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궁궐길라잡이 활동과 서울의 역사문화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낮 최고기온 영하 7도, 포니 투 택시를 형무소에 대절 하고 낯선 여인네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재소자를 기다린다. 저 여인네가 박경리가 아닐까?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엎고는 교도소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중략)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해 보였고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풀포기의 모습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얼렀다.’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기자 시절에 쓴 글이다.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서울 구치소(1967년부터 1987년까지)에서 사위인 김지하의 출옥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손자 원보를 업고 어르고 달래며, 마당 저만치서 사위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김지하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친구, 지인, 기자 등이 구치소 문 앞을 가득 메웠다. 또 다른 여인, 김지하의 부인이자 박경리의 딸인 김영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옥문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럴 때 칭얼대는 아가는 할머니의 몫이다. 이곳에서조차 우선순위에 밀려 저만치에서 택시를 대절해 놓고 마음을 졸이고 있다. 기자 김훈은 소설가 박경리를 팔자 사납고 무력한 할머니, 교도소 마당의 풀 한포기보다도 못한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이곳은 누가 오더라도 그렇게 되는 곳이다. 형무소 안에 갇힌 사람도, 그를 돌봐야 하는 가족들도 매한가지이다. 나도 어릴 적 이곳에 와 본적이 있다. 크게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들어간 큰 아버지의 출소 때문이었다. 그때도 추운 겨울이었는데 구치소
몇 년 전에 엄정화 주연의 '오케이 마담'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병뚜껑 이벤트로 하와이 여행에 당첨된 엄정화가 좌충우돌 하는 코미디 영화다. 엄정화의 극중 배역이 '영천시장 꽈배기 아줌마'였다. 영천시장의 꽈배기는 이처럼 유명하다. 수십년 전 비디오 방을 달군 에로영화의 주인공들, ‘젖소 부인’, ‘김밥 부인’, ‘만두 부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착한 아줌마, '꽈배기 아줌마'다. 방금 튀긴 꽈배기를 설탕에 굴려 먹으면 정말 맛있다. 가격도 싸서 1천원에 무려 3개나 준다. 얼마 전까지는 5개였다. 1만 원을 내면 50개, 2만 원이면 큰 박스에 백 개나 담아준다. 박스로 사가는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경찰, 군인들이란다. 한 박스, 두 박스 사가면 아마도 중대원들이 다 먹을 정도로 근사한 회식도 가능할 것이다. 나도 한 박스 사보려다가 그 많은 꽈배기를 줄 사람들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싸게 팔아도 남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영천시장에는 꽈배기만 싼 것이 아니다. 칼국수도 싸다. 몇 년 전에는 한 그릇에 2500원이었는데 얼마 전에 들렸더니 4천원을 받는다. 막걸리 한 병과 같이 먹어도 1만원을 내면 2, 3천원을 거슬러 준다. 나의 소박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안산이나 인왕산에 오른 후 이곳에서 칼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인근의 이진아 도서관에 가서 꾸벅꾸벅 졸며 책을 읽는 것이다. 함께 하실 분을 찾는다.'맛의 해방구', '가격의 해방구' 영천시장에서 꽈배기와 더불어 유명한 곳은 떡집이다. 한때는 서울 시내 떡의 70%를 공급했다고 한다.영천시장의 유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2011년이
지난 칼럼에서는 서대문 밖이 주택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아파트들이 들어선 동네라고 소개했다. 오늘의 주제도 아파트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영등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여의도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막 개발된 여의도는 진짜 부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다 구비돼 맨몸으로 들어가 산다는 맨션아파트였다.맨션아파트의 대척점에 시민아파트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문 밖에는 서울의 제 1호 시민아파트인 ‘금화시민아파트’가 있었다.금화시민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 금화산 110미터 일대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삶의 터전을 일군 판자촌 밀집 지역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땅을 파고 거적으로 지붕을 올려 만든 토막집들이었다가 해방 후에는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판자집들이 즐비했다. 서울시는 이들을 몰아내고 아파트를 지었다. 내부에 화장실과 연탄 창고를 들인 최신식이었다. 19평형과 14평형 두 종류로 2,000 세대가 넘는 대단지였다. 산에 나무가 별로 없던 때라 시내 어디에서도 잘 보였다. 시민아파트 1호 금화시민아파트는 처음에는 서울 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그런데 왜 이런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었을까? 김현옥 서울시장의 대답이다. “야 이놈들아 그것도 몰라!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그래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잘 보이는 곳에 지어졌다. 아마도 그린벨트, 군사보호구역, 국유지는 철거 및 토지 보상이 필요 없기 때문에 산등성이에 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민아파트에서 사
35. 미동아파트(경성 대화숙), 현대(개명)아파트와 금화장 주택지 아파트 홍수 시대다. 이곳에는 유독 특이한 아파트들이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녹색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다. 2030년이면 지어진 지 백년이 되는데 아쉽게도 28층의 주상복합 건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입주민들은 이 허름한 아파트에 사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 개발 시대를 지나온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이 아파트가 사라진다고 하니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경찰청 옆의 물길 위에 세워진 서소문 아파트도 재건축으로 사라진다. 만초천의 휘어진 물길을 아파트의 곡면으로 짐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다. 아쉬움이 남는 분들은 이 아파트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보시라.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한 건물이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굴곡진 세월을 따라 울고 웃는 생명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일부분은 잘리기도 했고 금가기도 했다. 상처가 깊은 피부, 늙어서 주름이 깊게 패인 어르신, 딱 그 모습이다.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중림동 약현성당을 길게 감싸고 있는 성요셉 아파트이다. 1971년생인 서소문 아파트와 비슷한 나이의 성 요셉 아파트는 중림동 일대가 재단장을 하면서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굴곡진 약현의 경사면을 밀어내지 않고 지어 아파트 남북 면의 층수가 다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높은 언덕을 걷어낸 후 지었을 것이다. 성문 밖에는 이처럼 나름대로 개성 있고 사연 있는 아파트들이 많다.충정 아파트 건너편에서 서대문 사거리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면 도로 안쪽에 있는 한 동짜리 아파트가 보인다. 미동 아
