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 속 한 장면 같다. 황량한 사막과 버러진 밀밭, 공장 폐수로 뒤덮인 사해(死海) 등 장애물이 표시된 거대한 지도가 길잡이다. 각 지역을 확대해 묘사한 유화와 파스텔화가 관람 동선에 따라 배치됐다. 관객은 작품에 적힌 '규칙'을 따르거나, 그림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퀘스트'를 수행하며 세계관에 빠져든다.뉴미디어아티스트 그룹 방앤리의 개인전 '카나리아 배포: 모든 거짓말에 대한 증명'이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렸다. 방앤리는 방자영(47)·이윤준(53)으로 구성된 2인조 작가 그룹이다. 환경문제와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 이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한 고민으로 뭉친 이들은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20여년간 합을 맞춰왔다.방앤리는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설치작업으로 국내외에 알려졌다. 대학생 시절인 1997년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함께 유학하며 인연을 키웠다. 2006년 듀오를 결성한 뒤 관객참여형 무대, 기술 융합 프로젝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독일의 복합예술센터 ZKM를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중국 등지의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전시 제목의 '카나리아 배포'는 정식 출시 전인 소프트웨어를 일부 사용자한테 미리 공개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뜻한다. 방앤리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건 미술 전시회와 '워킹 시뮬레이터' 형식의 결합이다. 워킹 시뮬레이터는 플레이어의 '걷기와 보기'라는 행동을 중심으로 주변에 얽힌 이야기를 파헤치는 게임 장르다. 전시장의 모든 회화와 설치, 영상 작업이 하나의 줄거리를 구성한다는 얘기다.이번 전시는 방앤리
제3세계로 불리는 나라들이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곳에서 전쟁과 혁명, 포스트 식민주의로 신음했다. 제3세계 시민의 아픔을 들려주는 전시가 열렸다.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과들루프 출신 토미야스 라당(31), 조국 이란에서 쫓겨나 미국에 정착한 작가 니키 노주미(82)가 그 주인공이다. 춤으로 승화한 식민지의 아픔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는 라당의 첫 번째 아시아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올드 소울-뉴 소울(오래된 영혼-새로운 영혼)’. 여러 세대에 걸친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뜻을 담았다.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대서양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의 섬나라 과들루프 역사를 알고 가는 편이 좋다. 영국과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표기된다. 라당의 고향으로 두 개의 큰 섬(바스테르와 그랑테르)이 주요 영토다.그의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들루프의 상처가 담겨 있다. 전시장 1층에 배치된 두 점의 타악기 나뭇조각이 이를 보여준다. 할아버지부터 3대째 목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의 가족 내력을 표현한 작품이다. 카리브해의 전통춤은 라당 작품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2~3층에 전시된 5점의 회화도 춤추는 인물을 묘사한다. 그는 “임산부의 태동부터 시작하는 몸짓은 인간이 처음 경험하는 언어”라며 “춤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당은 ‘라이벌’이라는 단편영화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바닷가에서 마주친 사내 두 명이 몸싸움을 벌이는 내용이다. 싸움은 두 명 모두가 ‘어떤 거대한 힘’의 피해
"큰 암탉을 죄다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어 느르미(찌거나 구운 재료에 즙을 부은 음식)처럼 하고 간장, 기름거리한 깨소금, 밀가루 조금, 후추, 파 넣고 재웠다가 익게 구어 즙 맛 나게 하여 쓰라"순조비 순원왕후(1789~1857)를 모시던 상궁 최혜영이 한글로 쓴 '닭찜법'의 일부다. 재료의 손질부터 조리기법, 양념에 대한 내용이 현대의 요리책 못지않게 상세하다. 오늘날 한식의 원천이자 '파인다이닝' 격인 궁중요리는 이처럼 체계적으로 유지·전승돼왔다.조선 왕실의 궁중음식 문화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렸다. 20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에선 재료 공수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여러 기록물과 그림, 그릇, 조리도구, 소반 등 200여점의 유물과 당시 수라상을 재현한 모형을 아우른 전시다.임금의 건강은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궁궐 내 식사를 책임지는 기관인 '사옹원'을 따로 두고 관리한 이유다. 요리를 전담하는 숙수를 비롯해 임금의 식단을 관리하는 내의원, 식자재를 검수하는 내시부가 두루 참여했다. 상궁과 나인들도 간단한 음식을 만들거나 이를 담아 옮기는 등 손을 보탰다.전시는 요리의 모든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이 첫 단추다. 강원도 고성군과 통천군에서 소금에 절인 연어를, 제주에서 특산품인 감귤을 각각 진상하는 과정이 기록과 그림 자료에서 확인된다.부엌처럼 꾸며진 제1전시장 가운데 공간엔 수라간에서 활용한 조리기구를 전시했다. 개회기에 서양에서 들여온 요리 지식을 결합한 거품기가 특히 눈에 띈다. 요
현대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대부분 그들 몫이었다.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 중심의 '제1세계', 소련의 계보를 이은 '제2세계'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갈등 등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전 세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혀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제3세계 시민들의 입장은 어떨까. 전쟁과 혁명, 포스트 식민주의 사회를 직접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시가 열렸다.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과들루아 출신인 토미야스 라당, 조국 이란에서 쫓겨나 미국에 정착한 작가 니키 노주미가 그 주인공이다.춤으로 승화한 식민지 시대의 아픔"여기 당신을 위한 이야기가 있다"는 내레이션으로 영상은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마주친 사내 두 명이 주택가와 버스 정류장, 시청을 오가며 몸싸움을 벌인다. 이들이 다투는 이유는 재산과 출신을 증명하는 한 장의 서류 때문으로 보인다. 막상 둘이 똑같이 '어떤 거대한 힘'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뒤에야 싸움을 멈추고 화해한다.화려한 현대무용을 연상케 하는 영상작업은 토미야스 라당(31)의 '라이벌'(2023). 지난 2021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촬영한 작가의 첫 단편영화로, 작가가 직접 무용수로 등장한다. 두 명의 주인공은 각각 작가의 고향 과들루프를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섬인 바스테르와 그랑테르를 상징한다.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들루프의 상처를 빗댄 것이다.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과들루프의 역사를 알고 가는 편이 좋다. 과들루프는 대서양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 나라다. 1493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뒤 사탕수수와 카카오 재배지로
