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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 장기영 당시 경제부총리는 ‘침수방지대책위원회’ 첫 회의를 소집했다. 경제기획원 재무부 내무부 상공부 농림부 등의 국장들이 위원으로 임명된 회의였다. 다른 일정이 생긴 내무부 치안국장은 ‘침수방지’라는 위원회 명칭을 말 그대로 이해하고는 소방과장을 대리참석시켰다가 혼쭐이 났다. 자연재해로 인한 도로와 주택 등의 침수 방지대책을 논의하는 회의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밀수와 부정 외제품 거래, 암달러 거래 따위의 나쁜 물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게(침수 방지) 한다’는 것이 위원회 발족 취지였던 것이다. 재기(才氣)가 넘쳤던 장 부총리의 엉뚱한 작명(作名)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패러디 대상이 된 '경제민주화' 1960년대는 만성적인 외환 및 물자 부족 상태에서 천정부지로 치솟던 물가와 정부가 사투(死鬪)를 벌이던 시기였다. ‘침수방지’ 소극(笑劇)은 그 시절 정책당국의 치열했던 고뇌를 보여주는 한 토막 풍경이랄 수 있겠지만, 요즘 정치판이 요령부득의 이름을 붙여 쏟아내고 있는 정치 슬로건들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가슴이 답답하다. 인기 걸그룹 멤버의 ‘민주화’ 패러디가 그런 예다.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는 말에 정치권은 발끈했고, 당사자는 ‘무(無)개념 연예인’으로 공격받는 곤욕을 치렀다. 집권 새누리당이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용어를 선점해 재미를 본 ‘경제민주화’를 감히 희화화했으니, 혼쭐나는 게 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1주(株)1표(票)’의 시장경제시스템에 ‘1인1표’의 정치개념인 ‘민주화’를 갖다 붙여 공약을 쏟아낸 결과가 어떤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몇몇
박근혜정부가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규제완화에 시동을 걸었다. 중화학기업들이 공장을 증설할 수 있게끔 국가 소유 부지를 빌려주기로 했고, ‘메디텔(병원이 운영하는 숙박시설)’ 허용을 통해 의료관광 활성화의 걸림돌 한 가지도 해결해줬다. 대통령의 말마따나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는 규제비용을 낮추는 것만으로도 돈 안 들이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률도 높일 수 있다. 규제완화의 경제 효과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10대 그룹이 쥐고 있는 현금성 자산은 작년 말 현재 124조원으로 불어났다. 역대 최대 규모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단기금융상품을 떠돌고 있는 자금만도 47조원이나 된다. 기업들의 투자심리를 살리는 것만으로도, 정부가 경기 회생을 위해 긴급 편성키로 한 추가경정예산(17조원)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시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 대통령의 규제완화 ‘고군분투 박 대통령이 ‘규제 완화’를 국정 아젠다로 강조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에 그치는 것 아닐지 걱정이 크다. 국정의 또 다른 강력한 축인 입법기관, 국회 때문이다. 대통령이 규제완화 패키지를 발표하기 전날, 국회는 기업들의 숨통을 죄는 규제법을 쏟아냈다. 하도급거래 규제 등 수십개 법안은 시장경제 생태계를 왜곡시켜, ‘보호’해주겠다는 중소기업들마저 피해자로 만들 게 분명한 내용을 담았다. 중소기업 대표를 포함한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서둘러 국회를 찾아가 부작용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최소한의 보완’을 애타게 호소했던 이유다. 그런 목소리에 귀 막으면서까지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뿌리째 꺾는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국회의원들이 했다는 얘기는 듣
박근혜 정부가 정책 슬로건으로 내건 ‘창조경제’의 의미를 놓고 곳곳에서 ‘뜻풀이 학예회’ 소동이 벌어졌다. 핵심 공직자들 사이에서까지 정확한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이 빚어지자, 급기야 박 대통령이 “창의성을 우리 경제의 핵심가치로 두며…”로 시작하는 ‘유권해석’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산업과 산업,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창조경제의 모델국가로 알려진 이스라엘에 대한 학습열기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긍정적 의미의) 뻔뻔함, 당돌함’이라는 뜻을 가진 ‘후츠파(chutzpha)’ 정신과 창업 초기의 기업을 민·관 합동으로 지원하는 ‘요즈마(Yozma) 펀드’를 통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벤처강국으로 거듭났다는 게 정설(定說)이다.‘창조경제’ 억눌렀던 키부츠그게 다일까. 조금 더 탐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태인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갖은 고생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맨손으로 수천년 전의 고토(故土)로 돌아온 유태인들에게는 당장의 주거안정과 생계수단 확보가 시급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똑같이 일하고, 공평하게 나눠갖는다’는 사회주의 집단공동체, 키부츠(Kibbutz)였다.키부츠는 이스라엘이 빠르게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순식간에 257곳이 조성됐고, 수십만명이 모여 살며 농축산물과 가공식품, 기계 등을 생산했다. 키부츠 구성원들은 철저하게 집단 노동을 했고, 수익을 고르게 나눠 가졌다. 음식도 공동식당에서 똑같은 것을 먹었고, 생활필수품도 공동구매를 통해 균일하게 분배했다.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슬로건인 ‘경제민주화’로
박근혜 정부의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였던 김종훈 씨의 전격 사퇴는 여러모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미국의 거대 정보기술(IT) 기업 벨연구소 사장으로서의 ‘보장된 길’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그의 충정을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가 짓밟은 꼴이 됐다. 김씨가 사퇴의 변으로 야당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정부조직법 개정 문제와 관련, ‘정치권의 난맥상에 대한 절망감’을 들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그가 소유한 국내 부동산 관련 의혹, 미국에서의 사생활 뒷담화 등 온갖 ‘신상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느꼈을 수모와 개인적 좌절감은 “아내가 미국으로 돌아가자며 울고 있다”고 한 말에 잘 담겨 있다.또 다른 말도 들린다. 장관 후보자로 지낸 보름 동안 각종 업무보고를 받은 과정에서 ‘한국어 적응’에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고생했다는 얘기다. 한자(漢字)에 뿌리를 둔 어지간한 어휘는 쉽게 이해하지 못해 일일이 영어 단어로 뜻을 적었을 정도라고 한다. 또 불거진 ‘인사 검증미흡’ 논란이유야 어쨌든, ‘정치 난맥상’을 포함해 그에게 닥칠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하고 이겨내겠다는 결기가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크다. 이명박 정부 초기의 ‘광우병 대소동’을 비롯해 미디어법 파동 등 최근 몇 년간 야당의 ‘대여(對與) 투쟁’은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왔다. 고위 공직자 후보에 대한 혹독한 검증 역시 이미 그 ‘악명’이 널리 알려진 터다. 그가 말했던 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은 인생을 바치기 위해 돌아왔다’면 이런 여건과 환경을 충분히 검토하고, 극복할 방책과 각오를 다졌어야 하지 않았을까.김씨의 돌
