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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두현 기자
    고두현 기자 편집국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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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육사 탄생 120년…‘광야’와 ‘절정’ [고두현의 아침 시편]

    광야(曠野)          이육사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나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오랜만에 만나는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시 ‘광야(曠野)’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와서 아주 친숙한데, 이 시는 그가 죽고 난 뒤에 빛을 본 유고 작품입니다. 육사의 동생(이원조)이 광복된 지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지요.특이한 것은 제목 ‘광야’에 쓰인 한자가 ‘빌 광(曠)’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넓을 광(廣)’을 쓸 것 같은데, 특별히 ‘빌 광’을 쓴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시에 나오는 들이 만주 벌판처럼 넓은 곳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일제에 빼앗겼던 고향의 들판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라도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두 한자 모두 넓은 들을 두루 뜻하기 때문에 애써 구별할 것까지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육사는 나라 없는 세상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빛낸 시인입니다. 문학사적으로도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평

    2024.09.13 00:24
  • 젊은 아이디어 원하면 '네오테니'를 깨워라 [고두현의 문화살롱]

    작가 마크 트웨인은 “우리가 80세로 태어나 점차 18세가 되어 간다면 인생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힌트를 얻은 스콧 피츠제럴드는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썼다. 이 작품은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소설과 영화에서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젊어질 수 있을까. 데이비드 싱클레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얼마 전 우리 몸의 ‘역노화 혁명’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는 “생명체의 모든 세포에는 정보 재생을 돕는 ‘젊음의 백업 사본’이 있고, 이를 이용하면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젊어질 수 있다”며 “관련 연구진이 생쥐나 원숭이에서 일정 수준의 역노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다빈치도 10세 안팎 눈으로 관찰같은 대학 심리학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서는 몸과 마음이 함께 젊어질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연구팀이 80세 남성들에게 60세 때의 가구와 옷, 음식을 그대로 재현한 환경에서 한동안 지내게 했더니 이들의 손놀림이 빨라지고 기억력도 향상됐다. 이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몸 상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주변 환경과 심리적 각성, 육체적 변화가 맞물려 일어난 결과다.이를 지렛대 삼아 젊은 아이디어로 창의력을 키우는 방법을 찾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미국 교육학자 론다 비먼의 ‘네오테니(neoteny) 활용법’이다. 그는 “영장류 가운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젊음의 유전자’ 네오테니를 되살린다면 육체적 젊음

    2024.09.10 17:27
  • '빠삐용' 실존 인물, 탈출한 뒤 '대박' [고두현의 아침 시편]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빠삐용!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빠삐용!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빠삐용!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빠삐용!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구상(具常, 1919~2004) : 시인, 언론인.구상(具常) 시인이 노년에 쓴 시입니다. 제목 ‘드레퓌스의 벤치’는 영화 <빠삐용>(1973)에 나오는

    2024.09.09 10:00
  • 여의도에 생긴 ‘구상시인길’ [고두현의 아침 시편]

      꽃자리                구상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제가 좋아하는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의 짧은 시입니다. 구상 시인은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을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공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축언(祝言)을 자주 건넸는데, 구상 시인이 그 말을 조금 풀어서 시로 쓴 게 이 작품입니다. 처음엔 긴 시였지만 줄이고 줄여서 6행으로 압축했다고 합니다. 이 짧은 시에 시인의 심성과 의지가 그대로 함축돼 있습니다.올해로 구상 시인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됐군요. 이에 맞춰 생전에 33년간 살았던 서울 한강변 여의도에 ‘구상시인길’이 생겼습니다. 영등포구가 최근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이 길은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을 보며 마음을 씻어낸다)의 뜻을 담은 구상 시인의 여의도시범아파트 서재 ‘관수재(觀水齋)’ 옆 63빌딩에서 제2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는 여의도공원의 마포대교 남단까지 여의동로 1500여m 구간입니다. 영등포구는 2010년부터 매년 ‘구상 한강백일장’도 열고 있지요.어제(5일) 오후 여의나루역 2번 출구 앞에서 ‘구상시인길’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시인을 기리며 축하 모임을 가졌습니다. 행사 직전까지 쏟아지던 비가 때맞춰 멈춰 “하늘이 돕는다”는 덕담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최호권 영등포구청장은 “구상 시인과 함께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살았는데 가끔 등나무 아래에 앉아 계시던 모습

    2024.09.06 01:51
  • 울지 못하는 닭과 나무로 만든 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일찍 우는 닭 얻고 키우던 닭을 잡다(得早鳴鷄烹家中舊鷄)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밤하늘 은하수로는 새벽 알기 어렵고바람결 종루로도 시각 다 알 수 없어라.베갯머리 근심 걱정 자꾸만 기어들어내 가슴 시름으로 편치 못하더니이불 끼고 뒤척이며 잠들지 못할 적에꼬끼오 첫닭 소리 듣기에도 반갑구나.*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초기 문신, 시인.이 시를 쓴 성현은 조선 초기 문신입니다. 지금의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는 약전마을에 살았지요. 그도 여느 집처럼 마당 한쪽에 닭을 키웠던 모양입니다.남의 병아리 지극정성 키운 의계(義鷄)첫 구절의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라는 표현부터 잔잔한 웃음을 짓게 하는군요. 닭이 일찍 울어야 제 역할을 하는데, 울지 못하니 그놈은 잡아먹고 잘 우는 놈을 키운다는 얘기죠.예부터 닭에 관한 예화는 많습니다. 그중에는 의계(義鷄) 얘기도 있지요.어미닭 한 마리가 병아리들을 부화한 후 금방 죽고 말았습니다. 솜털 같은 병아리들은 추위에 떨며 삐약삐약 울었죠. 이를 본 다른 암탉이 기진맥진한 녀석들을 불러 모으고는 날개로 감싸 밤새워 품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모두 기사회생했다고 해요.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병아리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운 이 암탉을 ‘의계’라 부르고 잡아먹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조선 중종 때 김정국의 <사제척언>에 나옵니다.이병철 삼성 회장이 늘 곁에 둔 목계(木鷄)<장자>에 나오는 목계(木鷄, 나무로 깎아 만든 닭) 얘기도 유명하죠.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는데, 열