미술시장 규제가 줄어들며 한국 작가들의 국제무대 진출이 늘어날 것이란 해외 미술계의 전망이 나왔다. 정부가 올 하반기 미술진흥법과 문화유산법을 각각 제·개정하면서 발이 풀린 한국 작가들의 '몸값'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영미권 미술전문 매체 아트뉴스페이퍼는 최근 한국의 미술시장 규제 완화를 두고 "한국 예술가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기회"라고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어 "그동안 한국 내에서만 활동하던 작가들한테도 해외 진출의 발판이 마련됐다"며 "조만한 한국 작가들의 새로운 경매 기록이 나올 것"으로 내다봤다.이러한 분석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1946년 이후 제작된 작품의 자유로운 국외 반출과 수출이 가능해진 게 그중 하나다. 지난 7월 개정된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문화유산법) 시행령'을 통해서다. 개정된 법령에 따르면 이중섭(1916~1956)·박수근(1914~1965) 등 그동안 엄격한 관리 대상이던 거장들의 말년 작품 일부도 해외 반출·전시·거래가 허용된다.그동안 '제작된 후 50년 이상이 지난 작품'(1970년대 중반 이전 제작된 작품) 중 예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은 일반동산문화유산으로 분류됐다. 일단 일반동산문화유산이 되면 국외 반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이번 법령 개정으로 규제 대상이 되는 일반동산문화유산의 인정 범위가 20년가량 줄며 숨통이 트인 셈이다.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작품 약 200점의 국외 반출이 금지됐다. 지난해 프리즈 런던의 '마스터스' 섹션에서 고(故) 곽인식 작가의 1962년 작품의 출품이 무산된 것이 단적인 예다
한평생 방랑한 한 화가의 얘기다. 연이은 전쟁으로 일본 도쿄와 부산을 옮겨 다녔고, 지독한 생활고로 이른 나이에 여동생을 잃었다. 두 차례 결혼과 이혼도 겪었다.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곤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로 떠났다. 말년에 눈을 감은 곳도 고향이 아니라 미국 땅이었다.천경자 화백(1924~2015·사진)이 100년에 걸친 여행을 마치고 고향인 전남 고흥에 돌아왔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찬란한 전설, 천경자’가 그의 생전 생일이던 11일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삶의 고달픔을 꽃과 여성, 모성으로 승화한 그의 회화 58점을 중심으로 유품 등 총 100여 점을 전시한 회고전이다.이번 전시는 천 화백의 차녀인 수미타 김(김정희·70) 미국 몽고메리칼리지 교수가 직접 기획했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선정하고 관련된 사진과 친필 편지 등으로 설명을 보탰다. 김 교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이 바치는 꽃다발이자, 화단의 거물로 거듭나 돌아온 작가를 고향이 맞이하는 잔치”라고 말했다.고흥의 풍경과 정서는 작가의 자양분이 됐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는 늘 그의 혀끝에 맴돌았고, 작업실에선 외할아버지한테 배운 판소리 가락이 흘러나왔다.작가의 본명은 천옥자다. 부모가 지어준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거울처럼 살겠다며 ‘경자(鏡子)’라고 개명했다. 새로 지은 이름이 암시하듯 작가는 평생에 걸쳐 수십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길례언니Ⅱ’(1982)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하얀 챙 모자를 쓴 여성 인물화다. 딸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던 작가는 초등
한평생 방랑했던 한 화가의 얘기다. 연이은 전쟁으로 일본 도쿄와 부산을 옮겨 다녔고, 지독한 생활고로 이른 나이에 여동생을 잃었다. 두 차례 결혼과 이혼도 겪었다.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곤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로 떠났다. 말년에 눈을 감은 곳도 고향이 아닌 미국 땅이었다.고(故) 천경자 화백(1924~2015)이 100년에 걸친 여행을 마치고 고향인 전남 고흥에 돌아왔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찬란한 전설, 천경자'가 그의 생전 생일이던 11일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삶의 고달픔을 꽃과 여성, 모성으로 승화한 그의 회화 58점을 중심으로 유품 등 총 100여점을 전시한 회고전이다.이번 전시는 천 화백의 차녀인 수미타 김(김정희·70) 미국 몽고메리칼리지 교수가 직접 기획했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선정하고 관련된 사진과 친필편지 등으로 설명을 보탰다. 김 교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이 바치는 꽃다발이자, 화단의 거물로 거듭나 돌아온 작가를 고향이 맞이하는 잔치"라고 말했다.고흥의 풍경과 정서는 작가의 자양분이 됐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는 늘 그의 혀끝에 맴돌았고, 작업실에선 외할아버지한테 배운 판소리 가락이 흘러나왔다. 어릴 적 봉황산에서 처음 본 남해의 빛깔은 그 특유의 색채를 구성하는 재료가 됐다. 작가가 1956년 국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풍경' 등에서 세련되고 대담한 색감이 두드러지는 이유다.작가의 본명은 천옥자다. 부모가 지어준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경자(鏡子)'라고 개명했다. 매끄러운 옥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鏡)처럼 살기로 결심한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은 점점 작아졌다…결국 수개월 후에 인물상은 못 크기로 줄어들어 몇 배나 더 큰 받침대 위에 고립돼 불안정하게 서 있게 됐다.”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평전 <자코메티: 영혼의 손길>에서 저자 제임스 로드는 이렇게 썼다. 1947년 무렵부터 자코메티는 ‘작은 조각’을 고집했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그 핵심만 담으려다 보니 조각이 작아진 것이다. 