2008년 1월2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소집해 이명박(MB) 대통령 당선인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성토했다. 정보통신부 통일부 여성부 국정홍보처 등을 없애기로 한 데 대해 ‘참여정부 흔적 지우기’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합치고, 해양수산부를 건설교통부에 흡수시켜 국토해양부로 통폐합하는 등의 ‘대부(大部)체제’ 전환에 대해서도 “검증되지 않은 개편이 바람직한지 따져봐야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MB 주변에서도 기존 정부편제를 뒤흔드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개편과정이 너무 전격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국회 심의과정에서 통일부와 여성부는 존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국정홍보처 등을 없애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도 보다 폭넓은 공론 수렴과정이 필요했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MB 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핵심 측근인사가 얼마 전 들려준 얘기다.‘전광석화 조직개편’ 후유증당시 정부조직 개편을 주도한 행정학자 출신 측근은 나름의 반론을 폈다. “부처·직역 이기주의에 말려들지 않고, ‘작은 정부’ 원칙에 맞춰 정부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보안과 전광석화와 같은 추진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한 채 열흘 만에 작업을 해치웠다.” 유감스럽게도 ‘보안’과 ‘전광석화’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MB 정부의 임기 중반에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과학기술정책이 교과부로 넘어간 뒤 미래지향적이고 체계적인 컨트롤 타워 기능이 사라졌다”는 각계의 문제 제기를 인정한 결과였다. “가장 뼈아픈 건 국정홍보처 폐지였다.
대통령 선거가 중반 열기를 달구기 시작했던 지난해 11월 중순,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부산 유세에 나섰을 때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젊은 지지자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연신 박수를 쳤다.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한 대학생이 질문을 던졌다.“반값 등록금을 언제부터 시작할 겁니까?” “임기 5년 내에 시행할 것”이라고 하자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급랭했다. ‘당선하면 취임 즉시’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빗나간 탓이었다. 안 전 원장 지지를 공개선언하고 유세에 동참했던 한 ‘스타’ 대학 교수는 “이후로는 연설 내내 단 한 차례도 박수가 터져나오지 않았고,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려 당혹스러웠다”고 전했다.대학 진학률이 80%를 넘나드는 나라에서 ‘반값 등록금’이 얼마나 화급한 정치이슈였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단면이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특별기구로 즉각 청년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위원장을 맡은 김상민 의원이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청년정책은 반값 등록금”이라고 강조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교육정책의 '큰 틀'이 궁금하다“그 많은 재원(財源)을 어떻게 조달할 건가”는 이미 숱하게 제기돼 온 문제다. 올해 정부가 국가장학금으로 편성한 예산만 2조75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다 대학들 자체적으로도 장학금을 늘리고 등록금을 인하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교수의 임금과 연구비 감액이 불가피해졌다. 대학들이 “교육의 질 저하를 어쩌란 말이냐”며 속앓이를 하는 이유다.그보다 앞서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교육정책의 큰 틀에 관한 문제다. 박 당선인은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
그리스에서 3대에 걸쳐 총리를 지낸 파판드레우가(家)가 또 한 번 뉴스메이커가 됐다. 해외로 빼돌린 재산이 확인된 것만도 한국 돈으로 8700억원대에 달한다는 뉴스로 말이다. 그리스인들 스스로가 자기 나라를 ‘4-4-2 국가’로 부르는 판이니, 새삼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이 나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의 팀 포메이션 얘기가 아니다. 국가에 내야 할 세금 가운데 40%를 탈루하는 대가로, 또 다른 40%는 세무공무원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나라 곳간에는 20%만 바치는 게 공식화돼 있다는 얘기다. 중국에서도 원자바오 총리 일가가 권력을 기반으로 27억달러(약 3조원)의 재산을 긁어모았다는 뉴욕타임스 보도에 이어 쓰촨성 부서기 등 고위 공직자들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 기사가 잇따르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신임 대통령이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가 소속한 제도혁명당은 멕시코의 사실상 단일 정당으로 정권을 독식해오면서, 절대권력을 무기로 한 고위 간부들의 비리와 부패가 극에 달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중국, 그리스, 멕시코의 공통점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뭘까. 정치·행정권력이 시장 메커니즘 위에 군림하고, 온갖 시시콜콜한 규제조항을 통해 공무원들의 오지랖을 최대한으로 넓혀 놨다는 점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공직자들의 비리와 부패가 횡행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다. 예컨대 중국의 덩치 큰 국영기업에는 최고경영자(CEO)의 책상 위에 어김없이 빨간 전화기가 놓여 있다.(대런 애쓰모글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당 간부가 해당 회사에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디에 투자해야 하며, 달성할 목표는 무엇인지를 수시로 지