    2024.09.02 10:00
  •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이준관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촌락(村落)들은, 마지막 햇볕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지붕 위에 초승달 뜨고, 오늘 저녁, 딸 없는 집에서는 저 초승달을 데려다가 딸로 삼아도 좋으리라.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 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는 오늘 저녁, 푸른 저녁 불빛들에게 시집가도 좋으리라. -----------------------------------번거로운 일상을 잠시 잊고 평화로운 들길을 한번 감상해 볼까요.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알고 나면 마음이 한결 둥글어질지 모릅니다. 이 아름다운 시의 배경은 뜻밖에도 장인어른의 죽음이었습니다. “지난 6월 초 건강하던 빙장어른이 갑자기 작고하셨다. 그 빙장어른의 49재가 마침 여름방학과 겹치는 때여서 아예 식구들을 데리고 시골로 갔다. 죽음처럼 슬픈 게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일 뿐, 죽음과 무관하게 세상은 마냥 밝게 빛났다. 산 자의 몫인 생은 여전히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는 아랑곳없이 들녘으로 개구리, 여치,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그들의 녹색으로 빛나는 생

    2024.08.29 09:20
  • 유럽이 발명한 시계…중국은 왜 500년 늦었나 [고두현의 문화살롱]

    700여 년 전인 1309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세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이곳 산테우스토르조 교회에 설치됐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거대한 기계 앞에서 탄성을 연발했다. 그전까지는 해시계와 물시계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이웃 도시에서 온 구경꾼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렌체 출신인 단테는 1308~1320년에 쓴 <신곡>의 ‘천국’ 편에서 “열두 영혼이 ‘시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원무를 추고, 이들의 노래가 ‘교회 첨탑의 종소리’같이 울려 퍼졌다”는 표현으로 시계를 언급했다.뒤늦게 '자명종'에 열광한 중국기계시계가 처음 출현한 것은 이보다 수십 년 전인 1200년대 후반이었다. 톱니바퀴의 회전 속도를 일정하게 조절해주는 탈진기(脫進機)가 등장하면서 기술 혁신이 일어났다.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가 해와 물에서 기계라는 동력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기계시계는 밀라노와 파도바, 제노바, 볼로냐에 이어 프랑스 보베, 샤르트르 대성당, 파리 궁정 등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1410년 세워진 체코 프라하의 천문시계는 지금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유럽이 시계산업에서 앞서간 이유는 무엇일까. 크고 작은 도시의 발달과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문화, 부족한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경제적 요인, 수공업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결합한 결과였다. <시계와 문명>의 저자 카를로 치폴라는 “기계적인 세계관이 유럽에서 먼저 싹튼 덕분”이라며 14세기 철학자 니콜라스 오레스무스가 우주를 각각의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 장치에 비유한 것 등을 예로 들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우주는 시계와 비슷하다”고 말했

    2024.08.27 17:23
  • 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뭇가지 아래나뭇가지 아래 시집 한 권포도주 한 잔, 빵 한 덩이그리고 네가 내 옆에서 노래한다면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 1047~1131): 페르시아 시인. 시집 <루바이야트>.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4행시)입니다. 루바이는 페르시아 문인들이 친구들과 흥겹게 어울리며 읊조린 4행짜리 즉흥시를 말합니다.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루바이야트’는 루바이의 복수형, ‘4행시 모음’을 뜻하지요. 신용카드 사업의 아버지인 디 호크가 ‘비자’를 창업할 때 이 시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후 700년 만에 세계적 시인으로시인의 성 하이얌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직업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오마르가 태어난 곳은 오늘날 이란의 북동부 지역.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당대 최고 철학자와 수학자,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1131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오마르는 생전에 시인으로서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700년 뒤인 19세기에 갑자기 세계적 스타가 됐습니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영어로 옮긴 시집 <루바이야트> 덕분이었지요.1859년 영국에서 발행된 이 시집은 1878년 미국에서도 출간됐습니다.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영미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오마르의 시 구절은 유명 작품의 제목이나 인용문, 관용어구 등으로 무수히 활용됐습니다.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아, 황야(Ah, Wilderness)>는 오마르의 시 속 “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라는 구절에서 따왔죠. 오닐의 여러 희

    2024.08.26 10:00
  • 퓰리처상 수상 시인이 발견한 행복 [고두현의 아침 시편]

    행복칼 샌드버그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네.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유명한 회사 사장들에게도 물었네.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마치 내가농담이라도 하는 듯 웃음을 지었네.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데스플레인즈 강을 따라 산책 나갔네.그리고 보았네, 한 무리의 헝가리 사람들이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을.--------------------------------------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1878~1967)의 시입니다.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인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대장장이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지요. 그는 11세부터 이발소 급사로 일했고, 우유배달과 벽돌공, 농장 일꾼 등 온갖 밑바닥 일을 다 했습니다.스무 살 때 미국-스페인 전쟁이 터지자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습니다. 이후 신문 기자가 되어 취재 현장을 누비면서 시를 썼습니다. 문예지에 작품을 활발하게 발표하면서 ‘시카고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며 시집과 링컨 전기로 퓰리처상을 연거푸 받았습니다.이 시는 38세 때 펴낸 첫 시집 <시카고 시편>에 실린 것으로, 행복의 의미를 한가로운 가족의 모습과 함께 묘사한 것입니다. 지식과 명예를 상징하는 교수,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사장이 아니라 휴일 오후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헝가리 이민자들로부터 행복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내용이지요.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일상의 즐거움을 한껏 누릴 줄 압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인간은 하루에 6만 가지 생각

