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까지 4년이 걸렸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입체파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남긴 말이다. 때론 노련함보다 정제되지 않는 순수함이 갖기 어려운 법. 피카소를 비롯해 초등학생의 낙서를 따라 그린 페트릿 할릴라이 등 이름난 작가들이 동심을 동경한 이유다. 오준식은 동심을 부러워하지 않는 작가다. 그는 올해 열 네살. 그저 힘껏 만든 작품이 동심이다. 그의 공룡과 바다생물을 주제로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서울 신사동 티디에이하우스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120점과 오브제 50점을 선보였다. “각자 어렸을 때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대상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시를 열게 된 계기를 묻자 오준식은 이런 답변을 들려줬다. 그는 “좋아하는 장난감에 따라 친구들이 공룡 파(派), 자동차 파, 로봇 파로 나뉘곤 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며 대부분 다른 관심사로 떠나갔다”며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오준식은 일곱살 무렵부터 작업실을 다녔다. 공룡과 바다생물의 행태를 분석하기 위해 해외 다큐멘터리를 반복해서 보고, 매주 아쿠아리움을 찾아 동물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작업의 소재로 공룡을 고른 이유는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공룡의 특성 때문이다.“인간은 화석 연구를 통해 공룡의 겉모습을 어느 정도 알아냈지만, 어떤 색이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나게 상상할 수 있죠.” 작가는 공룡과 바다 동물을 모티브로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언제적 삼청동입니까."최근 만난 한 갤러리스트가 건넨 말이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이 2022년 삼성동 코엑스에 자리 잡은 게 시작이었을까. 지난 3년 사이 세계적인 화랑들이 물밀듯이 압구정·신사·청담 등 강남권에 한국 지점을 열기 시작했고, 둥지를 옮기는 국내 갤러리도 부쩍 늘었다.그래도 한국 미술의 1번지는 여전히 삼청동이다. 아트선재센터 등 국내 최정상급 미술관과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등 터줏대감 화랑들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국내외 거장들과 오랜 시간 구축한 네트워크,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안목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KIAF-프리즈 기간에 마련된 부스 외에도, 이들의 '본진'을 찾아야 할 이유다.강철의 존 배 vs 섬유의 함경아올해 한국 미술계가 프리즈 서울을 상대로 꺼내든 카드는 '거장의 재발견'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조각가 존 배의 개인전을 준비한 갤러리현대가 그 중심에 있다. 갤러리 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13년 갤러리현대 전시 이후 11년 만에 열리는 배 작가의 국내 개인전이다. 1960대 초기 강철 조각부터 작가를 상징하는 철사 조각까지 30여점을 선별해 보인다.1949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배 작가는 지난 70년간 해외에서 한국 예술을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올해 초 맨해튼 중심부로 보금자리를 옮긴 뉴욕한국문화원의 개관전 작가로도 선정된 이유다. 철사를 주로 활용하는 배 작가는 미리 완성된 모습을 정해두고 작업에 임하지 않는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점과 선 사이 운명적인 조우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국제갤러리는 함경아 작가의 부드러운 자수 작품으로 여기 맞선다. 마찬가
과거 사대부가 모여 살던 서울 북촌 한옥마을. 예스러운 기왓장 사이로 높이 10m를 훌쩍 넘는 미디어아트가 들어섰다. 시시각각 색깔과 형태가 바뀌는 이 영상은 4억 개 넘는 동물 이미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이 생성해낸 것. 튀르키예 출신 세계적 미디어아티스트인 레픽 아나돌(39·사진)의 ‘기계 환각-LNM: 동물’이다.‘미술계의 이단아’는 그를 표현하기에 낡은 수식어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개관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구형 공연장 ‘스피어’ 외관을 장식했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300만 명 넘게 찾으며 전시 기간이 네 번이나 연장됐다. 올해 1월 정·재계 유력인사가 모인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선 자연을 다룬 신작들을 선보이며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다보스포럼에서 공개한 자연 이미지의 진화한 버전을 들고 방한한 그를 지난 26일 북촌 푸투라 서울에서 만났다.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그가 ‘아시아 첫 개인전’ 무대로 서울 구도심 북촌을 고른 이유는 뭘까. “과거의 지혜를 간직한 자연은 미래를 위해 지켜야 할 대상이죠. 서울의 옛 모습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미래 기술로 자연을 다룬 AI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과거’ 북촌과 ‘미래’ AI의 조우“이 향수 한번 뿌려 보시겠어요? 열대우림에서 수집한 50만 개의 향기 분자를 바탕으로 저의 AI가 만들어낸 냄새입니다. 아, 그리고 사진은 거울이 있는 이 방이 가장 잘 나와요.”전시장에서 만난 아나돌에게 전시 공간 소개를 요청하자 유쾌한 미소와 함께 이런 답변을 들려줬다. 시청각부터 후각까지 모든 감각으로 자
미국 뉴욕 맨해튼 북부의 할렘은 역설적인 동네다. 빈민가의 대명사이면서도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아메리칸드림이 서려 있고, 불안정한 치안에도 공동체 의식으로 엮여 있다. 역설은 예술가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 시인 랭스턴 휴스,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 등 재능있는 작가들이 할렘에서 '흑인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유가 여기 있다.뉴욕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 나리 워드(61·사진)는 할렘의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가다. 폭력을 상징하는 방망이가 치유의 도구로, 죽음을 암시하는 촛농은 생명의 메시지로 뒤바뀐다. 할렘의 길거리에서 수집한 사물을 재활용한 결과다. 이런 그가 신작 10여점을 들고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을 찾았다.1963년 자메이카 세인트 앤드루에서 태어난 작가는 12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뉴욕과 뉴저지를 전전하다가 할렘가에 정착했다. 30대부터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상적인 사물로 할렘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인종차별, 민주주의, 공동체까지 다양하다.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할렘의 모습을 담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장례식장마저 문을 닫았던 시절이다. 할렘의 주민들은 길거리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작가는 매일 아침 양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기 위해 새로운 초를 놓고, 버려진 양초와 빈 병, 꽃다발을 수집했다.일반적인 시선에선 상처로 얼룩진 거리였겠지만, 예술가의 눈은 달랐다. 작가는 꺼져가는 촛불에서 치유의 희망을, 그리고 전염병도 갈라놓지 못한 공동체 의식을 발견했다. "제가 전하려던 메시지
