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관객 수 474만 명으로 전 세계 현대미술관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을 기록한 ‘현대미술의 성지’, 영국의 테이트모던. 이곳에 들어선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주하는 전시장이 있다. 미술관을 상징하는 거대한 전시 공간 ‘터바인 홀’이다. 테이트모던은 개관 이후 매년 현대미술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이곳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어 왔다. 루이스 부르주아, 아이웨이웨이 등 많은 거장이 이곳을 거쳐 갔다. 지난 2월 올해 전시의 주인공으로 역대 최연소인 이미래(36·사진)가 선정됐을 때 한국 미술계가 환호한 이유다.예술가들이 꼽는 터바인 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크다는 것’. 높이 35m에 넓이가 3300㎡(약 998평)에 달하는 이곳은 어떤 상상이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드넓은 무대지만, 웬만한 작가의 작품은 설치해도 존재감이 희미해질 정도로 광대하다. 하지만 지난 8일 찾은 터바인 홀에서 만난 이미래의 대형 설치 작품 ‘오픈 운즈’(열린 상처들)는 공간에 지지 않고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관람객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작품이 주는 인상은 기괴하다. 터바인 홀 공중에는 촉수 같은 실리콘 줄이 감겨 있는 7m 길이의 터빈이 매달려 끊임없이 돌아가고, 여기에서 피나 체액처럼 보이는 끈적한 액체들이 끊임없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천장에 달린 쇠사슬에는 동물의 가죽이나 넝마처럼 보이는 천 조각들이 걸려 있다. 작가가 2022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지난해 미국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뉴뮤지엄에서 선보인 작품과 비슷한 공포스러운 느낌을 준다.이미래는 몸 밖으로 삐져나온 내장을 닮은 이런 작품들을 통해 못생기고 불쾌하지만 가여운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 중 하나인 영국 런던에서는 지금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한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던 것도, ‘한국 작가 조명의 해’와 같은 행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세계 미술계에서 잘나가는 미술관과 화랑 관계자들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인 ‘런던 아트 위크’에 자신들을 대표하는 ‘얼굴’로 한국 작가를 선택한 것이다.글로벌 명문 화랑인 타데우스로팍의 런던 지점에서 전시를 여는 정희민 작가(38)가 단적인 예다. 타데우스로팍 런던 지점은 런던의 수많은 갤러리 가운데서도 최고의 화랑 중 하나로 꼽힌다. 미술계 관계자는 “10월 초 타데우스로팍의 런던 지점에서 전시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미이고, 작가에게도 앞으로 큰 ‘스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정희민은 설치와 영상,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갤러리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젤을 굳혀 조각처럼 두텁게 쌓아 올린 작품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작업을 통해 작가는 동틀 무렵 서울의 풍경, 전통 장례 의식 속 영혼과 환생의 개념 등 한국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잠깐 스쳐 가는 미묘한 순간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설치예술가 정금형(44)은 런던현대미술관(ICA)에서, 건축가 조민석(58)은 하이드파크의 미술관인 서펜타인갤러리에서 건축전을 열고 있다. 이은실 작가(41)가 프리즈런던 측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은 작품을 보러 온 외국인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서용선 작가(73)의 전시도 크롬웰플레이스에서 선보였다. 박원재 원앤제이갤러리 대표는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한국을 대표하는 사립미술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53년간 유지했던 무료 관람 정책을 접고 전시 입장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소장품 보존과 관리, 미술관 운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다.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15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술관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시 유료화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관람료는 성인 5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3000원 등 저렴한 수준으로 책정됐다.간송미술관은 조선의 전설적인 미술품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세운 미술관이다.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들을 사들인 간송이 1938년 보화각 건물을 짓고 유물을 보관·전시한 게 시초다. 간송의 아들인 전영우 전 간송미술관장이 1971년 ‘겸재전’을 열면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개방됐다. 이때부터 간송미술관은 계속 무료 관람 정책을 유지해 왔다. 전 관장은 “미술관 운영 지속을 위해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니 너른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입장료 유료화는 오는 16일 개막하는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 전시부터 적용된다. 이 전시는 독립운동가이자 문화재 수장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을 중심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소개한다. 위창은 간송에게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중요성,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을 가르친 평생의 스승. 전시에서는 그의 감식을 거친 문화재 총 108점과 함께 유물의 입수 경위, 수장 내력 등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이번 전시에 나온 혜원 신윤복이 그린 화첩 ‘혜원전신첩’(국보)은 위창