우리나라가 민주화 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신문만 펼치면 ‘강민창 치안 본부장’의 이름이 나왔다. 서슬 퍼런 엄혹의 시기에 경찰 업무를 총괄했던 곳 치안본부, 치안 본부장 강민창. 민주화의 대척점에서 늘 소환되던 인물이다. 강민창 치안본부장 시절인 1986년, 서대문 밖 이곳에 치안본부 청사가 들어섰고 1991년 경찰청으로 바뀌었다. 근처를 지날때면 아직도 치안본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신문사에 근무할 때, 경찰청 뒤쪽 담을 따라 샛길을 지날 때가 많았다. 샛길을 통과하면 사조산업 건물이 나온다. 그 옆에 KT&G, 미동초등학교가 이웃해 있다. 5호선 서대문역 옆이다. 골목에서는 금방이라도 정치 깡패 김두한과 이정재가 나와 가죽장갑을 끼고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60, 70년대 분위기다.내가 궁금했던 것은 경찰청을 두르고 있는 높은 벽돌담이었다. 광화문 맞은편 옛 의정부터 자리에 있던 치안본부가 1986년에 이곳에 신축해 들어왔다는데 그때 생긴 담일까? 이전부터 있던 담일까? 오래된 붉은 벽돌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1930년대 지도를 살펴보면 서대문 사거리를 중심으로 서대문 경찰서, 우체국(현재 충정로 우체국), 금융조합(농협 전신), 병원(서울 적십자 병원), 전매국 연초공장이 나온다. 병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기감영 터에 들어선 적십자병원이다. 적십자병원 옆 죽첨정 1정목(충정로 1가)에 서대문 경찰서가 있었다. 우체국도 그대로다. 이런 기관들이 일찍부터 들어선 것은 서대문 밖, 이 동네가 발전이 빨랐기 때문이다. 1907년 서대문에서 마포 종점까지 전찻길이 개통되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변화가 생겼다. 일본인들도 금화장 문화주택 단지를
충정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정치적인 사건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계유정난부터 임오군란, 그리고 1960년의 4.19혁명까지 다뤘다. 이 서대문 밖이 '혁명의 성지'로 느껴지기도 한다.정치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기 전에는 충정로의 문화 예술 콘텐츠들을 들여다 봤다. 김환기, 김중업, 이중섭, 김수영, 동양극장의 무용수 배구자, 요화 배정자까지…이곳 성문 밖에는 정치와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수많은 서사들이 넘쳐 난다. 성문 안의 엄격한 규율 속 양반들의 모습과 달리 숨통이 트이는 곳이라서 일까?오늘 이야기도 우리 현대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정치적 사건에 관한 것이다.일제강점기 최고 부자 3인방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민영휘와 김성수, 최창학이다. 민영휘의 아버지 민영준이 돈 버는 방법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관직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큰 돈을 벌었는데 벼슬을 원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상납금을 높게 부른다. 벼슬을 사려는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다. 벼슬도 좋지만, 상납금이 너무 커 전 재산을 날릴 판이다. 고민하다 다시 민영준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벼슬을 사지 않겠다고(마다) 한다. 민영준은 이미 윗선에 금액을 말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리 저리 궁리하는척 하다 귓속말로 "내가 잘 무마 시키겠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제시한 상납 금액의 절반 혹은 3분의 1을 무마 비용으로 챙긴다. 이것이 속칭 ‘마다리 수법’이다. 민영휘의 아버지 민영준은 이런 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이 집안의 상속자 민영휘가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됐다.인촌 김성수의 집안은 우리가 아는 대로 전북 고창의 만석꾼 집안이다. 호
오빠와 언니들은책가방을 안고서왜 총에 맞았나요(중략)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오빠와 언니들이왜 피를 흘렸는지를오빠와 언니들이배우다 남은 학교에배우다 남은 책상에서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뒤를 따르렵니다 이 시는 1960년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학생의 시다. 당시에는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던 시절인데 정동에 있던 덕수국민학교와 함께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는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였다. 사람들이 4.19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첫째, 4.19는 대학생들이 시작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4.19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가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위 시에서 보듯 4.19 혁명의 주도 세력이 대학생만은 아니었다. 중학생, 고등학생과 초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4.19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 등 고등학생들에 의해 시작됐다. 일요일인 이날은 민주당 장면 후보의 선거 유세가 대구 수성천변에서 예정돼 있었다. 일요일에 등교 명령을 내려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화근이다. 경북고를 비롯한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오에 반월당에 집결해 매일신문사를 거쳐 도청으로 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것이 4.19의 시작인 ‘2.28 민주 운동’이다.4.19의 또 다른 도화선 ‘마산 의거’는 시위에 참여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시작됐다.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까지 박힌 시신이었다. 보도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시민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 서울에까지 번졌다.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
