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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두현 기자
    고두현 기자 편집국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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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려는 마음만으론 충분치 않다. 해야만 한다.”‘르네상스의 완성자’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하루 20시간씩 연구와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고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며 한탄했다.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창의와 상상의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며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1452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에서 태어나 1519년 프랑스 앙부아즈에서 삶을 마감했다. 67년간 그가 쌓은 예술·과학의 금자탑은 인류 문명의 시간표를 단숨에 앞당겼다. 시골뜨기 사생아에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한 그가 ‘위대한 발견자’와 ‘전인적 르네상스맨’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그 비밀 중 하나가 방대한 분량의 ‘다빈치 노트’에 담겨 있다. 그의 노트는 유품으로 확인된 것만 1만3000여 쪽에 이른다. 이후 뿔뿔이 흩어져 지금 남은 것은 7200쪽 정도다. 이 가운데 72쪽짜리 노트는 1994년 빌 게이츠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080만달러(약 345억원)에 구입해 화제를 모았다. 다빈치 노트에는 그가 젊을 때부터 구상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와 헬리콥터, 낙하산, 잠수함, 장갑차 등의 제작 개념도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그는 호기심이 생기면 의문이 다 풀릴 때까지 관찰과 탐구를 계속했다. 인물을 그릴 때는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였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찾아 그들의 습관과 행동을 살폈다. 특이

    2024.11.18 16:22
  • 심장을 내어준 우편배달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우표            함민복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잔 시켜주고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함만복(1962~) : 시인 함민복 시인을 울린 우편배달부요즘같이 어려울 때 마음의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우표로 상징되는 우편배달부의 속 깊은 정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하지요. 첫 줄에 나오는 ‘판셈’은 빚잔치를 말합니다. 남은 재산으로 빚을 모두 청산하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죠.함민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수도전기공고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경주에 있는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일했지요. 이 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라는 대목처럼 그는 월급을 아껴 집에 우체국 전신환을 또박또박 보냈습니다.하지만 좀처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사이에 우편배달부는 빚 독촉 우편물을 전하며 안타까워했고요. 급기야 빚잔치를 하고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날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그 배달부가 다가왔습

    2024.11.18 10:00
  • ‘야구의 아버지’가 된 하이쿠 시인 [고두현의 아침 시편]

    떠나는 내게머무는 그대에게두 개의 가을.-마사오카 시키-----------------------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 이전까지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로 정립한 그는 스물세 살 때부터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35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만여 편의 하이쿠를 남겼습니다.그는 한창나이에 1주일간 각혈한 뒤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시키)를 필명으로 짓고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29세부터는 병이 깊어져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짧고 가혹한 생애를 견디게 해 준 힘은 시였습니다.그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같이 지낸 글벗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친한 벗이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였습니다. 동갑내기인 둘은 도쿄대학 시절 만났습니다. 시키의 문집 뒷부분에 소세키가 비평을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지요. 소세키는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는 원래 시키의 여러 필명 중 하나였습니다. 시키가 자신의 필명을 그에게 줄 정도로 둘은 절친이었습니다.둘은 같은 하숙방을 쓰거나 여행을 함께 다니며 삶과 문학을 논했습니다. 서로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도 마련했지요. 시키는 자신이 창간한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두견새)>에 소세키의 출세작이자 일본 최초의 근대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실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도련님》도 그 잡지에 실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오늘 소개하는 하이쿠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두 개의 가을’은 시키가 고향으로 요양하러 갔을 때 그곳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와 함께 지내다가 헤어질 때 아쉬움을

    2024.11.15 00:35
  • 혹시 나도 '환상방황'에 빠진 건 아닐까 [고두현의 문화살롱]

    ‘짙은 안개나 세찬 눈보라를 만났을 때 (…) 보통 등산자는 자기가 목표한 곳을 향해 곧장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자신도 모르는 착각에 의해 어떤 지점을 중심으로 둘레를 빙빙 돌기가 일쑤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링반데룽이라는 것으로, 사람에 따라 왼편으로 돌기도 하고 오른편으로 돌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세찬 눈보라나 짙은 안개 속에서 대개 등산자는 이 환상방황(環狀彷徨)을 하다가 종내는 조난을 당하게 마련인 것이다.’눈먼 비둘기·꿀벌도 제자리 뱅뱅황순원 단편소설 <링반데룽>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은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보며 멀어진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지만, 자꾸 제자리를 맴돌 뿐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제목의 ‘링반데룽’은 ‘고리·원형’을 뜻하는 독일어 링(ring)과 ‘걷기·방황’을 의미하는 반더룽(wanderung)을 합친 조어다. 일본이 한자어 ‘환상방황’ 또는 ‘윤형방황(輪形彷徨)’으로 번역했다.환상방황 현상은 과학 실험으로 입증됐다. 독일 막스플랑크 생물인공두뇌학연구소가 9명의 실험참가자에게 사하라 사막과 넓은 숲 지대에서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걷도록 했다. 그런데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거나 어두운 밤에 참가자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한 곳을 맴도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15명에게 눈을 가린 채 걷도록 했더니 모두가 지름 20m 미만의 커다란 원 안을 맴돌았다.이런 일은 알프스산맥의 조난 사고에서도 자주 확인됐다. 몽블랑 정상에서 폭설로 길을 잃은 등반가가 산을 내려오기 위해 약 2주간 하루 12시간씩 걸었지만 끝내 길을 찾지 못

    2024.11.12 17:16
  • 오늘, 영연방은 왜 빨간 배지를 달까요? [고두현의 아침 시편]