과거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서울 북촌 한옥마을. 예스러운 기왓장 사이로 높이 10m가 훌쩍 넘는 미디어아트가 들어섰다. 시시각각 색깔과 형태가 바뀌는 이 영상은 4억개가 넘는 동물 이미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이 생성해낸 것. 튀르키예 출신의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레픽 아나돌(39·사진)의 '기계 환각-LNM: 동물'이다.'미술계의 이단아'는 그를 표현하기에 낡은 수식어가 된 지 오래다. 요즘 그의 AI 작품은 주류 무대에 오르내린다. 지난해 개관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구형 공연장 '스피어'의 외관을 장식했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300만명이 넘게 찾으며 전시 기간이 네 번이나 연장됐다. 올해 1월 정·재계 유력인사들이 모인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에선 자연을 다룬 신작들을 선보이며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다보스포럼에서 공개한 자연 이미지의 '진화'한 버전을 들고 방한한 그를 26일 북촌 푸투라 서울에서 만났다.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그가 '아시아 첫 개인전'의 무대로 서울의 구도심 북촌을 고른 이유는 뭘까. "과거의 지혜를 간직한 자연은 미래를 위해 지켜야 할 대상이죠. 서울의 옛 모습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미래의 기술로 자연을 다룬 AI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습니다."북촌의 과거와 AI의 미래가 만나다"이 향수 한번 뿌려 보시겠어요? 열대우림에서 수집한 50만개의 향기 분자를 바탕으로 저의 AI가 만들어낸 냄새입니다. 아, 그리고 사진은 거울이 있는 이 방이 가장 잘 나와요."전시장에서 만난 아나돌에게 전시 공간 소개를 요청하자 유쾌한 미소와 함께 이런 답변을 들려줬다. 시청
영국의 세계적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7)에게 명성을 안겨준 건 1960년대 ‘수영장’ 시리즈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정취에 매료된 그는 현지 수영장을 화폭에 옮겼다. 쏟아지는 햇볕과 약간의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일렁이는 물은 까다로운 소재다. 작가가 수영장에 푹 빠지게 된 이유다.한국 작가 강유진(47)의 수영장 그림은 호크니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호크니가 수영장을 통해 LA 타지 생활의 이국적인 낭만을 옮겼다면, 강유진의 수영장은 어릴 적 뿌리로 회귀하는 작가의 여정이다. 금세 마르는 아크릴 물감 대신 두꺼운 에나멜페인트를 고수한 것도 차별화되는 지점 중 하나다.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강유진표 수영장’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지난해 미국 버지니아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영감을 얻은 신작을 포함해 30여 점이 걸렸다. ‘환상의 파편: 풍경의 새로운 시각’이란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작품에는 실제 풍경과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뒤섞였다. 도심, 공항, 정원 등 외국의 풍경과 작가의 기억에 자리 잡은 수영장 이미지를 나란히 놓은 결과다.1977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줄곧 떠돌이였다. 유년기에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머물렀다.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영국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순수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한 뒤로도 뉴욕과 유타, 네바다 등 미국 곳곳을 옮겨 다니다가 최근에는 버지니아에 정착했다.강 작가가 본격적으로 수영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 영국 유학생 시절이다. 습하고 흐릿한 기후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난히 밝고 쨍했던 어느 날 수영장을 찾았다. 다섯 살 무렵부터 늘 취미로 찾은 수영장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육로가 아니라 하늘길로 민통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성까지 20㎞, 평양까지 160㎞입니다.”태풍 9호 종다리가 한반도에 접근하던 21일 오전. 비바람을 뚫고 찾은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서 탑승한 케이블카에서 흘러나온 음성이다. 6·25전쟁의 총탄 흔적이 남은 철교, 지뢰 매설을 경고하는 철조망 표지판이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간직하는 듯했다.비무장지대(DMZ) 일대가 거대한 미술관이 된다. 평화누리에서 30일부터 열리는 ‘DMZ OPEN 전시: 통로’를 통해서다. 1년에 한 번 DMZ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DMZ OPEN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전시다. 경기도가 주최하고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한다.국내외 12명의 작가가 작품 32점을 출품한 이번 전시는 ‘통로’를 주제로 DMZ의 의미를 돌아본다. 전시를 공동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우리는 그동안 DMZ를 경계를 나누고 통로를 가로막는 공간으로 인지해왔다”며 “누군가 지날 수 있는 통로이자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DMZ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전시는 마치 관람객이 긴 통로를 지나듯 구성했다. 출발점인 평화누리 곳곳에 설치된 노순택의 사진 연작 ‘분단인 멀미’가 먼저 눈길을 끈다. 중국과 북한 접경지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을 흔들리는 초점으로 촬영한 작품이다.임진각 평화곤돌라를 타고 임진강을 지나는 길목엔 노원희의 ‘바리데기’ 연작 121점이 놓였다. 황석영 작가가 2007년 신문에 연재한 소설 <바리데기>를 위해 제작된 삽화 연작이다. 탈북민 소녀 ‘바리’가 혼자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하는 과정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덕희 작가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고집한다. 꼬마전구처럼 큼지막한 RGB 픽셀 칩을 사방에 흩뿌리는가 하면, 남들이 애써 감추는 케이블도 전시장 바닥에 그대로 노출한다.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영상이 호기심을 자아낸다.