충정로를 이야기하며 서대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서대문의 본명은 돈의문(敦義門)이다.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5상(五常)을 사대문에 한 글자씩 넣어 이름을 지었다. 오상에는 이미 방위 개념이 포함돼 있다. 동쪽을 상징하는 어질 인(仁)은 당연히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이름이 되었고, 남쪽 방위 개념인 예(禮)는 숭례문(崇禮門)이 되었다. 서쪽을 나타내는 의(義)를 넣은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다. 지혜 지(智)자는 북향을 말하나, 조금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 의미가 비슷한 꾀 정(靖)자로 교체해서 숙정문(肅靖門)이 됐다. 인의예지신 중에서 인의예지는 사대문에 쓰였고 중앙을 의미하는 신(信)은 서울의 중앙, 종로 한복판 보신각에 쓰였다. 종각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의 ‘신’자가 믿을 신(信)이다. 우리 문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서대문으로 부르는 문은 돈의문이다. 서대문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됐다.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고 서대문구에 서대문이 없다. 숭례문만 중구에 속하고 서대문, 동대문, 숙정문이 모두 종로구에 속한다. 서울 공동화로 거주 인구가 줄자 종로구를 확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다.돈의문은 조선 초 한양도성을 쌓을 때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서대문이 있는 자리가 경복궁의 팔과 다리에 해당한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팔과 다리에 해당하는 곳에 서대문이 뻥 뚫려 풍수상 좋지 않으니 문의 위치를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선 초의 권신인 이숙번 집 앞에 문을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집 앞에 문이
서대문 사거리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농협’ 간판이 많이 보인다. 1970년대 만해도 대다수 국민들이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농촌에도 아파트 거주자들이 많고, 농업만을 통해 가계를 꾸려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농사도 박물관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시대가 됐다. 농협중앙회 옆에는 농업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볼거리들이 많다. 고향이 농촌인 사람들은 어릴 적 향수도 느껴보고 재미있는 체험도 해보길 권한다.농업박물관 앞에는 ‘김종서의 집’이라는 표석이 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계유정난 때 단종 편에 서서 죽임을 당했다' 정도였는데 그가 쌓아 놓은 공을 찬찬히 살펴보니 만만치가 않다. 먼저 그는 6진을 개척한 인물이다. 지금 한반도의 북쪽 경계, 두만강 유역이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는 여진과의 전투에서 가슴과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여진족을 몰아냈고, 우리 주민들을 이주시켜 나라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16세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고 세종의 명으로 고려사를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세종시 장군면인데 ‘장군’이라는 지역명은 김종서 장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실력자다. 그의 집이 이 돈의문 밖에 있었다.1417년생인 수양대군(세조, 이름 유瑈, 1417~1468)과 대비되는 사람이 1383년생 김종서다. 수양이 아무리 왕의 적자인 ‘대군’이라 하지만 좌의정 김종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선대 왕 세종, 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문무에 능하고 나이도 지긋한 국가의 원로였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 신
1880년대 조선 말기,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성경을 들고 온 선교사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깨우러 온 외교관들, 시장을 개척하러 온 상인들, 여행가들, 목적은 달랐지만 배를 타고 멀리 태평양을 횡단해 제물포(인천)에 내렸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비위생적인 주거 공간이었다. 늦은 밤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린 서양인들은 난감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로 이른 아침 제물포에서 출발해야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서대문이나 숭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장 인천에서 하룻밤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곳에 호텔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大佛, 다이부츠 호텔)이다. 1887년에 착공해 1888년에 완공했다. 주인은 일본인 호리 큐타로인데 풍채가 불상처럼 크다 해서 호텔 이름이 대불이다. 인천시는 대불호텔을 2011년 복원했다.대불호텔에 묵은 서양인들은 이른 아침 서울로 출발했다. 보통은 가마나 조랑말을 이용했다. 가마는 1시간에 6km를 걸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했다. 한강을 건널 때는 마포나루에서 내렸다. 만리재 옛길을 따라 숭례문으로 들어왔다. 김포, 양천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양화진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와우산, 노고산을 넘어 신촌의 대현을 통과한 후 아현(애오개)을 넘어 충정로를 지나 서대문으로 들어오거나 아현에서 약현(중림동)을 넘어 숭례문으로 들어갔다.그런데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됐다. 처음에는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만 운행했다. 정거장은 제물포역, 유현역, 우각역, 소사역, 오류역, 영등포, 종착역이 노량진이다. 12시간 걸리던 길이 1시간 40분으로 줄었
동양극장을 설립한 홍순언의 부인, 배구자를 지난 편에 소개했다. 오늘은 그를 무용수로 키운 배정자를 소개한다. 배정자에게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요화(妖花)’, ‘조선의 마타하리’이다. 둘 다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마타하리는 독일 정보기관에 2만 마르크를 받고 연합군 고위 장교들을 유혹, 군사 기밀을 독일군에 넘긴다. 그녀의 활약은 연합군에게 치명적이었다. 연합군 5만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정보가 마타하리에 의해 독일로 흘러갔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여인이 있었다. 배정자. 그녀에 대해 알게 되면 의아함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인터넷을 뒤져보니 ‘요화 배정자’라는 영화가 있었다는데 1966년에 개봉된 이 영화 주제가가 금지곡이 됐다. 이 노래에는 '세상을 제멋대로 희롱도 하고 청춘을 마음대로 불태웠지만 요염한 눈동자에 슬픔은 있어 기구한 운명 속에 몸부림을 치면서 그 사람 보내놓고 슬피 우는 배정자'라는 가사가 들어있다. '세상을 제멋대로 희롱도 하고 청춘을 마음대로 불태웠다’는 가사 한 줄에 그녀의 삶이 압축된다. 그녀는 1897년 10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해 탄생한 대한제국을 농단해 나라를 멸망케 했다. ‘청춘을 마음대로 불태웠다’는 가사에는 지독한 남성 편력이 녹아 있다. 정보를 빼내 일본에 바쳐 나라를 팔았고, 자신의 치마폭에 수많은 남성을 끌어들여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이런 여자이기에 영화 주제가에 ‘슬픔’, ‘기구한 운명’이란 말들은 맞지 않는다. 영화는 너무 배정자를 미화했다. 그녀의 못된 인생사를 알면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이유를 알 것이다.배
