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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이수 필진
    한이수 필진 라이프이스트외부일반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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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대학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궁궐길라잡이 활동과 서울의 역사문화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 "이완용이 죽자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졌다"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딸이 어릴 적, 대화를 나누다 이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딸은 이완용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도대체 학교에서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매국노 이완용을 모르냐고 야단을 쳤다. 이 일 이후 딸이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태반이 이완용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빠에게 야단맞은 것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이완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부끄러운 과거, 수치의 역사야말로 미래를 창조적으로 빚을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1926년에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화장실의 주된 낙서가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자는 내용이어서 욕할 대상이 사라지자 낙서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필경은 붙들려 갔다. 겹겹이 있는 순사의 파수와 돈과 폐물 벽의 견고한 보호막도 저승사자의 들이닥침을 어찌하지 못했다…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이다.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1926년 2월 13일)라는 사설을 실었다. 일제 치하에서 총독부가 이완용을 지키고 감쌌더라도 민족의 배신자인 그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분출은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완용이 중림동에 살았었다.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자료를 종합해보면 지금의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주변이다. 그 앞의 몇몇 허름한 한옥자리가 이완용의 집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이완용은 우봉(牛峰) 이씨로 태어난 곳은 경기도 판교이다. 자녀가 없는 먼 친척인 이호준의 집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준은 처세술의 달인으로 고종 휘하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이완용은 양

    2023.08.22 18:10
  • 떡 장수에서 외교관,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하영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업한 이하영 대감에 대해 들어보셨는가? 중림동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다는 것도 생소한 이야기일 텐데…이하영 대감?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의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의 사위, 경주이씨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다. 같은 항렬의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조선이 멸망할 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 이회영 선생의 동생인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귀국 후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하영의 족적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이회영 선생과는 많이 다르다. 이하영은 부산 초량에서 떡 장사를 하다 큰 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알거지가 된다. 간신히 돌아오는 배삯을 마련했는데, 배 안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알렌은 조선의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탔다. 두 사람은 1858년생 동갑내기로 이 때가 고종 21년, 1884년이었다. 1858년은 무슨 해(年)일까? 60세가 넘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이 ’1958년생 개띠‘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 첫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증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일백년 전, 1858년생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858년생 동갑내기 말띠인 이하영과 알렌, 이들은 이후 조선에서 거칠 것 없이 화려한 인생을 펼치게 된다. 알렌은 오갈 데 없는 이하영을 요리사로 채용했고 이하영은 알렌의 입이 되어 주었

    2023.08.17 17:17
  • 왕을 광고 모델로 쓴 고무신 회사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여름방학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신창이다. 1호선의 종착역이라서 전철을 타고도 고향에 갈만한 거리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은 가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동네에 순천향대학교가 들어선 뒤로 반은 도시, 반은 농촌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은 여느 시골 동네처럼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골에 가면 ’서울에서 온 도련님‘이라고, 먼 나라에 유학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대우받았다.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사셨지만 우리 집은 셋방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시골에 내려갈 때 꽃단장을 시키셨다. 꽃단장이란 새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운동화는 '서울 사람'의 상징과 같아서 코흘리개 시골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촌 형들은 나를 동네의 만만한 꼬마들과 이유 없이 싸움 붙였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다가 원두막에서 방학 숙제도 하고 덜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기도 했다. 냇가에서 송사리와 붕어를 잡을 때 사촌 형들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이용했다. 운동화를 신은 나는 물에 젖을까 봐 한쪽 모래톱에 벗어 놓고 들어갔지만, 형들은 고무신을 신고 물에 들어갔다. 물 묻은 고무신은 뜨거운 햇빛에 말라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고무신은 작은 물고기를 넣으면 어항이 되고, 모래를 수북이 쌓으면 장난감 자동차도 되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은 우리에게 추억의 존재다. 그 고무신 공장이 모여있던 곳이 중림동이었