“배접(褙接·종이나 천을 겹쳐 붙이는 그림의 밑작업)해라. 나가면 작업할 게 너무 많다.”지난해 10월 14일 세상을 떠난 단색화 대표 화가 박서보 화백(1931~2023)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작품 활동을 돕던 며느리에게 남긴, 퇴원하자마자 바로 작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는 당부였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세계적인 화랑 화이트큐브의 미국 뉴욕지점에서 열 개인전. 작고 한 달 전인 지난해 9월 그가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내년에 개인전을 연다. 작업실을 찾은 제이 조플링 화이트큐브 대표와 신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더없이 의미가 큰 작업이라며 좋아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조급하다.”박 화백이 필사적으로 준비한 이 전시는 결국 그의 1주기 기념전이 됐다. 다음달 7일 화이트큐브 뉴욕에서 ‘박서보, 신문 묘법 2022~2023’이라는 제목으로 개막하는 전시다. 그의 마지막 작품 30점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박 화백은 화이트큐브의 유일한 한국인 전속 작가였다.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박 화백이 몰두한 화풍은 ‘신문 묘법’.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인 뒤 오래된 신문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물감과 연필로 드로잉하는 방식의 작업이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와 기록, 시간이라는 화두를 다뤘다. 폐암 3기 투병 중이었지만 그가 이 화풍으로 남긴 신작은 51점에 달한다. 갤러리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런던 서펜타인 예술감독이 박 화백 타계 한 달 전 진행한 인터뷰도 도록에 함께 실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화이트큐브 뉴욕의 전시는 내년 1월 11일까지.국내에서도 그의 1주기를 기념하는 전시 &lsq
“배접(褙接·종이나 천을 겹쳐 붙이는 그림의 밑작업)해라. 나가면 작업할 게 너무 많다.” 지난해 10월 14일 세상을 떠난 단색화 대표 화가 박서보 화백(1931~2023)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작품 활동을 돕던 며느리에게 남긴, 퇴원하자마자 바로 작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는 당부였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건 세계적인 화랑 화이트큐브의 미국 뉴욕 지점에서 있을 개인전. 작고 한 달 전인 지난해 9월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은 이랬다.“내년에 개인전을 연다. 작업실을 찾은 제이 조플링 화이트큐브 대표와 신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더없이 의미가 큰 작업이라며 좋아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조급하다.” 박 화백이 필사적으로 준비했던 이 전시는 결국 그의 1주기 기념전이 됐다. 다음 달 7일 화이트큐브 뉴욕에서 ‘박서보, 신문 묘법 2022~2023’이라는 제목으로 개막하는 전시다. 그의 마지막 작품 30점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박 화백은 화이트큐브의 유일한 한국 전속 작가였다.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박 화백이 몰두한 화풍은 ‘신문 묘법’.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인 뒤 오래된 신문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물감과 연필과 유화물감으로 드로잉하는 방식의 작업이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와 기록, 시간이라는 화두를 다뤘다. 폐암 3기 투병 중이었지만 그가 이 화풍으로 남긴 신작은 총 51점에 달한다. 갤러리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런던 서펜타인 예술감독이 박 화백 타계 한 달 전 진행했던 인터뷰도 도록에 함께 실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화이트큐브 뉴욕의