요즘 트로트가 문화의 대세가 되었다. 노래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가수들의 활약으로 열풍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한때 트로트를 하류 문화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면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고전음악, 가요, 팝송, 가곡, 오페라 등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누리면 된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1926년, 경성역, 경성부청(서울시청), 조선총독부(구 중앙청), 경성신사 등 서울에 주요 건물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대경성’을 표방하며 서울이 크게 확장됐고 이 공간에 근대적인 문화가 범람했다. 서울 곳곳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했고 은행, 다방, 백화점, 극장이 속속 들어섰다. 1932년, 이명래의 동생 이순석에 의해 소공동 105번지 지금의 서울시청 건너편에 '낙랑파라'가 세워진다. 낙랑파라와 같은 다방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식민지의 어두운 밤하늘을 지성으로 밝혔다. 고전음악을 듣고 서구의 영화를 감상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성행한 ‘살롱’을 표방한 다방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조선의 땅은 식민지였으나 문화는 전위에 서고자 했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극장 한 모퉁이에서 신파극을 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슬픈 처지를 배우의 연기에 오버랩하며 울분을 삼켰다. ‘신파극’은 일본의 가부키 등 고전극에 반해 새롭게 꾸며진 연극을 말한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신파극) 전용극장으로 충정로 1가 문화일보 자리에 있던 '동양극장'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동양극장
김수영이 마포 구수동에서 버스에 치여 겨우 숨이 붙은 상태로 적십자병원에 왔다면 이중섭은 치료받기 위해 정식으로 입원한다. 이중섭의 발병은 그가 죽기 1년 전으로 거슬러 돌아간다. 1955년 명동의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촌에 사는 친구 정치열의 집에서 하숙하며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는 작품을 팔아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45점 중에 절반이나 팔렸지만 외상 손님이 많았다. 받은 돈도 이중섭의 손에 들어가면 친구의 술값으로 사라졌다. 미도파 화랑 전시 이후 대구의 전시회에서도 일본에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중섭은 실망이 극에 달해 거식증과 자학 증세까지 보였다. 자신을 파멸시켜 현실의 고달픔을 잊으려 했을까? 간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견뎌왔던 몸의 장기들이 서서히 고장나기 시작한 것이다. 피란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냈던 박고석과 그의 친구들은 그를 서울로 불러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수도육군병원(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유석진 박사가 운영하는 성베드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정성스런 치료를 받으니,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1955년 성탄을 하루 앞둔 겨울, 함박눈이 내려 북한산이 하얀색으로 채색될 때 화가 박고석은 그를 정릉 자신의 집 근처로 데리고 왔다. 정릉에는 이중섭이 들어오기 한 달 전에 부산에서 함께 우정을 쌓았던 화가 한묵이 하숙을 하고 있었고 옆 방이 비어 이중섭이 그와 한 지붕, 가족이 되었다. 북한산의 삭풍이 살을 에는 곳, 얼음 밑으로 냇물이 흐르는 정릉천 상류, 지금은 북한산 탐방안내소로 변한 청수장 언덕의 집이다. 이중섭이 들어오자 정릉은 예술
'서울적십자병원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뢰할 수 있는 병원입니다.' 서울 적십자병원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이다.병원이 국민들에게 늘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 1957년 출간된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자식을 잃은 지영(박경리 자신)이 병원과 사찰에 대해 실망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스님은 시주받은 공양미를 마을 사람들에게 되팔아 이익을 챙긴다. 쌀을 더 가져가려는 주민들과 흥정하면서 연신 "이래서 중이 살갔수?"를 외친다. 병원에서는 주사기의 함량을 속이고 환자를 건성으로 돌본다. 넘어져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들의 엑스레이 한 장 찍지 않고 마취도 없이 수술대에 올린다. 지영은 허망하게 아들 문수를 잃는다. 부도덕한 사찰의 행태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결국 지영은 절에서 아들의 위패를 들고 나와 불을 질러 버린다. 어디를 가도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다. 박경리가 소설에서 말한 불신시대는 가장 깨끗하고 신뢰해야 할 병원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적십자병원은 정말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뢰할 수 있는 병원일까? 적십자 병원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적십자의 정신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적십자 역사는 1903년 대한제국이 제네바협약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1905년에는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적십자병원이 발족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적십자 역사도 무척 오래됐다. 프랑스에서 적십사가 창설된 지 불과 40여년만에 우리나라에도 적십자병원이 설립된 것이다. 스위스의 사업가 앙리 뒤냥에 의해 창설된 적십자는 185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그는 전쟁이 끝난 카스