    2023.08.16 16:58
  • 예수님, 왜 여기 누워계세요?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 잠 자던 내 머리맡에서 부모님이 뭔가 심각한 대화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목이 잘릴 것 같다"는 섬뜩한 이야기에 잠이 확 깼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물품 관리와 행정 보조 업무를 담당하고 계셨는데, 그 즈음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해고 된다는 것을 목이 잘린다고 표현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생목이 잘리는 상상을 하며 눈도 뜨지 못하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직장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조사하면 ‘목이 잘린다’는 말이 수위(首位)에 들 것이다. 직장생활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의건 타의건 직장을 떠나야 하는 현실은 진짜 목이 날아가는 것과 같은 고통의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다. 성문 밖 이곳, 서소문 역사공원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의 생목이 잘려 나간 곳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내려온 만초천은 이곳에서 아현과 약현의 높은 지형을 넘지 못하고 선회하여 염천교 방향으로 흘러갔다. 물이 흐르던 이곳, 평평한 지역은 넓은 모래밭이 형성돼 있었다. 모래밭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참수(斬首)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정확한 위치는 만초천의 여섯 개 다리 중 하나인 서소문역사공원내의 ‘이교(泥橋, 진흙다리-서소문역사공원에 이교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건너 만초천변 모래사장’이다. 당시 천주교를 믿었다 하여 바로 참수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형조, SC제일은행 자리에 있던 의금부, 동아일보 앞의 우포도청 등에서 고초를 겪다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으면 이곳으로 끌려온다. 참수가 확정된 사람은 마차에 실려 오는데, 사형

    2023.08.08 17:29
  • 서울상수도사업본부, 윤동주가 살았던 곳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주말이면 옆구리에 핸드마이크를 달고 시민들을 몰고 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는 무리를 만나게 된다. 특히 서촌에 가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풍경 너머로 문학 향기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상기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촌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어디일까? 윤동주의 하숙집 터?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잠시 학창 시절 외운 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서촌에서 3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현재 연세대 신촌 캠퍼스의 핀슨관이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학한 그는 이 건물에서 이양하, 김송 교수 등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가 거처한 곳은 학교 기숙사였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하숙했다. 그런데 그중 한 곳이 이곳 중림동 일대, 성문 밖 첫 동네였다면 믿으시겠는가?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선생의 먼 친척인 송우혜 선생님이 쓴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입학 동기인 유영 교수의 증언이다. 송우혜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며 책의 일부를 소개한다. 유영 교수는 ‘동주는 먼저 아현동에서 하숙을 했었지요. 후에 서소문으로 이사했어요. 서소문 하숙집은 옛날 서대문구청 자리 근처였는데 그때만 해도 거긴 꼭 시골과 같은 곳이었어요. 앞에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고, 근처에는 우물도 있었어요. 바로 동주의 시의 배경이 된 우물이지요. (앞의 책 241페이지) 나는 송우혜 선생의 책을 읽으며 숨이 멎을 뻔했다. 아니 윤동주가 이곳에 살았다고? 과거 서대문구청 자리였다고?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서대문구청은 지금의 상

    2023.08.01 18:01
  • 미나리가 물결치던 마을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이야기]

    2005년 이명박 대통령은 1976년 청계고가 개통으로 복개가 마무리된 청계천을 복원했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다. 도심에 물이 흐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라이드를 타고 광교에서 청계고가를 올라 시내를 달리면 마치 어릴 적 어린이대공원에서 청룡 열차를 타듯 미끄러지고 올라가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그 고가를 드러내니 거짓말 같은 하천이 펼쳐졌고 지금은 머릿속에서 청계고가의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서울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사산(內四山)이라 부른다.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산이다. 산이 있으면 계곡이 생기고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도대체 물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도로 아래에 있다. 하천을 모두 도로로 복개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하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50년 전만 해도 시내에 많은 하천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하천은 1960년대에 복개되었다. 내사산에서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는 도성 안에 한 가운데로 모여 청계천을 이룬다. 청계천이 사대문 안에서 흐르는 하천이라면 사대문 밖을 대표하는 하천이 만초천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문 밖 이 일대의 지명을 가만히 살펴보면 만초천의 흔적들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인 무악에서 발원한 만초천은 서대문 영천시장 앞에서 석교(石橋)라는 돌다리 밑을 지나게 된다. 지금도 이 일대는 ‘석교’라는 지명을 사용한다. 석교 다리의 윗동네라 하여 교북동(橋北洞), 아랫동네라 하여 교남동(嶠南洞)이다. 그 주변의 평평한 동네가 평동(平洞)이다. 그 동네에 찬 얼음물이 늘 솟아나는 샘이 있다

