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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권 필진
    조성권 필진 라이프이스트외부일반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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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력
    우리은행 홍보실장, 서여의도지점장
    예쓰저축은행장/대표이사
    국민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이투데이 선임연구위원
    현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소개 글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살다 보니 그때는 듣기 싫던 잔소리가 나를 이만큼이나 키워준 거란 걸 알았습니다.
    그 지겹던 잔소리들이 모두 고사성어에서 나온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부모 등을 보고 배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불초(不肖)‘라는 고사성어에도 나오듯 아버지를 닮지 못합니다.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인성이 더없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시집간 딸이 딸을 낳고 장가든 아들이 아들을 낳아 손주가 생기고 나니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고사성어를 100여 개 추려 잔소리를 회억해냈습니다.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마당에 심을 나무를 캐러 간다고 아버지가 따라나서라고 했다. 인부 둘과 트럭을 타고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지금은 무릉도원면) 아버지가 경영하던 채석공장 뒷산으로 갔다. 임도(林道)를 따라 한참 올라가서야 트럭이 멈췄다. 저 나무다 싶을 정도로 운치 있는 소나무였다. 벼랑에 매달리듯 누운 와송(瓦松)이었다. 길을 반쯤은 가리며 길손을 반기듯 산을 지키던 소나무는 반나절은 걸려 산채(山採)해 우리집에 왔다.  소나무는 바로 심지 않았다. 대문 안쪽 마당 끝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 옆에 놔뒀다. 아버지는 하루 몇 번씩이나 아이 엉덩이처럼 밑동을 싼 가마니를 두들겨줬다. 때로는 목을 축일 수 있게 물을 조금씩 흘려주며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며칠 지나 머리카락 다듬듯 솔을 쓰다듬던 아버지는 인부들을 불러 비로소 심었다. 식혈(植穴) 속에 앉힌 뿌리분과 그 주위에 채워진 새로운 흙이 잘 밀착되도록 반나절이나 걸쳐 심었다. 내가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우고서야 소나무는 이튿날 번듯하게 살아났다.  아버지는 “소나무를 옮겨심을 땐 뿌리를 가마니로 싸서 묶어뒀다가 아픈 기운이 좀 없어지면 옮겨 심어야 한다”고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이어 “대문 앞에 큰 나무는 한자로 표현하면 ‘한가할 한(閑)’으로 가난하다. 현관 앞의 큰 나무는 ‘곤란할 곤(困)’으로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해 피한다”다고도 했다. 우리집 소나무는 대문 들어오는 다리를 반쯤은 가려 마치 손님을 반기는 환영수(歡迎樹)가 됐다. 허리를 굽힌 소나무는 눈비를 대신 맞아주기도 했고 뙤약볕을 가려주기도

    2024.02.06 17:59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조바심이 졸속을 부른다

    중학교 진학해서는 집에서 30리 떨어진 읍내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잠꾸러기에게 새벽 기차 타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챙겨주는 책가방을 들고 기차 기적이 들려야 뛰어가 간신히 타는 일이 빈번했다. 때로는 먼저 타고 온 여학생들이 나서서 뛰어오는 나를 가리키며 열차 출발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여중 3학년 누나 둘이 유독 챙겨줬다. 모자를 바로 씌워주기도 하고 교복 단추도 끼워줬다. 열린 가방을 알뜰하게 닫아주기도 했다. 속으로 키 큰 누나, 예쁜 누나로 불렀다. 자장면을 사주기도 했고, 숙제도 가르쳐줬다. 기차가 기다려졌다. 집에도 놀러 와 자고 가기도 하고 나도 두 누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두 누나가 읍내에서 자취하기로 해 기차에서는 만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키 큰 누나가 같이 자취해도 된다고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아버지는 “생각 좀 해보자”라고만 했다. 저녁을 거르고 버티자 아버지가 불러 “조바심내지 마라. 조바심낼 일이 아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을 “조마조마해 졸이는 마음이다”라며 길게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바심’은 타작을 뜻하는 말이다. 곡식 이삭을 비비거나 훑어서 낟알을 털어내는 탈곡(脫穀)을 뜻한다. 조 이삭을 털어내는 일이 조바심이다. 조는 이삭이 질겨서 잘 떨어지지 않아 비비고 문지르면서 애써야 간신히 좁쌀을 얻을 수 있다. 조바심할 때는 당연히 힘만 들고 좀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진다는 데서 이 말은 유래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설

    2024.01.30 17:43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새 물이 연못을 살린다

    손자가 태어나 집에 오자 아버지는 바빴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자는 동침(東枕)을 고집했다. 아버지는 창과 벽 사이로 스며드는 웃풍이 심하자 머리맡에 둘러칠 머리 병풍(頭屛風)을 만들었다. 흔히 가리개라 부르는 침병(枕屛)은 대개 두 폭이다. 미뤄뒀던 일이라며 방 귀퉁이에 한동안 밀쳐둔 종이상자를 풀었다. 목공소에 진즉에 주문한 홍송(紅松) 병풍 틀을 만드는 나무가 가득 들어있었다. 끌로 파고 사포로 문질러 결대로 짜 넣는 데만 며칠 걸렸다. 아버지는 “배접(褙接)은 왜놈들 용어”라며 다시 며칠 걸려 두 번에 걸쳐 배첩(褙貼)했다. 밀가루로 풀을 쑤고 녹말을 완전히 내린 후 말려서 가루로 두었다가 묽게 쑤어 풀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풀로 삼베로 병풍 기둥을 싼 뒤 비단으로 다시 싸 돌쩌귀로 붙여 연결했다. 곁눈으로 지켜만 봐도 정성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 매달리던 아버지가 불렀다. 종이를 잘라 놓고 기다리던 아버지는 먹을 갈아달라고 했다. 더는 말하지 않고 한 번에 써 내려간 시가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다. 주희가 책을 읽다 든 생각을 쓴 시다. “작은 사각 연못에는 큰 거울이 펼쳐지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일렁인다. 묻노니 이 연못은 어찌 이리도 맑을까. 발원지에서 쉬지 않고 새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시는 두 편이다. 저 시는 첫 편이다. 아버지는 행서체로 두 연을 한 폭씩 썼다. 그래서 병풍은 모두 네 폭이 됐다.  며칠 뒤 아버지는 작품을 배첩한 뒤 외선을 둘러 병풍을 마무리했다. 붙인 병풍 제목이 고사성어 ‘원두활수(源頭活水)&rsq

    2024.01.23 17:41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마음을 열어야 복이 들어온다