가느다란 못 크기에 불과한 그의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작가를 ‘거장(巨匠)’ 반열에 올려놨다.때론 작은 작품일수록 거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법.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중견 화랑 ‘Various Small Fire’(VSF)에 한국 작가들이 모여든 이유다. ‘언박싱 프로젝트 3.2: 마케트’란 이름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김윤신, 권오상, 신미경 등 조각가 28명이 각각 30㎝ 내외의 ‘작은 조각’을 선보였다.언박싱 프로젝트는 상자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선별해 보여주는 전시 기획이다. 변현주 큐레이터와 채민진 아트어드바이저가 기획했다. 참여 작가들에게 제한된 틀에 맞춰 각 프로젝트의 주제에 맞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의뢰하고, 이를 ‘언박싱’(개봉)해 전시하는 방식이다.전시된 작품들의 공통분모는 선반 위에 얹을 정도로 작다는 점이다. 전시 제목의 ‘마케트(maquette)’는 대형 조각을 만들기 전 미리 작은 크기로 제작해 형태를 가늠하는 습작을 뜻한다. 변현주 큐레이터는 “압도적 크기의 작품이나 스펙터클이 주는 ‘감탄’보다 작은 작품이 주는 감동이 더 오래 남았던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참여 작가들의 존재
“악장 간 연결이 매끄러워 전체적인 통일감이 뛰어났습니다. 다비드 라일란트의 지휘 아래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더욱 빛났고 슈만의 복잡한 감정을 잘 전달해 줬습니다.”아르떼 회원 ‘capriccioso14’는 최근 아르떼 홈페이지에 이 같은 내용의 후기를 남겼다. 지난 한 달간 아르떼가 구독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회 티켓 이벤트에 당첨된 것.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난달 26일 열린 공연에 다녀온 그는 ‘슈만, 교향곡 4번’을 감상한 소회를 적었다.세계신문협회(WAN-IFRA)가 한국경제신문 아르떼 프로젝트를 베스트 수익 다각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한 데는 아르떼만의 차별화된 이벤트가 큰 몫을 했다. 고품격 공연·전시 무료 이벤트를 지속적으로 열어 고정 회원층을 형성하고, 더 많은 이가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공공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다.아르떼 홈페이지와 앱에는 월평균 15만 명이 찾는다. 클래식 음악 등 예술 애호가들이 평소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문화 플랫폼이 없던 국내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과 미국, 아시아 각 지역 통신원을 포함해 120여 명의 필진과 기자들이 매일 다채로운 평론과 리뷰, 뉴스 등을 전하면서 온라인 정규 회원은 약 2만 명에 달했다.아르떼는 지난해 5월 출범한 뒤 현재까지 총 283건의 이벤트를 진행했다.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과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내한 공연 등 ‘매머드급’ 이벤트는 물론 현대무용, 국악, 연극,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수시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
미국 대선 열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르던 지난 5일(현지시간) 한 장의 이미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산했다. 성조기를 든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어깨에 인기 팟캐스트 진행자 조 로건이 목마를 타고, 그 위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올라탄 모습이다. 'NFT(대체불가능토큰) 미술의 황제'로 불리는 '비플(Beeple)'이 개인 SNS 계정에 공개한 신작이다.비플은 이번 작품을 올리며 '라스트 푸시(LAST PUSH·막판 스퍼트)'라는 문구를 남겼다.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이른바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머스크는 이번 대선에서 정치자금 모금 단체 '아메리카 팩'을 직접 설립·운영해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지원했고, 로건은 4일 트럼프 후보에 대한 공식 지지를 표명하며 지난 수년간 고수했던 '트럼프 반대론'을 번복했다.작품이 공개되자 머스크는 자신이 소유한 SNS 엑스(X·옛 트위터)에 이를 공유했다. 비플의 게시물은 이후 엑스와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하루 만에 8000건 이상 리트윗(재공유)됐다.비플은 미국의 그래픽 아티스트 마이크 윈켈만의 활동명이다.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투박하게 합성한 디지털아트로 정치·사회적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논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1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포토샵과 3D 렌더링, 블록체인 기술 등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래픽 아티스트'로도 꼽힌다. 지난 202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매일: 첫 5000일'이 6930만 달러(약 785억원)에 낙찰되면서다. 작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은 점점 작아졌다…결국 수개월 후에 인물상은 못 크기로 줄어들어, 몇 배나 더 큰 받침대 위에 고립돼 불안정하게 서 있게 됐다."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평전 <자코메티: 영혼의 손길>에서 저자 제임스 로드는 이렇게 썼다. 1947년 무렵부터 자코메티는 '작은 조각'을 고집했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그 핵심만 담으려다 보니 조각이 작아진 것이다. 가느다란 못 크기에 불과한 그의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작가를 '거장'(巨匠) 반열에 올려놨다.때론 작은 작품일수록 거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법.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중견 화랑 'Various Small Fire'(VSF)에 한국 작가들이 모여든 이유다. '언박싱 프로젝트 3.2: 마케트'란 이름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김윤신, 권오상, 신미경 등 조각가 28명이 각각 30㎝ 내외의 '작은 조각'을 선보였다.언박싱 프로젝트는 상자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선별해 보이는 전시 기획이다. 변현주 큐레이터와 채민진 아트 어드바이저가 기획했다. 참여 작가들한테 제한된 틀에 맞춰 각 프로젝트의 주제에 맞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의뢰하고, 이를 '언박싱(개봉)'해 전시하는 방식이다. 전시된 작품들의 공통분모는 선반 위에 얹을 정도로 작다는 점이다. 전시 제목의 '마케트(maquette)'는 대형 조각을 만들기 전 미리 작은 크기로 만들어서 형태를 가늠하는 습작을 뜻한다. 