    2024.08.22 16:37
  • 제2회 음유시인문학상에 가수 강허달림

    노작홍사용문학관(관장 손택수)이 주관하는 제2회 음유시인문학상 수상자로 가수 강허달림(사진)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지난해 발표한 앨범 '러브'(LOVE)에 실린 ‘바다라는 녀석’이다.음유시인문학상은 문학과 연극, 음악을 통해 시대와 자아를 꾸준히 성찰한 노작 홍사용(1900~1947) 시인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한 창작곡 문학상이다. 심사위원들은 "강허달림은 노랫말과 선율의 독창성은 물론 감성까지 탁월한 현시대의 음유시인"이라고 평했다.강허달림은 2005년 싱글앨범 '독백'을 발표하며 솔로로 데뷔했다. '기다림, 설레임', '넌 나의 바다', 'LOVE' 등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솔로 데뷔 전에는 밴드 마고, 풀 문, 신촌블루스의 보컬로 활동했다.시상식은 내달 28일 경기도 화성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열리는 노작문학축전에서 축하공연과 함께 진행된다. 상금은 2000만원이다. 

    2024.08.21 23:23
  • 어둠을 불평하기보다 등불 하나 켜는 게 낫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은 시 외에 사회평론도 많이 썼다. 평생 ‘구도자 시인’이자 기자, 논설위원, 종군작가로 격동의 시대를 증언하면서 산문집을 10권 이상 남겼다. 그중 1960년에 펴낸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구상의 스승이자 문학 도반인 공초 오상순 시인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에 얽힌 얘기다. 1960년 11월 초, 서울에 온 펄 벅은 명동 서라벌다방에서 철학적인 문답을 즐기던 공초에게 ‘사슴’ 담배 두 갑을 선물하며 한참 동안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날 감명을 받은 펄 벅은 공초가 펼친 사인북에다 이렇게 썼다. “It is better to light a single candle than to complain of the darkness(어둠을 불평하는 것보다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 6·25전쟁 후 혼혈아동들을 돌보며 한국식 이름을 박진주(朴眞珠)로 지었던 펄 벅이 가장 좋아했고 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이 말은 중국 격언이나 공자의 말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서구에서는 기독교의 가르침 중 하나로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다. 펄 벅뿐만 아니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자주 인용한 말로도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이 얘기를 전하며 “어느 사회나 모순과 부조리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 격언대로 어둡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한 촛불이라도 스스로 켜고 밝히기를 다짐하면서 우리가 지닌 능력의 최선을 발휘해 보자”고 말했다. 이런 정신은 그의 문학적 유지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평생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하고, 글을 쓸 때도 교묘하게 꾸며 쓰는

    2024.08.20 16:07
  • 윔블던 테니스 코트에 새겨진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만약에…J. 러디어드 키플링모든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비난해도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모두가 너를 의심할 때 자신을 믿고그들의 의심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속임을 당하고도 거짓과 거래하지 않고미움을 당하고도 미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그런데도 너무 선량한 체, 현명한 체하지 않는다면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생각하면서도 생각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승리와 좌절을 만나고도이 두 가지를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네가 말한 진실이 악인들 입에 왜곡되어어리석은 자들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있다면네 일생을 바쳐 이룩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세울 용기가 있다면네가 이제껏 성취한 모든 걸 한데 모아서단 한 번의 승부에 걸 수 있다면그것을 다 잃고 다시 시작하면서도결코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심장과 신경, 힘줄이 다 닳아버리고남은 것이라곤 버텨라! 라는 의지뿐일 때도여전히 버틸 수 있다면군중과 함께 말하면서도 너의 미덕을 지키고왕들과 함께 거닐면서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면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모두를 중히 여기되 누구도 지나치지 않게 대한다면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의 시간을60초만큼의 장거리달리기로 채울 수 있다면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무엇보다 아들아,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J.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영국 시인·소설가.키플링이 열두 살 된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시입니다. 이 시에 그의 철학과 문학의 정수가 응축돼 있지요. 지금은 그의 아들뿐 아니라

    2024.08.19 10:00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온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유랑하는 엥거스의 노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개암나무숲으로 갔네.머릿속이 불타올랐기에,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낚싯바늘에 딸기 꿰고 줄에 매달아,흰 나방이 날갯짓하고,나방 같은 별들이 반짝일 때,냇물에 그 열매 드리워자그마한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돌아와 그걸 마룻바닥에 내려놓고불을 피우러 갔지.뭔가 마룻바닥에서 바스락거렸고,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네.송어는 머리에 사과꽃을 단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내 이름을 부르곤 뛰어나가눈부신 허공 속으로 사라졌네.골짜기와 언덕을 헤매느라나 이제 나이 들었지만,그녀가 간 곳을 찾아내어입 맞추고 손 잡으리,그리고 알록달록 긴 풀숲을 거닐면서시간과 세월이 다할 때까지 따리라,달의 은빛 사과,해의 금빛 사과들을.---------------------------------오늘처럼 그날은 8월 16일이었습니다. 59년 전인 1965년, 한여름이었지요. 중년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미국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한적한 마을을 찾았습니다. 지붕이 덮인 다리 7개 중 마지막 다리를 찾다가 길을 잃은 그는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묻습니다.마침 집에 혼자 있던 여인은 농가의 안주인 프란체스카. 남편과 두 아이가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의 박람회에 참가하러 떠난 뒤 현관 그네에 앉아 한가롭게 아이스티를 마시던 중이었지요. 그녀는 다리의 위치를 한참 설명하다가 직접 길 안내에 나섭니다.그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집 주위를 산책하던 중 로버트가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라는 시 구절을 읊자 그녀는 “예이츠! ‘유랑

