러내도록 말
그래서 다섯째 날엔 죽었답니다.이 문장은 독일 어린이 동화 ‘수프 안 먹는 카스파 이야기’ (Die Geschichte vom Suppen-Kaspar)의 마지막 구절이다. 동화책의 내용은 이러하다.건강하고, 동글동글 통통한 소년이었던 카스파는 식탁에서 단정히 수프도 잘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떼를 쓰기 시작하며 수프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카스파는 매일 점점 마르고 약해지다가 나흘째 되는 날 몸무게가 8g이 될까 말까 실오라기처럼 말라버린다. 결국 다섯째 날 죽는다.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다소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가? 동화책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엄지 빠는 아이 이야기’ (Die Geschichte vom Daumenlutscher). 어린 소년 콘라트에게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없는 동안 단정히 말 잘 듣고 있고, 특히 손가락을 빨아선 안 된다고 말이다. 손가락을 빨면 재단사가 가위를 들고 와서 손가락을 싹둑 자를 거라고 겁을 주고 나간다. 아랑곳하지 않았던 콘라트는 손가락을 입으로 쏙 넣는다. 그러자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재단사가 나타나서 콘라트의 두 엄지손가락을 싹둑싹둑 잘라버린다.이 잔인하고 충격적이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한 동화는 1844년 독일 정신과 의사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이 펴낸 어린이 동화 모음 <슈트루벨페터> (Struwwelpeter)에 수록되어 있다. 원제는 ‘데어 슈트루벨페터’ (Der Struwwelpeter)로, 한국에서는 <더벅머리 페터>로 출간되었다. <슈트루벨페터>는 그 강렬한 내용과 삽화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부 부모와 교육자들은 이 책이 아이들에게 너무 무섭고 충격적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아
기자를 구독하려면
로그인하세요.
박효진 기자를 더 이상
구독하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