올해 한국 프로야구의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왕으로 각각 선정된 박병호와 서건창은 ‘B급 성공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박병호는 2005년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1군보다는 2군에 머문 시간이 더 많은 무명신세였다. 작년 여름 넥센으로 옮기고 나서야 제대로 된 주전 생활을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 홈런, 타점, 장타율 1위를 휩쓸며 MVP를 꿰찼다.2008년 프로생활을 시작한 서건창은 이듬해 방출되는 수모를 당했고, 별볼 일 없는 기량으로 인해 일반 병사로 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작년 겨울 정규 멤버가 아닌 연습생 신분의 ‘신고 선수’로 프로무대에 다시 선 그는 천신만고의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안정된 수비와 도루 2위 등의 고른 성적을 인정받으며 ‘중고 신인’의 서러움을 단박에 날렸다. 확대되는 ‘스펙 해방구’감독 데뷔 첫해에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 기록을 세운 류중일 삼성 감독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선수 시절 유격수로 탄탄한 수비와 야무진 공격을 펼치기는 했어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이처럼 ‘인생 역전’과 반전(反轉)의 짜릿한 스토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야말로, 프로야구가 올해 관중 700만명을 넘어서며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는 대표적 요인으로 꼽힌다. 각본 없이 펼쳐지는 ‘반전’의 드라마는 ‘왕년에…’로 시작하는 이른바 ‘스펙’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B급 스펙’의 핸디캡을 치열한 자기계발로 날려버리는 ‘인생 역전’의 무대가 스포츠를 넘어 우리 사회 곳곳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학과성적 일변도로 신입생을 선발하던 대학들의 입시 전형이 다양해진
지난 10년간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직 재·보궐선거에 쓴 비용만 1845억5000만원에 이른다는 국감 자료에 말문이 막힌다. 18대 국회(2008~2012) 임기 중 21곳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 비용 등은 별도다. 18대 재·보선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출한 공식 선거비용은 233억원이라지만, 실제 투입된 돈은 그 뒤에 동그라미(0)가 하나 더 들어간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득표율 15%를 넘는 후보들은 1인당 선거비용으로 신고한 평균 1억8600만원씩을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챙겨갔다. 5% 이상 득표한 후보들도 신고 선거비용 일부를 혈세로 보전받았다. 그게 다는 아니다. 상당수 후보들이 실제 선거운동비용으로 적어도 5억~10억원은 썼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쏟아지는 재·보선 남용방지 방안이렇게 엄청난 비용을 좀먹는 재·보선이 또 한바탕 치러진다. 12월19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진행하기로 11일 현재 확정된 재·보선만도 서울시 교육감, 경상남도 지사, 인천 중구청장과 광주 동구청장 등 22곳에 이른다.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문재인 의원(부산 사상)의 국회직 사퇴도 예정된 수순이다.이 중 곽노현 씨의 당선 무효로 치르게 된 서울시 교육감 재선거에 300억여원, 김두관 전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의 사퇴로 인해 치러지는 경남 도지사 보궐선거에 100억여원의 지출이 각각 예상된다. 두 달 남짓 뒤의 재·보선에만 최소 500억원이 넘는 혈세를 또다시 쏟아부어야 한다는 얘기다.‘돈 먹는 하마’ 재·보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된 지 오래지만, 공론에 그치고 있다. 이완영 의원(새누리당)은 얼마 전 선출직 공직자의 중도사퇴로 재·보선이 발생할 경우 원인 제공자가 선거 비용을 물도록
얼마 전 한·중·일 장관회의에 참석한 경제부처 장관은 “일본의 국운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그들의 언어 사용법에서도 느꼈다”고 했다. “같은 표현을 한국과 중국의 장관은 간결하게 하는 반면, 일본 장관은 빙빙 돌려서 하더라. 통역은 간단하게 끝나는데도 일본말로는 두 배쯤 더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였다.예를 들어 한국어로 “그건 문제없습니다”는 말을 중국어로는 “메이유관시(沒有關系)”라고 하는데, 일본어는 “소레와 몬다이데와 나이다토 오모이마스(それは問題ではないだとおもいます)”라고 하는 식이다. 한국말로 직역하면 “그것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는 뜻이다.딱부러지게 말해도 될 것을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는 게 입에 배다 보니,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매사 이런 식이니 듣는 사람이 답답해지고, 글로벌 경쟁과 커뮤니케이션의 요체인 효율과 스피드에서 갈수록 일본이 뒤처질 수밖에 없겠다는 게 그의 소감이었다.상의하달 ‘메이지 유신’의 그늘20세기 후반부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을 석권할 듯 기세를 올렸던 일본 저력의 원천은 1867년 메이지(明治)왕 즉위와 함께 단행한 ‘메이지 유신’이었다. 일본은 구미(歐美)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중앙집권체제와 함께 주요 산업 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 막부(幕府)체제를 왕정(이른바 ‘대정봉환’)으로 되돌리고 서양문물을 흡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하지만 근대적 시민주의를 고취시켜 개개인의 각성과 창의력을 일깨운 개혁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은 명백한 한계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던 메이지 유신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혼네(本音·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비분강개와 결기가 넘쳐난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소수 재벌과 특권층에 부(富)가 집중되는 재벌특권경제를 해체해 중산층과 서민이 함께 잘사는 나라로 바꾸겠다”는 ‘21세기 경제개혁 비전’을 제시했다. 심상정 통합진보당 원내대표는 “전횡적인 재벌지배구조를 개혁하는 잔 다르크가 될 것”이라고 자임했다. 남경필 민현주 등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 의원들은 배임·횡령죄를 지은 대기업 총수는 반드시 실형을 살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놨다. ‘재벌원죄론’이 판치고 있다. 30대 그룹의 자산총액이 지난 10년간 3배로 늘었고, 계열사가 두 배로 증가했다는 등 ‘재벌 독식’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수뢰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기업들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하도급 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행위를 일삼은 결과는 ‘사상 최악의 양극화’일 뿐이란다. 상대적 빈곤율, 소득 5분위배율 등 사회적 격차를 재는 지표 역시 10년 남짓한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는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이 아닌 인식이 진실? ‘21세기 마녀사냥’의 광풍이다. 살림살이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소득층,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세대들의 팍팍해진 삶을 ‘재벌 탓’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버린다. 특정한 수치, 부분적 사실을 전체의 진실로 호도하려는 정치공학자들에게 ‘사실관계를 제대로 짚어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대기업그룹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하고 자산을 늘렸다고 몰아세우는 것으로 충분할 뿐, 주력사업에 치중하는 업종특화율이 80%(10대그룹 기준)