    2024.08.16 00:08
  • 별을 보라…상상력의 스위치를 켜라 [고두현의 문화살롱]

    그제 밤부터 어제 새벽까지 전 세계에서 ‘우주 대향연’이 펼쳐졌다. 3대 별똥별 중 하나인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쏟아졌다. 페르세우스 유성우는 스위프트-터틀 혜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부스러기가 지구 대기권에 부딪혀 불타면서 떨어지는 현상이다. 관측하기 좋은 곳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다.유성우뿐 아니라 모든 별은 도시보다 초원이나 사막에서 잘 보인다. 쏟아지는 별빛이 이마에 닿을 듯 가깝다. 도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대기 오염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빛 공해가 가장 큰 요인이다. 가로등이나 네온사인 같은 조명이 별빛을 방해한다.  별, 인류 꿈을 키운 영감의 광원정진규 시인은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며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고 노래했다. 별은 어두울수록 빛난다. 번쩍이는 섬광도 가장 어두울 때 강한 빛을 뿜는다. 별은 인류의 꿈을 키운 영감의 광원(光源)이며, 상상력의 발광점이기도 하다.옛사람들은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우주를 동경했다. 지도가 없던 시대의 유일한 이정표는 별이었다. 별자리는 지상의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자 해상의 항로를 일러주는 나침반이었다. 자연과학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도 별을 대상으로 한 천문학이다. 이는 인류 문명의 첫 꾸러미와 우주의 근본 비밀을 푸는 열쇠다. 우리 조상들이 어떤 생각의 각도로 세계를 보고, 어떤 사유의 진폭으로 현실을 인식했는지가 거기에 투영돼 있다.그 정신사의 단면 중 하나가 명명법(命名法)이다. 이름은 대상의 본질과 우리의

    2024.08.13 17:31
  • 다산은 이곳으로 좌천될 줄 어찌 알았을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금정시참(金井詩讖)정약용금정(金井)의 찬 기운 벽오동 감싸는데물 긷는 소리 끊기고 까마귀는 울며 간다.이제야 알겠네, 해 지고 별 뜨는 즈음황혼의 시각 보내기 새삼 어려운 줄.金井寒煙鎖碧梧 聲斷度啼烏偏知日沒星生際 銷得黃昏一刻殊* 정약용(丁若鏞·1762~1836) : 조선 후기 시인, 학자.다산 정약용이 1794년 8월 5일 밤 죽란(竹欄)에 앉아 쓴 시입니다. 죽란은 다산이 살았던 서울 명례방 집의 정원 이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문인들과 어울려 자주 시회를 가졌죠. 유명한 죽란시사(竹欄詩社)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추심(秋心)’이라는 제목의 5수 연작 중 두 번째로 실려 있지요. 이 시 쓴 다음 해 금정으로 좌천당해다산이 이 시를 쓸 때 곁에는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 1752~1821)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산의 육촌 형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시문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지요. 다산과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는데, 특히 이 시를 극찬했다고 합니다.시정이 쓸쓸하고 가을날 황혼의 정치가 함께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다산이 이 시에 쓴 금정(金井)은 궁궐이나 정원에 있는 우물을 미화해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요.그런데 다산이 이 시를 쓴 다음 해인 1795년 7월에 주문모 사건에 연루돼 좌천당해 간 곳이 바로 충청도 금정이었으니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이때 역참 누각 앞에 벽오동 한 그루가 서 있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지요.어쨌거나 금정 찰방으로 쫓겨 간 이래 다산은 황혼이 깃들 즈음이 가장 괴로웠다고 고백합니다. 세상만사가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지요. ‘방금 뜬 초승달이 발을 더디

    2024.08.12 10:00
  • ‘나의 침실’ 속 마돈나는 누구?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의 침실로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메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아래 줄임)-------------------------------- 이 시에 나오는 ‘마돈나’는 누구일까요? 이상화(1901~1943)의 ‘나의 침실로’는 1923년 9월 동인지 <백조> 3호에 실렸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이지요. 그때부터 ‘마돈나’가 누구인지를 놓고 온갖 말이 나돌았습니다. 가장 흥미를 끈 것은 함흥 출신 여성 유보화라는 설입니다. 팔봉(八峯) 김기진의 회고에 따