변현주 큐레이터는 "압도적 크기의 작품이나 스펙터클이 주는 '감탄'보다 작은 작품이 주는 감동이 더 오래 남았던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참여 작가들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40여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우리 장(醬)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5일 ‘대한민국의 장 담그기 문화’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 2022년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등재신청서를 바탕으로 유네스코가 심사한 결과다. 평가기구는 한국의 장 문화에 대해 “밥, 김치와 함께 한국 음식 문화의 핵심”이라며 “(맛이나 방식이) 집마다 다르며 각 가정의 역사와 전통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장을 담그는 공동의 행위는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며 “식량 안보와 지속 가능한 농업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덧붙였다.최종 등재 여부는 다음달 2~7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평가기구는 등재신청서를 제출한 유산을 심사한 뒤 ‘등재’ ‘정보 보완’ ‘등재 불가’ 등으로 구분하는데, 그간의 사례를 봤을 때 등재 권고 판정이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최종 심사가 무난히 이뤄지면 장 담그기 문화는 한국의 23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다. 한국은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아리랑(2012년), 김장문화(2013년), 탈춤(2022년) 등 22건을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안시욱 기자
된장·간장·고추장 등 우리의 장(醬)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5일(현지시간) '대한민국의 장 담그기 문화'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 지난 2022년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등재신청서를 바탕으로 유네스코가 심사를 거친 결과다. 평가기구는 한국의 장 문화에 대해 "밥, 김치와 함께 한국 음식 문화의 핵심"이라며 "(맛이나 방식이) 집마다 다르며 각 가정의 역사와 전통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이어 "장을 담그는 공동의 행위는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며 "식량 안보와 지속가능한 농업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덧붙였다.최종 등재 여부는 다음 달 2~7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평가기구는 등재신청서를 제출한 유산을 심사한 뒤 '등재' '정보 보완' '등재 불가' 등으로 구분하는데, 그간의 사례를 봤을 때 등재 권고 판정이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최종 심사가 무난히 진행될 경우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한국의 23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다. 한국은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탈춤(2022) 등 22건을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장 담그기 문화는 한식의 기본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하는 모든 과정의 지식과 기술을 아우른다. 한국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장을 만들어 먹었다고 알려졌으며, 조선시대 왕실에선 장을 보관하는 '장고(醬庫)'를 두고 '장고마마'라는 상궁이 따로 관리할 정도로 장을 중시했다.특히 한국의 장은 제조법
트레버 영(36·사진)은 현재 홍콩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수족관,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그의 설치작업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영은 올해 열린 굵직한 국제 미술 무대마다 홍콩의 ‘간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홍콩 국가관 대표 작가로 나섰을 뿐 아니라 시드니 비엔날레, 라호르 비엔날레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4 아트바젤 파리에서 홍콩관광청이 기획한 휴게음식점 ‘차찬팅’에선 그의 샹들리에 조명 작품을 설치했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설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공개한 ‘회피의 동굴’(2024)이 단적인 예다. 작품은 수족관 형태를 띠는데 정작 그 내부에 물고기는 한 마리도 없다. 관람객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도록 의도한 작품이다.198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영은 해산물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식당 수족관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물고기를 키울 수 없게 되자 대신 식물을 가꿨다. 그의 작품에 수조와 화초가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안시욱 기자
한 대기업 품질연구팀에서 근무하던 이인석 국대인테리어필름 아카데미 대표(38)는 20대 중반에 일을 그만뒀다.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선택한 일은 인테리어 시공 기술자였다. 10~20년 뒤에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자기만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현재 그는 연 매출 약 27억원 규모의 국대인테리어를 이끌고, 후배 시공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교육시설을 운영하고 있다.31일 '글로벌인재포럼 2024'에 연사로 나선 청년 기업가들은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브라운칼라의 등장: Gen Z(Z 세대)가 개척하는 직업세계 현장' 세션에서 만난 이들은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이 빨라지면서 인간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며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나누는 이분법적 논리가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이들의 대안은 '브라운칼라'다. 브라운칼라는 화이트칼라의 전문성과 블루칼라의 노동력이 결합한 형태의 노동자를 뜻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정신노동에 지친 청년들 가운데 사무실에서 벗어나 땀 흘리는 노동을 추구하는 모습이 늘면서 생긴 단어다. 국내에는 2013년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의 <내:일>에서 처음 소개됐다.실제로 '젠지'(Gen Z·199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반 출생자)를 중심으로 브라운칼라가 떠오르고 있다. 최근 사람인이 20·30세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술직을 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79%에 달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노력한 만큼 벌 수 있어서'(55.7%),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로 내 일을 할 수 있어서'(51.2%) 등