“군의관들은 부상자들의 붕대를 갈지도 못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는 순간 손이 곧바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던 해병들은 지퍼가 얼어붙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중공군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구호소 텐트 안에 있던 부상병들은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비틀거리면서도 총을 들고 나가 싸웠다.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사라져간 영웅, 끝나지않은 전쟁 6·25전쟁에 참전했던 마틴 러스 전 카네기멜론대 교수가 쓴 《브레이크아웃》에 나오는 증언이다.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지역으로 진격한 미 해병대 1사단은 전력의 10배가 넘는 12만여명의 중공군 9병단(7개 사단)과 17일 동안 사투를 벌였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2500여명의 전사자와 5000여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적군 사상자는 4만명에 육박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남하에 제동이 걸렸고,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수습해 반격에 나설 시간을 벌었다. 10만여명의 북녘 민간인들이 자유를 찾아 ‘원조 탈북’을 단행한 ‘흥남철수’도 장진호 전투의 고귀한 선물이었다. “조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한 나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6·25전쟁 동안 30만2483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그 중 5만4246명이 전사하고, 8177명이 실종됐으며, 7140
1991년 여름, 방콕에 들렀을 때다. 삼성전자 태국법인의 K 과장은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고생이 심했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며 ‘성공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는 태국 전역의 주요 가전제품 매장을 찾아다니며 담당자들을 설득해 Samsung 로고의 제품을 SONY, Sharp, Sanyo 등 ‘S’돌림의 일본 브랜드 옆에 배치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매출이 슬금슬금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태국인들에게 ‘삼성’이란 브랜드는 낯설었지만, 비슷한 발음의 일본 브랜드들 틈에 섞어놓아 ‘착각’을 유도한 게 주효했다. 씁쓸한 성공담이었다.당시 ‘삼성’은 일본 B급 브랜드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저급상품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특파원으로 부임한 뉴욕 일대의 가전제품 매장에서도 상황은 여전했다. 매장 한복판을 점령한 일본 브랜드에 밀려 맨 뒤쪽의 ‘정리 판매(clearance sale)’ 코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자존심은 사치였던 '그시절' “일본이 너무 앞서 있었다. 우리 세대에는 절대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너무도 컸다.” 1969년 삼성전자 설립과 함께 일본의 산요전기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던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고다.반도체사업 도전을 시작한 1980년대 초 삼성의 ‘굴욕’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삼성은 당시 라디오용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다. 세계 반도체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일본 기업들에 기술제휴를 타진했다. 도시바 히타치 NEC 등 선두기업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문을 조금 열어준 곳이 샤프였다. 산업연수생을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D램 생산라인 현장근로자들의 ‘시다바리(조수)’로 일을
“역사적 사실과 ‘악의 제국’이 지닌 공격적 충동을 더이상 못 본 척 해서는 안 된다. 양쪽이 모두 동등하게 잘못이 있다고 태평스럽게 선언하거나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투쟁을 외면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폭탄 발언’이었다. ‘무모하리만큼 적대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의 분위기는 그랬다. 진보 언론은 물론 지지자들도 그의 ‘악의 제국’ 발언에 경악했다. 일부 참모들조차 그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3년 3월8일,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연설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확신에 차 있었다. 지구의 절반 가까이를 농단해온 소련제국의 몰락을 밀어붙이는 기폭제가 된 연설이었다.세계 역사를 바꾼 ‘통찰력’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은 좌파 이념이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치솟은 에너지가격이 경제를 마비시켰고, 이란 인질구출작전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세계의 조롱거리가 돼 있었다. 수세에 몰린 서방 지도자들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에 급급했다.당대 최고의 지성이라던 몇몇 미국 학자들은 세치 혀를 놀려 ‘악의 제국’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했다. 하버드대의 존 갤브레이스는 “노동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소련의 시스템은 서구 산업경제와 대조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했고, MIT의 폴 새뮤얼슨은 “소련 모델은 계획경제가 급속한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줬다”고 치켜세웠다.레이건에게 그런 따위의 말들은 가당치 않은 궤변일 뿐이었다. 그는 전기작가 리처드 리브스에게 “소련의 국가