    플랑드르 들판에서                    존 맥크래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흔들리네.우리가 누운 곳을 알려주는십자가들 줄줄이 서 있는 사이로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지만땅에선 포성 때문에 그 노래 들리지 않네.우리는 죽은 자들. 며칠 전까지만 해도살아서 새벽을 느끼고 불타는 석양을 보았지.사랑도 하고 사랑받기도 했건만지금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누워 있네.우리들 적과의 싸움을 이어가게.쓰러져가는 손길로 횃불을 던지노니그대여 붙잡고 드높이 들게나.행여 그대가 우리의 믿음을 저버린다면우린 영영 잠들지 못하리.비록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해도.* 존 맥크래(1872~1918) : 캐나다 시인, 의사.오늘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는 영연방의 현충일과 관련한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5월.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에 걸친 플랑드르 지역은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동화 ‘플랜더스의 개’로 유명한 이곳 들판은 늪과 수렁, 진흙투성이였죠. 비가 많이 오는 데다 토양이 질어 물도 잘 빠지지 않았습니다.무릎까지 차오르는 뻘과 오물, 쥐가 들끓는 참호 속에서 수십만 병사가 죽어갔지요. 캐나다에서 군의관으로 파견된 존 맥크래 중령은 전투에서 친한 친구 알렉시스 헬머 중위와 동료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흔들리는 양귀비꽃을 보며장례를 치를 군목이 없어 맥크래 중령이 대신 장례를 집전했지요. 다음 날 그는 군용트럭 뒤에 웅크리고 앉아 전사자들이 묻힌 들판에 양귀비꽃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를 썼습니다. 그 시가 바로 ‘플랑드르 들판에서’입

    2024.11.11 10:00
  • 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었을 땐... [고두현의 아침 시편]

    홍시여 잊지 말라너도 젊었을 땐떫었다는 것을.     -나쓰메 소세키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하이쿠 시편입니다. 그는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가이자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지요. 산문뿐만 아니라 하이쿠도 아주 잘 썼습니다.‘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었을 땐/ 떫었다는 것을’에 나오는 ‘홍시’는 말랑말랑하게 잘 익은 우리나라의 붉은 감이 아니라 ‘타루가키(たるがき·樽枾)’라고 하는 일본의 감 장아찌를 가리킵니다. 일본 사람들이 감의 떫은맛을 없애려고 소금을 뿌려 오래 삭혀서 먹는 음식이지요.이 시는 인생의 경륜을 홍시에 비유하면서 젊은 날의 객기를 떫은 감에 빗댄 하이쿠의 명편입니다. 하이쿠에는 하나의 계절어(季語)가 꼭 들어가는데, 이 시에서 ‘홍시’는 가을을 말해주는 계절어입니다. 이처럼 하나 이상의 자연 소재를 넣어 창작 당시의 시공간을 짐작하게 하는 게 기본 작법이지요. 꽃잎 핀 아침시를 노래하는그이의 소식이려나.이 작품은 2014년에 발견된 그의 미발표 하이쿠입니다. 소설 《도련님》 무대인 시코쿠 북서부 진조중학교의 동료 교사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것을 118년 만에 발견했다고 합니다.편지는 1896년 4월 8일자로, 그가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대)에 교사로 부임할 때 전 근무지였던 에히메현 진조중학교(현 마쓰야마히가시고교) 동료 이카이 다케히코(猪飼健彦)에게 보낸 것입니다. 작별 인사차 왔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

    2024.11.08 00:07
  • ‘하이쿠 성인’의 놀라운 발견 [고두현의 아침 시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번개를 보면서도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 마쓰오 바쇼 -----------------------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일본 에도 시대 초기의 방랑시인입니다. 죽은 지 3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인기가 대단합니다. 아사히신문의 ‘지난 1000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 조사에서 6위에 올랐지요. 일본 전역에 그의 시비만 4000개가 넘습니다. 그가 남긴 하이쿠는 2000여 편에 이릅니다. 하이쿠는 5-7-5의 17음으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를 말합니다. 음절 수만 맞추는 게 아니라 기본 작법도 철저히 지키지요. 계절 감각을 나타내는 말을 꼭 넣어야 하고, 첫 구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져야 하며, 반드시 끊어 읽는 맛이 나게 해야 합니다. 짧지만 촌철살인의 지혜와 통찰을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이런 작법 덕분이다.  특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라는 작품은 번뜩이는 영감과 깊은 성찰을 동시에 주는 절창 중의 절창입니다. 이처럼 짧은 시에 인생의 오묘한 뜻을 ‘번개’처럼 응축해 낸 솜씨라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발견이지요.  그의 본명은 무네후사(宗房)입니다. 그런 마흔이 다 되어서 얻은 호 바쇼(芭蕉)로 더 유명하지요. 38세 되던 해 봄에 친구가 보낸 어린 파초(芭蕉)를 심었더니 날로 무성해져 오두막 전체를 덮었습니다. 파초에 둘러싸인 그는 호를 바쇼라 하고 오두막 이름도 바쇼우안(芭蕉庵)이라 했습니다. ‘파초를 옮기는 말’이라는 산문에서 그는 파초를 사랑하게 된 까닭을 ‘무용의 용(無用之用)’으로 설명했

    2024.10.31 17:17
  • "걱정할 거면 딱 두 가지만 해라" [고두현의 인생명언]