    마루 유리문 깨지는 소리에 놀라 깼다. 건넌방에서 일찍 잠들었던 내가 급히 뛰어나갔다. 안방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놀라 마루로 나왔다. 마당에 불을 켜자 눈 내리는 밤에 늦게 귀가하던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다 미끄러져 웅크리고 있었다. 무릎을 찧어 일어서지 못한 아버지가 불 켜진 안방에 소리를 질렀으나 기척이 없자 돌을 던져 마루 유리문을 깬 거였다. 내가 얼른 부축해 방안으로 옮겼다. 숨돌린 아버지는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못 듣느냐”며 심하게 나무랐다.  바로 큰 망치를 가져오라고 한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 벽체를 힘껏 쳐내 구멍을 냈다. 내가 건네준 망치로 구멍 난 벽을 더 내려치자 낡은 한옥이라 쉽게 허물어졌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가는 미닫이문 옆 벽면은 원래 창이 나 있었는지 위아래에 모두 통나무를 건너질러 마감이 돼 있었다. 눈 쌓인 마당이 대문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찬바람 들어오는 창은 신문지로 가려 막았다. 이튿날 새벽부터 목공소에 주문해 밖으로 열리는 두 쪽 여닫이 창문을 달고 창호지를 발랐다. 부엌으로 통하는 창문 바깥에는 쪽마루도 깔았다. 부엌에서 마루를 통해 안방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야 했지만, 소소한 물건은 창문을 열고 바로 안방에 들여올 수 있게 됐다. 안방에 앉아 창을 열고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쪽마루로 부르는 게 쉬워진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인 머름(遠音)에 팔을 걸치고 밖을 내다보는 걸 아버지는 무척 즐겼다. 창을 낸 그 날 저녁 아버지는 하루 만에 낸 창을 ‘눈꼽재기창’이라고 알려줬다. 여닫이 옆에 작은 창을 내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창을 일컫는

    2024.01.16 16:16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총명은 갈고 닦아야 빛난다

    중학교 다닐 때 IQ(intelligence quotient) 검사를 했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 결과를 발표했다. 130점 넘는 학생이 1명, 120점과 110점대는 네다섯 명쯤 불렀다. 나머지는 개별적으로 점수를 알려줬다. 나는 108점이었다. 선생님은 점수 발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아이큐 테스트를 설명했다. “이 지능지수(知能指數) 검사는 지능의 발달 정도를 나타내는 거라 상대적이다. 잠재력을 나타내는 거니만큼 점수에 상관없이 노력이 중요하다”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다른 학생들은”이라고 말문을 열자 아버지는 “다른 학생들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중심이다. 괴금(塊金) 이로구나”라며 큰소리 내 웃었다. 곧바로 “괴금이란 덩어리 상태의 금이란 말이다. 그거면 됐다.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가장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원소가 금이다. 머리가 비상하구나. 할아버지와 아비를 닮았으니 그럴 거다”라고 흡족해했다. 기분 좋은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런데 하필이면 108이냐? 하긴 인생이 온통 백팔번뇌(百八煩惱) 덩어리긴 하다”고 해 기억이 생생하다. 이어 “네가 받은 그 점수는 금덩어리를 깎은 정도를 뜻한다. 지능이 완전히 발달한 성취물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한 수준이다. 앞으로 연금술을 써서 가공해야 한다. 금반지를 비롯해 장신구를 만드는 이외에도 치과, 의료 등 여러 분야에 요긴하게 쓰일 거다. 뭐로 만들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귀한데 쓰일 머리다”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 손님이 오자 절을 시킨 뒤 “큰아들입니다. 자식 자랑 같지만, 애가 머리가 비상합니

    2024.01.09 13:12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라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 자기는 그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피눈물을 쏟으면서 저 말을 배웠다. 은행에 다닌 지 오래지 않아 내 이름으로 집 매매계약을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돈은?”하고 빤히 쳐다봤다. 집 담보로 대출해준 기업체가 부도나 연체됐다. 대출이 나간 지 1년도 안 돼 연체가 되자 승진을 앞둔 담당자들이 곤란해졌고 경매로 가기 전에 내가 매입해 연체 정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해 인수했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대금은 은행 대출을 받아 처리할 거다”란 말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담배 재떨이를 내던졌다. 정수리에서 바로 피가 났고 눈물도 났다. 그때 피눈물을 흘리는 내 머리 위로 아버지가 쏟아낸 말이다. 부도로 경영하던 기업을 은행이 강권해 넘긴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옛일을 떠올리며 “그게 은행이 욕먹는 이유다”라며 그때 하지 못했던 험한 말들을 마구 퍼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버지의 질타다. “은행원이 옹졸하다. 잔혹하기 그지없다. 야비한 집단이다. 협잡꾼들 집합소다. 편협하기 이를 데 없다. 상처 난 데 소금 뿌리는 놈들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한다. 지네들도 장사하는 놈들인데 상도(商道)란 게 없다”라며 그런 걸 강요하는 직장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내가 손수건으로 피눈물을 찍어내는 걸 개의치 않고 야단치던 아버지는 “집은 제2의 옷이다”라고 정의했다. 설명을 이어나갔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거기 사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누구인지를

    2024.01.02 14:29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손주는 하늘이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내가 뉴욕에 살던 1999년 11월의 일이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남동생이 전화했다. 응급 처치를 해 의식은 돌아왔으나 말씀을 못 하신다면서 전화를 바꿔 달라시는 거 같다고 했다. 전화기를 통해 아버지는 ‘악!’ ‘악!’ 하는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만 질렀다. 말이 되지 않자 전화기를 내던졌는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끊어졌다. 나는 아버지의 그 두 마디를 “손주들을 보고 싶다”라는 말로 얼른 알아들었다. 두 달 전에 뉴욕 집에 다녀간 아버지가 툭하면 국제전화를 걸어 손주들과 통화했다. 통화를 못 하면 아쉬워하며 으레 저 말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한집에서 같이 지내다 내가 뉴욕 주재원으로 발령 나자 아버지는 손주들을 유독 찾았다. 김포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손주들을 양손으로 한참을 꽉 껴안았다. 다녀가라고 해도 오시지 않았다. 2년을 버티던 아버지는 “안 보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다”라며 어머니와 갑자기 미국에 와 손주들과 몇 날을 같이 지냈다. 그때 아버지는 손자와 손녀로 구분 짓지 않고 언제나 손주라고 했다. 내가 “왜색(倭色) 짙은 말이라 낯설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 과문(寡聞)을 탓했다. 손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손자 손녀를 작은 손님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아버지는 “옛날에는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집안에 작은 손님이 온 것처럼 기뻐했다. 손자 손녀를 가리키는 말에도 손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라고 일러줬다. 아버지는 손주를 길게 설명했다. 선조들은 손자 손녀가 집안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로, 집안의 대를 이어갈 후손으로, 그래서 귀한 존

    2023.12.26 17:26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요긴함을 품어야 진정한 풍요다