    2024.08.08 17:51
  • 건드리면 바로 반응하는 미모사의 비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미모사                김민서포트에서 차가 끓고 있다들꽃을 발로 차고 다니는몹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손님이 말했다나는 하얗게 센 민들레를불지 않고 발로 차서 날려주었는데내가 어떤 말을 해도당신은 나를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왜인지 그건 내가그동안 나를 탁월하게 변명해 왔다는 증거 같아요잎이 움츠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미모사 같은 사람에겐민감함이 건강함일까요(아래 줄임)------------------------------------2019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잎이 움츠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모사 같은 사람에겐/ 민감함이 건강함일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눈길을 끕니다. 젊은 여성의 내면 심리와 섬세한 감성 묘사가 돋보이는 시인데, 미모사 잎은 실제로 너무나 민감해서 손만 갖다 대면 금방 움츠러들지요. 제가 미모사를 처음 만난 건 오래전 초여름 날 오후였습니다. 한적한 산길에서 얼떨결에 마주쳤지요. 첫눈에 봐도 참하고 보드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지요. 어디에서 봤을까, 한참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미모사는 손끝을 안으로 오므리더니 아예 손을 밑으로 내려버렸습니다. 무엇엔가 섭섭해서 뾰로통하게 토라진 듯했습니다. 새침한 것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요. 미모사는 신경이 예민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양쪽 잎을 접어버린다고 해서 별명이 ‘신경초(sensitive plant)’입니다. 특별한 자극이 없으면 낮 동안 잎을 펴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잎을 닫는데, 그 모

    2024.08.01 22:51
  • "나를 키운 스승은 시·청각 장애와 난독증" [고두현의 문화살롱]

    “나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자연, 그리고 청각 장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스승은 청각 장애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자주 한 말이다. 고야는 46세 때 콜레라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청력을 잃었다. 이후 그의 그림은 한층 깊어졌다. 애쿼틴트 기법의 판화집 ‘카프리초스’를 통해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고발하면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붙인 용기도 여기에서 나왔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전쟁의 재난’ 시리즈 등의 명작들이 청각 장애라는 시련을 겪은 뒤에 탄생했다. 색깔 구별 못하자 과감한 실험고야가 스승으로 삼은 렘브란트는 시각 기능에 문제가 있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왼쪽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몰리는 외사시(外斜視)를 겪었다. 그래서 입체감을 살리는 데 애를 먹었다. 이런 단점을 만회하려고 그는 먼 곳을 어둡게, 가까운 곳을 밝게 그렸다. 그 결과 현대의 3차원 영상처럼 입체미가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이처럼 신체적인 결점을 딛고 예술적 창의성을 꽃피운 인물이 많다.‘절규’를 그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망막 질환을 앓았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왼쪽 시력이 좋지 않았다. 67세부터는 오른쪽 안구 출혈로 두 배의 고통을 받았다. 주로 쓰던 눈의 시력을 잃은 그는 아픈 눈을 통해 본 사물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후 왼쪽 눈에도 비슷한 출혈이 생겼다. 이런 고통을 딛고 그는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가 공식 기증한 작품만 유화 1100여 점과 판화 1만8000여 점, 드로잉 및 수채화 약 4500점

    2024.07.30 17:29
  • 첫사랑 연인과 이별한 김소월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김소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오늘은 또 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김소월(1902~1934): 평북 구성 태생.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시집 <진달래꽃>.오는 9월 8일은 시인 김소월이 탄생한 지 1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날이지요. 소월의 고향은 봄마다 산꽃이 지천으로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옥녀봉에서 만나 풀피리 불던 소녀할아버지가 개설한 독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곧 남산소학교에 입학했지요. 같은 반 동네 소녀 오순과 친하게 된 뒤로는 옥녀봉 냉천터에서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바위에 올라 함께 피리를 불거나 노래를 불렀고, 숲 사이의 시냇가를 거닐기도 했죠. 어릴 때의 이런 추억은 훗날 ‘풀따기’라는 시에도 잘 묘사돼 있습니다.“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일부 발췌)오순은 의붓어미 밑에서 자랐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아래로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 더욱 궁핍했죠. 소월이 숙모에게 들은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시 ‘접동새’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2024.07.22 10:00
  • 사후 46년 만에 등단한 문학청년 남정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독백체 7 -불새를 꿈꾸며                                       남정국아니다, 순아그게 아니라 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거다활활 타며 날아가는 새, 아니면 불같이 붉은 새온몸으로 허물어지는 새허물어져서 자신을 이루는 새그리하여 어떤 코뮤니스트의 깃발보다도 더욱더욱 붉게나는 괴로워하고 싶은 것이다피를 흘리고 싶은 것이다자유롭고 싶은 것이다.아니다, 순아정말 그것이 아니라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것이다빠알갛게 달아오른 아침 해 속에서푸더덕거리며 잠을 깨는 새, 꿈틀대는 힘을그침 없는 울음으로 뱉아내는 새아주아주 뜨거운 새.춥구나, 도와다오아름다운 불새를 꿈꾸며하루를 버리고 이틀을 버려도비켜 가는 것뿐인데도와다오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순아내가 너의 볼을 만지면그 볼의 온기만큼만, 그만큼만 순아.-----------------------------------------문학청년 남정국(南正國)이 고려대학교 1학년 때인 1978년 9월에 쓴 시입니다. 1958년 12월 21일생이니 만 19세 때였지요. 두 달 뒤인 11월 4일, 그는 경기도 대성리 북한강에서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만 20년의 삶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에 빠진 벗들을 모두 구하고 차가운 강 밑으로 사라진 그를 1주일간의 수색 끝에 발견했다고 합니다.그가 남긴 시편들은 이듬해 친구들에 의해 소박한 문집으로 묶였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시국 속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반세기 가까이 잊혔던 그의 작품들이 최근 유고 시집 『불을 느낀다』(엠엔북스)로 되살아났습니다.이 시집에는 새로 발견한 시 한 편을 포함한 27편의 시와 생전의 일기, 초고,