지금 ‘미술 주간’을 맞은 세계 미술의 중심지, 영국 런던에서는 미술 거장들의 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전시 작가는 세 명.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입니다. 지난주에는 고흐 전시를 소개해 드렸죠.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모네와 베이컨의 전시, 그리고 이들의 삶의 한 조각을 풀어 봅니다. 120년만에 다시 만난 그림들런던 템스강 옆에는 코톨드 갤러리라는 작지만 아주 멋진 미술관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규모의 공간에 고흐, 모네, 세잔, 마네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알짜배기로만 모여 있는 곳입니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들요.지난 주말 찾은 이곳의 특별전시실에서는 클로드 모네의 전시 ‘모네와 런던, 템스 강의 전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방 두 곳에 희끄무레한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는데,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도 쳐다보고 있더군요. 모네가 120여년 전 대기오염이 심했던 시절 런던의 모습을 그린 스물한 개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이 전시의 광고 문구는 ‘120년에 한 번 있는 전시’. 100년에 한 번 있는 전시도 아니고 120년은 또 뭔가 싶었지만, 사연이 있었습니다. 딱 120년 전 런던에서 열리려다 취소된 전시가 마침내 열린 거거든요.그 사연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870년대 가난한 화가 시절, 모네는 프랑스와 프로이센(현재 독일)의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을 간 적이 있습니다. 도시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나중에 런던으로 꼭 돌아와서 이곳의 그림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영광은 저문 지 오래지만 미술 분야에서만큼은 영국이 여전히 초강대국이다. 고흐와 모네를 비롯한 수많은 서양미술 거장의 작품과 데이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현대미술 스타들이 공존하는 문화 강국이자, 미국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위(2023년 기준)를 지키는 거대 시장이라서다. 그 중심에 런던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규모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이 있다.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장터지만 이곳은 세계 미술계의 대세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장(場)으로 평가받는다. 최대 수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리값을 내고 참전하는 갤러리들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을 들고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엔 냉정한 수요·공급 논리만 있을 뿐 인종, 애국심, 각국 정부의 문화 정책과 지원 등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지난 9일 전 세계 VIP를 상대로 개막한 올해 프리즈 런던 행사에 방문한 국내 미술계 관계자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년에 비해 한국 작가 작품 수와 비중이 확연히 늘었기 때문이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한국 미술이 대세가 될 거란 얘기를 들을 때마다 ‘국뽕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놀랍다”고 했다. ○“한국 작가가 팔린다”이날 프리즈 런던에서 찾은 영국 갤러리 로빌란트보에나 부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취급하기로 유명한 이 갤러리는 프란시스코 고야, 에드가르 드가를 비롯해 미술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거장들의 작품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 작품들 가운데 이배 작가의 대작 ‘불로부터’가 있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이배 작가가
비싼 자리값과 작품 운송료, 출장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미술시장이 불황일 때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갤러리들은 늘 이런 고민을 한다. 작품 판매가 저조하면 수천만~수억원에 달하는 참가 비용 대부분을 허공에 날리는 일이 다반사라서다. 하지만 지난 9일 영국 런던 리젠트파크에서 열린 프리즈 런던에서 만난 갤러리스트들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있었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회장은 “경기가 최악이던 작년에 비해 판매 실적과 분위기가 훨씬 낫다”고 말했다.2021~2022년 호황이던 세계 미술시장은 2023년 꺾이기 시작해 올해 상반기까지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미술시장 분석의 권위자로 꼽히는 분석가 마이클 모제스와 지안핑 메이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올봄 경매시장은 지난 수십 년간 본 적 없는 최악의 불황이었다”고 진단했다. 예전에 구입한 작품을 올봄 경매에 내놓은 사람 대부분이 손해를 봤다는 내용이었다.그래서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올해 프리즈 런던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영국 시장이 미국에 이어 중국과 2위를 다투는 초거대 미술시장이고, 프리즈 런던은 하반기와 내년 미술시장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척도라서다. 행사에서 반등의 기미가 보인다면 기나긴 불황의 터널도 곧 끝난다는 뜻이 된다.현장에서 느낀 ‘체감 열기’는 호황 때와 비슷했다. 프리즈가 초청한 VIP로 입장객을 제한했는데도 공원 앞에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수십억원대 판매 기록도 곳곳에서 나왔다. 미국 뉴욕의 갤러리 하우저앤워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 그림을 약 66억원에, 런던 갤러리인 아르케우스·포스트모던은 쿠사마 야요이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영광은 저문 지 오래지만, 미술 분야에서만큼은 영국이 여전히 초강대국이다. 