아메리카온라인, 월드컴, 글로벌크로싱, 버티컬넷….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진 이름들이다. 10여년 전엔 정반대였다. 증권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닷컴’의 대명사들이었다. 닷컴 열풍이 월가에 상륙한 건 1998년 10월. 2001년 초 거품 붕괴가 시작되기까지 치세(治世)는 2년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자취는 대단하다. 2000년 3월10일 5048.62까지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는 2002년 10월9일 1114.11로까지 고꾸라졌다. 반의 반토막도 안되는 수준이다. 애플 구글 등 초우량 IT주식들의 대약진 덕분에 최근 올라섰다는 게 ‘11년여 만의 3000선 회복’이다. 거품 후유증이 그만큼 크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길다.‘개념’의 포로가 됐던 바보들유쾌할 리 없는 얘기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닷컴주의 명멸만큼이나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 월가 용어, ‘개념주(concept stock) 소동’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증시의 유망주식을 구분하는 용어는 성장주(growth stock)와 가치주(value stock)뿐이었다. 닷컴주식들은 이 가운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실적도, 투자가치도 검증되지 않은 미증유의 뉴비즈니스 기업들이 ‘뭔가’ 큰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맹신 아래 ‘묻지마 투자’가 몰려들었다.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업체였던 버티컬넷이 그 전형을 보여줬다. 이 회사는 거품이 절정을 치달았던 2000년 2월, 주식 시가총액(70억1000만달러)이 전년 매출의 326배에 달했다. 미국 증시 상장기업 평균(2배)의 160배를 넘었다.문제를 키운 건 월가 증권회사들이었다. 수익성이 검증되지도, 보장되지도 않은 주식에 몰려드는 투자자들에게 해괴한 지표를 들이대며 투기를 부추겼다. 이익구조가 없는 닷컴주식들을 위
미국 주가(다우존스지수)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나스닥지수는 11년여 만의 최고치로 올라섰다. 글로벌 금융위기 진앙지였던 나라의 뒷심이 예사롭지 않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GM과 포드 등 간판 제조업체들의 부활이 눈에 띈다. 닷컴 1세대 기업이었던 아마존도 ‘킨들파이어’ 돌풍과 함께 변신에 성공했다. 애플, 구글 등 ‘실리콘 밸리 군단’ 선두주자들의 기세도 갈수록 등등하다. 월가 금융자본의 실패 속에 가려져 있던 실물 기업부문이 저력을 드러내고 있다.그런 저력의 근원이 궁금해진다. 1980년대 미국을 이끈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부시 두 공화당 대통령의 ‘12년 치세(治世)’가 밑거름을 깔았음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두 대통령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광풍에 맞서 ‘큰 시장, 작은 정부’ 정책을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과감한 세율 인하와 규제완화로 기업의 창의와 투자를 북돋웠다. “기업이 만드는 일자리가 복지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이 승승장구하던 소니 도요타 등 일본 회사들의 위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권토중래를 위한 다운사이징(대규모 구조조정과 인력 감축)이 계속됐다. 실직자가 줄을 이었고, 경제 양극화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5%로 안정돼 있던 실업률이 1990년대 초반 8% 가까이로 치솟았다.민주당의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 구호와 함께 집권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800만개 일자리(EMJ·Eight Million Job) 창출’이 그의 공약 1호였다. 양극화의 상처를 입은 저소득층 유권자들을 겨냥해 소득격차 축소를 약속했지만, 그 방법을 기업 일자리 확대에서 찾았다. 전임 대통령들의 핵심
삼성전자와 유한양행. 주요 기관들이 조사하는 ‘존경받는 기업’ ‘일하고 싶은 직장’ 순위에서 매년 최상위에 랭크되는 기업들이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또 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매출과 종업원 수 등 규모가 비슷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달라졌다. 유한양행의 2010년 매출은 6493억원, 순이익은 1280억원이었다. 삼성전자는 112조2500억원의 매출에 13조2365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유한양행은 임직원이 2010년 말 기준으로 1530명이고, 137억원의 법인세를 냈다. 삼성전자는 8만4462명을 고용한 가운데 3조1821억원의 법인세를 납부했다. 위기 극복의 한국 기업史국민 경제를 살찌우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 그리고 나라살림의 밑천인 ‘납세’의 기여에서 두 기업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국내 시장 위주로 사업을 해온 기업과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며 성장해온 기업의 차이다. 오늘의 삼성전자를 낳은 것은 치열한 개방과 경쟁의 대내외 환경이었다. 일부 경영학자들은 삼성전자의 역사를 ‘1993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불량 제품’을 찾아내 ‘화형식’을 치르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주요 임원들을 불러 모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며 조직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해다. 돌이켜보면, 그 즈음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제조업체들에 누란의 위기가 몰아닥치고 있던 때였다. 정부는 국내 유치산업 보호라는 명분으로 유지했던 대일(對日) 전자제품 수입선 다변화 조치 해제를 필두로 유통시장과 종합상사 비즈니스를 전면 개방하는 조치를 잇따라 단행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준비하던 정
“탄자니아와 골드만삭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는가.” 영국 일간신문 가디언이 몇 해 전 1면 머리기사에서 던진 화두(話頭)였다. 답은 뭘까. “공통점은 총소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탄자니아는 1년에 22억달러를 벌어서 2500만명이 나눠 갖는데, 골드만삭스는 26억달러를 벌어서 161명의 파트너들이 나눠 갖는다”였다.화두의 주어를 바꿔보자. 북한과 전라북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뭐냐고. 공통점은 역시 총소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북한은 1년에 30조원을 벌어서 2418만명이 나눠 갖고, 전북은 32조원을 벌어서 187만명이 나눠 갖는다(통계청·한국은행 2010년 추정 통계치).선군정치’ 피눈물 흘리는 민생 탄자니아와 골드만삭스는 우연하게도 연간 총소득이 비슷했을 뿐이다. 그 밖엔 공통점이랄 게 없다. 탄자니아는 높은 문맹률의 전형적인 저개발국가다. 골드만삭스는 우수한 인재와 첨단 금융기법으로 뭉친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IB)이다. 그런 두 곳을 맞비교하는 것은 어색하다.전북(대한민국)과 북한은 그렇지 않다. 같은 민족이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외형 조건과 잠재력은 어떤가. 영토 면적이 전북은 8048㎢다. 북한은 12만2762㎢로 대한민국 전체(9만9373㎢)보다도 넓다. 게다가 전북은 ‘2010년 지역소득’ 통계에서 1인당 소득이 대한민국 16개 시·도 가운데 12위에 그친 곳이다. 지역내총생산(GRDP)이 한국 전체의 3%남짓에 불과하다.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쪽보다 경제력이 우세했다. 일제(日帝)가 남쪽보다 훨씬 더 많이 물려준 중공업 공장에다 머리 좋고, 근면하고, 생활력 강한 사람들에 막대한 광물자원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그런 북한이 어쩌