김 작가는 비(非)미술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의 작동 원리를 탐구해 왔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기 제작한 ‘하얀 그림자’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 자신과 지인들의 손을 본떠 만든 모형 내부에 발열 장치를 삽입하면서 비대면 시대에 사라져가는 체온을 형상화했다. 2021년 시작한 ‘밤’ 시리즈에선 녹아내린 파라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를 시각화했다.발광다이오드(LED)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이번 신작들은 ‘시간’의 본질에 관해 질문한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원자 단위의 세계에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없죠. 우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영상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도 전부 인식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이런 생각의 계기는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2000년대 무렵 퇴근길에 마주친 네온사인이었다. 처음에는 간판의 불빛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램프 하나하나를 톺아보니 그저 깜빡임을 반복할 뿐이었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였다. 전시 제목은 ‘사과와 달’. 거대한 천체나 주먹만 한 과일이나 똑같은 물리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뉴턴의 일화에서 따왔다.이번 전시의 설치 작품 ‘움브라’(2024)의 RGB 램프들이 큼지막한 것도 픽셀의 기본 단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다. 높이 2m짜리 네 개의 디스플레이가 각각 동
가느다란 구리 선으로 점과 점 사이를 잇는다. 텅 빈 공간이 어느새 점과 선의 운명적인 조우로 채워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조각가 존 배(86·사진)의 ‘철사 조각’이 제작되는 원리다.무(無)의 공간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건 그의 작품만이 아니다. 작가가 걸어온 길이 그랬다. 국내 예술인의 인지도가 해외에서 전무하다시피 한 시절부터 미국 뉴욕에서 한국미술의 첨병 역할을 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따라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능은 타고났다.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 15세에 불과했다. 뉴욕의 명문 사립미술대학인 프랫인스티튜트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졸업 직후 모교 역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작가는 뉴욕 한인 예술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백남준, 김환기, 김창열, 백건우 등 이름난 화가와 음악가가 그의 집을 거쳐 갔다. 오는 9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 그의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1960년대 초기 철 조각부터 철사로 제작한 근작까지 3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안시욱 기자
"여러분은 지금 육로가 아닌 하늘길로 민통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성까지 20㎞, 평양까지 160㎞입니다."태풍 9호 종다리가 한반도에 접근하던 21일 오전. 비바람을 뚫고 찾은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서 탑승한 케이블카에서 흘러나온 음성이다. 6·25전쟁의 총탄 흔적이 남은 철교, 지뢰 매설을 경고하는 철조망 표지판이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간직하는 듯했다.850m에 걸친 하늘길 끝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자갈밭이었다. 흑과 백의 자갈이 임진각 평화곤돌라 종착점의 옥상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작품의 정체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 지비리의 '균열-회색지대'(2018). 전시 기간 중 두 종류의 자갈은 관람객들의 움직임에 의해 서서히 섞인다. 남과 북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비무장지대(DMZ) 일대가 거대한 미술관이 된다. 경기도 파주 평화누리에서 30일부터 열리는 'DMZ OPEN 전시: 통로'를 통해서다. 1년에 한 번 DMZ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DMZ OPEN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린 전시다. 경기도가 주최하고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했다.국내외 12명 작가가 작품 32점을 출품한 이번 전시는 '통로'를 주제로 DMZ의 의미를 돌아본다. 전시를 공동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우리는 그동안 DMZ를 경계를 나누고 통로를 가로막는 공간으로 인지해왔다"며 "누군가 지날 수 있는 통로이자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DMZ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전시는 마치 관람객이 긴 통로를 지나듯 구성됐다. 출발점인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곳곳에 설치된 노순택의 사진 연작 '분단인 멀미'가 먼
'현실보다 진짜 같은 전시'.지난 몇 년 사이 유행처럼 자리 잡은 '몰입형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다. 희귀한 컬렉션을 영상으로 재현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식이다. 초고화질 영상을 송출하는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 또는 최신형 가상현실(VR) 기기를 동원했다는 전시 홍보 문구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이유다.이러한 트렌드에 역행하는 작가가 있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덕희 작가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고집한다. 꼬마전구처럼 큼지막한 RGB 픽셀 칩을 사방에 흩뿌리는가 하면, 남들이 애써 감추는 케이블도 전시장 바닥에 그대로 노출한다.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영상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낸다. 몰입감이 여느 몰입형 전시 못지않다.비(非)미술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의 작동 원리를 탐구해온 그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제작한 '하얀 그림자'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 자신과 지인들의 손을 본떠 만든 모형 내부에 발열 장치를 삽입하면서 비대면 시대에 사라져가는 체온을 형상화했다. 2021년 시작한 '밤' 시리즈에선 녹아내린 파라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를 시각화했다.LED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이번 신작들은 '시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원자 단위의 세계에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없죠. 우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영상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도 전부 인식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이런 생각의 계기는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2000년대 무렵 퇴근길에 마주친 네온사인이었다. 처음에