고흐와 모네를 비롯한 수많은 서양미술 거장들의 작품과 데이미언 허스트·트레이시 에민 등 현대미술 스타들이 공존하는 문화 강국이자, 미국에 이은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위(2023년 기준)를 지키는 거대 시장이라서다. 그 중심에 런던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규모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이 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장터지만 이곳은 세계 미술계의 대세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장(場)으로 평가받는다. 최대 수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릿값을 내고 참전하는 갤러리들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엔 냉정한 수요·공급의 논리만 있을 뿐, 인종·애국심·각국 정부의 문화 정책과 지원 등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지난 9일 전세계 VIP를 상대로 개막한 올해 프리즈 런던 행사에 방문한 국내 미술계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년에 비해 한국 작가 작품의 수와 비중이 확연히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관객 수 474만명으로 전 세계 현대미술관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을 기록한 ‘현대미술의 성지’, 영국의 테이트 모던. 이 거대한 미술관에 들어선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주하는 전시장이 있다. 미술관을 상징하는 거대한 전시 공간 ‘터바인 홀’이다. 테이트 모던은 개관 이래 매년 현대미술 작가를 딱 한 명씩 선정해 이곳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어 왔다. 루이스 부르주아, 아이웨이웨이 등 수많은 거장들이 이곳을 거쳐갔다.예술가들이 꼽는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크다는 것’. 높이는 35m에 넓이가 3300㎡(약 998평)에 달하는 이곳은 어떤 상상이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드넓은 무대지만, 웬만한 작가의 작품은 설치해도 존재감이 희미해질 정도로 막막하리만치 광대한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8일 찾은 터바인 홀에서 올해 전시 주인공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인 이미래(36)의 대형 설치 작품 ‘오픈 운즈’(열린 상처들)는 공간에 지지 않고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멈춰세우고 있었다.작품이 주는 인상은 기괴하다. 터바인 홀 공중에는 촉수 같은 실리콘 줄이 감겨 있는 7m 길이의 터빈이 매달려 끊임없이 돌아가고, 여기에서 피나 체액처럼 보이는 끈적한 액체들이 끊임없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천장에 달린 쇠사슬에는 동물의 가죽이나 넝마처럼 보이는 천 조각들이 걸려 있다. 2022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지난해 미국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뉴뮤지엄에서 선보였던 작품들과 유사한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이미래는 몸 밖으로 삐져나온 내장을 닮은 이런 작품들을 통해 못생기고 불쾌하지만 가여운 것들이 주는
“100년에 한 번 있는 전시.”이런 평가를 받으며 세계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전시가 있습니다.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반 고흐 : 시인과 연인’입니다. 모두가 이 전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타임스, 가디언, 텔레그래프, 인디펜던트 등 영국 주요 매체부터 아트뉴스페이퍼, 아트뉴스 등 글로벌 미술 전문 매체까지 입을 모아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아무리 전시 주인공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라지만, ‘좀 호들갑스럽지 않은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그런데 작품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같은 화가의 전시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작품이 많이 나올수록 그 가치가 확 뛰거든요. 이번 전시에 나온 그의 작품 61점은 모두 찬찬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명작들.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작 급의 작품도 상당수 나와 있습니다.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의 ‘해바라기’ 등 각국 주요 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이라 외부에 좀처럼 빌려주지 않는 작품들도 다수 나왔습니다.이런 그림들이 다 함께 벽에 걸린 덕분에, 관람객들은 고흐라는 사람의 삶과 정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 작품 설명을 비롯한 설명글이 거의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말 대신 그림으로 보여줬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라는 거지요.하지만 전시 하나 보러 런던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오늘은 주요 전시 작품들과 함께 고흐가 보낸 ‘가장 뜨거웠던 2년’의 이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개개인의 지능이나 능력이 현대인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축적된 지식·자본·시스템이 부족했을 뿐, 탁월한 실력으로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례가 적지 않다. 1500년 이상 전에 제작된 삼국시대 금속공예품들이 단적인 예다. 