남파간첩 출신 귀순작가 이항구 씨가 《소설 김일성》을 쓴 것은 북한이 극도의 식량난에 빠져 있던 1993년 초였다. 작가는 휘문고 재학 중 터진 6·25전쟁 때 자진 월북, 평양문학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북한 중앙방송위원회 소속으로 김일성 수행기자를 했던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1966년 남파간첩으로 휴전선을 넘자마자 자수, 이후 정보당국에서 북한동향을 모니터링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농촌지역 주민들의 처절하고 고단한 삶, 부모와 형제간의 사랑과 고발, 당 간부들의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경쟁 등 북한 내부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총 3권짜리 소설은 북한 지도부가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태국 등 동남아에까지 ‘구걸행각’을 벌이는 모습도 생생하게 담았다. 믿거나 말거나, 거듭된 흉작으로 도탄에 빠진 농촌을 ‘지도방문’한 김일성이 “내가 이렇게 인민을 고통에 빠뜨리자고 정치를 했단 말인가…”고 자책했다는 대목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남·북한의 '잃어버린 20년'비슷한 시기에 작가 황석영 씨가 쓴 《사람이 살고 있었네》도 화제를 모은 책이었다. 1989년 남북한 작가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불법 방문하고 난 뒤 쓴 이 북한체류기는 책 제목과 ‘나의 숙소와 친구들’ ‘평양, 평양사람들’ 등의 소(小)제목이 시사하듯 그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돼 있다. ‘황구라’로 불릴 정도인 특유의 입담으로 써내려간 이 책에 독설을 퍼부은 사람은 일본 교도통신 기자 세키가와 나쓰오였다. 역시 북한 정부 초청으로 각계 인사들을 취재하고 돌아온 뒤 쓴 《마지막 신(神)의 나라, 북조선》이라는 책에서였다. 그는 세심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지나치게 '솔직한' 화법(話法)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았지만,그만큼 소신이 분명한 정치인이었다. 언론사 경제부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기업 투자 활성화 및 출산장려정책에 관해 털어놓았던 얘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규제 좀 풀고 세금혜택을 준다고 해서 기업들이 안 해도 될 투자를 할 것 같습니까? 기업은 돈이 될 것 같으면 아무리 규제를 해도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투자할 것이고,전망이 안 보이면 어떤 유인책을 내놔도 지갑을 열지 않습니다. " "보육시설을 늘리고 육아비용을 보조해주면 않는 것보다야 출산을 늘리는 데 도움은 되겠죠.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 참 살 만하다고 느껴야 자식을 더 낳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정부 때 투자활성화와 출산장려정책이 없지는 않았다. "우리 경제의 핵심 현안에 아무런 조치도 안 내놓으면 언론에서 '조지니까',또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대책을 시행하기는 한다. 하지만 정책 효과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 이게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한 토로였다. 기업이 투자해야 일자리가 늘어 청년실업문제가 개선되고,출산 감소를 막아야 '북핵보다 더 무섭다'는 경제활동인구 축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노 전 대통령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증(對症)적인 요법으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고민이었다. 그가 지지기반인 좌파 정치인과 시민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결단한 이유였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하루라도 빨리 확고한 공동시장과 경제동맹을 구축해야 기업들의 판로(販路)가 넓혀지고,투자
'어려운 결단을 존중한다,희망 안철수.''다음 대통은 안철수네.''벌써부터 나눠먹을 궁리인가. '…인터넷 포털 다음의 토론광장 아고라에 오른 글들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재야 단일후보로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한다며 불출마를 선언한 직후 300개가 넘는 참여글이 쌓였다. 단일후보로 결정난 사람은 박 변호사지만,진보적 젊은이들의 소통마당인 아고라에서 주어(主語)는 압도적으로 '안철수'였다. 안철수의 '정치 드라마'는 여전히 진행형이며,한국 사회의 정치 · 사회 지형에 강력한 변수가 될 것임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안 원장의 최근 정치 행보를 둘러싼 글로 도배됐다. 그가 한나라당의 간판 '선거 책사(策士)' 출신인 윤여준 전 의원의 정치 멘토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진보 성향 네티즌들의 혼란이 커졌다. 그래서일까. 안 원장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응징을 당하고 대가를 치러야 역사가 발전한다"며 한나라당에 독설을 퍼부었고,진보좌파 계열의 '대부' 박원순 변호사의 손을 들어줬다. 한 방 먹은 사람이 "안 교수는 한나라당 생각과 아주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만은 아니었다. 그런 안 원장이 박 변호사 지지를 선언하기에 앞서 묘한 말을 던졌다. "한나라당이 거듭나면 지지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이 아니다. " 도대체 그의 정치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생긴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울대 의학박사 출신의 전직 의과대학장,
지난 주말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이 나라 군인들의 6 · 25전쟁 참전 기념비에 헌화했다. 남아공 더반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확정지은 직후였다. 에티오피아의 최정예 부대였던 황실근위대원 6000여명은 6 · 25전쟁에 참전,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단 한명 포로로 잡히는 일 없이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군인들의 대가는 참담했다. 1970년대 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축출하고 집권한 친북(親北) 공산주의자 멩기스투 정부로부터 무참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모든 공훈을 박탈당한 뒤 빈민가로 내쫓겼고,10여년간 사실상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몇 달 전 그곳을 다녀온 조윤선 의원이 "고초 속에서도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에 감격하고,고마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들려주던 기억이 새롭다. 호주 시드니 근교의 홀스워디에는 'Gapyong Battalion(가평대대)'이라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 붙인 군부대가 있다. 중공군의 침공으로 전세(戰勢)가 기울어 후퇴를 거듭해야 했던 1951년 4월24일,서울에서 불과 56㎞ 떨어져 있던 가평 전선을 사수(死守)한 호주 육군3대대는 그날 이후 부대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가평전투 당시 스물여섯의 나이에 남편 찰스 그린 중령을 잃고 미망인이 된 올윈 그린 여사(86)는 60년 넘게 수절하며,매년 4월이 오면 남편이 묻혀 있는 한국을 찾는다. 호주 내 한인 이민사회의 '대모(代母)'로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그의 "가평전투 이후 나는 한국과 재혼했다"는 말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2전3기' 끝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따낸 한국 사회가 한