영국의 세계적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7)한테 명성을 안겨준 건 1960년대 '수영장' 시리즈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정취에 매료된 그는 현지의 수영장을 화폭에 옮겼다. 쏟아지는 햇볕과 약간의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일렁이는 물은 까다로운 소재다. 작가가 수영장에 푹 빠지게 된 이유다.한국 작가 강유진의 수영장 그림은 호크니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호크니가 수영장을 통해 LA 타지 생활의 이국적인 낭만을 옮겼다면, 강유진의 수영장은 어릴 적 뿌리로 회귀하는 작가의 여정이다. 금세 마르는 아크릴 물감 대신 두꺼운 에나멜페인트를 고수한 것도 차별화되는 지점 중 하나다.'강유진 표 수영장'의 세계 일주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 펼쳐졌다. 작가가 지난해 미국 버지니아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영감을 얻은 신작을 포함해 30여점이 걸렸다. '환상의 파편: 풍경의 새로운 시각'이란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작품에는 실제 풍경과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뒤섞였다. 도심, 공항, 정원 등 외국의 풍경과 작가의 기억에 자리 잡은 수영장 이미지를 나란히 놓은 결과다.1977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줄곧 떠돌이 생활을 겪었다. 유년기에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머물렀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어 유학길에 올라 영국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순수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한 뒤로도 배우자와 함께 뉴욕과 유타, 네바다 등 미국 곳곳을 옮겨 다녔다. 최근 정착지는 미국 버지니아다.본격적으로 수영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 영국 유학생 시절이다. 습하고 흐릿한 기후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난히 밝고 쨍했던 어느 날 수영장을 찾았다
불의의 사고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미국 뉴욕의 대형 옥외광고 화가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가 그랬다. 1960년 동료 두 명이 비계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본 그는 일을 관두고 순수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미국 팝아트를 이끈 거장이 탄생한 순간이다.작가의 어릴 적 기억은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대평원에서 시작한다. 항공기 정비공이었던 아버지와 파일럿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덟 살부터 모형 비행기를 만들며 놀았다. 하늘을 동경하며 살아온 유년기의 기억은 훗날 ‘시간 먼지-블랙홀’(1992) 등 우주를 연상케 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대중매체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콜라주한 작품으로 사회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각적인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유작은 ‘본질적 존재’(2015)로 알려졌다. 화면 가운데 감상자를 비추는 거울을 중심으로 펼쳐진 유리 파편은 각각 하나의 멀티버스를 상징한다. 어린 시절 하늘을 동경한 작가는 2017년 먼 우주로 떠났다. 로젠퀴스트의 회고전이 서울 신문안로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유료 전시이며 9월 29일까지.안시욱 기자
할리우드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62·사진)가 최장기간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배우로 지난달 26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25년240일. ‘블레이드’(1998)에서 뱀파이어 사냥꾼인 블레이드 역할을 맡은 그는 최근 개봉한 ‘데드풀과 울버린’(2024)에 깜짝 출연했다. 종전 기록은 ‘엑스맨’ 시리즈에서 열연한 휴 잭맨과 패트릭 스튜어트의 16년228일이었다.가장 오래 공백기를 보낸 마블 캐릭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블레이드 캐릭터를 연기한 건 시리즈 3편인 ‘블레이드: 트리니티’(2004)에서다. 이번 데드풀 영화로 19년231일 만에 복귀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옥타비우스를 맡은 알프리드 몰리나의 17년 기록을 경신했다. 스나입스는 “블레이드의 몸매를 꾸준히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액션이든 감당할 수 있도록 예전의 컨디션을 되찾는 걸 중점적으로 준비했다”고 털어놨다.1962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그는 12세부터 무술을 연마했다. 가라테 5단, 합기도 2단 등 수준급 실력을 갖췄다. 1997년 ‘원 나잇 스탠드’로 베네치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안시욱 기자
“살아서는 대한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대한의 귀신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생각하여 서둘러 도모하라.”1909년 경기 양주 일대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하다 전사한 의병장 유인순이 남긴 말이다. 국가유산청이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공개한 <한말 의병 관련 문서>에서 원문이 처음 확인됐다.국가유산청은 이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한일관계사료집-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 <조현묘각운> 시판 등 선조들의 자주독립 의지가 담긴 환수 문화유산 세 건을 언론에 공개했다. 일제강점기 전후 국외에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을 통한 매입과 기증 등의 방식으로 국내 환수했다.올해 7월 복권기금을 활용해 일본에서 들여온 <한말 의병 관련 문서>는 의병 활동 기록과 서한 등을 엮은 문서다.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허위, 이강년 등이 작성한 문서 9건, 유중교와 최익현의 서신 4건 등으로 구성됐다. 이번에 처음 원문으로 확인된 수록 문서 13건에는 의병 간 협조와 갈등 양상 등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됐다. ‘함께 국가를 구제하기로 회신하오니, 밤새워 군진을 이끌고 오시길 간절히 바람’ 등 편지 내용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허위와 이강년의 체포, 항일의병장 유인석의 시문집인 <의암집> 제작 현장 급습 등 일제의 탄압 과정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한일관계사료집>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다. 지난 5월 재미동포 개인 소장자가 “국민이 함께 향유하길 바란다”며 아무 조건 없이 국외재단에 기증했다. &