    은행에 근무할 때다. 미국 연수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께 출국 인사를 드리자 만년필을 고쳐오라고 했다. 매일 쓰는 파카51 만년필이었다. 1941년에 출시되어 70년이 넘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명작이다. 18K 금촉을 쓰는 ‘파카51 골드 닙’은 뚜껑에 새겨진 로고가 시그니처 디자인이다. 책상에서 뭘 쓰다 손자가 오자 껴안은 아버지는 아이가 만년필을 집어들 때만 해도 좋아라 했다. 손자가 만년필을 거꾸로 들고 책상 위 유리판에 두어번 내리 찍었다. 제지할 겨를도 없이 눈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펜촉이 심하게 구부러졌다. 아버지는 손자를 내동댕이쳤다. 손자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그 만년필을 그냥 고쳐 쓰는 줄로만 알았다. “구부러진 펜촉을 펴기만 하면 될 텐데요. 그게 미국에 있을까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몇 번을 고쳐봤는데 전처럼 부드럽지가 않다. 펜촉을 구해 와라. 미국인데 왜 없냐?”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만년필 병원(FPH,Fountain Pen Hospital)은 뉴욕시청 뒤에서 쉽게 찾았다. 만년필 수리 전문 업체인 가게는 1917년 설립돼 100년이 넘는 노포(老鋪)다. 만년필을 내밀자 점원은 바로 파카51 골드 닙 브랜드라고 했다. “오오 불쌍하다”며 펜촉을 더는 쓸 수 없어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점원이 뒤 서랍을 열자 금촉이 그득했다. 그는 지금까지 8억 개나 팔렸다고 자랑하면서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파카51 만년필을 애용해 ‘아이젠하워 만년필’이라고 불린다고 소개하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귀국해서 바로 찾아뵙고 만년필 병원 얘기 끝에 “미국 참 풍요롭더라고요”라며 고쳐온 만년필을 드렸다. 아

    2023.12.19 16:00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일의 성패는 사소함이 가른다

    마루의 괘종시계가 멈췄다. 제때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서다. 아버지가 멈춰선 시계를 넘어뜨리자 앞 유리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집이 멈췄다"라며 새벽부터 불같이 화냈다. 대학에 다니던 때다. 건넌방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재빨리 뛰쳐나가 시계를 일으켜 태엽을 감았다. “집안의 시계가 멈추는 일은 삶의 긴장이 느슨해진 거고 게으름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며 아버지는 태엽을 감는 내 머리 위로 역정을 쏟아부었다.방으로 불려들어가자 아버지는 “집안의 시계가 멈춘 거는 우리집 지킴이의 죽음이다”라며 태엽을 감지 않은 것이 무척 큰일이라고 확대했다. 이어 “시계 태엽을 감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데 끝나지 않고 습관으로 굳어지는 일이 두렵다”라며 우려했다. 아버지는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때와 때 사이가 시간이다. 시간(時間)의 ‘간(間)’은 원래 문(門) 안에 달 월(月)을 넣어 ‘틈 한(閒)’이었다. 틈새란 뜻이다. 어두운 밤 문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온 모습을 그렸다. 밝은 낮에는 보이지 않고 어두운 밤이 되어야 달빛을 통해 문틈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으니 ‘틈새’라는 뜻을 잘 표현했다. 시간에 틈이 있어 한(閒)이 ‘한가하다’란 뜻으로 쓰이자 날 일(日)자를 써 지금의 틈새를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아버지는 “시계의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가 태엽이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돼 있고 연결된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시간은 물론 인간, 일간(日間), 천지간, 막간(幕間), 산간, 부모·자식 간처럼 둘의 연결에는 틈이 있다. 틈은 시간이 지나면 벌어진다. 그 틈

    2023.12.12 15:36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마음은 얻는 것이지 훔치는 게 아니다

    저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나 깨달았다. 군 복무를 마치던 때다. 우리 집이 빼꼼히 올려다보이는 길지 않은 골목길에 낯선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서성거렸다. 가로등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지만, 싸락눈을 맞으며 우리집 대문을 바라보는 걸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다. 어머니가 “초인종을 누르길래 나갔더니 아버지 회사 직원 부인이라며 사장님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더라”라고 궁금증을 풀어줬다. 어머니가 “들어와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저렇게 서 있다”라며 불편해했다. 늦은 밤에 귀가한 아버지를 대문 앞에서 붙잡고 그 여인이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튿날 퇴근한 아버지가 집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 들어와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는 소리가 났다. 내가 얼른 나가서 “어제 그 부인이 안 돼서 많지는 않은 돈을 넣은 봉투를 드렸으나 한사코 받지 않아 아이 업은 포대기 안에 넣어드렸다”고 자랑스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대번에 “쓸데없는 짓 했다”라며 나무랐다. 방에 불려들어가자 아버지는 어제 그 여인은 김 과장의 부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과장은 내가 몇 번 만난 일이 있는 직원이었다. 은행의 권고로 회사 구조조정을 하면서 십여 명을 감원했다며 김 과장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직원이어서 모두 그의 잔류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감원명단 맨 앞에 나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어느 곳에 가서라도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기에 명단에 첫 번째로 넣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그는 회사에 꼭 필요한 직원이지만,

    2023.12.05 17:38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아버지를 이기려면 열정을 가져라

    아버지가 47세 생신을 맞았다. 군에서 휴가받아 집에 온 다음 날이다. 아침 생신상을 받은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살았구나”라며 탄식했다. 상을 물린 아버지가 처음으로 밝힌 가족사다. 내 고조부는 96세, 증조부는 79세로 장수했다. 두 분과 달리 조부는 47세로 단명했다. 내 조부는 고조부가 81세, 증조부가 41세 때 태어났다. 남들이 고손자를 얻을 나이에 손자를 본 고조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젖 뗀 뒤부터는 방을 같이 쓰고 밥 먹을 땐 겸상했다. 고조부는 손자를 서당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친구를 사귀거나 바깥출입도 막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케 했다. 그랬던 고조부는 내 조부가 14살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한 훈육을 계속했다. 소학,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글자만 비판적으로 가르쳤다. ‘내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집안 유훈 때문에 과거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그러니 네 조부는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만큼 할 줄 아는 게 오직 학문뿐이었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네 조부가 형님과 내게 당신의 할아버지가 가르친 방법대로 살아가며 필요한 글자를 모두 직접 가르쳤다. 우물이 떠오르면 관련된 모든 문장을 일일이 써가며 가르쳤다. 당신이 싫어하는 글자는 가르치지 않았을뿐더러 쓰지도 못하게 했다”라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이어 “네 조부는 군에서 다리를 다친 나한테는 집을 떠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라며 더 오래 사시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해준 그 말씀이 나를 살렸다. 내가 아버지 덕에 이만큼 살았다”라