붉은 립스틱을 칠한 금발 여성, 코카콜라와 맥주로 가득한 가정집 냉장고, 성조기를 상징하는 빨강·파랑·하양의 과감한 색채….톰 웨슬만(1931~2004)은 가장 미국적인 팝아트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평화와 풍요가 겹친 미국의 호시절을 묘사했다. 그의 ‘위대한 미국의 누드’ 연작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선거 구호로도 등장하는 ‘위대한 미국’ 이미지 그 자체다.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군 복무 중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역 후 뉴욕으로 거취를 옮기면서 순수예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대표작은 1961년부터 총 100점의 연작을 그려낸 ‘위대한 미국의 누드’ 시리즈다. 성조기의 빨강 파랑 하양 등 색감과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성 해방 사상을 결합한 작품이다. 작가는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TV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활용한 ‘인테리어(Interior)’, 여성의 가슴 형태로 자른 캔버스에 그린 ‘시스케이프(Seascape)’ 등이다.웨슬만 별세 2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품 150여 점을 중심으로 후대 팝아티스트를 함께 조명한다. 전시는 내년 2월 24일까지.안시욱 기자
한동안 유럽 미술계의 맹주는 영국이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3위를 다투는 영국의 입지는 굳건했다. 10월 9~13일 열린 프리즈 런던이 화룡정점을 찍는 듯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악조건에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며 '미술시장 훈풍'의 신호탄을 날리면서다.16일(현지시간) 아트바젤 파리가 베일을 벗자 세계 미술계는 "파리가 런던을 턱끝까지 추격했다"고 입모아 말했다. VIP 개막일인 첫날부터 수십억원부터 100억원대에 이르는 고가 작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프리즈 런던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을 위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면, 아트바젤 파리는 굵직한 대작으로 차별화를 꾀했다는 평가다.보장된 맛 런던 vs 별미(別味) 파리'유럽 미술수도' 자리를 둔 런던과 파리의 싸움은 예견된 결과였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는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이란 번잡한 이름표를 떼고 일찌감치 새출발을 알렸다. 스위스 바젤-홍콩-마이애미로 이어지는 아트바젤의 영향력과 문화도시 파리의 이름값을 업고 '세계 초일류 부자'들을 겨냥하고 나섰다.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다. 파리시는 지난 2020년부터 5억4100만 유로(약 800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그랑 팔레'를 이번 행사를 위해 통째로 내줬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에 지난해보다 27% 늘어난 42개국 195개 갤러리가 참전하게 된 배경이다. 새롭게 참여를 결정한 갤러리만 53개. 국내 화랑으로선 국제갤러리가 유일하게 참가했다.글래드스톤, 마시모데카를로를 비롯한 여러 유명 화랑이 이번 프리즈 런던을 건너 뛰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를 선택한 마이어리거의 토마스 리거 공동대표
아트 바젤 파리로 프랑스 미술계가 떠들썩한 가운데, 파리 마레지구 화랑가 한편에 익숙한 한국화 20여 점이 걸렸다. 한지에 천연염료로 찍은 형형색색 얼룩과 이들을 연결하는 굵은 붓질이 밤하늘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갤러리 아트버스에서 열린 디지털아트 전시 ‘혜명: 한지에 수놓은 별자리’다.전통 기법으로 완성된 수묵화와 첨단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디지털아트. 얼핏 보면 대척점에 있는 두 장르를 아우른 작가는 혜명 김성희(61)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이자 서울대 미술관장 및 미대 학장을 지낸 그의 본업은 화가다. 지난해 영국 글로벌 경매회사 본햄스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초대전을 연 김 작가가 이번엔 프랑스 무대에 올랐다. 혜명은 그의 호다.김 작가의 개인전은 서울과 파리 두 도시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ACS)의 ‘별을 잇다’가 그림 30여 점을 전시한다면, 파리에선 이를 디지털로 변환한 작품을 걸었다. 그는 “코로나19로 하늘길마저 막힌 시절, 미술로 경계를 뛰어넘는 방식을 고민한 끝에 디지털아트에 도달했다”고 말했다.김 작가의 대표작인 ‘별 난 이야기’ 연작은 ‘관(觀·보다)’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별은 그 자리에서 빛날 뿐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 의해 의미가 따라붙는다는 의미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별자리가 보는 이마다 다른 해석을 끌어내는 이유다. 머리에 맴도는 번뇌처럼 복잡해 보이기도,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 정원처럼 아름답게 다가오기도 한다.이야기는 10여 년 전 작가가 겪은 교통사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근길에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넘어져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그