“살아서는 대한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대한의 귀신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생각하여 서둘러 도모하라.”1909년 2월 경기 양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유인순(1880~1909)이 남긴 말이다. 항일 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의 우장군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항전을 계속하다가 다음 달인 3월 17일 양주 북방 40리 지점에서 부하 16명과 함께 전사했다. 이번에 일본에서 돌아온 <한말 의병 관련 문서>에서 그 원문이 처음 확인됐다.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선조들의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환수 문화유산 세 건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유산청은 14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 시판을 언론에 공개했다. 일제강점기 전후 국외에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최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을 통한 매입과 기증 등의 방식으로 국내 환수됐다.올해 7월 복권기금을 통해 일본에서 들여온 <한말 의병 관련 문서>는 의병들의 활동 기록과 서한 등을 엮은 문서다. 총 두 개 묶음으로 구성된 두루마리엔 총 13건의 문서가 수록됐다.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허위, 이강년 등이 작성한 문서 9건과 유중교와 최익현의 서신 4건 등으로 구성됐다.첫머리에 덧붙여진 글을 통해 개천장치(芥川長治)라는 일본의 헌병경찰이 1939년 이 문서들을 수집해 지금의 형태로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두루마리에는 '구한말 일본을 배척한 우두머리의 편지'와 '구한말 일본을 배척한 폭도 장수의 격문'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이번에 처음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10일(현지시간) 오전 영국 런던 북서부의 한 버려진 광고판에서 발견된 뱅크시의 신작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로도 알려진 그는 이번 주 들어 매일 한편의 '런던 동물 벽화 연작'을 도시 곳곳에서 깜짝 공개하고 있다. 이번 고양이 그림은 그중 여섯번째 작품이다.그런데 해당 작품은 몇시간 뒤 작가와 계약한 업체에 의해 철거됐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지난 8일 뱅크시가 런던 남부의 페컴 라이 레인 건물 위 위성안테나에 남긴 네 번째 그림이 공개 한시간여만에 도난당했다.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복면을 쓴 범인 3인조가 이를 뜯어내 달아나는 모습이 한 시민에 의해 포착됐다.뱅크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신랄한 풍자로 미술계에 일침을 날리면서 '예술계의 테러리스트'로도 통한다. 2018년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벌어진 사건이 단적인 예다. 그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약 17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액자에 심어둔 분쇄기를 가동해 그림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그는 최근 6일간 런던에서 매일 한편의 동물 벽화를 공개하고, 작품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면서 본인 작품임을 인증했다. 시작은 5일 런던 남서부 큐 브릿지 인근 건물의 염소 그림이었다. 절벽에 위태롭게 서 있는 염소의 형상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일각에선 염소(goat)와 영문 철자가 같은 '고트'(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로서 작가의 자신감을 나타낸 장치라고도 풀이했다.이어 6일에는 런던 서부 풀럼의 한 건
“후배들, 제가 여기서 당한 거 다 복수해 줬으면 좋겠습니다!”2024 파리올림픽 브레이킹 최고령 선수인 김홍열(39·사진)이 올림픽에서의 ‘라스트 댄스’를 마치고 이같이 털어놨다. 본명보다 ‘홍텐’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그는 11일 콩코르드광장에서 열린 브레이킹 남자 조별리그 조 3위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김홍열은 조별리그에서 총 2라운드를 따내며 조 2위인 네덜란드 레이라우 데미러(4라운드)의 기록에 못 미쳤다. 그는 “8강까지는 가고 싶었는데 안 돼서 아쉽다. 1년 넘게 계속 노력해서 달려왔는데 끝났다. 이제 자유라는 생각이 든다”며 복잡한 감정을 전했다.올림픽 무대가 주는 압박감은 강렬했다. 이날 김홍열은 데미러에게 라운드 점수 0 대 2로 패했다. 김홍열은 “요새 긴장을 많이 안 해 올림픽에서도 그럴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국 긴장했다”고 했다.이번 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브레이킹은 2028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 때는 정식 종목에서 제외된다. 그는 “다음 올림픽에서도 정식 종목이면 다음 세대가 나올 텐데, (정식 종목 채택이) 안 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경력 23년 비보잉 선수인 그는 비보잉 분야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는 브레이킹 선수가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그들과 겨룰 한국 선수는 줄어들고 있다”며 “우리도 열정을 쏟을 분야에 도전할 길이 생겼으면 한다”고 했다.안시욱 기자
중심이 잘 안 잡힌 조각을 보는 것 같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의 2024년 창작산실 협력전시 ‘집(ZIP)’ 얘기다. 1세대 조각가 김윤신부터 20대 작가 박소연까지 여성 조각가 16명을 망라한 기획전이다.50여 점이 투입된 전시는 풍성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김주현 작가의 신작 ‘확장된 뫼비우스의 띠-구형’(2024)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데 가운데로부터 프랙털 형태로 번져나가는 동선에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설치한 작품이다. 내부와 외부를 반전했다는 점에서 맞은편에 전시된 정문경 작가의 ‘Yfoog’(2016)와 비교할 만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구피 인형의 겉과 속을 뒤집은 설치 작업이다.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굽은 김태연의 ‘말린 어깨’(2023)와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재료의 질감이 돋보이는 작품도 모여 있다. 비누를 빚어 만든 신미경의 도자기, 미용실에서 머리를 털 때 사용하는 폴리우레탄 스펀지를 활용한 서혜연의 설치 작업 등이다. 여성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이립 작가의 조각은 세 개의 중심축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는 여성을 형상화했다. 비걸(B-girl) 댄서의 몸동작이 모티프다. 한애규의 ‘천 년 동안 잠자던 바다여신은 왜 깨어났을까’(2024)도 빼놓을 수 없다.다소 산발적으로 구성된 전시장 각 층의 중심은 거장들이 잡아준다. 1층의 중심은 박윤자다. 1980년대 세라믹과 테라코타 작업부터 최근의 유리를 활용한 조각까지 작품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2층의 균형을 잡아주는 건 김윤신이다. 40여 년간 남미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거장의 울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통일된