    2024.07.18 21:06
  •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에서 보는 달(蔽月山房詩)왕양명산이 가깝고 달이 먼지라 달이 작게 느껴져사람들은 산이 달보다 크다 말하네.만일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산이 작고 달이 더 큰 것을 볼 수 있을 텐데.山近月遠覺月小, 便道此山大於月.若人有眼大如天, 還見山小月更闊.* 왕양명(王陽明, 1472~1529): 명나라 시인.명나라 시인 왕양명이 열한 살 때 지었다는 시입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의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단순한 원근법을 넘어 우주의 근본 이치를 꿰뚫는 혜안이 놀랍습니다.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얘기한 게 1543년이고, 갈릴레이가 이를 확인한 것이 1632년인데, 1483년에 10대 소년이 이런 시를 썼으니 천재가 아닐 수 없지요. 세상을 하늘처럼 큰 눈으로 보려는 시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한시 원문 제목에 나오는 폐월산방(蔽月山房)은 절강성 금산(金山) 위에 있던 승방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군요.왕양명은 그의 호(號), 본명은 수인(守仁)입니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말이 트이지 않아 부모의 애를 태우다가 이름을 수인으로 바꾸자 말문이 터졌다고 해요. 이후 워낙 총명해서 아버지가 개인 교사를 붙여줬습니다.하루는 “천하에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는데,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선생의 말에 어린 양명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하여 성현이 되는 것이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이렇게 조숙했던 그는 14세 때 이미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고 병서를 읽었지요. 15세에는 집을 떠

    2024.07.15 10:00
  • 우리 사랑은 늘어나는 금박처럼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별의 말      —슬퍼하지 말기를                          존 던덕 있는 사람들이 온화하게 세상 뜨며,자신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이고,그러는 동안 슬퍼하는 친구 몇몇이이제 운명하나 보다, 혹은 아니라고 말할 때처럼,그처럼 우리도 자연스럽게, 소란스럽지 않게,눈물의 홍수도, 한숨의 폭풍도 보이지 맙시다,속인(俗人)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건우리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일 테니.지진은 재해와 공포를 초래하니,사람들은 그 피해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그러나 천체의 움직임은,훨씬 클지라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따분한 지상의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은(그 정수가 감각이기에) 서로의 부재를용납할 수 없나니, 부재는 사랑을 이루는감각들을 지우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지순한 사랑으로,부재가 무언지도 모를 정도로,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믿고 있기에,눈, 입술, 손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우리의 두 영혼은, 하나이기에,내가 떠난다 하더라도, 그건 다만끊기는 게 아니라, 늘어나는 것일 뿐입니다,공기마냥 얇게 펴진 금박(金箔)처럼. (이하 줄임)----------------------------------- 영영 이별이 아니라 잠깐 이별을 노래한 사랑 시입니다. 영국 시인 존 던(1572~1631)의 연애 시 중 한 편이지요.  존 던은 런던의 철물 상인과 극작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을 공부한 뒤 에식스 백작을 따라 스페인 원정에 두 차례 종군했고, 귀국 후 국새(國璽) 담당관인 에저튼 경의 비서가 됐습니다. 비서로 일하는 동안 그는 에저튼 경의 조카인 앤 모어와 사랑에 빠졌습

    2024.07.12 00:18
  • 귀는 왜 두 개일까…다섯 가지 숨은 이유[고두현의 문화살롱]

    카슨 매컬러스 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은 귀먹은 청년이다. 갑작스레 친구를 잃고 동네 카페에서 외롭게 시간을 보내는 그의 곁으로 몇몇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남모를 비밀 때문에 아내와 소원해진 카페 주인, 떠돌이 급진주의자, 음악으로 탈출구를 찾으려는 소녀, 인권을 생각하는 흑인 의사. 이들은 서서히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입술 모양을 열심히 읽으며 얘기를 들어준다. 그러나 눈만 껌벅일 뿐 뭐라고 대꾸를 해줄 수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원 위치 찾는 '양이(兩耳)효과'청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민감한 감각이다. 시각보다 빠르고 섬세하다. 우리 뇌는 시각 정보 변화를 초당 15~25회 정도 인지하지만, 청각 정보 변화는 초당 200회 이상 감지할 수 있다. 청각은 잠자는 중에 깨어 있고, 죽을 때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다. 외부 음파를 모으는 귓바퀴는 포유동물에게만 있다. 귓바퀴 모양은 사람마다 달라서 ‘제2의 지문’ ‘이문(耳紋)’이라고 부른다. 여권 사진 찍을 때 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게 이런 연유다. 그런데 귀는 왜 두 개일까. 좌우 양 끝에 떨어져 있는 이유는 뭘까. 생물학적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먼저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양쪽 귀가 필요하다. 방향감각은 생존과 직결된다. 위험 신호를 듣고 반사적으로 방향을 알아채야 한다. 양쪽 귀 사이의 거리는 17㎝ 안팎. 소리가 각각의 귀에 도달하는 시간과 세기가 다르다. 올빼미 실험에서도 100만분의 1초 차이로 음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귀로 들으면 강약만 파악할 뿐 방향을 찾기 어렵다. 음의 세기와 도달시간 차