    2023.11.28 14:36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말을 삼가라

    이름이 바뀐 걸 안 건 내가 고등학교 입학해서다.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서무실(지금의 행정실)에 호적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 뒤 고향의 면사무소에서 우편으로 보내온 호적등본에는 중학교 졸업장에 나와 있던 내 한자 이름 조성권(趙誠權)이 조성권(趙成權)으로 가운데 자가 ‘정성 성(誠)’자에서 ‘이룰 성(成)’자로 바뀌어 있었다. 호적등본을 앞에 놓고 주역(周易)에 밝은 아버지는 그리 길지 않게 바꾼 경위를 설명했다. 설명하기 전에 아버지는 “그 입을 다물라. 말을 삼가라”라고 주의부터 줬다. “한양조씨 26세손은 항렬자가 성(誠, 成)이다. 네 사주는 오행(五行)이 모두 들어있다. 흔치 않게 고루 갖춘 사주다. 어느 글자를 취하더라도 이름이 사주를 뒷받침하는 데 문제 될 게 없었다. 자식의 이름을 지으며 고심하다 살아가는 데 더 긴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정성 성(誠)자를 택했다.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신념은 지금도 변함없다. 자라는 너를 지켜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면서 먼저 말을 문제 삼았다. 패가망신할 말과 말하는 태도까지 5적(五賊)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나무랐던 게 이거다. 첫째 지적이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자식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말에 거짓이 드러나면 심하게 책망하고 절교하거나 거래를 끊었다. 몇 번 들키지는 않았지만, 송충이처럼 싫어하는 거짓말이 탄로 날 때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고 그에 맞는 벌을 줬다. 두 번째는 말이 많은 다언(多言)을 추궁했다. 실언과 변명했던 몇 가지 일을 들어 책망하

    2023.11.21 17:16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천년은 갈 일을 해라

    종합기획실 발령을 받고 출근하기 전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치챈 아버지가 어머니를 시켜 아래층으로 호출했다. 그제야 발령받은 걸 말씀드렸다. “걱정도 되겠지”라며 아버지는 술 한 잔을 따라 주며 마시라고 했다. 이어 “걱정은 내가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걱정은 사라진다. 할 수 없는 사람을 발령내는 건 인사권자가 걱정할 일이다”며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하면 된다”고 간단히 정리했다. ‘다만’이라고 허두를 잡은 아버지가 한참 뜸을 들이다 내놓은 말이다. “낯선 곳에 가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라. 그러면 떨어진 휴지나 문방구가 보일 게다. 그걸 줍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숙이면 보이고 낮추면 쉽게 주울 수 있다.” 아버지는 “어느 회사든 기획실은 그 조직의 핵심부서다”라고 전제한 뒤 ‘기획’이 뭐냐고 불쑥 물었다. 머뭇거리자 아버지의 설명은 이랬다. 기획(企劃)과 계획(計劃)은 둘 다 일을 이루기 위해 미리 생각하고 세우는 것을 의미하지만, 엄연하게 다르다. 기획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계획은 세부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기획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과 방향을 제시한다. 계획은 기획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어 “기획의 기(企)자는 ‘꾀하다’나 ‘도모하다’, ‘발돋움하다’라는 뜻이다. 파자하면 사람 인(人)자와 발 지(止)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지’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으로 ‘발’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 크게 ‘발돋움한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기’는 발돋움해서 멀리

    2023.11.14 16:43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천재로 태어난 아이, 둔재로 키우지 마라

    결혼하던 해 아들을 얻고 삼 년 뒤에 딸을 얻었다. 직원회식 중에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축하 잔을 물리치지 못해 만취한 채 아내가 입원한 산부인과에 갔다. 몸을 일으키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안쓰러워 머뭇거리자 어머니가 느닷없이 “왜? 딸 낳아 서운하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며칠 지나 아버지가 호출했다. 같이 앉은 어머니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고 눈짓했다. 아버지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 “바보 같은 놈”이라고 역정부터 냈다. 아버지는 “세 여인에게 상처만 주는 못난 짓을 했다. 사내답지 못하다”라며 당신이 기대했던 자식의 행동을 일일이 제시했다. 바라지하는 어머니에게 고마운 인사를 먼저 해야 했다. 아내의 건강을 살피고 애썼다는 말을 했어야 옳다. 아이를 안아준 뒤 순산(順産)을 축하하고 소중한 딸을 얻게 돼 ‘기쁘다’라는 표현을 반드시 해야 했다. 다음에는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병원 가는 길에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뭘 생각한 거냐?”며 나무랐다. 아버지는 “‘서운하다’라는 말은 실망할 때 쓰는 말이다. 아들을 바랐던 거냐?”고 물었다. 이어 “서운한 감정은 부질없다. 그건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라며 딸을 낳아 서운해하는 이유가 잘못임을 일일이 설명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기대에서 온 남아 선호사상은 헛된 거다. 아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딸은 아들보다 약하고, 결혼해 남편의 가족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걱정은 고정관념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는 거는 사회적 편견이다. 아버지는 “너 같이 지각없는 행동을 하는 아들을 나

    2023.11.07 11:38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뽐내는 글은 읽히지 않는다

    결혼 준비 때 벌어진 일이다. 예식장을 구하지 못해 안달 내다 지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구했다. 토요일 오후 3시와 4시 결혼식 중간에 3시 30분으로 끼워 넣었다. 30분 만에 결혼식을 끝낸다는 조건이었다. 예식장이 정해지니 일이 한번에 밀려들었다. 맘이 급해 청첩장은 전문업체에 가서 샘플을 보고 그 자리서 직접 문안을 만들었다. ‘저희 두 사람이 平素 저희를 아끼고 보살펴주시던 여러 어르신과 친지분들을 모시고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디 오셔서 축복해주시면 더없는 기쁨과 격려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장남 成權 올림.’ 그리고 욕심내 만년필로 글을 쓰고 동판으로 찍어 인쇄했다. 인쇄소는 이렇게 만드는 청첩장은 처음이라며 정성 들여 인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청첩할 지인들을 엄선했다며 300매만 달라고 했다. 인쇄된 청첩장은 드리기 전에 다시 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청첩장을 받은 아버지는 문안을 보자 바로 “이걸 나더러 보내라는 거냐”고 역정을 내며 내던졌다. 부아가 나서 내뱉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라는 말 때문에 아버지 말씀만 길어졌다.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적했다. 맨 먼저 “자식이 청첩인인 걸 아비가 보낼 수 있느냐?”며 격식성을 문제 삼았다. 두 번째는 “청첩장은 속성상 자랑하는 글이다. 그러니 완곡하게 간청하는 문투여야 한다. ‘우리 둘이 결혼식을 하니 오라’는 데 그치고 말았다. 진실성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아버지는 이어 “‘저희를’을 왜 두 번씩이나 썼냐? ‘平素’를 한자로 쓴 이유는 뭐냐?”고 캐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게 ‘글의 여울(灘)’이다. 읽는 이들은 거기서 저항을 느낀다. 글의 맥을 끊고 나