폭염과 열대야에 지친 직장인들을 위한 문화 피서지 어디 없을까. 서울 신문로 세화미술관이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도심 속 쉼터로 탈바꿈한다. 1960년대 미국 팝아트 거장의 회고전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를 점심시간에 직장인 대상으로 무료 개방하면서다.무료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다. 미술관 안내 데스크에 명함을 제시하면 입장이 가능하다. 12시 30분엔 직장인 관람객들을 위한 특별 도슨트도 마련됐다. 직장인 대상 무료 관람 행사는 다음 달 29일까지다.▶▶▶(관련 기사) 추락, 화재, 교통사고…'팝아트의 전설'은 세 번의 위기를 겪었다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미국 팝아트를 이끈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뉴욕의 옥외광고판 화가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돌아선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10년대 근작까지 회화와 콜라주, 아카이브 자료를 망라했다.로젠퀴스트의 작품의 주요 특징은 거대한 규모와 다양한 색채다. 방문객 인증 사진 명소로는 전시관 내부 연결통로 네 개 면에 조성한 '네 명의 뉴클리어 여성'(1982)이 꼽힌다. 전시회 관람 '인증샷'을 SNS에 게재하면 선착순으로 전시 포스터도 받아 갈 수 있다.태광그룹이 2017년 설립한 세화미술관은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3층에 있다. 전시 관람객은 건물 내 식당과 카페 4곳에서 메뉴를 10%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 2층에 들어선 독립·예술 영화관 씨네큐브도 전시회 무료입장권을 제시하는 관람객들에게 영화 티켓 가격을 1000원 할인해준다.세화미술관은 “광화문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피서지로 자리매김하는 바람에
“허영만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다른 이름으로 연재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온 종이 만화가 아니라 웹툰으로요.”원로 만화가 허영만(77·사진)이 각시탈을 쓴다. 가면을 쓴 주인공이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는 그의 1974년 작 <각시탈> 얘기가 아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노(老)작가 본인이 정체를 감추고 남몰래 도전하겠다는 얘기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그는 “이미 3~4개월치 원고를 준비했다”며 “나의 방식이 웹툰 플랫폼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허영만 작가의 반세기 만화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전시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가 6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10년대 후반 <만화 일기>까지 원화와 드로잉, 취재 자료 등 2만여 점을 선보인다. 전남 여수에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나온 지역 작가의 화업을 기념하는 취지다.중장년층이라면 그의 만화가 실린 손때 묻은 어린이 잡지를 기억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X세대를 포착한 <비트>, 1990년대생의 안방극장을 책임진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타짜> <식객> 등 대표작들은 종이를 넘어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넓히며 재탄생했다.세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비결로는 평범함을 꼽았다. “제 작품에는 ‘슈퍼스타’가 없어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자분들이 편하게 다가와 주신 것 같습니다.”늘 만화계의 정상을 지켜왔지만, 그는 ‘만년 2위’라며 자신을 낮췄다. “이전에는 이상무 선생이 1등이었고, 그다음 이현세 선
"허영만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다른 이름으로 연재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온 종이 만화가 아니라 웹툰으로요."원로 만화가 허영만(77)이 각시탈을 쓴다. 가면을 쓴 주인공이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는 그의 1974년 작 '각시탈' 얘기가 아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노(老)작가 본인이 정체를 감추고 남몰래 도전하겠다는 얘기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그는 "이미 3~4개월 치 원고를 준비했다"며 "나의 방식이 웹툰 플랫폼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허영만 작가의 반세기 만화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전시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가 6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10년대 후반 '만화 일기'까지 원화와 드로잉, 취재 자료 등 2만여점을 선보인다. 전남 여수에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나온 지역 작가의 화업을 기념하는 취지다.중장년층이라면 그의 만화가 실린 손때묻은 어린이 잡지를 기억할 만하다. 질풍노도의 X세대를 포착한 '비트', 1990년대생들의 안방극장을 책임진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타짜', '식객' 등 대표작들은 종이를 넘어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넓히며 재탄생했다.세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비결로는 평범함을 꼽았다. "저의 작품에는 '슈퍼스타'가 없어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자분들이 편하게 다가와 주신 것 같습니다." '오! 한강'과 '각시탈' 등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강토'는 극장에서 들은 애국가의 한 소절에서 따왔다.늘 만화