'경의선의 종착역은 신의주가 아닙니다. 압록강을 건너 모스크바를 지나 파리와 런던까지 이어집니다.' 국정홍보처의 경의선 홍보문구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지만, 경의중앙선이라 부르는 이 철길은 문산을 지나 도라산역까지만 운행한다. 의주까지 도보로 가는 길은 ’1,080리‘ 경의대로인 의주로가 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고 우리나라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중국에 갔다. 그래서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1번 국도‘ 였다. 길을 따라 왜병이 북상한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조선시대에는 인공적인 길 조성을 꺼렸다. 그러나 중국으로 오가는 이 길은 늘 정비를 해서 통행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철길‘ 경의선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만든 길이 아니다.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해 설계한 길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경의선 부설 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이 철길의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철길이 일본제국주의 확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경의선 철도의 가설 비용은 일본의 40% 수준이었다. 조선 사람을 마구잡이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하다 보니 돈이 덜 들었다. 선로 가설을 위한 자재를 나르기 위해 소들을 죄다 끌고 갔다. 철길 주변에 빈집이 넘쳐났던 것은 일본의 강제적 동원을 피해 이사 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름이면 우리나라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망초 꽃도 이때 들어왔다. 나라가 망할 무렵에 들어왔다고 하여 망할 망(亡)자가 들어간 ’개망초‘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다. 일본이 철로에 까는 침목을 놓기 위해 미국에서 나무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 나무에 꽃씨가 묻어왔다.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철길이 깔
택배가 없던 시절이다. 광고주에게서 받은 광고 필름은 데드라인 전에 넘겨야 윤전기가 돌아가고 신문이 나온다. 1분 1초가 아쉬운 시간, 광고 필름을 가지고 신문사로 급히 가다가 '땡땡거리'에서 차단기에 막히면 헛수고다. 서소문에서 급하게 차를 몰아도 이곳에서 차단기에 걸리면 온전히 기차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차단기가 내려가기 전 더 속도를 내 앞차를 따라붙어야 한다. 건널목을 지키는 아저씨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각오를 하고 말이다. 더 힘든 것은 열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는데 반대편에서 또 다른 열차가 오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참으로 화가 나는 순간이다.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기차,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어쩔 수 없이 한 템포 쉬어 가야 하는 곳이 이 '땡땡거리'다. 이 거리 만큼 우리에게 아련한 정서를 제공해 주는 곳도 흔치 않다. 아니 마음 놓고 지나가는 기차를 볼 곳도 서울에서는 흔치 않다. 승용차와 버스, 전차가 대중화 돼 기차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타니 말이다. 최근 1967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귀로'를 봤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신 분은 ’연식‘이 꽤 되신 분일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이 '땡땡거리'가 나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귀로'는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로 여주인공 문정숙은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김진규)과 함께 산다. 성불구가 된 남편의 유일한 낙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다. 아내 문정숙은 세속적 욕망에 초탈한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마음 속 불덩어리는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아내는 매주 남편이 쓴 원고를 신문사에 가져다 준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출발해 서울역에 내
우리 건축사에서 걸출한 두 명의 건축가를 꼽으라면 단연 김수근과 김중업을 꼽을 것이다. 김수근은 구(舊) 공간 사옥을 비롯해 경동교회, 부여박물관, 세운상가 등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모래사장이었던 여의도를 최초로 설계한 사람도 김수근이다. 김중업도 만만치 않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서강대 본관, 프랑스대사관, 올림픽광장 세계평화의 문, 작품 수에서는 김수근보다 적지만 굵직한 작품들이다. 6.3빌딩이 세워지기 전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꼽으라면 31층 높이의 3.1빌딩인데 그 빌딩을 설계한 사람도 김중업이다. 김수근은 박대통령과 궁합이 잘 맞는 건축가였다. ‘근대화 대통령’ 박정희의 구상에 따라 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 계동 현대 사옥 옆의 조그만 건물, 구 공간사옥을 지나다 보면 거장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장충동 족발골목에 오르기 전 붉은 벽돌의 경동교회, 벽돌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숭고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경찰청 인권 보호 센터'로 이름이 바뀐 ‘남영동 대공 분실’도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 '1987'에 등장하는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난 현장.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 폐쇄형 렌즈, 고문의 고통으로 투신하지 못하게 창문의 너비를 좁게 한 장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도록 휘감아 올라가는 철제 계단, 이런 치밀한 장치들은 김수근이 고안한 것이다. 옥의 티다. 그러나 그의 미적 영감과 섬세함이 그를 시대를 이끄는 건축가로 만들었다. 김중업은 김수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1970년 4월, 대통령 박정희와 서울시장 김옥현의 무리한 욕심으로 비탈 위에 세운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그해 8월 졸속 추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자리에는 원래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1862~1905)의 별서(別墅, 별장)가 있었다. 예조판서 등을 지낸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때에 자결을 통해 조약의 부당성과 일본의 조선 침탈을 만천하에 알린 문신이다. 민영환의 집은 안국동 조계사 옆에 있었으나 만초천 맑은 물이 흐르고 안산에서 내려오는 아현의 지세가 아름다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조무래기들은 만초천에서 조개를 주워 올렸다. 이곳에 얼마나 조개가 많았는지 이 지역은 조개 합(蛤)자를 써서 합동(蛤洞)이라 한다. 서대문구 합동 30번지이다. 아낙들은 만초천에서 멱을 감고 논과 개천의 둔치에서 미나리를 뜯어 저녁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합동의 옆동네는 동네 이름도 물결미, 미나리 근자를 써서 미근동(渼芹洞,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이 아니던가?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벽이 그림처럼 드리워진 아름다운 동네, 별장을 짓고 가끔 찾아 어지러운 국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공(忠正公)을 따서 ‘충정로’가 됐다. 충정로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해방 이후로, 일제 강점기에는 죽첨정(竹添町)이라 불렸다. 죽첨은 갑신정변 때 우리나라에 온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이다. 죽첨이 서대문 밖, 이곳 어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죽첨정(竹添町)이라 했다. 이곳의 지명에 '죽첨'이 많이 활용됐다. 미동초등학교 앞에는 서대문에서 출발하는 전차역인 ‘죽첨역(竹添驛)’이 있었고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김구 선생님이 순국하신 경교장도 일제 강점기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