화려함과 정교함으로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는 이 유물들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당시 첨단기술의 결정체다.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상상의 동물사전-백제의 용(龍)’은 백제시대 금속공예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전시다. 국보 6점과 보물 7점을 비롯해 총 174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와 있다. 주제는 백제시대의 용 문양 금속공예. 용은 당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즐겨 쓴 문양이었다. 나선민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옛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용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다”고 설명했다.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령왕릉에서 나온 용 문양 유물들이다. 칼자루 끝에 있는 고리 안에 두 마리의 용과 용 머리가 장식돼 있는 ‘용봉황무늬 고리자루 큰칼’은 너무나도 정교해 출토 당시 학계 일각에서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양나라)에서 들여온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훗날 연구를 통해 백제의 자체 기술로 제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발톱이 셋 달린 용이 묘사돼 있는 무령왕비의 팔찌인 ‘글자를 새긴 용무늬 은팔찌’도 눈여겨 볼 만하다. ‘경자년 2월 다리라는 사람이 대부인용으로 은 230주를 들여 만들었다’는 문구가 한자로 새겨져
“영감을 주는 연주네요. 한국경제신문이 문화예술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겠어요.”3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신문 60주년 기념식이 시작되기 전 식장에 모인 각계 VIP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무대에 오른 한경아르떼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을 들은 뒤 나온 반응이었다.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쾌하면서 힘찬 연주에 감탄했다”고 말했다.한경미디어그룹이 2015년 ‘경제와 문화의 가교’를 표방하며 창단한 한경아르떼필은 전 세계 신문사 유일의 오케스트라로 활발히 활동하며 관객과 꾸준히 소통해왔다. 2022년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전곡 초연한 발레음악 ‘코레아의 신부’, 지난해 몬테카를로 발레단과 함께 공연한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지난 3월 홍콩 아트 페스티벌에 국내 교향악단 최초로 현지 초청을 받아 펼친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공연 지휘봉은 380년 역사의 독일 울름시립극장에서 수석지휘자를 지낸 마에스트로 지중배(42)가 잡았다. 행사 시작 전에는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등의 아름다운 선율이 식장을 메웠다. 류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는 “언론사 행사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연주를 들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입장에 맞춰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화려하게 연주하는 등 한경아르떼필의 존재감은 행사 중에도 빛났다.행사 마지막 순서로는 테너 김현수, 유슬기, 백인태와 베이스 길병민으로 구성된 남
스위스에서 태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주로 활동하는 우르스 피셔(51)는 지금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만큼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그가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뉴뮤지엄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고, 베네치아비엔날레에도 단골로 참여하는 비결이다. 경매 낙찰가는 수십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피셔를 정의하는 ‘대표적인 작풍’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김환기의 점화,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처럼 ‘피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만한 체급의 작가로서는 이례적이다. 2009년 미국 뉴요커지도 그와의 인터뷰에서 “피셔의 작품은 매우 기억에 남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서울 성북동 제이슨함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피셔의 개인전 ‘Feelings’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에서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10여년간 피셔가 만든 주요 조각, 사진, 회화, 설치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각국 미술관에 전시됐던 피셔의 주요 작품들이 나와 있어 갤러리 전시인데도 미술관 회고전을 방불케 한다. 전시 작품에 대한 해설과 피셔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피셔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키워드는 ‘낯설게 보기’전시장은 외관부터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낡은 건물에 흰색 페인트를 엎은 듯하다. 이 건물은 바로 옆에 위치한 제이슨함 갤러리가 최근 매입한 공간으로, 이전 소유주가 건축사에 의뢰하지 않고 직접 지었기에 기둥과 동선 등 내부 구조가