아트 바젤 파리로 프랑스 미술계가 떠들썩한 가운데, 파리의 마레 지구의 화랑가 한편에 익숙한 한국화 20여 점이 걸렸다. 한지에 천연염료로 찍은 형형색색 얼룩과 이들을 연결하는 굵은 붓질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파리의 갤러리 아트버스에서 열린 디지털아트 전시 '혜명: 한지에 수놓은 별자리'다.전통 기법으로 완성된 수묵화와 첨단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디지털아트. 얼핏 보면 대척점에 있는 두 장르를 아우른 작가는 혜명 김성희(61)다. 현직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이자, 서울대 미술관장 및 미대 학장을 역임한 그의 본업은 '화가'다. 지난해 영국의 글로벌 경매회사 본햄스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초대전을 가졌던 그가 이번엔 프랑스 무대에 올랐다. 혜명은 김 작가의 호다.현재 그의 개인전은 서울과 파리 두 도시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ACS)의 '별을 잇다'가 실제 그림 30여점을 전시한다면, 파리에선 이를 디지털로 변환한 작품을 걸었다. 김 작가는 "코로나19로 하늘길마저 막혔던 시절, 미술로 경계를 뛰어넘는 방식을 고민한 끝에 디지털아트에 도달했다"고 말했다.작가의 대표작인 '별 난 이야기' 연작은 '관(觀·보다)'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별은 그 자리에서 빛날 뿐,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 의해 의미가 따라붙는다는 의미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별자리가 보는 이마다 다른 해석을 자아내는 이유다. 머리에 맴도는 번뇌처럼 복잡해 보이기도,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 정원처럼 아름답게 다가오기도 한다.왜 그는 밤하늘의 별을 묵묵히 바라보게 됐을까. 이야기는 10여년 전 작가가 겪은 교통사
지난 20일 막을 내린 아트 바젤 파리를 행사 기간 내 못 갔더라도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아트페어가 열린 그랑 팔레 행사장 바깥에서도 ‘매머드급’ 전시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년 초까지 파리를 대표하는 미술 기관들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를 정리했다.① 퐁피두센터 ‘초현실주의’올해 아트 바젤 파리가 꺼내든 카드는 초현실주의 마스터피스였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 출간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기획이다. 아트페어 부스엔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등의 대작이 걸렸고, 페로탕갤러리 등 파리에 거점을 둔 갤러리 40곳에선 초현실주의 관련 전시를 일제히 개최했다. 그 중심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의 간판 전시 ‘초현실주의’가 있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꿈과 환상, 우주, 에로스, 키메라 등 13개 주제에 걸쳐 조각과 회화 500여 점을 걸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 달리의 문제작 ‘위대한 자위행위’, 사진 역사상 최고 가격에 낙찰된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 등 원화를 한꺼번에 감상할 기회다. 내년 1
지난 20일 막을 내린 아트 바젤 파리를 행사 기간 내 못 갔더라도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아트페어가 열린 그랑 팔레 행사장 바깥에서도 ‘매머드급’ 전시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년 초까지 파리를 대표하는 미술 기관들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를 정리했다. (1) 퐁피두센터 ‘초현실주의’올해 아트 바젤 파리가 꺼내든 카드는 초현실주의 마스터피스였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 출간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기획이다. 아트페어 부스엔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등의 대작이 걸렸고, 페로탕갤러리 등 파리에 거점을 둔 갤러리 40곳에선 초현실주의 관련 전시를 일제히 개최했다.그 중심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의 간판 전시 ‘초현실주의’가 있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꿈과 환상, 우주, 에로스, 키메라 등 13개 주제에 걸쳐 조각과 회화 500여 점을 걸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 달리의 문제작 ‘위대한 자위행위’, 사진 역사상 최고 가격에 낙찰된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 등 원화를 한꺼번에 감상할 기회다. 내년 1월 13일까지. (2) 피노 컬렉션 ‘아르테 포베라’퐁피두센터에서 서쪽으로 10분가량 걷다 보면 둥근 돔 형태의 지붕으로 덮인 건물이 나온다. 세계적인 럭셔리 그룹 케링의 창업자 프랑수아 피노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부르스 드 코메르스(BdC)-피노 컬렉션이다. 예전에 증권거래소로 사용됐던 건물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손길을 거쳐 2021년 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지난 9일부터 이곳에선 ‘아르테 포베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아르테 포베
미술과 명품에는 공통점이 많다. 아티스트의 장인 정신에 의해 탄생한다는 것, 돈이 흐르는 곳에 모인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이 프랑스 파리로 통한다는 것. 루이비통과 겔랑, 미우미우 등 명품 브랜드들이 올해 전 세계 ‘큰손’들을 불러 모은 아트 바젤 파리와 손잡은 이유가 여기 있다.명품 브랜드들이 가세한 올 10월 ‘파리 아트 위크’에선 한국 작가들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겔랑은 이우환 화백과 컬래버(협업)한 한정판 향수를 선보였고, 루이비통과 미우미우는 각각 기획한 특별 전시를 통해 서도호, 정금형 등을 소개했다. (1) 전 세계 21개…이우환 한정판 향수아트 바젤 파리의 공식 파트너로 참여한 겔랑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화백과 협업한 향수 ‘르 플라콘 콰드릴로브 파 이우환’을 공개했다. 2L 용량에 5만유로(약 7500만원)로 전 세계 21병 한정 제작됐다. 한국에는 오는 12월 두 병이 공식 출시된다. 겔랑은 매년 아카이브의 상징적인 향수 용기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데, 올해 협업 아티스트로 이우환 화백을 선정했다.이우환 화백은 순백의 향수 용기 겉면에 초록색 붓질을 해 넣었다. 자연과 재생, 균형을 상징하는 녹색을 통해 환경 보호에 관한 작가와 겔랑의 철학을 표현했다. 겔랑의 조향사인 델핀 젤크가 산의 맑은 공기와 난초의 부드러움을 떠올리며 만든 향수가 담겼다. 향수를 담은 그릇은 프랑스의 럭셔리 도자기 브랜드 메종 베르나르도가 디자인했다.겔랑은 동시대 한국 작가들을 조명하는 특별 전시도 기획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겔랑 부티크에서 열린 ‘굿 모닝 코리아’ 전시다. 백남준, 박서보, 이배 등 한국 작가 17명의 작품을