    걱정이 많으면 삶이 흐트러진다. 사소한 일도 큰 문제처럼 여겨진다. 걱정의 무게가 일상을 짓누르면 긍정적인 일조차 부정적인 것처럼 변한다. 그동안 가꿔온 희망도 빛이 바랜다. 일상 속에서 자잘한 걱정들을 없애는 방법은 뭘까. 몇 해 전에 정리했던 내용을 다시 펼쳐 본다.하버드의대 임상심리학과 교수인 로널드 시걸이 제안한 다섯 가지 방법부터 보자.◆ 당신과 당신의 생각은 다르다-생각의 노예가 되지 말라.◆ 관찰하라, 판단하지 말고-나쁜 생각들과 논쟁을 벌이지 말고 한 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정신을 흐트리지 말고 주위에 녹아들어라-커피를 마실 때는 향을 음미하고 식사를 할 때는 맛에 집중해라.◆ 나쁜 생각에는 ‘나쁜 생각’이라는 딱지를 붙여놔라-나쁜 생각들을 자신과 분리하라.◆ 자기 감각으로 돌아와라-당신 주위의 세계에 온 정신을 집중하라.퇴근해서도 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면 영국 일간 가디언의 조언을 참고할 만하다.◆ 판단-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되,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구태여 오늘 하려 애쓰지 말라.◆ 경계-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아직 일이 남았는데도 퇴근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버릇-집에 와서도 자꾸 일에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어떤 버릇이나 의례를 만드는 게 도움이 된다. 몸과 마음을 준비시켜 진정한 휴식을 취하라.◆ 몰두-창조적 기쁨을 누릴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날리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취미를 가질 것.◆ 차단-스마트 폰을 멀리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이메일을 열어보지 말 것. 누군가 정말 급했다면 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라 전화를 했을 것이다.이런 걸 실

    2024.10.29 20:10
  • 부·영예 다 버리고 무명 시인과 사랑의 도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엘리자베스 브라우닝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헤아려 보죠.보이지 않는 존재의 끝과 영원한 은총에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그 깊이와넓이와 높이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태양 밑에서나 또는 촛불 아래서나,나날의 가장 행복한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사랑하고칭찬에 수줍어하듯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써 사랑하고내 어릴 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세상 떠난 모든 성인과 더불어 사랑하고,잃은 줄만 여겼던 사랑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신의 부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하리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1806~1861) : 영국 시인오늘 얘기는 좀 말랑말랑한 러브 스토리입니다. 주인공은 영국 문학사상 최고의 사랑시를 남긴 여성 시인입니다. 당대의 스타였으나 부모·형제를 버리고, 부와 영예도 버리고, 연하의 무명 시인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입니다.엘리자베스는 열다섯 살에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치고, 몇 년 뒤 가슴동맥이 터져 시한부나 다름없는 청춘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네 번의 유산 끝에 사랑스러운 아들까지 낳았죠. 그 아들은 훗날 뛰어난 조각가가 됐습니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 덕분에 그가 남긴 사랑 시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요.엘리자베스는 여덟 살 때 호메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고, 열네 살 때 서사시 ‘마라톤 전쟁’을 쓸 만큼 조숙한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척추병, 동맥파열 등이

    2024.10.28 10:00
  • 진짜 샹그릴라는 어디 있을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차마객잔(茶馬客棧)                           윤효설산에마지막 마방이 걸어두고 간조각달 아래하룻밤내내가쁜 숨소리,그곳에도아침은와서보니앉은뱅이도라지꽃. ------------시의 제목에 나오는 차마객잔(茶馬客棧)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인 차마고도(茶馬古道)의 고산 지역에 있는 숙소입니다. 기원전부터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이 오가던 곳이지요. 차마고도의 길이는 약 5000㎞에 이릅니다. 평균 해발고도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길이지만, 눈에 덮인 설산과 수천㎞의 협곡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힙니다. 협곡이 얼마나 깊은지 절벽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면 몸이 그대로 오그라들고 말 정도이지요.  이 길을 따라 물건을 교역하던 상인 조직을 마방이라고 합니다. 수십 마리 말과 말잡이가 차와 소금, 약재, 금은, 버섯류 등을 싣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녔지요. 요즘은 이 길을 따라 도로가 많이 건설되어 트레킹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윤효 시인은 2018년 동료 문인들과 함께 10일간 이 길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왔습니다. 쿤밍에서 호도협, 샹청, 야딩을 거쳐 샹그릴라까지 이어지는 여정이었습니다. 해발 6740m의 만년설이 덮인 매리설산에서는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가 무너지는 장관을 보았습니다. 백마설산을 넘을 때는 고산병 때문에 심한 구토와 울렁거림에 시달렸고, 산사태로 도로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요. 이 시는 그때의 경험에서 건진 것입니다. 간결하면서도 깊은 깨우침을 담은 작품이어서 2021년 유심작품상 시 부문 수

    2024.10.25 01:13
  • "고개 빳빳 자만 말고 서릿발 딛듯 신중하라" [고두현의 문화살롱]

    벌써 상강(霜降)이다. 서리(霜)가 내리기(降) 시작하는 절기. 이맘때면 온갖 수풀이 시들고, 나뭇잎은 푸른빛을 잃는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비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쇠락의 계절에는 배울 게 많다. 처음 내리는 서리는 ‘첫서리’, 평년보다 빨리 내리는 서리는 ‘올서리’라고 한다. 올해 설악산에 내린 첫서리는 예년보다 빠른 올서리다.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는 ‘무서리’라고 부른다.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의 무서리가 이때쯤 내리는 서리다. 늦가을에 되게 내리는 ‘된서리’, 강하게 내리는 ‘강서리’도 있다.겸허함을 일깨우는 삶의 역리서리는 공기 중의 습기가 땅이나 물체에 흰 가루처럼 얼어붙은 것으로 농작물에 해를 끼친다. 비유적으로는 ‘타격’이나 ‘피해’, ‘힘없고 굼뜬 사람’ ‘세력이 다해 좌절한 사람’을 나타낸다. ‘서리 내리다’ ‘서리 앉다’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다’를 뜻하고, ‘서리를 맞다’는 ‘큰 타격으로 몹시 풀이 죽다’를 뜻한다. ‘서리 병아리’는 기력이 없고 행동이 둔한 사람을 일컫는다.서릿발은 서리와 달리 땅속 수분이 얼어 뾰족하게 솟아난 얼음 조각들이다. 이것이 흙을 들어 올려 식물 뿌리를 상하게 하므로 더 큰 피해를 입힌다. 생성 원인도 달라서 서리는 공기 중의 수증기, 서릿발은 땅속 수분 때문에 생긴다. 한마디로 서리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서릿발은 밑에서 위로 솟는다. 어감도 서릿발이 서리보다 강하다.몇 해 전 어느 날 아침, 자고 나니 서릿발이 하얗게 솟아 있었다. 바쁜 출근길에 무심코 서릿