서도호가 처음 집에 천착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아버지인 서세옥 화백이 창덕궁 연경당의 사랑채를 본따 지은 한옥으로 이사를 가면서다. 서도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매일 학교를 가기 위해 대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경험을 했고, 집에 돌아올 땐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았다.” 수십년 뒤 그는 이 한옥을 비롯해 자신이 거쳐온 집들을 설치미술 작품으로 만들어내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1970년대의 그 한옥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전 세계 관객들을 맞고 있을까.① 천으로 만든 집(1990년대 후반~)1990년대 후반 그는 전통 한옥을 반투명 천으로 재현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옥색, 분홍색, 주황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의 폴리에스터 천으로 한땀 한땀 꿰매 한옥을 만든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미국 뉴욕 작업실을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관객들이 여러 문화권을 옮겨 다니는 경험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했다.작품을 통해 서도호는 복도, 문고리, 세면대, 가스레인지, 욕조 등 그와 함께한 모든 공간의 디테일을 실제 크기 그대로 전시장에 되살려냈다. 그는 폴리에스터 천이나 여름용 한복을 지을 때 쓰는 은조사로 집을 짓는다. 너무나 얇고 가벼운 나머지 빛이 그대로 투과된다. 이런 천으로 만든 거대한 집을 보고 있노라면 환상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집은 마치 옷과 같다고. 옷이 내 몸을 보호하듯이, 집은 사람을 보호해주는 공간이잖아요. 건축이 옷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가 2012년 리움미술관에서 전시한 ‘천으로 만든 집’은 당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 제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1612년 3월 이탈리아 로마의 법정. 19세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고통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당한,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법정에는 피해자에게 고문을 가하는 야만적인 제도가 있었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진술을 해야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탕으로, 일종의 ‘거짓말 탐지기’로 고문을 이용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르테미시아는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고문받기로 했습니다. 얇은 줄로 손가락을 죄는 시빌레(Sibille)라는 고문이었습니다.줄이 손가락을 부러트릴 듯 죄어왔지만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가해자를 당당히 노려봤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성폭행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더군요. 내 명예와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어요. 당신, 지금 내 손을 봐. 지금 내 손가락을 죄고 있는 줄이 당신이 말했던 결혼반지야? 이게 당신이 했던 약속이야?” 그 말에 가해자는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 문란한 여자가 날 유혹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뻔뻔한 가해자였지만, 아르테미시아가 말하는 진실 앞에서는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세세한 피해 사실까지 일관적으로 증언하는 피해자, 각종 전과가 있는 데다 수시로 말을 바꾸는 가해자.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판사는 가해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개개인의 지능이나 능력이 현대인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축적된 지식·자본·시스템이 부족했을 뿐, 탁월한 실력으로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례가 적지 않다. 1500년 이상 전에 제작된 삼국시대 금속공예품들이 단적인 예다. 화려함과 정교함으로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는 이 유물들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당시 첨단기술의 결정체다.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상상의 동물사전-백제의 용(龍)’은 백제시대 금속공예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전시다. 국보 6점과 보물 7점을 비롯해 총 174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와 있다. 주제는 백제시대의 용 문양 금속공예. 용은 당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즐겨 쓴 문양이었다. 나선민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옛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용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다”고 설명했다.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령왕릉에서 나온 용 문양 유물들이다. 칼자루 끝에 있는 고리 안에 두 마리의 용과 용 머리가 장식돼 있는 ‘용봉황무늬 고리자루 큰칼’은 너무나도 정교해 출토 당시 학계 일각에서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양나라)에서 들여온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훗날 연구를 통해 백제의 자체 기술로 제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발톱이 셋 달린 용이 묘사돼 있는 무령왕비의 팔찌인 ‘글자를 새긴 용무늬 은팔찌’도 눈여겨 볼 만하다. ‘경자년 2월 다리라는 사람이 대부인용으로 은 230주를 들여 만들었다’는 문구가 한자로 새겨져