그날의 파리에도 비가 내렸을까. 부부로 보이는 중산층 남녀 한 쌍이 우산을 쓴 채 걷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은 저마다 수심에 잠긴 모습이다. 빗물에 빛이 반사되며 반짝이는 거리는 한 장의 사진처럼 생생하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의 역작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이다.부슬비가 내리던 지난 19일 오후. 작품의 배경인 파리 북부 생라자르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을 찾았다. 화폭 가운데 그려진 건물 1층의 약국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친한테 물려받은 약국을 4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프랭크 암살렘은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카유보트는 파리 시민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도시의 모습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주변 작가들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죠.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네, 르누아르도 없었을지 몰라요.”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예술 후원자, 군인, 법학자, 요트 선수…. 카유보트한테 따라붙는 여러 꼬리표 중 일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는 단연 ‘파리가 사랑하는 화가’다. 이달 8일부터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회고전 ‘카유보트: 페인팅 맨’ 입장이 아트 바젤 파리 주간 내내 조기 마감된 이유다.카유보트의 타계 13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주요작 70여 점을 선별해 걸었다. ‘페인팅 맨’이란 전시 제목은 우리말로 ‘남성들을 그리다’로 풀이된다. 작가는 근대화와 여성권 신장 운동이 맞물리며 남성성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흔들리던 시기에 살았다. 부르주아 출신 화가이자 법학자, 스포
세상은 프랑스 파리를 ‘빛의 도시’라고 한다. 1667년 루이 14세가 도시 치안을 위해 밤새도록 켠 가로등이 불야성을 이룬 데서 기원한 애칭이다.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유럽의 예술가와 철학자, 과학자가 모여들자 지식으로 반짝였다. 오늘날 보석처럼 빛나는 샹젤리제 거리와 센 강을 가로지르는 37개의 다리, 2만 개 넘는 전등이 발광하는 에펠탑이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준다.이런 파리가 1년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 10월이다. 아트 바젤을 중심으로 모던아트 페어, 아트 쇼핑, 디자인 마이애미 등 굵직한 문화예술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행사장뿐 아니다. 프랑스 학사원과 팔레 루아얄 정원, 팔레 디아나 등 수백 년의 역사가 깃든 고건물은 시민을 위한 공공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다.특히 올해는 이를 갈고 나왔다. 아트 바젤 파리는 지난 2년간 유지한 ‘파리 플러스 파 아트 바젤’이란 번잡한 수식어를 떼고 새출발을 알렸다. 1000만달러대 대작들을 발에 챌 만큼 걸어 전 세계 미술 애호가의 눈을 사로잡았다. 오랜 시간 유럽의 문화 수도 자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여온 영국 런던과 비교하면 어땠을까. 아트뉴스 등 외신은 이렇게 평가했다. “빛의 도시 파리가 런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고.지난 20일 아트 바젤 파리가 막을 내렸지만 파리의 문화예술 행사는 연말까지 이어진다. 오르세미술관의 귀스타브 카유보트전, 퐁피두센터의 초현실주의전 등 블록버스터급 전시가 가득하다. 루이비통, 겔랑 등 명품 브랜드의 협력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여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난 10월의 파리. 빛의 도시로 당신을 초대한다.처칠 거리엔 쿠사마 호박…프랑
미술과 명품에는 공통점이 많다. 아티스트의 장인 정신에 의해 탄생한다는 것, 돈이 흐르는 곳에 모인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이 프랑스 파리로 통한다는 것. 루이비통과 겔랑, 미우미우 등 명품 브랜드들이 올해 전 세계 ‘큰손’들을 불러 모은 아트 바젤 파리와 손잡은 이유가 여기 있다. 명품 브랜드들이 가세한 올 10월 ‘파리 아트 위크’에선 한국 작가들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겔랑은 이우환 화백과 컬래버(협업)한 한정판 향수를 선보였고, 루이비통과 미우미우는 각각 기획한 특별 전시를 통해 서도호, 정금형 등을 소개했다.① 전 세계 21개…이우환 한정판 향수아트 바젤 파리의 공식 파트너로 참여한 겔랑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화백과 협업한 향수 ‘르 플라콘 콰드릴로브 파 이우환’을 공개했다. 2L 용량에 5만유로(약 7500만원)로 전 세계 21병 한정 제작됐다. 한국에는 오는 12월 두 병이 공식 출시된다. 겔랑은 매년 아카이브의 상징적인 향수 용기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데, 올해 협업 아티스트로 이우환 화백을 선정했다. 이우환 화백은 순백의 향수 용기 겉면에 
그날의 파리에도 비가 내렸을까. 부부로 보이는 중산층 남녀 한 쌍이 우산을 쓴 채 걷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은 저마다 수심에 잠긴 모습이다. 빗물에 빛이 반사되며 반짝이는 거리는 한 장의 사진처럼 생생하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 (1848~1894)의 역작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이다 부슬비가 내리던 지난 19일 오후. 작품의 배경인 파리 북부 생 나자르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을 찾았다. 화폭 가운데 그려진 건물 1층의 약국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친한테 물려받은 약국을 40여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프랭크 암살렘 씨는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카유보트는 파리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도시의 모습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주변 작가들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죠.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네, 르누아르도 없었을지 몰라요.”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예술 후원자, 군인, 법학자, 요트 선수…. 카유보트한테 따라붙는 여러 꼬리표 중 일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는 단연 ‘파리가&n