    2023.10.31 20:25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를 담당하던 여선생님이 작문 숙제를 내줬다. 자유 주제였다.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형식에 상관없이 써오라고 했다. 잘 쓰고 싶었다. 몇 날을 끙끙댔다. 숙제를 내야 하는 전 날밤엔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눈치챈 아버지가 사정을 듣자 대뜸 “잘 쓰려고 그러는구나”라고 했다. 이어 “자유 주제가 어렵다. 그래서 엄두가 안 나는 거다”라고 했다. ‘엄두’란 말을 그날 처음 배웠다. 엄두는 한자어 ‘염두(念頭)’에서 온 말이다. 염두에서 엄두로 변하는 현상을 변음이라고 한다. 한 몸에서 나온 엄두와 염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로 각기 변했다. 염두는 마음의 속이나 ‘생각의 맨 처음’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처럼 된 엄두는 흔히 부정적인 말과 어울려 쓴다. ‘감히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엄두가 안 난다’라는 말은 어떤 일을 시도하기가 두렵거나 어려운 경우에 쓴다. ‘엄두 나기’는 조선 시대에 쓰던 말로, ‘엄두’와 ‘나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아버지는 글 쓰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두려움 때문이다. 실패하거나, 실망하거나,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는 부족함이다. 네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도전하기 어렵다. 성공할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글을 써본 일이 없을 테고 쓴 글이 없으니 실패한 적이 없어 글쓰기가 두려운 것은 아니라고 아버지는 지적했다. “네가 잘 쓰려는 마음이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원인이다”라고 진단했다.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면, 극복하기 쉽다”라고 전제한 아버지는 “두

    2023.10.24 16:07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나서야 할 땐 반드시 나서라

    병원 원장실 유리창을 깼다. 하굣길에 학교 앞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축구를 하다 벌어진 일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친구들 여럿이서 공 뺏기를 하다 찬 공이 하필이면 그쪽으로 날아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이 들리자 우리는 모두 놀라 학교로 되돌아 도망쳤다. 이튿날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작 전에 어제 병원 옆에서 공놀이한 학생들을 불러 세웠다. “누군지 다 알고 있다”라는 말에 모두 나왔다. 병원장이 학교에 항의하며 학생들이 찾아와 사과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며 선생님과 같이 갈 학생들은 따라나서라고 했다. 나는 같이 가지 않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를 만나고 가는 걸 봤다. 아버지는 그날 바로 부르지 않았다. 긴 하루가 더 지나고서야 아버지가 불렀다. 아버지는 선생님이 찾아와 한 얘기를 알려줬다. "도망가는 학생 중에 병원 옆집 사는 아이를 봤다. 그래서 그 학생 담임 선생님을 찾았다. 병원장이 '옆집 학생이 낀 거니 사과만 받으라'고 했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사과하러 갈 때 같이 가지 않은 일과 어제 선생님이 다녀간 걸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점을 들었다. 변명해보라고 했다. 유리창을 깬 그 공은 내가 차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애를 잘못 키웠다"라고 자책하며 이전과 다르게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날 비장하게 하신 말씀은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는 "살아가며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지르거나 사고를 칠 수도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는 사과하거나 용서를 빌거나 사고를 수습해 같은 일이 더 벌어지지 않게 하는 지각이 있어서

    2023.10.17 14:42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힘 있는 말은 간명하다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는 소파에서 등을 떼고 내 말을 경청했다. 군 복무 중 포상휴가를 받아 아버지 회사에 들렀을 때다. 비서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전에 없이 내 말에 관심을 보이자 신나서 여러 얘기를 했다. 아무나 포상휴가를 받지는 않는다. 비록 일등병이지만 군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주로 하는 일은 군의 작전계획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자 더는 말할 게 없었다. 휴가 중에 쓸 용돈이나 얻으러 들렀으나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말을 마치자 아버지가 “네가 말하려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도 못 했다. 아버지는 “삶은 전쟁이다. 집이 아닌 내 삶의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찾아왔으면 특별히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다. 네가 한 말은 전장에서 할 게 아니다”라고 야단쳤다. 이어 아버지는 “목적 없는 말은 힘이 없다. 힘없는 말은 맥쩍다. 힘 있는 말은 간명하다”라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 브리핑은 송요찬 수도사단장이 전쟁 중 미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에게 한 영어 브리핑을 꼽는다”라고 예를 들었다.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송 사단장의 전황 브리핑은 이랬다. “이게 대한민국 지도입니다. 이쪽이 일본과 접한 동쪽, 중공과 접한 이쪽이 서쪽, 소련과 맞댄 북이 중공군과 남으로 침공했습니다. 각하가 있는 곳은 여깁니다. 적과 대치한 여기가 38선입니다. 현재 아군 사기는 100%, 계속 진군 중입니다.” 아버지는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 해야 한다. 브리핑은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며 “아이젠하워는 브리핑을 받고 송 장군에게 ‘내 군 생활

    2023.10.10 17:12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익숙함은 오직 연습에서 나온다

    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다. 음력으로 2003년 9월 23일. 올해가 20주기다. 부음은 거래처와 점심에 폭탄주를 많이 마셔 잠깐 졸고 나서 들었다. 더 사실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웠다. 본가로 가는 차 안에서 전화로 장례식장 등 장의 절차 논의를 끝냈다. 아버지는 당신의 방에 언제나처럼 그대로 누워계셨다. 눈을 뜬 채 미간을 약간 찌푸린 모습이 당장 일어나 지난주에 오지 않은 것을 질책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못 할 짓이 사람 기다리는 걸 텐데 찾아뵙질 못한 게 후회됐다. 뒤이어 도착한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눈을 감겨드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중풍으로 오른쪽을 쓰지 못하는 아버지는 5년째 누워 지냈다. 말씀하지 못해 주로 한자로 필담(筆談)을 나눴다. 머리맡의 잡기장에는 나와 지난주에 나눈 뒷장에 한 글자만 쓴 장이 더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자다. 남기고 싶은 마지막 필담은 그렇게 유언이 됐다. 누워서 종이를 보지 못하고 떨리는 왼손으로 쓴 글씨는 글자라기보다 차라리 그림이었다. 획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나는 바로 읽었다. ‘익힐 습(習)’자였다. 성격 급한 아버지를 닮은 속필(速筆)이자 달필(達筆)을 나는 언제나 글자를 마무리하기 전에 알아맞혔다. 한참이나 그리듯 썼을 그림 같은 글자가 뭘 뜻하는지는 그래서 대번에 알아봤다. 워낙 여러 번 말씀하셨던 글자였기 때문이다. 틈날 때마다 아버지가 가장 많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여조삭비(如鳥數飛)’다. 그래서 가장 많이 들은 성어다. ‘셀 수(數)’ 자는 여기서는 ‘자주 삭’으로 읽는다. ‘새가 자주 하는 날갯짓과 같다’라는 말이다. 쉬지 않고 배우고 익힘을 비유한 말이다. 아