    2024.10.22 17:41
  • 이웃집 처녀에게 바친 사랑詩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빛나는 별이여빛나는 별이여, 내가 너처럼 한결같다면 좋으련만-밤하늘 높은 곳에서 외로운 광채를 발하며,참을성 있게 잠자지 않는 자연의 수도자처럼,영원히 눈을 감지 않은 채,출렁이는 바닷물이 종교의식처럼육지의 해안을 정결하게 씻는 걸 지켜보거나,혹은 산과 황야에 새롭게 눈이 내려부드럽게 쌓이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게 아니라-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여전히 한결같이, 변함없이,아름다운 내 연인의 풍만한 가슴에 기대어,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것을 영원히 느끼며,그 달콤한 동요 속에서 언제까지 깨어있으면서,평온하게, 그녀의 부드러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그렇게 영원히 살고 싶어라- 아니면 차라리 죽어지리라.* 존 키츠(1795~1821) : 영국 시인.오늘은 영국 시인 존 키츠의 사랑시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유독 지식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단 4년간 활동한 뒤 26세에 요절했지만, 영국 낭만주의 대표 시인이 됐습니다. 셰익스피어 뒤를 이을 재목그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세계문학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죠.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았고 바이런, 셸리와 더불어 당대 시단의 최고봉으로 불렸으니 그럴 만했습니다.짧은 생애에 비해 많은 작품을 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와 ‘가장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동시에 남겼습니다. 그의 사랑 얘기를 그린 제인 캠피언 감독의 영화 <브라이트 스타>가 흥행한 뒤에는 더욱 그랬지요.전기작가들이 특별히 궁금해한 것은 그가 죽기 전 끔찍이 사랑하던 연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친구는 알고 있었지만, 여인의 남은 생을 위해

    2024.10.21 10:00
  • 뜻밖의 실수가 가져다준 행운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잠자리 날다서정춘아세요빠른 힘을 가지고눈에귀를 듣는볕소리부스러기 리듬인지모시 빛깔물맛 나는시과(翅果) 빛깔인지아세요나는 일이슬픈 일인지빼빼 마른 기분에고비사막에서물을 뜯는참 시원한 일인지아세요바람 맛에힘이 자란한 마리악기(樂器)라고 불러놓고리듬을 쓰는글자인지아세요---------------------‘잠자리 날다’는 서정춘 시인의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10여 년간 고군분투하다 비로소 뜻을 이룬 등단작인데, 그는 뜻밖의 실수가 행운을 가져다줬다고 얘기합니다. 무슨 사연일까요.그는 당시 신아일보에 시조, 동아일보에 시를 응모했습니다. 그런데 신아일보사로부터 “시 당선을 축하한다. 당선 소감을 써 보내라”는 전문을 받고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곧이어 실수를 깨달았지요. 두 신문사로 보낸 겉봉의 주소를 바꿔 써서 보낸 것이었습니다.“솔직히 말하지만 시조는 아무래도 크게 자신이 없어서 발행 부수가 좀 적은 신아일보사, 자신만만했던 시는 동아일보사로 응모를 했는데, 그런 실수가 빚어지고 만 것이었지요. 생각건대 시가 제대로 동아일보사로 갔을 경우 내 시는 당선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해 마종하가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석권했고, 나는 그 두 군데 작품 앞에 간담이 서늘했기 때문이죠.”이런 뜻밖의 행운 외에 더 재미있는 얘기도 감춰져 있습니다. 며칠 후 시상식이 끝나고 마포 공덕동으로 심사위원인 서정주 선생을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선생은 사모님을 불러 “저 국화꽃 대궁이 옆에 묻어 둔 포도주 항아리를 통째 뽑아 걸러 오시오” 하셨습니다.그러고는 자리에

    2024.10.17 19:07
  • 가을 서리에 백발이 삼천장이라니! [고두현의 아침 시편]

    추포가(秋浦歌)이백삼천 장이나 되는 흰 머리온갖 시름으로 올올이 길어졌네알 수 없어라 거울 속 저 모습어디서 늦가을 무서리 맞았는지.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이백(李白, 701~762) : 당나라 시인.이 시는 이백의 ‘추포가(秋浦歌)’ 연작 17수 중 15수입니다. 만년에 귀양에서 풀려난 그가 양쯔강 연안의 추포에 와서 지었는데 애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죠.삼천장(丈)이면 10㎞나 되는데…이 시의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은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 근심으로 허옇게 센 머리카락 길이가 3000장(약 10㎞)이나 된다고 했지만, 사실은 끝없는 고뇌와 슬픔의 길이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거죠.백발은 노년과 쇠잔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멜라닌 부족으로 생긴 자연현상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나 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상징하기도 하지요.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주흥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자문(千字文)’을 다 짓고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글자가 겹치지 않게 4자씩 짝을 지은 250구(句)를 하룻밤에 완성했으니 오죽했을까요.이처럼 ‘추포가’의 거의 모든 시행에는 ‘백발(白髮)’과 ‘추상(秋霜)’의 애수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는 첫수에서 이렇게 읊조리지요.“추포는 늘 가을 같아 쓸쓸함이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나그네 근심 헤아릴 길 없어 동편 큰 누대에 올라보니/ 서쪽으로 장안이 바라보이고 밑으로는 흐르는 강물이 보이네/ 강물 향해 말 붙이노니 너는 날 생각하는가/ 내 한 움큼의 눈물을 멀리 양주까지 실어가 다오.”2수에서도 “추포 원숭이들의 밤 시름에 남쪽 황산도 민둥산