한동안 유럽 미술계의 맹주는 영국이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3위를 다투는 영국의 입지는 굳건했다. 지난 9~13일 열린 프리즈 런던이 화룡점정을 찍는 듯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악조건에도 기대 이상으로 선방하며 ‘미술시장 훈풍’의 신호탄을 날리면서다.16일(현지시간) 아트바젤 파리가 베일을 벗자 세계 미술계는 “파리가 런던을 턱밑까지 추격했다”고 입 모아 말했다. VIP 개막일인 첫날부터 높게는 100억원대에 이르는 고가 작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프리즈 런던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 위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면 아트바젤 파리는 굵직한 대작으로 차별화를 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유럽의 미술 수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런던과 파리의 싸움은 예견된 일이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는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이란 번잡한 이름표를 떼고 일찌감치 새출발을 알렸다. 스위스 바젤-홍콩-미국 마이애미로 이어지는 아트바젤의 영향력과 문화도시 파리의 이름값을 업고 글로벌 슈퍼리치를 겨냥하고 나섰다.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다. 파리시는 2020년부터 5억4100만유로(약 8000억원)를 들여 리모델링한 ‘그랑 팔레’를 이번 행사를 위해 통째로 내줬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엔 지난해보다 27% 늘어난 42개국 195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국내 화랑은 국제갤러리가 유일했다.글래드스톤, 마시모데카를로를 비롯한 여러 유명 화랑이 프리즈 런던을 건너뛰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를 선택한 마이어리거의 토마스 리거 공동대표는 “두 개의 아트페어에 연달아 참여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며 “파리가 더욱 매
한동안 유럽 미술계의 맹주는 영국이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3위를 다투는 영국의 입지는 굳건했다. 지난 10월 9~13일 열린 프리즈 런던이 화룡점정을 찍는 듯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악조건에도 기대 이상으로 선방하며 '미술시장 훈풍'의 신호탄을 날리면서다.16일(현지시간) 아트바젤 파리가 베일을 벗자 세계 미술계는 "파리가 런던을 턱밑까지 추격했다"고 입 모아 말했다. VIP 개막일인 첫날부터 높게는 100억원대에 이르는 고가 작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프리즈 런던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을 위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면, 아트바젤 파리는 굵직한 대작으로 차별화를 꾀했다는 평가다.보장된 맛 런던 vs 별미(別味) 파리'유럽의 미술 수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런던과 파리의 싸움은 예견된 일이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는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이란 번잡한 이름표를 떼고 일찌감치 새 출발을 알렸다. 스위스 바젤-홍콩-마이애미로 이어지는 아트바젤의 영향력과 문화도시 파리의 이름값을 업고 글로벌 슈퍼리치들을 겨냥하고 나섰다.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다. 파리시는 지난 2020년부터 5억4100만 유로(약 8000억원)를 들여 리모델링한 '그랑 팔레'를 이번 행사를 위해 통째로 내줬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엔 지난해보다 27% 늘어난 42개국 195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국내 화랑으로선 국제갤러리가 유일하다.글래드스톤, 마시모데카를로를 비롯한 여러 유명 화랑이 프리즈 런던을 건너뛰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를 선택한 마이어리거의 토마스 리거 공동대표는 "두 개의 아트페어에 연달아 참여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
한강의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내용은 늘 처절하고 어둡다. 그의 인물들은 떠나고 방황하며 추락한다. 그러면서 담담히 인생을 견딘다. 한강이 그려내는 삶이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말했다. 그 어느 약한 존재와도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여수의 사랑>-‘붉은 닻’(1994)등단작.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 살다 죽었다. 어머니와 두 아들의 관계는 서서히 갈라진다. 오랜만에 서해안을 찾은 이들은 바다에 방치된 채 녹슬어 가는 붉은 닻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작가의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수록됐다.○ <아기부처>(1999)최선희는 정체 모를 꿈에 시달린다. 이국적 분위기의 아기부처가 등장하는 꿈이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악몽이 거세진다. 선희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꿈은 여전히 괴롭지만, 선희는 남편의 배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검은 사슴>(1998)잡지사에서 일하는 인영은 의선이라는 여자와 동거하게 된다. 어느 날 의선은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닌다. 작가는 의선 등 인물들의 모습을 검은 사슴에 빗댄다. 어둠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그럴수록 심연으로 추락한다.○ <몽고반점>(2004)주인공은 아내가 처제(영혜) 몸에서 몽고반점을 봤다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흥분에 빠진다. 식물 같은 삶을 갈망하던 영혜도 형부와의 결합이 싫지 않다. 결국 둘은 금기를 깨고 사랑을 나눈다. 아내는 남편을 경멸하는 말을 쏟아낸다.○ <채식주의자>(2007)‘몽고반점’과 ‘채식주의자’ ‘나무 불꽃&rsquo
한강의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내용은 늘 처절하고 어둡다. 그의 인물들은 떠나고 방황하며 추락한다. 그러면서 담담히 인생을 견딘다.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한강이 그려내는 삶이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 있다.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한강을 발굴한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물었다. “그녀는 왜 삶의 치욕들을 헤집어, 그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잔인하게 우리 앞에 던져주는가”라고. 한강은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답하는 듯하다. 그 어느 약한 존재와도 ‘작별하지 않겠다’라고 말이다.○ <붉은 닻>(1994)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등단작이다. 작가의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수록됐다.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 살다 죽었다. 남은 두 아들과 모친의 관계는 서서히 갈라진다. 오랜만에 서해안을 찾은 세 모자는 바다에 방치된 채 녹슬어가는 붉은 닻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 <아기부처>(1999)주인공 최선희는 최근 정체 모를 꿈에 시달린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아기부처가 등장하는 꿈이다. 남편이 젊은 여성과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악몽이&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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