    2023.10.04 10:00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때 추석날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상차림을 두고 크게 다퉜다. 끝내 차례를 모시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설된 차례상을 점검하던 큰아버지가 “배는 왜 안 올리느냐?”고 했다. 독촉하는 큰소리가 나자 배 한 개를 담은 접시가 상에 받쳐 들여왔다. 큰아버지는 대뜸 “왜 한 개냐”고 했고, 더 큰소리가 나자 큰어머니가 세 개 중 하나가 썩은 게 있어 빼다 보니 홀수를 맞춰야 해 하나만 올렸다고 설명했다. 큰어머니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책하는 더 큰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괜찮습니다.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또 어떻습니까. 썩은 놈을 도려내려면 배 세 개를 모두 그만큼 도려내고 상에 올리면 되잖아요”라며 말을 거들었다. 큰아버지는 바로 “정신 나간 소리”라고 일축하며 당장 배를 구해다 상을 올바르게 차리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버지는 전통은 상황에 따라 변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절충안으로 사과와 배, 감을 모두 한 개씩만 놓자고도 했으나 큰아버지는 “차례는 정성이다. 정성을 들이지 않은 차례는 안 지낸다”라며 건넌방으로 나가버렸다. 화난 아버지는 집에 가자며 따라나서라고 엄명했다. 해가 이제 막 뜨는 동네를 벗어나며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는 혼잣말해댔다. “형편이 닿지 않으면 종이에 ‘배’라고 써서 올리거나 물만 떠놓고도 지내면 되는 거다. 배가 안 나는 지방에서는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가 길게 설명한 과일을 상에 올리는 이유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

    2023.09.26 13:34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효는 실천이다

    인삼을 쪄 꿀에 재서 오래 두고 먹는 ‘인삼 꿀절임’을 안 건 대학 다닐 때였다. 해 뜨기 전 곤한 잠을 깨운 건 아버지였다. 가족들 깨지 않게 조용히 따라오라고 했다. 차를 타고 간 게 경동시장. 가게 문을 열기 전이라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버지는 이전부터 아는 집처럼 쉽게 인삼가게를 찾아들어 갔다. 주인이 문 여는 걸 도와주며 꿀에 잴 인삼을 달라고 했다. 주인은 바로 “어제 들어온 최고 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달라는 대로 대금을 치렀다. “어머니 드릴 약이라 깎으면 부정 탑니다”라자 주인이 고맙다며 대신 인삼을 따로 좀 싸줬다. 어머니에게 할머니께 드릴 거라고 하자 마뜩잖은 표정으로 인삼을 씻고 찌면서 내내 군소리를 했다. “인삼은 이렇게 크고 굵은 거보다 좀 가늘고 작은 게 약효가 더 있다. 이 많은 걸 노인네가 은제 다 드시겠냐? 옛말에 인삼 많이 먹으면 죽을 때 고생한단다. 한 푼도 안 깎았지? 이런 거는 인삼을 아는 내가 사야 제대로 된 실한 놈을 사는 건데 형편 모르는 양반이 헛돈 쓴 거다”라며 아쉬워했다. 고향 큰댁에 계시는 할머니께 드리려고 가는 보자기에 싼 인삼 꿀절임은 몇 걸음 걷고 나서 손을 번갈아 들 만큼 무거웠다. 보자기를 풀고 아버지가 인삼을 꺼내 할머니 입에 넣어드렸다. 연신 웃으며 “나이 든 분들 면역력을 키우는 데는 이게 최고”라고 몇 번이나 말씀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는 흡족해하며 고사성어 ‘육적회귤(陸績懷橘)’을 입에 올려 당신의 어머니께 드린 인삼 꿀절임의 의미를 새겼다. 이 성어는 육적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육강(陸康)과 함께 당대의 명문거족 원술(袁術)을 만났을 때 육 씨 부자에게 귤

    2023.09.19 14:44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가족이 먼저다

    회사가 부도가 나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해 경영권을 넘기고 나서 아버지는 심한 화병을 앓았다. 믿었던 부하 직원의 배신에 몸서리쳤다. 분노나 답답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꾹 눌러 담았다가, 그 화가 삭아 비틀어져서 생긴 심화병(心火病)이다. 지나칠 정도로 화를 잘 내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가족들이 가까이 가질 않았다. 언제나 독상(獨床)을 받아 혼자 드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다. 가끔 내가 겸상을 해도 많이 불편했다. 아버지는 약도 별로 없는 울화병(鬱火病)을 겪어냈다. 밤새 불이 켜진 아버지의 방, 불면의 밤을 지켜보는 가족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근무하는 남동생이 TV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사 보냈다. 다른 가족들도 좋아했지만, 특히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오랜만에 두레반에서 저녁밥을 먹을 때 어머니가 “냉장고에 넣은 김치가 참 맛있다. 냉장고가 커서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다. 그때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건넌방으로 가서 나를 불렀다. 불길이 안 들어가 냉골이라고 투덜거린 게 기억났던지 방을 치우라고 했다. 온 방에 불을 켜고 밥 먹던 가족들을 불러 건넌방 구들장을 뜯어내고 새로 깔았다. 시멘트로 방바닥 마무리를 끝냈을 땐 이미 밤이 이슥해서였다. 이튿날 새벽부터 집 고치는 크고 작은 공사는 계속됐다. 안방으로 물이 새는 지붕에는 내가 올라가 기와를 갈아 끼웠다. 모든 창문은 대패로 깎아내 부드럽게 열리게 고쳤고, 깨진 계단은 모두 수리했다. 집을 새로 짓는 것처럼 대대적인 집안 수리공사는 한 달이나 계속됐다. 손 안 본 데가 없을 정도로 수리를 마친 아버지는 느닷없이 마루방에 걸려있