    2024.10.14 10:00
  • 정든 밥집이 있는 골목 [고두현의 아침 시편]

      밥집 골목                             이현승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질 때그것은 익숙한 표정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고가령 입맛을 다시는 것도 거기에 포함되겠지만몸의 분별력이란단순한 반복 속에서 예리해지는 것인데혀의 경우도 그렇다바람은 바깥양반이 피웠는데소태 같은 나물무침을 손님이 받아내야 하는 그런어떤 사람들이든 밥집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땐금세 타인의 허기도 내 것이 되고이런 이상한 가족을 식구라고도 한다골목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표정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그것이 배고픔의 표정이다정든 밥집이 있는 골목은 초입에만 들어서도거친 가슴을 다독이는 힘이 있다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지는 것만으로도우리는 결딴난 연애보다 참혹한 표정이 된다쫓을 대상은 없고 그저 쫓기는 자의 심정으로---------------------------------------- “일상이 시고, 시의 재료이고, 삶 자체죠. 제 시가 구체적인 사건과 경험에서 나오다 보니 시를 쉽게 쓰기가 힘들어요. 한때는 좋은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쓰던 시를 요즘은 저를 바꾸려고 써요. 제 시로 일상의 혁명 정도는 이룰 수 있겠지요.” 이현승 시인에게 시는 ‘삶의 질료’이자 ‘일상의 혁명’을 꿈꾸는 씨앗입니다. 생활 속의 사건들은 모두 그에게로 와서 시가 되지요. 그는 이렇게 복잡다단한 현실의 단층을 깊이 들여다보고 민감하게 조응하면서 그 이면의 풍경까지 하나하나 그려냅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에 나오는 시 ‘밥집 골목’에는 다

    2024.10.11 00:03
  • 연암 박지원은 거구에 쌍꺼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쳐다봤지.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 박지원(1737~1805) : 『열하일기』 저자.오늘 읽어드리는 시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51세 때인 1787년에 형을 추모하며 쓴 것입니다. 그보다 일곱 살 위인 형 박희원(朴喜源)은 그해 7월 세상을 떠났지요. 1월에 동갑내기 부인을 떠나보낸 데 이어 맏며느리까지 잃고 난 뒤여서 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긴 얼굴에 광대뼈 … 안색은 붉은 편연암은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형을 무척 따랐죠. 서른한 살 때인 1767년에 아버지 박사유(朴師愈)가 64세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백면서생으로 소일하다 늦게야 음서로 출사해 정5품 통덕랑에 머물렀습니다. 연암은 유산을 가난한 형에게 몰아주고 서대문 밖으로 집을 옮겼습니다.떨어져 사는 동안에도 연암의 형제애는 각별했지요. 형님에게 자식이 없자 둘째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첫아들을 양자로 보낼 정도였습니다. 정조 즉위 직후 세도를 부리던 홍국영의 표적이 돼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피신했을 때도 형님 식구들을 설득해 함께 갔다고 합니다. 그의 호 연암은 이 골짜기 이름을 딴 것이죠.형님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난 형수에게는 절절한 묘지명을 지어 바쳤습니다. 연암골 집 뒤에 마련한 형수의 묘에 형님을 합장하고 애틋한 추모시까지 바쳤으니, 연암의 속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만합니다.그런데 추모시 치고는 뭔가 좀 이상하지요? 무겁고 슬픈 게 아니라 동심 같은 순수와 해학이 곁들여져 빙그레 웃음까지 짓게 만듭니다. 닮은꼴 &lsqu

    2024.10.07 10:00
  • 보라 저 ‘발가벗은 힘’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참나무                앨프리드 테니슨젊거나 늙거나저기 저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여름에는 무성하고그리고, 그러고 나서가을이 오면 다시더욱 더 맑은황금빛이 되고마침내 잎사귀 모두 떨어지면보라, 줄기와 가지로나목 되어 선저 발가벗은 힘을.----------------- 가을 초입에서 한 그루 참나무를 떠올립니다. 나목의 ‘발가벗은 힘’을 생각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국보적 존재로 추앙받았던 영국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 그가 참나무 앞에서 생의 사계절과 인간의 근본을 노래했습니다. 봄 여름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나무의 몸이 가을날 ‘더욱 더 맑은’ 빛을 뿜어내는 이유와 ‘마침내 잎사귀/ 모두 떨어지면’ 줄기와 가지만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이치….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믿음은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저 발가벗은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경영철학자 윤석철 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입니다. 그는 정년퇴임 고별강연에서 이 시를 인용하며 “개인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참나무처럼 ‘발가벗은 힘’(naked strength, 나력·裸力)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서 ‘발가벗은 힘’은 일정 지위나 상황 때문에 만들어지는 힘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어서 일정 기간이 흐른 후에도 유지되는 힘을 말하지요. 그는 두 가지 사례로 링컨의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이 비록 2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게 회자되는 것과 베르디 오

    2024.10.04 00:38
  • 제발 "제가 아시는 분" "제게 여쭤보세요"는 그만 [고두현의 문화살롱]