지난 토요일 아내와 공세리 성당을 찾았다. 고색창연한 성당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성당에서 이명래의 흔적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이명래와 이순석 선생의 표석이라도 세워 우리가 알아야 할 문화사를 후대에 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에 글을 이어간다. 이명래는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경기도 평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창업자 사후, ‘이명래 고약’은 전통 비법 고수와 약의 대중화로 분화된다. 서울로 돌아오니 지금의 종근당빌딩 자리에 3층 건물로 있던 '명래 한의원'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이명래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제약 자료들도 대부분 소실됐다. 가업은 이명래의 사위 이광재에게 넘어갔다. 이광재는 이명래선생이 첫 부인과의 사별 후 얻은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첫딸의 남편이다. 보성전문 출신인 이광재는 장인에게 물려받은 가업을 충정로역 뒤편, 지금의 자리에서 이어간다. 이광재에 이어 다시 가업을 이은 임재형도 이광재의 사위이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색다른 구조였다. 한편 이명래의 둘째 딸 이용재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설립한다. 명래제약에서 판매한 고약을 80년대까지 전 국민이 사용했다. 명래제약은 관철동에 있었다. 이용재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 신민당 총재와 고려대 총장을 지낸 ‘현민 유진오’의 아내다. 명래제약은 대량생산을 위한 설비투자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제 이명래(1890~1952) 선생의 동생 이순석의 이야기를 해보자.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1905-1986)은 이명래의 막내 동생으로 이명래와는 15살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7명의 형과 누나가 있
충청남도에 내포(內浦)라는 지역이 있다. 지금은 ‘내포신도시’로 불리지만, 가야산이 엄마의 품처럼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다. 서쪽에 큰 바다가, 북쪽에는 아산만, 동쪽에 너른 들판이 있어 바다며 산이며 지척의 자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동네다. 이 동네 초입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공세리 성당이다. ‘공세리’라는 곳은 충청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서해와 인접해 신부들의 왕래가 잦더니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드비즈 신부가 본당 주임신부로 왔다. 그는 폐허가 된 조세창고와 제당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년,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만든 고딕양식 형태이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돌을 주워다가 성당의 기초를 다졌다. 성곽돌로 사용된 돌들이 성당을 두르고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성당을 둘러 싸고 있어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아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다. 동네도 예쁘고 성당도 아름다운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까지 32명의 순교자를 내 순교 성지로써도 의미가 깊다. 어느날 고향인 온양을 향하다 우연히 성당을 만났을때 너무도 아름다워 넋을 잃고 말았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마을의 편안한 지세도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성당과 많이 닮은 성당이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의 북쪽 고딕 형태의 모습은 공세리 성당과 흡사해 공세리 성당을 옮겨온 것은 아닐
충정로역 배후에는 작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을지로나 종로 같이 대규모 밀집은 아니지만 ’한 개성‘하는 식당들이 많다. 한옥을 개조해 노포 분위기가 나는 식당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폼나게 인테리어를 한 식당들까지 다양하다. 식당 주변 한옥들을 보면 마치 196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출근할 때 종종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려 골목을 지나 신문사로 향하곤 했다. 아침 일찍 인적 드문 골목길을 걷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점심시간이 되면 오피스맨들이 삼삼오오 골목으로 모여든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보약과 같은 시간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은 직장인들의 행복한 특권일 터. 이 골목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충정각,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식당 앞 마당에 쌓여있는 와인병들이다. 그 앞에는 오래된 석등, 탑, 돌 조형물들이 술병들과 부조화 속에 개성을 연출한다. 전편에 소개한 충정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다. 나이로 치면 120살이 훌쩍 넘은 건물, 90대의 충정아파트가 ’아버지 건물‘이라면 이 건물은 ’할아버지 건물‘이다. 낡았지만 외관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기품있는 어르신의 모습과 같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오래된, 외관상 손상이 없는 건물을 찾기는 힘들다. 서대문 형무소가 마주 보이는 ’딜쿠샤‘ 정도라면 견주어 볼 수 있을까?충정각, 일제강점기 때 주소는 ’죽첨정 360번지‘이다. 최근 서양식 저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자료들을 뒤져보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소설가 이호철이 이 아파트와 인연을 맺기 전, 아파트에서 살았던 유명인이 있다. 한국 화가 중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을 그린 사람, 김환기이다. 1971년 작 '우주'가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됐다. 그 전의 기록은 85억에 거래된 '붉은 점화'다. 그 작품도 김환기가 그렸다. 김환기의 기록을 김환기가 깼다. 값비싼 작품 순위 10개 중 9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이 아파트에 살았던 기록은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5월 22일 도교의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제 4회 자유미술가전’에 참여한 김환기는 전시 도록에 주소를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다. 왜 주소를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을까? 그의 고향은 알려진대로 신안군 안좌도라는 섬이다. 190cm에 육박하는 자신의 키에 대해 섬사람이어서 육지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 그리 되었다는 싱거운 소리를 했던 그였다. 그가 소설가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에게 준 자신의 다른 이름 ’향안(鄕岸)‘은 멀리 육지의 언덕을 그리워한 마음이 실려 있다. 이곳에 살았다는 흔적은 1940년 4월에 발간된 문학잡지 '문장'에도 보인다. 김환기는 삽화를 자주 그렸지만 청록파가 대거 등단했던 이 잡지에 수필도 많이 썼다. 섬 생활이 울적해 서울로 올라왔다고 하며 "종일 여관방에 드러누워 지내면서 영화 한편 만들거나 자비로 시집 200부 정도를 낸다거나…그림 100점 정도를 장곡천정(지금의 소공로)에서 개인전을 열거나…(중략) 나중에 여관비를 치르고 나갈 일이 은근히 걱정"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글에 등장하는 ’여관‘은 이 아파트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에는 ‘여관’과 ‘아파트’를 구별해 사