지난주 금융감독원을 찾아가 집단기합을 준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에서는 '당혹감' '배신감'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자신의 직접 통제영역 내에 있는 공직자들의 만연한 비리와 배임에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핵심 국정 아젠다로 추진해 온 '공정사회'가 공직자들에 의해 뿌리째 부정 당하고 있었다는 데 대한 배신감도 커보였다. '국민 전체에 주는 분노보다 내가 분노를 더 느낀다' '분노에 앞서 슬픔을 느낀다' 등의 말에서 그런 심사가 고스란히 읽힌다. 이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 · 실천적 인프라'로 제시한 건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서였다. 승자가 독식하지 않는 사회,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상생하는 사회,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 등 그가 경축사에서 열거한 레토릭은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 '공정 신드롬'을 몰고 왔다. 'MB노믹스'의 '반(反)기업 선회'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청년 일자리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가운데 물가마저 치솟기 시작하면서 측근들이 앞장서 찾아낸 '마녀'가 대기업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동반성장위원회가 출범했고,대통령 직속기구인 미래기획위원회는 '대기업 관료주의'를 깨부수는 것을 새로운 과업으로 공언했다. '대기업=승자독식=공정사회의 적(敵)'이라는 3단 논법은 '서민과 약자'를 논할 때 빼놓지 않는 매뉴얼로 동원됐다. 당황한 대기업들은 온갖 '위원회'에 불려 다니며 상생(相生)과 동반성장의 선물보따리를 풀어놓기에 바빠졌고,그런 결과물은 고스란히 '공정 사회'의 치적(治積)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터진 저축은행 대주주들의 비리에 금감원 간부들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국무총리 재임기간(2009년 9월~2010년 8월)이 1년에도 못 미쳤고,그나마 세종시 문제에 파묻혀 있던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이익공유제'를 들고 나와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그가 제기한 '이익공유제'는 대기업들이 내는 이익에 대해 협력업체들의 기여분을 인정,일정분을 나누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 학자의 논문 아이디어라면 몰라도,정부가 업무를 위임한 조직의 수장이 내놓은 정책구상으로서는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거둔 이익을 어떤 기준으로,주주들로부터 어떻게 동의를 받아 얼마를 '토해내라'는 건지 개념부터가 불분명하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한 교수는 "위원회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고,지식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부처도 "검토한 적이 없는 아젠다"라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를 위원장으로 임명한 청와대에서조차 "대기업을 옥죄어서 중소기업과 상생하자는 것은 대통령의 생각과 다르고 정부의 입장도 아니다"며 불쾌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책으로서의 적정성이나 실현가능성도,추진을 위한 위원회 내부 및 정부와의 소통조차 없이 불쑥 공표부터 한 것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마추어 수준이다. 정작 더 걱정스러운 것은 MB정부의 불분명한 경제정책 스탠스다. 이익공유제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는 "검토한 적도 없고 정부 생각과 다르다"며 펄쩍 뛰고 있다지만,MB정부의 최근 기업정책과 '오십보 백보'라는 평이 많다. 물가를
최근 레바논의 이슬람 군사조직인 헤즈볼라가 서방외교관과 언론인들에게 성탄 축하카드를 보냈다.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AK-47 소총을 금빛으로 디자인한 조직 로고를 새긴 카드 표지에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라(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파이낸셜타임스 특파원이 헤즈볼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를 보낸 까닭을 물었다. 대변인은 이렇게 되물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이사(Isa · 예수의 아랍어 발음)의 탄신일은 무슬림들에게도 큰 명절이다. 그 분의 탄신을 함께 축하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의 말처럼,무슬림들도 경전인 쿠란의 한 장(章)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로 '이사'를 낳았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예수 탄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와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와 함께 마흐디(Mahdi · 구세주)로 숭앙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신정일치(神政一致)시대를 거치면서 회복하기 힘든 갈등의 나락에 빠져든 탓에 대립구도만 부각돼 왔을 뿐이다. 종교 갈등이 가장 치열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에서,그것도 과격 이슬람 군사단체가 서방 기독교인들을 향해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상기시킨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메시지를 한국의 각계 지도자들도 함께 새길 것을 권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는 반대집단에 대한 관용의 미흡과 불안정한 정당정치 등으로 인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를 0.71로 산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념 · 계층 · 지역 등 다양한 집단 간 갈등으
G2(미국 · 중국) 결전(決戰)의 분수령이 될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식 소동이 벌어진 직후에 열린다는 사실은 참으로 얄궂다. 요즘 국제사회를 들쑤시고 있는 통화 · 무역수지 전쟁의 한복판에 중국이 자리잡고 있듯이,'6 · 25사변'으로 시작된 60년 전의 비극을 '한국전쟁'이란 이름의 국제전으로 '완성'시킨 나라도 중국이었다. 60년 전 10월19일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6 · 25사변은 기습 남침을 감행한 북한과,이를 응징하기 위한 한국 및 유엔군의 결전 구도였다. 그러나 중국 참전 이후 전쟁 구도와 이후의 한반도 현대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 '의용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중 · 북한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았고,3년 뒤 정전협정도 유엔군과 중국이 주도한 북측 연합군 사이에 체결됐다. 중국 차기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이 지난주 열린 '항미원조(抗美援朝 · 미국과 싸워 북한을 도운) 전쟁' 기념식에서 내놓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검증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중국은 이 전쟁에 300만명이 넘는 병력을 쏟아부었고,참전 직후 미국으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도 발동하지 않았던 '국가 비상사태'를 즉각 선포하게 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비롯해 최소한 40여만명(옛 소련 집계로는 100여만명)이 목숨을 잃었고,미국 공군의 중국 본토 공습에 대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전과(戰果)는 엄청났다. 대규모 병력 파견을 대가로 스탈린의 소련으로부터 막