    1. “제가 아시는 분이 참석하신다고 해서 기대가 큽니다.” 2.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저에게 여쭤보세요.” 3. “할머니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 선생님께 물어봐라.”세 문장 모두 잘못된 높임말을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 문장의 “제가 아시는 분”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말이어서 “제가 아는 분”이라고 해야 옳다. ‘아시는 분’은 ‘나’가 아니라 ‘그분’을 주어로 할 때 “저를 아시는 분”이라는 형식으로 쓸 수 있다. 두 번째의 “저에게 여쭤보세요”도 자기 존대이므로 “저에게 물어보세요”라고 써야 한다. ‘물어보다’의 높임말인 ‘여쭤보다’를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스워진다. 세 번째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하는지 선생님께 여쭤봐라”로 각각 높임말을 쓰는 게 맞다."디자인이 예쁘시죠?"는 틀린 말왜 이렇게 높임말을 잘못 쓰는 사례가 많을까. 경어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주체를 높이는 주체경어법과 대화 상대를 높이는 상대경어법을 거꾸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밖에 나가셨다”와 같이 ‘시’를 붙여 문장의 주체인 ‘선생님’을 존대하는 게 주체경어법이다. 반면 “학생이 밖에 나갔습니다”와 같이 ‘학생’ 말고 대화 상대를 ‘습니다’로 높이는 게 상대경어법이다. 객체경어법은 문장 주체의 행위가 미치는 대상을 높이는 것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하는지 선생님께 여쭤봐라”가 그런 예다.높임말의 ‘시’는 사람에게만 붙이는데, 무생물인 사물에 ‘시’를 갖다 붙이면 황당한

    2024.10.01 17:32
  • 19세 처녀에 빠진 73세 괴테 [고두현의 아침 시편]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가볍고도 우아하게, 맑고도 부드럽게근엄한 구름 합창단이 천사처럼 하늘에 떠 있다.파란 하늘 저편에 마치 그녀를 닮을 듯한,연한 향기로 만든 날씬한 모습이 솟는구나.너는 즐겁게 춤추는 그녀를 본다.사랑스러운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 괴테(1749~1822) : 독일 시인, 극작가, 정치가.1822년 6월, 73세의 괴테는 휴양지 마리엔바트로 향했습니다. 몇 달 전 병으로 혼수상태까지 갔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생기가 돌았지요. 오래전 부인을 잃고 홀로 지내는 동안 뻣뻣해진 심신에 물이 오르는 듯했습니다. ‘늙은 베르테르’의 사랑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가 열아홉 살짜리 울리케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어린 날 폴짝거리던 소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니! 홀린 듯 바라보는 괴테의 눈빛을 맞받는 초록색 눈동자와 목덜미에서 팔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곡선, 게다가 가장무도회에서 미리 짠 듯 베르테르와 로테의 분장을 하고 들어선 두 사람….그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분출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제야 만났을까?” 그는 조심스레 결혼을 상상했고, 실제로 청혼하기에 이르렀죠.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온 독일이 떠들썩했지요.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씩 세워가며 헌신적인 남자의

    2024.09.30 10:00
  • 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도배를 하다가                  문신 도배를 한다방 보러 와서 잠깐 마주쳤던, 전에 살던 젊은 부부처럼등이 얇은 벽지를 벗겨내자한 겹 초벌로 바른 신문이 나온다나는 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벽지 뒷면에 바른 묵은 신문처럼쉽게 찢어지는 청춘을 내면 깊숙이 묻어두고천천히 돌아서던 그들을 향해나는 하마터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할 뻔했다그들은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트럭에 올랐다사내는 말이 없었고아이를 안은 여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쓸쓸함으로 채우고 떠난 그들은세면대 위에 닳은 칫솔 하나를 남겼다얼마나 많은 날들이 그 위에서 저물어갔던지칫솔모는 빳빳했던 기억들이 주저앉아 있었다새로 사 온 꽃무늬 벽지를 자르고풀을 먹여 벽에 바르면서나는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았다분명 한 시절을 총총히 걸어왔을 각오들이빛바랜 배경으로 시무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문신 시인은 남들이 한 번도 당선되기 어려운 신춘문예에 네 번이나 당선됐습니다. 2004년 《세계일보》와 《전북일보》 시 당선에 이어 2015년 《조선일보》 동시, 2016년 《동아일보》 문학평론까지 석권했으니 21세기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4관왕’입니다. 《세계일보》 당선작 ‘작은 손’에서 그는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겹쳐 보이면서 죽은 친구의 빈소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했지요. 그 속에 “세상 어느 것 하나/ 온

    2024.09.27 00:07
  • 거울은 스스로 비추지 못하고, 칼은 스스로 찌를 수 없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더위도 한풀 꺾이고,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독서 모임을 준비할 때마다 고민이 앞선다. 이맘때 읽기에 알맞은 책은 뭘까. 계절별로 읽기 좋은 책이 따로 있기는 할까. 굳이 함께 모여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약 330년 전 청나라 장조(張潮)의 소품 잠언집 <유몽영(幽夢影)>에서 몇 가지 답을 발견했다. 장조가 첫머리에 제시한 지침부터 흥미롭다.“경서(經書)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으니,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를 읽기에는 여름이 좋으니, 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서(諸子書)는 가을에 읽기 좋다. 운치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문집(文集)은 봄이 더 좋다.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다음 제언도 눈길을 끈다. 혼자 읽느냐 함께 읽느냐에 관한 얘기다. “(사서삼경 같은) 경전은 혼자 읽어야 좋고, (역사책인) <사기(史記)>와 <통감(通鑑)>은 벗과 함께 읽는 게 좋다.” 성현의 저술은 조용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정독하며 사색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서는 여럿이 함께 읽으며 토론하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나 홀로 정독’과 ‘다 함께 토론’의 장점을 접목한 사람 중에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이 있다. 그는 “뒤숭숭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차분한 날에는 사서를 읽는다”면서 마음이 고양된 날 경전으로 심신을 다독이고, 가라앉은 날 사서로 투지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이 같은 잠언은 수많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의 결실이다. 장조는 요즘으로 치면 교육감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15세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10년 이상 과거에 낙방했고, 평생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그는 이런 불운과 좌절