앤디 워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팝아트의 거장’. 대중매체에서 빌려온 이미지로 날 선 질문을 던지는 ‘시각적인 시인’. 미국 뉴욕의 옥외광고업계를 주름잡고 카셀 도큐멘타 6(1977)와 베네치아 비엔날레(1978) 등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의 여러 수식어 중 일부다.명성과 별개로 그동안 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경우는 드물었다. 1989년 단체전과 1995년 개인전이 전부였다. 길게는 수십m에 달하는 작품 크기가 한몫했다. 서울 새문안로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는 넉넉한 공간에서 그의 대표작 29점과 아카이브 자료 39점을 만날 기회다.거대한 규모와 추상적 상징으로 특징되는 그의 작품에는 굴곡진 인생사가 투영됐다. 작가는 1933년 미국 노스다코타의 대평원에서 태어났다. 뉴욕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가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학업을 포기하고 뉴욕의 네온사인 제작회사 아트크래프트슈트라우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타임스스퀘어의 옥외광고를 그렸는데 1960년 건물 외벽에서 작업하던 동료 두 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아들은 뇌 손상으로 쓰러졌다. 2009년에는 산불이 일어나 그의 땅과 집, 스튜디오 그리고 상당수 작품이 불에 탔다.전시 가운데 가로 6.1m 세로 2.74m에 이르는 ‘우주를 응시하는 부유한 사람’(2011)은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전까지의 섬세한 기교 대신 감정에 충실한 붓 터치가 눈길을 끈다. 군데군데 물감이 튀고 덜 섞인 물감을 거칠게 바른 모습이다. 전시는 작가의 유작으로 알려진 ‘본질적 존재’(2015)로 마무리된다. 화면 가
"잘 살자면 자기의 이념을 살려서,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남보다 특별한 경제체제를 만들어 세계의 모범국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던 어떤 미국 정치인의 연설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선진국의 의회 회의록도 아니다. 이 발언이 나온 건 식민지 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가난한 나라다.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12석을 차지한 대동청년단을 이끈 이청천의 말이다.신간 <헌법의 순간>은 대한민국을 설계한 20일의 역사를 재조명한 책이다. 1948년 5·10 총선거로 선출된 제1대 국회의원 198명이 제헌국회를 구성했다. 책은 이들이 6월 23일 헌법 초안을 상정하고 7월 12일 통과하기까지의 국회 회의록을 생동감 있게 풀어낸다.헌법은 국가와 주권자의 지고지순한 약속이지만, 지금껏 제헌 과정에 대한 불신은 적지 않았다. 저자 본인도 그랬다.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는 저자 박혁 박사의 고백에서 책은 시작한다."저는 지금까지 남한에서만 치러진 총선거로 뽑힌 제헌의원들을 무시했습니다. 남북 영구 분단을 초래할 선거가 시행된 것이 안타깝고 못마땅했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만든 제헌헌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자는 우연히 헌법의 순간과 마주쳤다. 당시 국회 회의록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독립국을 향한 제헌의원들의 진지한 고민이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든 '졸속 헌법', 다른 나라 헌법을 짜깁기한 '모방 헌법'으로 격하하기엔 자못 진지했다.이청천의 말처럼, 제헌의원들은 단순한 독립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모범국가'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분투했다. 국호를 '대한'
지난해 11월은 국내 클래식 팬들한테 각별한 연말이었다. 세계 3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로열 콘세르트 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이 나란히 내한하면서다. 특히 11일에는 이들 중 두 곳이 동시에 연주회를 열면서 한판 승부를 벌였다. ‘롯데콘서트홀의 RCO냐, 예술의전당의 베를린필이냐.’ 관객들은 전례 없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이런 일은 2016년 롯데콘서트홀이 문을 열기 전까진 불가능했다. 롯데콘서트홀은 예술의전당 음악당 이후 28년만에 서울에 들어선 클래식 전용 홀이다. ‘문화예술을 통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롯데문화재단이 1500억원을 들여 조성했다.메세나 정신은 공연장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국내 최초로 객석이 무대를 둘러싼 빈야드 스타일을 도입했다. 객석 어디서나 평등한 음향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음향 완성도도 정상급이다. 빈 필하모닉(2016), MET 오페라 오케스트라(2024) 등 세계적인 악단들이 거쳐 간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RCO 공연은 클래식계에서 “악단의 속살을 모처럼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내한 공연 중 하나”(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라며 호평받았다.재능 있는 연주자들과 신예들을 위한 ‘인 아티스트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무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상주 음악가 제도다. 2021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 에스머 콰르텟을 시작으로 첼리스트 문태국, 피아니스트 신창용 등이 거쳐 갔다. 올해 첼리스트 한재민이 선정됐다.‘문화 문턱’을 낮추기 위한 롯데문화재단의 노력은 클래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시대 현대미술품을 전시하는 롯데뮤지엄이 지난 20
'근대올림픽의 아버지' 피에르 쿠베르탱(1863~1937)은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10여년 뒤 이렇게 썼다. "올림픽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때가 왔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황금기, 심지어 네로 황제가 군림한 뒤로도 예술과 문학은 스포츠와 결합해 올림픽의 위대함을 꽃피웠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쿠베르탱의 염원이 한 세기가 지나 프랑스의 문화 중심지 파리에서 이뤄졌다. 2024 파리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운동 선수들만의 제전이 아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차원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은 물론, '파리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퐁피두센터도 특별전을 열면서 '문화 올림픽'에 뛰어들고 있다.파리의 대표적인 명소 샹젤리제 공원에 아프리카 전통 의상 차림의 여성 흑인 조각상이 들어섰다. 양손에는 올림픽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올리브 나무와 올림픽 성화를 쥐고 있다. 승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행인 누구한테나 쉼터를 내어준다. 조각을 둘러싼 6개의 의자는 서로 다른 대륙과 산업, 직업, 관심사를 의미한다.IOC가 주도하는 '올림픽 아트 비전'의 일환으로 마련된 공공 예술 '살롱'이다. 저명한 예술가를 선정해 올림픽 가치에서 영감을 받은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개최 도시에 설치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선 프랑스 예술가 자비에 베이앙이 올림픽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으로 칠한 군상이 들어섰다.올해 올림픽에서 선정된 작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앨리슨 사르(68)다.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와 흑인 여성을 주제로 조각과 혼