    2024.07.09 17:12
  • 양반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시인' 정초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새는 얼굴을 알건만정초부산새는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관아의 호적에는 아예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얻기 어려워강가 누각에 홀로 기대어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山禽舊識山人面, 郡藉今無野老名.一粒難分太倉粟, 江樓獨倚暮烟生.* 정초부(1714~1789) : 조선 후기의 노비 출신 시인.정초부(鄭樵夫)는 조선 정조 때 사람입니다. 초부란 나무꾼을 뜻하니 ‘정씨 나무꾼’이죠. 최하층 신분입니다. 지금의 양평 지역에 있는 여씨 집안의 가노(家奴)였지요.그런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지을 줄 알았을까요.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을 두루 맞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하며 내공을 익혀야 합니다. 10개가 넘는 규칙을 지키면서 문학성까지 발휘해야 하니 양반들에게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죠.노비 신분 벗어난 뒤에도 쌀이 없어정초부는 어릴 때부터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주인이 낭독하는 글을 듣고 바로 외워버릴 정도로 재주가 남달랐죠. 그런 그를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업 성취가 매우 빨랐고, 곧 시 잘 짓는 나무꾼으로 경기 일대에 명성이 자자해졌지요.그는 특히 과거시험에 쓰이는 과시(科詩)를 잘 지었습니다. 주인집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죠. 이 덕분에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그는 지식을 뽐내는 것보다 정감이 넘치는 시를 많이 지었어요. 하층민이라고 해서 독설과 비판이 담겨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속으로 익히고 견디는 자세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습니다.하지만 양인이 된 후로도 전처럼 나무를 해야

    2024.07.08 10:01
  • 남해 금산산장에서 보낸 며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오목고두현금산산장 노할머니일흔여덟,바둑판 같은 생 펼치고오목을 놓으시네.가고 싶은 길 참 많았제,못 가는 길 더 많았지만.서울서 내려온 딸이어머니, 그쪽은 절벽이에요오냐 그러면 이렇게 놓제.길은 미끄럽기도 하고 굽어졌다 펴지기도하면서 바둑판을 몇 굽이째 도는데세상의 모든 길이 흑 아니면 백,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따라바둑돌은 저희끼리 잘그락거리며몸을 부딪네.밖에는 먼 길 가는 산꿩들다섯 발자국씩총, 총, 총, 총, 총점을 찍고노할머니 딸네 둘이첩첩 산 골짜기마다오 촉짜리 등불을 켜 다네.----------------------------------남해 금산 꼭대기에 산장이 하나 있습니다. 지은 지 100년도 넘은 금산산장입니다. 보리암에서 산길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지요.오래전 그곳에서 혼자 1주일을 지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장에서 며칠 동안 자기 시간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당일치기 등산이나 하룻밤 자는 둥 마는 둥 쫓기듯 내려오는 산행과는 애초부터 격이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몰랐던 숲속 나무들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맑은 물을 떠 청량하게 세수하는 기분 또한 묘미였지요.산장에서 이틀째를 맞은 날, 저녁을 먹고 일어나는데 여든이 다 되어가는 주인 할머니가 바둑판을 펼칩니다. 아니 웬 바둑? 의아하게 바라보았더니 옆에 있던 환갑 나이의 딸이 바둑통을 챙기며 대답합니다. “자꾸 정신이 흐려진다고 해서…. 오목을 두면 그나마 머리를 쓰게 되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해서요.”노할머니와 환갑에 가까운 딸네가 마주 앉아 밤늦도록 오목을 두는 모습이라니! 저도 곁에 앉아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두 사

    2024.07.04 17:12
  • 될성부른 나무는 '부름켜'부터 다르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무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내 다시 보지 못하리.허기진 입을 대지의 달콤한 젖가슴깊숙이 묻고 있는 나무온종일 앞에 덮인 두 팔을 들어 올린 채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무그 가슴에 눈이 내리면 쉬었다 가게 하고비가 오면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나무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 만들지만나무는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다네* 조이스 킬머(1886~1918): 미국 시인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섬세한 촉수로 지혜의 빛을 잡아낸다. 광합성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포착하면 푸른 잎사귀를 차르르 흔든다. 그럴 때 나무의 두 발은 더 깊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다.대지에 발을 딛고 서 우주로 팔을 벌린 형상이 곧 나무[木]다. 그 밑동에 ‘한 일(一)’ 자를 받치면 세상의 근본[本]이 된다. 나무는 이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상과 천상을 연결한다.나무는 뛰어난 인재(人材)를 의미한다. 목조건축이나 기구를 만드는 데 쓰는 나무를 재목(材木)이라고 한다. 이 또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거나 어떤 직위에 합당한 인물’을 가리킨다. 예부터 될성부른 떡잎과 들보로 쓸 만한 동량(棟梁)을 나무에 비유했다. 떡잎부터 나이테까지 결정짓는 ‘부름켜 경영’나무가 가장 바쁜 시기는 봄부터 초여름까지다. 날마다 새순을 밀어 올리느라 쉴 틈이 없다. 줄기를 살찌우며 몸집을 키우는 것도 이때다. 새로운 세포로 줄기나 뿌리를 굵게 만드는 식물의 부위를 ‘부름켜’라고 한다. 불어나다의 어간인 ‘붇’과 명사형 ‘음’, 층을 뜻하는 ‘켜’가 합쳐진 순우리말이다. 형성층(形成層, cambium)이라고도 한다.부름켜는

    2024.07.01 10:00
  • 그대 붉은 입술을 깨물었으니, 묻지 마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모두 다 꽃                               하피즈장미는 어떻게 심장을 열어자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주었을까?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빛의 격려 때문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얼마 전 소개한 이란 시인 루미에 이어 이번에는 하피즈의 시를 들려드립니다. 14세기에 태어난 하피즈는 2행으로 된 연작 형식의 사랑시 ‘가잘’을 워낙 잘 써서 ‘이란의 시성(詩聖)’으로 칭송받는 시인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석탄 사업 실패로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지요. 어릴 때 아버지가 외우던 코란을 귀동냥으로만 듣고 모두 암기했는데, 그의 필명 하피즈가 ‘코란을 모두 외운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대부분이 연인이나 신에게 바치는 연시 형식을 띠고 있지요. 신앙을 사랑에 빗대어 표현한 게 많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국민 시인’으로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그의 시는 서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괴테가 그의 독일어 번역판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서동시집(西東詩集)>을 펴낼 정도였지요. 영국 시인 바이런과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독일 철학자 니체도 그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니체는 ‘하피즈에게’라는 시까지 썼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 ‘모두 다 꽃’은 우선 장미의 아