    2024.09.24 15:59
  •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다니! [고두현의 아침 시편]

    대국유감(對菊有感) 1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 같은지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말 문신. 국화는 여러 꽃과 함께 피는 봄이 아니라 가을 서리를 맞으면서 홀로 피는 꽃입니다. 그래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 서릿발 날리는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이라고 하지요. 일찍부터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꼽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중국에서 유독 국화를 좋아한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이었죠. 북송의 주돈이(周敦)도 ‘애련설(愛蓮說)’에서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菊花之隱逸者也)”라며 “진나라 도연명이 국화를 사랑했는데 이후 그런 사람이 드물다”고 할 정도였고요.도연명은 한때 관직을 맡기도 했지만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향리의 어린 것들에게 허리를 굽히랴” 하며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유명한 시 ‘음주(飮酒) 5’도 그때 쓴 것입니다.“사람 사는 곳에 오두막을 지었지만/ 문 앞에 수레와 말소리 들리지 않네./ 묻노니 어찌하여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절로 외딴곳이 된다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멀거니 남산을 바라보네./ 산 기운은 해 저물어 아름답고/ 날던 새들 짝지어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어/ 말하려다 말을 잊고 말았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

    2024.09.23 10:00
  •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사연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그렇게 만나는 것을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송수권 시인의 등단작 ‘산문(山門)에 기대어’는 휴지통에서 건져 올린 시입니다. 원고지가 아닌 갱지에 써서 ‘문학사상’ 신인상에 응모했다가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이어령 씨가 극적으로 발견했지요. 응모작에는 여관 주소만 적혀 있어 그를 수소문하느라 1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전남 고흥 태생으로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서른 중반까지 문학 열병을 앓았습니다. 20대 초반 섬으로 발령을 자청해 중학교 교사로 6년을 지냈고, 몇 년 뒤 다시 섬으로 발령이 나자 아내와 3남매를 두고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어느 날 서점에서 ‘문학사상’을 보고, 여관에 틀어박혀 갱지에 응모작을 써서 투고한 뒤 낙향

    2024.09.19 17:47
  • 이육사 탄생 120년…‘광야’와 ‘절정’ [고두현의 아침 시편]

    광야(曠野)          이육사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나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오랜만에 만나는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시 ‘광야(曠野)’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와서 아주 친숙한데, 이 시는 그가 죽고 난 뒤에 빛을 본 유고 작품입니다. 육사의 동생(이원조)이 광복된 지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지요.특이한 것은 제목 ‘광야’에 쓰인 한자가 ‘빌 광(曠)’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넓을 광(廣)’을 쓸 것 같은데, 특별히 ‘빌 광’을 쓴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시에 나오는 들이 만주 벌판처럼 넓은 곳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일제에 빼앗겼던 고향의 들판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라도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두 한자 모두 넓은 들을 두루 뜻하기 때문에 애써 구별할 것까지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육사는 나라 없는 세상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빛낸 시인입니다. 문학사적으로도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평

    2024.09.13 00:24
  • 젊은 아이디어 원하면 '네오테니'를 깨워라 [고두현의 문화살롱]

    작가 마크 트웨인은 “우리가 80세로 태어나 점차 18세가 되어 간다면 인생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힌트를 얻은 스콧 피츠제럴드는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썼다. 이 작품은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소설과 영화에서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젊어질 수 있을까. 데이비드 싱클레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얼마 전 우리 몸의 ‘역노화 혁명’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는 “생명체의 모든 세포에는 정보 재생을 돕는 ‘젊음의 백업 사본’이 있고, 이를 이용하면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젊어질 수 있다”며 “관련 연구진이 생쥐나 원숭이에서 일정 수준의 역노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다빈치도 10세 안팎 눈으로 관찰같은 대학 심리학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서는 몸과 마음이 함께 젊어질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연구팀이 80세 남성들에게 60세 때의 가구와 옷, 음식을 그대로 재현한 환경에서 한동안 지내게 했더니 이들의 손놀림이 빨라지고 기억력도 향상됐다. 이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몸 상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주변 환경과 심리적 각성, 육체적 변화가 맞물려 일어난 결과다.이를 지렛대 삼아 젊은 아이디어로 창의력을 키우는 방법을 찾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미국 교육학자 론다 비먼의 ‘네오테니(neoteny) 활용법’이다. 그는 “영장류 가운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젊음의 유전자’ 네오테니를 되살린다면 육체적 젊음

    2024.09.10 17:27
  • '빠삐용' 실존 인물, 탈출한 뒤 '대박' [고두현의 아침 시편]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빠삐용!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빠삐용!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빠삐용!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빠삐용!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구상(具常, 1919~2004) : 시인, 언론인.구상(具常) 시인이 노년에 쓴 시입니다. 제목 ‘드레퓌스의 벤치’는 영화 <빠삐용>(1973)에 나오는

    2024.09.09 10:00
  • 여의도에 생긴 ‘구상시인길’ [고두현의 아침 시편]