오늘부터 ‘성문 밖 첫 동네’는 충정로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림동을 이야기하면서 중림동의 지역적 특색으로 단연 만초천을 거론했다. 만초천이 중림동으로 흘러 조선시대에 서소문 처형장의 입지가 용이했고, 이곳의 순교자들로 인해 중림동 약현성당이 들어섰다. 만초천의 흐름으로 염천교, 윤동주의 자화상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리고 충정로에는 ‘전차’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과는 다른 ‘전차’이다. 이 전차는 1907년 서대문에서 출발해 마포를 종착역으로 했다. 왕년의 인기 가수 은방울 자매의 노래인 ‘마포종점’은 충정로를 지나 아현 고개를 넘어 공덕, 마포까지 갔던 이 전차의 종점 이야기이다. 지금도 마포에 가면 당시 운행했던 전차를 볼 수 있다. 마포구간을 운행한 이 전차는 강화도에서 황포돛단배로 운반해 온 새우젓 항아리도 수없이 날랐을 것이다. 전차의 개통으로 충정로 일대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성문 밖 첫 동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쇠바퀴의 굉음이 진동하는 첨단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60년대에도 서울에는 초가집들이 있었고 변두리에는 논밭이 즐비했다. 필자도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대방동 논밭길을 어릴 적 누나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있다. 하물며 백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논밭 사이로 만초천이 흐르고 그 옆에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미근동)가 이곳 아니었던가? 천에서 조개를 잡는 조무래기들 사이로 순박한 농부는 소를 몰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 전차의 굉음이 진동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전차가 들어서니 역사(驛舍)가 생기고 역사가 들어서니 역세권이 되었다. 역세권하면 무엇이
15,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의 대표적인 건물은 누가 뭐래도 약현성당이다. 성당의 정확한 이름은 ‘중림동 약현 성당’이다. ‘약현성당’이라고 해도 되고 ‘중림동성당’이라고 해도 될 텐데 중림동이라는 근대의 행정동명과 약현이라는 조선시대의 지명을 같이 붙인 것은 성당이 위치한 지역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당의 지역 사랑이랄까? 신문사에서 일할 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직원들과 성당에 들러 차를 마셨다. 성당은 번잡하지 않아서 잠깐의 머뭄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북적이는 카페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 맛도 모르는 커피를 들이켜고 부리나케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대부분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네 직장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성당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마음을 식히자. 복잡한 일상사, 꼬였던 일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안 풀리면 또 어떠랴. 언제 우리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있었던가. 성당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운동 한 셈 치자. 성당에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며 오르는 좁은 계단이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에 올라서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올라 갈수록 보이는 것은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정약용의 조카이자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성도 갓 쓴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200년 전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 그의 넉넉한 품이 참 좋다. 언덕 위 작은 전망대에 오르면, 이곳이 성문 밖 첫 동네, 교통의 요지라는 것을 실감한다. 숭례문이 눈 앞에 있다. 숭례문에서 봉래동과
내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복학한 해는 유난히도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다. 대학 캠퍼스는 말할 것도 없고, 명동성당 주변은 최루가스로 인해 눈을 뜨고 다닐 수 없었다. 전방 부대에 근무한 나는 목요일이면 정치색 짙은 이념 교육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제대는 민간인으로의 신분변화와 ‘주입된 이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민주화의 바람 앞에 모든 것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한국은 긴 독재의 터널을 통과해 민주화의 햇살 속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에서 하사교육을 하던 군인정신 투철한 분대장이 민주 열사의 장례 행렬에서 군중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공을 역사로 택한 나는 캠퍼스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학우들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위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는 1987년이다. 우리 역사의 분기점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해방된 1945년, 4.19가 있던 1960년 등이다. 그러나 영화 ‘1987’이 말해주듯 민주화가 정점을 이룬 1987년도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된다. 시작은 1987년 1월 14일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정국은 정초부터 뒤숭숭했다. 코미디언 김형곤은 이를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코미디 소재로 사용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사춘기 소녀처럼, 뭔가 어수선하고 들떠 있었다. 학생들의 집회에 넥타이 부대가 합류해 민주화운동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4월13일, ‘지금의 헌법대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안’이 발표됐다.