    2023.07.25 17:57
  • "춘삼아!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드라마 왕초나 야인시대를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거지왕 김춘삼이다. 거지들을 모아 구걸을 시키며 중부시장 일대에서 활약한 김춘삼은 당대의 주먹 김두한, 이정재 등과 어울렸다고 한다. 거지왕 김춘삼의 근거지였던 곳이 염천교이다. 염천교는 조선시대에 화약을 만드는 염초청 근처의 다리라 해서 염초청교라 부르다 염천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역 앞의 염천교가 거지왕 김춘삼이 활약했던 그 염천교일까? 만약 일제 강점기나 제1공화국 시절로 되돌아가 김춘삼이 서울역 앞의 염천교에서 나오는 것을 김두한이나 이정재가 봤다면 아마도 ‘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했을 것이다. 거지왕 김춘삼이 맹활약했던 근거지는 이 염천교가 '아니올시다.’ 1770년에 만들어진 한양도성도를 보면 또 다른 염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김춘삼은 현재의 염천교가 아니라 청계천에 있던 염천교에서 활동했다. 청계천의 다리는 거지들의 소굴, 좋게 말하면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이 생활 하수를 버리는 곳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천 바닥에 흙과 오물들이 쌓여 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가 오면 범람하기 일쑤였고 악취가 진동하고 불결하여 전염병의 발원지였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영조는 자신의 치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청계천 준설사업으로 꼽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긁어낸 흙과 오물을 멀리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인 흙과 쓰레기를 청계천 주변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여기에 꽃을 심어 방산(芳山)이라 했다. 꽃다울 방자를 써서 ‘꽃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것이다. 을지로 4, 5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는

    2023.07.18 15:16
  • 윤동주, 김기찬, 이명래 고약의 동네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나는 30여 년간 중림동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중림동을 잘 모른다. 어디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2호선 충정로역 근처라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충정로역 4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한 번 꺾으면 나타나는 곳, 한국경제신문사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 50대의 모든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2호선 충정로역이 있는 곳, 중림동. 그러나 5호선이 통과하는 지역은 충정로 3가에 있다. 충정로역은 2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는 역이라서 이 일대에 넓게 포진해 있다. 이 칼럼의 대부분은 충정로역이 점유한 중림동과 충정로 일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철이 들어오기 전의 모습은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에 그 이야기의 조각이나마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땡땡거리며 지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땡땡 사거리. 스치며 지나가는 기차. 차단기 앞에 선 차들은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정차해 있다. 서울역을 지나서 수색을 통과하여 한때는 신의주까지 갔다는 경의선 철도가 부설된 지 100년이 흘렀지만, 이 일대의 풍광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철길이 서울을 동서로 갈랐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서울로 7017'에서 이 일대를 둘러보면 서울은 동과 서로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철길의 동쪽은 많은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서쪽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덜 된 곳이다. 동쪽에 중요한 시설들이 포진하여 철길의 서쪽은 상대적으로 낙후하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지형처럼 동고서저의 형태이다. 서쪽의 중심을 차지하는 곳이 중림동이다. 중림동을 통과하는 이 기차의 종착지는 신의주였다. 신의주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단둥을 지나서 수많은

    2023.07.1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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