      꽃자리                구상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제가 좋아하는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의 짧은 시입니다. 구상 시인은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을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공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축언(祝言)을 자주 건넸는데, 구상 시인이 그 말을 조금 풀어서 시로 쓴 게 이 작품입니다. 처음엔 긴 시였지만 줄이고 줄여서 6행으로 압축했다고 합니다. 이 짧은 시에 시인의 심성과 의지가 그대로 함축돼 있습니다.올해로 구상 시인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됐군요. 이에 맞춰 생전에 33년간 살았던 서울 한강변 여의도에 ‘구상시인길’이 생겼습니다. 영등포구가 최근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이 길은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을 보며 마음을 씻어낸다)의 뜻을 담은 구상 시인의 여의도시범아파트 서재 ‘관수재(觀水齋)’ 옆 63빌딩에서 제2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는 여의도공원의 마포대교 남단까지 여의동로 1500여m 구간입니다. 영등포구는 2010년부터 매년 ‘구상 한강백일장’도 열고 있지요.어제(5일) 오후 여의나루역 2번 출구 앞에서 ‘구상시인길’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시인을 기리며 축하 모임을 가졌습니다. 행사 직전까지 쏟아지던 비가 때맞춰 멈춰 “하늘이 돕는다”는 덕담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최호권 영등포구청장은 “구상 시인과 함께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살았는데 가끔 등나무 아래에 앉아 계시던 모습

    2024.09.06 01:51
  • 울지 못하는 닭과 나무로 만든 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일찍 우는 닭 얻고 키우던 닭을 잡다(得早鳴鷄烹家中舊鷄)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밤하늘 은하수로는 새벽 알기 어렵고바람결 종루로도 시각 다 알 수 없어라.베갯머리 근심 걱정 자꾸만 기어들어내 가슴 시름으로 편치 못하더니이불 끼고 뒤척이며 잠들지 못할 적에꼬끼오 첫닭 소리 듣기에도 반갑구나.*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초기 문신, 시인.이 시를 쓴 성현은 조선 초기 문신입니다. 지금의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는 약전마을에 살았지요. 그도 여느 집처럼 마당 한쪽에 닭을 키웠던 모양입니다.남의 병아리 지극정성 키운 의계(義鷄)첫 구절의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라는 표현부터 잔잔한 웃음을 짓게 하는군요. 닭이 일찍 울어야 제 역할을 하는데, 울지 못하니 그놈은 잡아먹고 잘 우는 놈을 키운다는 얘기죠.예부터 닭에 관한 예화는 많습니다. 그중에는 의계(義鷄) 얘기도 있지요.어미닭 한 마리가 병아리들을 부화한 후 금방 죽고 말았습니다. 솜털 같은 병아리들은 추위에 떨며 삐약삐약 울었죠. 이를 본 다른 암탉이 기진맥진한 녀석들을 불러 모으고는 날개로 감싸 밤새워 품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모두 기사회생했다고 해요.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병아리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운 이 암탉을 ‘의계’라 부르고 잡아먹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조선 중종 때 김정국의 <사제척언>에 나옵니다.이병철 삼성 회장이 늘 곁에 둔 목계(木鷄)<장자>에 나오는 목계(木鷄, 나무로 깎아 만든 닭) 얘기도 유명하죠.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는데, 열

    2024.09.02 10:00
  •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이준관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촌락(村落)들은, 마지막 햇볕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지붕 위에 초승달 뜨고, 오늘 저녁, 딸 없는 집에서는 저 초승달을 데려다가 딸로 삼아도 좋으리라.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 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는 오늘 저녁, 푸른 저녁 불빛들에게 시집가도 좋으리라. -----------------------------------번거로운 일상을 잠시 잊고 평화로운 들길을 한번 감상해 볼까요.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알고 나면 마음이 한결 둥글어질지 모릅니다. 이 아름다운 시의 배경은 뜻밖에도 장인어른의 죽음이었습니다. “지난 6월 초 건강하던 빙장어른이 갑자기 작고하셨다. 그 빙장어른의 49재가 마침 여름방학과 겹치는 때여서 아예 식구들을 데리고 시골로 갔다. 죽음처럼 슬픈 게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일 뿐, 죽음과 무관하게 세상은 마냥 밝게 빛났다. 산 자의 몫인 생은 여전히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는 아랑곳없이 들녘으로 개구리, 여치,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그들의 녹색으로 빛나는 생

    2024.08.29 09:20
  • 유럽이 발명한 시계…중국은 왜 500년 늦었나 [고두현의 문화살롱]

    700여 년 전인 1309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세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이곳 산테우스토르조 교회에 설치됐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거대한 기계 앞에서 탄성을 연발했다. 그전까지는 해시계와 물시계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이웃 도시에서 온 구경꾼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렌체 출신인 단테는 1308~1320년에 쓴 <신곡>의 ‘천국’ 편에서 “열두 영혼이 ‘시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원무를 추고, 이들의 노래가 ‘교회 첨탑의 종소리’같이 울려 퍼졌다”는 표현으로 시계를 언급했다.뒤늦게 '자명종'에 열광한 중국기계시계가 처음 출현한 것은 이보다 수십 년 전인 1200년대 후반이었다. 톱니바퀴의 회전 속도를 일정하게 조절해주는 탈진기(脫進機)가 등장하면서 기술 혁신이 일어났다.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가 해와 물에서 기계라는 동력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기계시계는 밀라노와 파도바, 제노바, 볼로냐에 이어 프랑스 보베, 샤르트르 대성당, 파리 궁정 등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1410년 세워진 체코 프라하의 천문시계는 지금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유럽이 시계산업에서 앞서간 이유는 무엇일까. 크고 작은 도시의 발달과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문화, 부족한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경제적 요인, 수공업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결합한 결과였다. <시계와 문명>의 저자 카를로 치폴라는 “기계적인 세계관이 유럽에서 먼저 싹튼 덕분”이라며 14세기 철학자 니콜라스 오레스무스가 우주를 각각의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 장치에 비유한 것 등을 예로 들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우주는 시계와 비슷하다”고 말했

    2024.08.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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