    2023.09.12 10:50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환경 탓하지 마라

    언덕에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대학 다닐 때다. 이삿짐 오기 전에 먼저 온 아버지는 지붕만 빼고는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문이란 문은 다 여닫아보고 수도꼭지는 물이 잘 나오는지를 살폈다. 집 감정하는 사람처럼 물을 부어 가며 하수구들도 빼놓지 않고 점검했다. 집 뒤 좁은 골목까지 둘러본 뒤, 이중으로 된 비탈진 텃밭을 살피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집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실개천 옆의 담벼락도 유심히 보았다. 한참 지나 아버지가 밖에서 불렀다. 아버지는 지팡이로 실개천을 건너는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개천 바깥쪽으로 몇 가닥 나무뿌리가 드러나 보였다. 나무뿌리는 줄기가 되어 담벼락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야 그게 오동나무인 줄 알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여서 마당 한쪽을 넓은 이파리로 그늘을 만들었다. 의자를 갖다 놓고 앉자마자 아버지는 “참 멋진 벽오동(碧梧桐)이다”라고 확인하며 “봉황은 벽오동에만 둥지를 튼다고 해 조선 시대에 왕의 상징으로 많이 심었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화투에서 ‘똥’이라 부르는 건 오동나무 잎이다. 화투가 일본에서 넘어오면서 오동잎을 완전히 검게 칠해 못 알아볼 뿐이다. ‘똥광’의 새도 닭이 아니라 봉황이다”라고 설명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설명은 계속됐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습기와 불에 잘 견딜뿐더러 가벼우면서도 마찰에 강해 가구를 만드는 좋은 목재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를 대비하기도 했다. 소리를 전달하는 성질이 뛰어나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다. 거문고나 아쟁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로 제작

    2023.09.06 09:25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초심을 잊지 마라

    국을 마실 때 아버지는 국그릇을 양손에 받쳐 들었다. 비운 밥그릇에 물을 부어 마실 때도 꼭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마셨다. 결혼해서 부모님과 같이 살 때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예물로 해온 백자 반상기(飯床器) 그릇을 쓸 때만 그랬다. 다른 그릇으로 마실 때는 한 손만 썼다. 겸상할 때만 그러나 했더니 독상을 받을 때도 그렇게 했다. 궁금해서 여쭸다. 아버지는 “봤구나! 일부러 그렇게 한다. 작가가 도자기를 빚을 때 손길처럼 그릇을 감싸 안아 마시면 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어서다. 또 요즘 흔치 않은 투박한 백자 밥그릇을 선물한 며느리의 초심도 읽을 수 있어서다”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예물은 시댁에 대한 예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거다. 도자기는 흡수성이 낮아 음식물이 잘 묻지 않고, 내구성이 강해 오래도록 쓸 수 있어 마음에 든다. 조선의 백자를 재현하는 집이 흔치 않은데 용케 구한 그 마음 또한 이쁘다. 더욱이 예부터 반상기는 시부모의 식사를 책임지겠다는 뜻을 나타내며 공경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잖느냐. 매끼 밥을 먹듯 며늘아기의 초심을 그릇에 담아주어 가득한 그 효심을 느낀다”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좋아했다. 자리를 옮긴 아버지는 대뜸 “원인 없는 결과 없고 근원 없는 현상 없다”라는 말을 꺼냈다. 이어 “성급한 사람들은 흔히 결과와 현상만 보고 방안을 찾고 문제를 풀 궁리만 한다. 그렇게 해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며 일을 해결하려면 근원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다. 아버지는 근원의 원(源)자는 물 수(氵) 자와 근원 원(原)자가 결합한 글자다. 원(原)자는 언덕(厂)과 샘(泉)을 함께 그린 것으로 바위틈 사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2023.08.30 09:14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유혹을 이기는 힘은 목표에서 나온다

    종로 담배 가게 골목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담배를 배워 그날 처음 사던 날이다. 나오다 골목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서로 놀랐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다.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집에서 만난 아버지는 말씀이 없었다. 며칠 뒤 책상 위에 신문 기사 스크랩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거였다. 말씀하실 게 있으면 그렇게 신문 스크랩을 책상에 종종 올려놓았다. 스크랩은 히말라야산맥에 사는 ‘할단새’라는 전설의 새 얘기였다. 날개에서 불을 뿜는 이 사나운 할단새도 대설 무렵만은 눈보라에 갇혀 꼼짝 못한다. 혹독한 추위가 몰리는 밤에 할단새는 떨면서 늘 ‘날이 새면 꼭 집을 지으리라’라고 굳게 마음먹지만 따뜻한 낮에는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 그렇게 낮에는 즐기다가 밤이 되면 추위에 떨며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크랩을 들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할단새 전설은 인간에게 다의적(多義的) 교훈을 준다. 그 기사는 할단새의 망각을 얘기하지만 틀렸다”고 했다. 이어서 “새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망각은 72시간이 지나서 시작된다. 다음 날 아침이면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결심은 아직 살아있어 실행하면 된다. 저 전설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는 해야할 본분이 있는데도 즐기는 데 정신이 팔리는 유혹을 경계한 데 있다”라고 지적했다. 할단새 전설과 관련지어 인용한 고사성어가 ‘다기망양(多岐亡羊)’이다. 여러 갈래로 갈린 길에서 양을 잃는다는 말이다. 학문에는 길이 많아 진리를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양자(楊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2023.08.22 16:38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의지를 품은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그해 12월 31일 큰 아이가 태어났다. 사무실에서 송년회 중에 전화를 받았다. 늦장가 간 그해 아들을 얻었다고 누가 얘기하자 엄숙하던 송년회가 축하 술잔이 오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만취해 동네 산부인과 병원에서 본 내 첫 자식은 그저 핏덩이였다. 신년 연휴라 이튿날 아버지는 바로 퇴원하라고 했다. 언덕길이 내려다보이는 마당에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싸안고 온 당신 손자를 포대기를 들추고 빼꼼히 들여다봤다. 짐을 들여놓고 마당으로 나온 내게 아버지는 마침 내리는 눈을 길조(吉兆)라며 서설(瑞雪)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비와 눈을 비교하면서 눈이 더 좋다며 기분 좋아했다. 눈이 내리면 하늘이 맑아서 보기 좋다. 눈은 비보다 녹는 시간이 오래 걸려 땅에 더 오래 머문다. 둘 다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하지만, 눈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아버지는 “손자가 집에 오는 날 눈이 내린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축하 선물이다. 손자가 눈의 속성을 닮아 모든 것을 감싸주며 자라기를 바라는 희망의 메시지다”라며 기쁨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손자는 내 아들의 아들이다. 대를 이어가는 존재다. 사랑과 희망의 대상이다. 내가 다시 한번 부모가 될 수 있으므로 새로운 시작의 뜻이 있다”라면서 새 각오와 희망을 다지게 한다고도 했다. 이어 아버지는 다섯 가지 유념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설명했다. 이런 깨우침이다. 자식은 독립적인 인격체다. 그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라. 자식은 네 재산이 아니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 자식에게 네 희망을 얹지 마라. 아이는 네 삶에 큰 선물이다. 아버지는 “네 자식에게 아버지인 너는 가장 중요한 멘토이