세계가 다시 '전쟁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가. 환율 조정을 통해 근린을 궁핍하게 해서라도 자국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통화전쟁의 비정함은 예전의 군사전쟁과 다를 게 없다. 지난 주말 연차총회를 열었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마저 두 손 들게 만든 주요국들 간 통화전쟁은 그러나 앞으로 본격화될 더 큰 '전쟁'에 비하면 작은 신호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환율싸움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강하고,각국의 궁극적인 생존을 담보로 건 '전쟁'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해외의 유능한 인재를 자국 국민으로 확보해 경제발전에 활용하려는 '이민 수용 전쟁'이다. 통화전쟁의 한 복판에 있는 일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도 재빨리 승부수를 던졌다. 앞으로 50년 동안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000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인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고질적인 저출산으로 인해 현재 1억3000만명인 인구가 30여년 뒤엔 1억명 이하로 줄 것이란 전망이 나오자 내놓은 대책이다. 한국 못지않은 순혈주의 국가로 꼽혀온 일본의 변신이 무섭다. 다문화(多文化) 수용성에서도 일본은 한국보다 한참을 앞서 달리고 있다. 지난 6월 출범한 간 나오토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이민 2세 출신(렌호 행정쇄신부 장관)을 장관으로 임명해 화제를 모았지만,이미 10여 년 전부터 일본 의회에는 두 자릿수를 넘나드는 귀화외국인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민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효과에 머물지 않는다. 나라 구성원들에게 다문화에 대한 적응능력을 높여주고,사회의 활력을 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한다. 이스라엘이 대표적인 예다. 이 나라가 시오니즘을 추종하는 유태인들의 국가이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고(故) 박인천 회장의 일대기인 '집념'을 쓴 사람은 진보 성향의 소설가 · 영화감독 이창동씨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같은 사회고발 소설을 쓰고 영화를 제작해 온 그가 왜 '재벌 기업가'의 삶을 글로 담아냈을까. "그의 일생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주는,만만치 않은 역사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었다. 1946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택시 두 대로 사업을 시작,승부욕과 성취를 향한 열망으로 숱한 시련과 좌절을 극복해낸 과정이 지연 · 학연 · 혈연 어느 것 하나도 닿지 않은 진보 지식인의 탐구욕을 자극한 것이다. 8년 전 그룹경영을 승계한 박삼구 회장은 '집념'의 DNA에 '스킨십 경영'을 보태면서 금호아시아나의 전성기를 일궜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들이 초유의 장기 파업을 벌이면서 노-노 갈등이 불거졌을 때,임직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그의 스킨십 경영은 조직을 더욱 탄탄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작년 초 아시아나가 '국제 항공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ATW상을 받을 정도로 저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신년을 해외에서 맞는 대신 직원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직원들이 진심으로 나를 반겨줄 때 기업하는 맛,보람을 가장 많이 느낀다"는 그의 말엔 최신 경영학 이론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다. 주주,고객을 만족시키기에 앞서 '내부고객'인 종업원을 감동시켜 조직역량을 최고조로 유지하는 것이 기업 성공의 최우선 요체라는 이론 말이다. 금호그룹이 요즘 또다시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재무구조 악화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가운데 경영 정상화를 지휘할 사령탑마저 부재(不在)상태에 빠져들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을 세운 산악인 오은선은 "고소(高所) 적응에 걸리는 시간보다 하산해서 평지에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고,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가 쓴 '남부군'에도 뜻밖의 얘기가 나온다. 지리산에서 쫓겨 다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에 잡혀 평지로 내려온 이후 공통적으로 앓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땅멀미'란다. 오랜 기간 경사가 심한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면서 지낸 사람에게는 평지가 오히려 어색하고,발을 헛디디다 못해 멀미까지 앓게 되더라는 것이다. 베테랑 산악인들조차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 원래의 익숙한 환경인 평지로 돌아오는데 고통스런 적응과정을 거쳐야 하고,구릉지대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은 배멀미 · 차멀미와 증세가 똑같은 땅멀미를 앓아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비정상(非正常)이건 아니건,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익숙하게 만든 환경의 포로가 되고 만다. 남유럽 재정위기와 태국 반(反)정부 시위 사태의 공통점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중독에서 비롯된 '집단 땅멀미'가 근원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재정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복지와 공공지출로 국민들의 의타심(依他心)만 잔뜩 키워 놓은 게 그리스 재정위기의 본질이다. 사회당을 창건한 파판드레우가(家)가 3대(代)에 걸쳐 여섯 차례나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로 GDP의 18%를 사회보장에 쏟아부은 포퓰리즘을 꼽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리스 정부는 IMF와 독일 등 외부의 긴급 자금지원 전제조건을 받아들여 GDP의 13.6%로까지 불어난 재정적자를 3%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라고 일갈했다. 엄청난 재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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