중심이 잘 안 잡힌 조각을 보는 것 같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의 2024년 창작산실 협력전시 '집(ZIP)' 얘기다. 1세대 조각가 김윤신부터 20대 작가 박소연까지 여성 조각가 16명을 망라한 기획전이다. 볼거리는 풍성하다.이번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기금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시각예술 분야 기획자와 창작자를 연결하며 전시, 출판, 행사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올해 총지원예산은 27억4800만원이다.작가 16명의 신작을 포함한 작품 50여점을 폭넓게 선보인다. 전시 제목은 압축파일을 뜻하는 '집 파일'과 다양한 세대 조각가들을 '지퍼'처럼 연결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재료, 물성, 조형 등 조각의 기본 요소를 바탕으로 오늘날 조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겠다는 취지다.전시는 아르코미술관 1~2층에 걸쳐 진행된다. 김주현 작가의 신작 '확장된 뫼비우스의 띠-구형'(2024)이 가장 먼저 관객을 반긴다. 가운데로부터 프렉탈 형태로 번져나가는 동선에 LED 조명을 설치한 작품이다. 안과 밖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했다.내부와 외부를 반전했다는 점에서 맞은 편에 전시된 정문경 작가의 'Yfoog'(2016)와 비교할 만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구피(Goofy) 인형의 겉과 속을 뒤집은 설치 작업이다.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굽은 김태연의 '말린 어깨'(2023)와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이처럼 몇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감상하면 전시를 한층 깊이 음미할 수 있다. 독특한 재료의 질감이 돋보이는 작업들이 그중 한 갈래다. 비누를 빚어 만든 신미경의 도자기, 미용실에서 머리를 털 때 사용하는 폴리우레탄 스펀지를 활용한 서혜연의 설
중국 국보 1호는 무엇일까. 한국 숭례문처럼 장엄한 건물도, 일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과 같은 아름다운 불상도 아니다. 북송 시대(960~1127) 궁중 화원 장택단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이다. 2015년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내달리면서 ‘고궁박물원 오픈런’이란 말까지 나왔다.<청명상하도>는 256쪽에 걸쳐 이 그림을 낱낱이 뜯어본다. 그만한 분량을 할애할 만하다. 가로 528㎝, 세로 24.8㎝로 길게 뻗은 화폭에 등장인물만 800명이 넘는다. 화가는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을 저마다 다르게 그렸다. 저잣거리를 세밀하게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북송의 패망을 암시하는 상징들을 예리하게 숨긴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책을 쓴 중국화 학자 톈위빈은 청명상하도를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두루마리 형태로 돌돌 말린 청명상하도는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펼쳐진다. 소설이나 영화를 감상하듯 순서대로 읽어야 작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책은 청명상하도에 얽힌 비밀을 완성도 높게 풀어낸다. 미적 가치 외에도 당대 사회상을 연결 지어 해석한 대목들이 “가장 세속적인 동시에 가장 위대한 중국화”라는 저자의 표현에 설득력을 더한다.안시욱 기자
프랑스 파리에서 테제베(TGV)를 타고 서남쪽으로 1시간30분을 달리면 고즈넉한 도시가 나온다. 중세 프랑스의 천년고도이자 기독교인들의 순례지, 품질 좋은 와인으로 유명한 투르다. 루아르강을 따라 자연과 고성이 어우러진 경관을 자랑하며 ‘프랑스의 정원’으로 불리는 곳.투르에도 어두운 과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혼란하던 시기다. 1940년 독일군의 폭격으로 도시 중심부가 잿더미가 됐다. 전후 10여 년간 재건 사업을 거치고 나서야 옛 모습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프랑스 추상화가 올리비에 드브레(1920~1999)의 풍경화는 투르의 역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인상주의를 계승한 초기 작업부터 나치의 침공으로 어두워진 드로잉, 새살이 돋은 듯 색채가 폭발하는 후기작까지. 작가가 한평생 지켜본 투르의 절경이 경기 수원시립미술관에 펼쳐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드브레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98년 주한프랑스문화원에서 연 판화전을 제외하면 굵직한 국내 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프랑스 올리비에 드브레 현대창작센터(CCC OD) 컬렉션과 작가 유족의 소장품 70여 점을 들여왔다.“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앞에 서 있는 내 안의 감정을 그린다.” 작가가 남긴 말이다. 전시 제목이 마음(mind)과 풍경(landscape)을 합친 ‘마인드스케이프’인 이유다. 같은 풍경이라도 당시 인상에 따라 다른 색채로 그린 대목에서 모네를, 기호화된 추상에서 피카소를 떠올릴 만하다.의사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유년 시절에 투르의 외가에서 휴가를 보내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건축가가 되고자 파리 에콜 데 보자르 건축과에 들어갔지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TV도,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비디오아트의 렘브란트’로 불린 미국 영상예술 거장 빌 비올라(1951~2024)가 지난 12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3세. 작가의 배우자이자 오랜 동업자인 키라 페로프 등 유족은 “사인은 알츠하이머와 관련한 합병증”이라며 “캘리포니아 롱비치 자택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비올라는 비디오 설치 작업과 전자음악 퍼포먼스를 오가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탐구했다. 가장 물질적인 도구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며 40년 넘게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한 인물. 백남준의 제자로서 비디오아트를 순수예술 반열에 올린 예술가 중 한 명이다.거장들을 흠모하던 비올라는 과거의 표현 양식과 현대 기술을 융합한 작업을 선보였다. 1995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 미국 대표작가로서 전시한 ‘인사(The Greeting)’가 그중 하나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다. 2010년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나란히 그의 ‘Emergence’를 설치하기도 했다. 호수 밑바닥에서 마주한 ‘느림의 미학’동서고금의 미술뿐 아니라 불교 선종과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의 신비주의 등 종교적 전통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모션 기법으로 유명한데, 정지된 듯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은 관객이 내면세계에 빠져들게끔 유도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 타오르는 불과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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