내가 신문사에 처음 출근할 무렵, 중림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노량진에서 전철을 타고 출근했는데, 서부역을 통과해 비린내 나는 이곳을 지나야 신문사로 출근할 수 있었다. 인근 은행 지점에서는 은행원들이 손수레를 밀며 상인들에게 지폐와 거스름용 잔돈을 바꾸어 주었고, 바빠서 은행에 오지 못하는 상인들의 돈을 예치해 가기도 했다. 아침마다 상인들의 악다구니 소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효과음처럼 들렸다. 새벽 3시에 열어 오전 10시에 닫는 시장. 겨울에는 생선을 담은 궤짝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쬤다. 인근 식당에서 배달해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좌판에서 먹는 것은 생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위로였다. 그들 사이를 오가며 믹스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들, 싱싱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물건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큰소리로 호객하는 사람들로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장사가 일찌감치 파하면 악다구니는 사라지고 웃고 농담하며 새벽의 피로를 풀었다. 바삐 출근하느라 아침을 못 챙긴 나도 상인들 틈에 끼여 라면이나 국수를 사 먹었다. 값은 모두 천원이었다. 토스트는 계란에 야채를 버무려 철판에 꾹꾹 눌러 속을 만든 뒤, 마가린이 스며 노랗게 된 식빵을 반 접어 그 안에 넣었다. 기호에 따라 설탕이나 케찹을 쳐 주었다. 오전 10시쯤 외근을 위해 회사에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판의 상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상점이 있는 주인들만 가게를 지켰다. 중림시장은 새벽에만 장사를 하는 도깨비시장이다. 중림 시장의 연원은 조선시대까지 올라간다. 성문 밖 최대의 난전인 칠패시장은 어물이 유통되는 시장이다. 전국 각지에서 마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하늘나라로 간 조세희 선생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생활은 전쟁과 같았’고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던 난장이 가족. 아무리 전쟁터라도 가끔은 이기는 날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세월은 흘러 소설이 출간된 지 어느덧 반세기다. 격동의 70년대를 지나 새천년을 훌쩍 넘은 21세기에도 ‘난쏘공’이 늘 회자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평론가 김현이 '난쏘공'을 밤새워 읽고 흥분해 8천 부는 나갈 거라고 작가에게 장담했다고 한다. 이후 소설로 200쇄를 최단시간 내에 돌파하고, 300쇄가 넘는 초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유가 뭘까? 난장이 가족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지기만 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억울한 자들은 난장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난장이 가족들이 날마다 졌다는 소설 속 공간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그들의 삶이 지옥일 망정, 작가는 난장이가 사는 삶의 공간을 그렇게 명명했다. 조세희는 지옥과 같은 전쟁터가 낙원으로 바뀌어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1편의 제목이 '뫼비우스 띠'인지 모르겠다. 안과 바깥이 고정돼 돌고 돌아도 겉은 겉대로 바깥은 바깥인 채로 존재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이
퇴근할 때 청파로를 따라가다 용산 넘어가는 고가를 타면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가 아래 오리온제과 공장에서 풍기는 과자 굽는 냄새다. 과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소환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고소한 과자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 공장은 과자 틀 없이 오븐에 반죽을 적당히 올려 구웠기 때문에 과자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굽다가 깨진 것, 모양이 이상한 것, 너무 오래 구운 것 등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바가지를 들고 가면 이런 과자들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살 수 있었다. 모양은 안좋아도 방금 구운 과자는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았다. 검게 탄 과자는 되레 식감도 좋았고 맛도 구수했다. 센베이 과자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굵은 설탕을 입힌 과자를 먹고나면 혀가 까칠해지기도 했다. 10여년 전 ’국희‘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희는 우리 토종 과자 회사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다. 드라마 종영 후 극 중 과자를 본떠 ’크라운 국희 땅콩샌드‘라는 과자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크라운제과의 오늘을 있게 한 과자가 산도다. 산도는 샌드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드는 샌드위치의 줄임말로 산도는 비스켓 사이에 크림을 바른 ’과자 샌드위치‘인 것이다. 산도는 먹는 방법이 있다. 두겹의 비스킷을 분리하면 달콤한 크림이 나오는데 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 맛을 보고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자 공장은 모두 용산에서 시작했다. 용산역을 기준으로 왼쪽 모토마치(元町,원효로)에 일본인이 모여 살았고 오른쪽, 지금의 미군기지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다.'라고 결정해버렸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중림동의 골목 안 풍경을 찍은 김기찬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의 사진집, 은 6집까지 발간됐다. 사진집에는 중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풍속화가 김홍도가 이 시대에 사진사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의 작품과 같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피사체가 되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얻기까지 수년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을 찍기 위해 그들과 같아져야 했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말을 걸고 웃으며 점차 그들과 동화돼 갔다. 만 2년이 되어서야 덩치 큰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골목을 걸으면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뭐 찍을 게 있냐?’며 먹던 부침개를 나눠주었고, 김치 부스러기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아저씨들도 잔을 내주었다. 더 이상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것은 삶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붙잡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장장 33년의 세월이었다. 왜 하필 중림동이었을까? 그는 왜 중림동을 사랑한 것일까? 그가 사는 곳이 중림동이라면 퇴근길에 카메라를 들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의 집은 사직동이다. 사직동은 그가 중림동을 찍기 전, 이미 망가지
근현대 우리 역사에는 두 명의 이종찬이 있다. 먼저 소개할 사람은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전 국정원장, 현 광복회장인 이종찬이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얼마 전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제강점기에 ‘정부는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이때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이 사진은 해방을 맞이하고 1945년 11월5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하이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앞의 반바지 차림의 어린이가 이종찬 광복회장이다. 어린 이종찬 옆에 한 노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작은 할아버지 성재 이시영 선생(1869~1953)이다. 모두들 광복의 기쁨에 들떠 돌아갈 고국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인데…그는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나라를 빼앗기자 명동의 그 넓은 땅을 팔아 만주로 떠났던 36년 전을 생각했을까? 당시 땅 판 돈 40만 원은 지금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다. 수백억, 아니 명동의 땅값을 계산하면 조 단위가 넘을지도 모른다. 이회영 선생은 그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우리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6형제가 떠났으나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회영 선생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 여사의 증언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쌀이 없어 하루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아버님께서 처량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고 하여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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