    2023.08.16 17:25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그렇게 할 거면 그만둬라"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1993년 8월 12일에 시행됐다. 탈세, 조세포탈, 자금세탁, 불법금융거래 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도입은 정부가 했지만, 시행은 거래가 일어나는 금융기관 몫이다. 은행의 대외소통 창구를 담당한 나는 일어난 모든 거래상황을 집계하고 보고했다. 시행 첫날부터 야근이 일상인 날이 이어졌다. 취합된 보고가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금융실명제는 내가 모두 한 것 같았다. 야근을 마치고 술에 취해 귀가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며칠 지나 집 앞에서 손주들을 보고 돌아가는 부모님을 만났다. 길거리서 우쭐한 기분에 금융실명제에 대해 몇 마디 하자 아버지가 따라오라고 호령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본가에 불려간 내게 아버지는 "네가 뭘 했다는 거냐?"고 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 세 가지에 답을 기다리지 않고 "건방 떨지 마라"며 꿇어앉으라고 했다. 술김에 들었지만, 기억이 생생한 첫마디가 고사성어 '득의양양(得意揚揚)' 이다. '뜻을 얻어 날아오를 듯하다'라는 말이다. 원하던 바를 이루어 매우 만족한 모습을 뜻한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온다.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3대의 군주를 섬기며 존망 받는 안영(晏嬰)이 수레를 타고 출타했다. 그 수레 모는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엿보았다. 마부는 머리 위에 펼친 큰 우산 아래서 채찍질하며 네 필 말을 몰았다. 의기양양하게 매우 흡족한 모습이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마부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자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이 채 안 되는데도 재상이 되어 제후들에게 명성을 날립니다. 바깥에서

    2023.08.08 16:25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친구는 울타리다

    학교에 신고 간 노랑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서울 다녀온 아버지가 사다 준 노랑 고무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고무신만 보았던 나는 학교에는 신고 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당부했지만 듣지 않고 이튿날 바로 신고 갔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노랑 고무신을 모두 만져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 집에 갈 때 텅 빈 신발장을 보고서야 잃어버린 걸 알았다. 여자 친구가 되돌아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를 지목하며 품에 뭔가 숨기고 수업이 끝나기 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줬다. 맨발로 집에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심하게 나무랐다. 여자 친구가 귀띔해준 얘기를 하자 어머니가 나를 끌고 신발을 찾아 나설 때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가지 말라며 내게 “그 친구가 가져간 걸 네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의심하면 안 된다. 그 친구가 가져간 게 설사 밝혀지더라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렇게 잊힌 노랑 고무신이 소환한 건 아버지다. 고등학교 다닐 때다. 고향 큰집에서 추석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불쑥 그 친구를 만나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졸업한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에 살던 옛집에 가보자고 앞장섰다. 옛집의 뒷담 구실을 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한참 둘러본 아버지가 둔덕에 앉아 꺼낸 고사성어가 ‘송무백열(松茂柏悅)’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문학가 육기(陸機)가 쓴 탄서부(歎逝賦)에 나온다. 그가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쓴 데서 따온 말이다.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 준다

    2023.08.01 17:08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거짓이 거짓을 부른다

    “나는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리를 다쳐 뛰어 도망칠 수 없어서다. 거짓말은 곤란한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기만의 술책일 뿐이다.” 자주 하신 아버지의 저 말씀을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외출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남동생과 내가 호박엿 먹는 걸 보고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했다. 내가 얼른 “지난번 오신 손님이 주신 용돈으로 샀다”라고 했다. 아버지 책상 위에 있는 돈으로 산 걸 둘러댄 거짓말은 이내 들통났다. 엿장수가 찾아와 “이 집 아들 둘이 큰돈을 가져왔길래 엿을 먼저 줬다”며 어머니에게 거스름돈을 내밀고 나서다. 무심결에 한 거짓말의 벌은 혹독했다. 아버지는 바로 옷을 벗으라고 했다. 팬티까지 다 벗기고 내쫓았다. 벌거숭이인 채로 둘은 초겨울의 논 한가운데 서서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소문이 그새 퍼져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해 질 녘에 어머니가 아버지 눈을 피해 울고 있는 둘을 싸안고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화난 아버지는 살림의 반은 두들겨 부쉈다. 방에 들어왔어도 오들오들 떨며 독한 한기를 느꼈다. 이튿날부터 연이틀에 걸쳐 아버지는 거짓말하지 말 것을 다짐받았다. 거짓말에 대한 가르침은 훗날에도 계속됐다. 아버지는 “사람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 거짓말한다. 하루에 한 말의 2%는 거짓말이다”라는 자료를 보여줬다. 거짓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대부분은 “자기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다”라고 분석한 아버지는 “거짓말은 해법이 아니라 감출 뿐이다. 감추는 행위가 가장 나쁘다.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확신시켜 진실을 은폐하는 속임수다”라며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첫

    2023.07.25 18:05
  •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갈등 해결의 열쇠는 공감력이다

    결혼 전날 밤 아버지가 시부모와 같이 살겠다고 한 내 아내를 칭찬한 뒤 한 얘기다. 들려준 옛 얘기는 이렇다. 아내가 남편한테 늙은 시어머니를 느닷없이 장에 내다 팔라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지게에 업고 장날에 팔러 갔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고운 반지와 맛있는 국밥을 사드리며 “집에 어미가 사드리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못 팔고 돌아오자 성화를 부리는 아내에게는 “몸이 야위어서 거들떠보지 않더라. 몇 가지 보신 될 만한 걸 사 왔으니 살찌워 다음 장날에 팔겠다”라고 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살을 찌우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 받쳤다. 다음 장에도 팔지 못하고 온 남편은 아내에게 “아직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해준 음식이며 아들이 대신 사준 반지 등을 자랑했다. 모두 며느리가 해준 거라며. 동네에 며느리 칭송이 자자했다. 칭찬을 여럿한테 들은 아내는 더욱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셨다. 볼살까지 오른 어머니를 장날에 팔러 나가려 하자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했다. 팔지 말라”며 울며 매달렸다. 아버지는 “민간에 오래 전해지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중재법이다”라면서 그래도 오래 입에 올려진 이유를 고부간 갈등에서 아들이자 남편인 중간자 역할의 중요성 때문으로 해석했다. 아버지는 “이제 며느리가 이 집에 들어와 같이 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다른 문화, 가치관, 경험이 있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게 걱정이다. 네가 중재자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이쪽에 얘기할 땐 이편이 돼야 하고 저쪽에 얘기할 땐 그쪽 편이 돼야 한다. 너는 마중물이다. 남편은 내 편이고 아

    2023.07.1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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