    2024.06.27 18:27
  • 내 고장 유월은 비파가 익어가는 시절…[고두현의 문화살롱]

    남녘에서 아주 특별한 소포가 왔다. 초여름 햇볕에 잘 익은 황금빛 열매, 남해안 일대에서만 나는 아열대 과일 비파(枇杷).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 있는 김달진 시인의 생가에서 천 리 길을 달려왔다. 김달진문학관 바로 옆 생가 마당의 비파나무는 해마다 살구 크기만 한 ‘황금 열매’를 조랑조랑 맺는다. 비파는 가을에 꽃망울을 밀어 올리고, 겨울에 꽃을 피우며, 봄에 열매를 매달고, 여름에 노랗게 익는다. 사계절 기운을 두루 갖춘 덕분인지 향이 좋고 맛도 달다.  중국·일본 사신 갔다가 반한 맛비파에 얽힌 사연도 갖가지다. 생태학적 특징부터 인문학적 이야기까지 다채롭기 그지없다. 비파라는 이름은 잎과 열매가 현악기 비파(琵琶)와 닮은 데에서 유래했다. 발음도 한국과 중국, 일본이 비슷하다. 청동기 시대에 쓰인 비파형 동검 역시 생김새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된 제례 의식용 장신구다. 칼의 하단부가 둥글게 퍼져 있어 악기 비파를 연상시킨다.비파 열매는 기원전 2세기부터 ‘비파십과(枇杷十果)’라고 해서 중국 남부의 10대 과일로 꼽혔다. <천자문>에 ‘비파는 늦게까지 푸르고 오동은 일찍 시든다(枇杷晩翠 梧桐早凋)’는 구절이 나오듯 사철 잎이 푸른 상록수다. 온난한 기후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경남 남해 거제 통영, 전남 완도 목포 순천, 제주 등 남부에서만 볼 수 있고 중북부에서는 보기 어렵다.이렇게 특이한 비파를 시인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두보는 ‘전사(田舍)’라는 시에서 “굴피나무 가지 가냘프게 드리우고/ 비파 열매 나무마다 향기를 풍기는데/ 가마우지는

    2024.06.25 17:45
  • 도연명이 금주를 선언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술을 끊으며(止酒)도연명성읍에 사는 것 그만두고자유롭게 노닐며 스스로 한가하네.앉는 건 높은 나무 그늘 아래에 멈추고걷는 건 사립문 안에 멈추네.좋은 맛은 텃밭의 아욱에서 그치고큰 즐거움은 어린 자식에서 그치네.평생 술을 끊지 못했으니술 끊으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었네.저녁에 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아침에 끊으면 일어날 수가 없네.날마다 날마다 끊으려고 했지만혈기의 작용이 멈추어 순조롭지 않네.단지 술을 끊는 게 즐겁지 않은 것만 알고끊는 게 몸에 이로운 것은 믿지 않네.비로소 끊는 게 좋다는 걸 깨닫고오늘 아침에 정말로 끊게 되었네.이로부터 한결같이 끊어 나가면장차 부상의 물가에 이르리라.맑은 얼굴이 예전 모습대로 머물 것이니어찌 천만년에 그치겠는가.居止次城邑 逍遙自閑止 坐止高蔭下 步止門裏好味止園葵 大歡止稚子 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暮止不安寢 晨止不能起 日月欲止之 營衛止不理徒知止不樂 未信止利己 始覺止爲善 今朝眞止矣從此一止去 將止扶桑 淸顔止宿容 奚止千萬祀.* 도연명(陶淵明·365~427) : 중국 동진 말기에서 송대 초기의 시인.이태백과 함께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도연명(陶淵明). 그가 술을 끊게 됐다니, 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시를 쓴 시기를 짚어보니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 무렵입니다. 이보다 13년 뒤인 예순두 살에 세상을 떠난 걸 감안하면, 말년까지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는 말인데….한자 ‘지(止)’라는 글자에 담긴 비밀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이후로도 술을 계속 즐겼습니다. 이 시에는 한자 ‘지(止)’ 자가 20개나 들어 있는데요, 그 글자 속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 어떤 비밀일까요.학

    2024.06.24 10:00
  •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지혜로운 사람이 들려준 말,“은화와 지폐와 동전은 다 주어도네 마음만은 함부로 주지 말아라.진주와 루비는 다 주어도네 순수한 마음만은 잃지 말아라.”그러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아무런 소용도 없었어라.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그 사람이 다시금 들려준 말,“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은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다.그 사랑은 숱한 한숨과 끝없는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내 나이 이젠 스물하고 둘오, 정말이어라, 정말이어라.-------------------------------영국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1859~1936)의 시입니다. 그의 시는 뛰어난 서정성과 절제미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운율에 따라 읊조리기 좋지요. 이 시도 많은 작곡가에 의해 노래가 됐는데 널리 알려진 것만 44곡에 이릅니다. 한창때의 사랑을 다룬 이 시는 한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현자(賢者)의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스물한 살은 너무 젊어서 낭만적인 감정에 휘둘리기 쉽지요. 어른이 됐으면서도 아직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 사랑에 빠져 마음을 빼앗기면 감정에 휘둘리고 결국 후회할 것이라고 일러줘도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이가 이 말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다./ 그 사랑은 숱한 한숨과/ 끝없는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라는 경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정신없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서야

    2024.06.2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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