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하고 따분할 것 같지만 간혹 재미있는 연구도 있다. 문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 중인 나는, 그런 진흙 속 흥미로운 진주를 찾는 데 늘 진심이다. 뻑뻑한 건빵 봉지에서 달콤한 별사탕을 골라 먹는 맛이랄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입안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로맨스 드라마 시청이 결혼에 대한 환상에 미치는 영향」. 논문을 읽지 않았는데도 뭔가 내용을 다 알 것 같은 느낌. 제목부터 웃음이 나온다. 2015년 중국 미혼 대학생 대상으로 한국 로맨스 드라마 시청 영향을 살펴보기 위한 연구라는데, 그 결과가 우리의 예상과 사뭇 달라 더욱 웃음이 난다. 429명의 설문조사 통계에 따르면, 신데렐라형 로맨스를 다룬 한국 드라마를 많이 시청할수록 일상생활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스토리 때문에 사회 비교가 일어나 불만족이 많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 반대라는 것이다. 대리만족 및 연애 학습 심리가 작용한 덕분이란다. 오호. 유레카. 이제 더 이상 훈남 재벌 3세가 나와 극강의 자본주의적 매력발산을 하는 ‘신자유주의식’ 로맨스물을 숨어서 볼 필요가 없다. 이제 더 이상 남자 셋이 한 여자에게 애걸복걸하며 사랑 공세를 퍼붓는 ‘다다익선식’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창피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금 로맨스 드라마를 보며 ‘일상생활 만족도’를 높여 희망찬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이다. 절대 인생 낭비 시간 낭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봐야 해서 보는 것이다. 매년 수십
직업마다 직업병이라는 게 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처럼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오지랖을 잔뜩 부리는 작가는 특히나 직업병이 더욱 심각하다. 글자가 적힌 것이라면 모조리 씹어먹을 듯 열심히 읽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독서의 계절이랄까. 한번은 음식점 메뉴판을 너무 오랫동안 본 탓에 밥값내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길거리에서 받은 전단지도 꼭 읽고 버리는, 지극히 사적인 나의 개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안구건조증과 노안공포증을 동반한 나의 달콤쌉싸름한 작가 직업병도 가끔 '득'이 될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마주해야 할 때다. 너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인간사에서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철학적 난제인데, 블랙홀처럼 중독성 강한 나의 ‘읽는’ 직업병 앞에서는 살짝 몸을 움츠린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과 웹툰을 통해 내가 만난 사람만 수천수만 명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어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름하여, 캐릭터 유형과 서사 패턴. 가끔 내 직업이 작가가 아니라 프로파일러 아닐까 헷갈릴 때가 있다. 학생들의 과제를 봐주는 일도 결국엔 다양한 층위의 캐릭터를 읽어내는 일이다.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만든 ‘너’란 사람은 어떤 캐릭터일까. 혼자 책상에 앉아 집요하게 나만의 프로파일링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러나! 사랑은 늘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 나의 '전문성'에 도전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의 ‘인물 대백과 사전’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나는 속절없이 매혹당하고 만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한 캐릭터는 니가 처음
나는 남들보다 학교에 머문 기간이 굉장히 길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지금 직장인 학교 근무 기간까지 합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 셈이다. 가방끈이 길다 길다 이렇게 길 수가 없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계신 어머니는 학교에 가기 제일 싫어하던 사람이 제일 오래 학교에 머문다며 인생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 신기해하신다. 작가가 되는데 대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던 열아홉 살의 나. 그리고 작가가 되는 데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학생을 붙잡고 설득하는 지금의 나.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얼굴의 내가 학교를 배경으로 겹칠 때가 있다. 내 인생의 기본 배경이 학교가 된 이후, 내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있는 나의 업보다.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여야 하는 것들. 내가 대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무렵, 공교롭게도 나의 은사님들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많은 나이였다. 가끔 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그분들을 몰래 쳐다본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나잇살, 비슷한 주름살을 가진 은사님들은 내 기억 속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그때는 한참 어른인 줄 알았는데…. 나만큼이나 마음의 키가 작아진 그분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짠해진다. 수업 중에 도망가지 말걸. 수업 중에 딴생각하지 말걸. 수업 중에 이러지 말걸 저러지 말걸, 말걸, 말걸…. 스승의 날도 아닌데, 갑작스레 스승의 날처럼 분위기를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이유는 지금이 방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의 끝과 새 학기의 시작 사이에서 나는 지금 지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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