김창열의 200호 크기(세로 198cm, 가로 123cm) 대작 '물방울'이 시작가 10억원에 경매에 오른다. 이달 초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의 열띤 분위기가 경매시장으로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케이옥션은 오는 25일 오후 4시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9월 경매'를 연다. 출품작 수는 136점(약 103억원 규모)으로, 올해 열린 경매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경매의 '간판 작품'은 김창열의 1973년작 '물방울'. 2001·2015·2024년 갤러리현대 전시와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를 통해 미술 애호가들에게 수 차례 선보인 적 있는 그림이다. 경매 시작가는 10억원이다. 김창열 작품의 기존 경매 낙찰 최고가는 1978년 작 '물방울'이 2021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세운 14억원이었다.이번 경매에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이우환의 150호 크기 'Dialogue'(추정가 9억8000만~18억원), 윤형근의 100호 '무제'(5억5000만~8억원), 박서보의 100호 '묘법 No. 060730'(5억~6억5000만원), 이건용의 150호 'Bodyscape 76-1-2020'(2억3000만~5억원) 등 대작이 유독 많은 게 눈에 띈다. 오는 10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앞둔 이강소의 100호 '무제-91125'(9000만~2억5000만원)도 주목할 만하다.이 밖에도 도상봉, 이대원, 김종학, 이숙자 등 한국 구상화가들의 작품과 알렉스 카츠, 우고 론디노네, 무라카미 다카시, 니콜라스 파티 등 해외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출품된다. 양혜규와 이배 등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한국 작품도 시선을 끈다.고미술 부문에서는 10폭짜리 '책가도'(1억200만~2억5000만원), 추사 김정희의 '시고'(900만~4000만원)
웃는 듯, 우는 듯. 남자는 괴상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남자의 표정도 자화상 속 얼굴과 똑같았습니다.한때 남자는 자신의 예술적 동지이자 큰 형님과도 같은 사람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됐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사랑은 비참하게 끝났고, 남자의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뒤 얼마 안 돼,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혔습니다.남자의 이름은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 뛰어난 재능으로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렸지만, 괴팍한 성격과 무책임한 행동은 그를 비참한 끝으로 몰아넣은 뒤 망각의 늪에 빠트렸습니다. 게르스틀의 작품이 재조명된 건 그가 세상을 떠난 후 50여년이 흐른 뒤였습니다.제대로 작품 활동을 했던 건 5년여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로 불리며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오는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에서 국내 최초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팔자를 자신이 꼰, 요절한 천재 화가 게르스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성격 더러운 천재“당신 그림은 아주 좋네요. 뛰어난 화가의 소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도 눈에 띄는군요.”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아버지는 매독에 걸린 채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매독균 때문에 두 아이를 뱃속에서 잃은 뒤에야, 아버지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놨습니다.집안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암울했습니다. 죽음은 계속됐습니다. 누나는 열 살 때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몇 년 뒤 아버지도 병이 악화되면서 미치광이가 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 결국 죽음을 맞았습니다. 가장을 잃자 집안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습니다. 생계를 꾸리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민한 감성을 갖고 있었던 소년 에곤 실레(1890~1918)의 마음은, 그 집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실레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죽음, 성(性)과 죄의식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혔습니다.그렇게 방황하던 실레가 비로소 마음 기댈 곳을 찾은 건 열일곱 살 때인 1907년.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 중 하나였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를 전시회에서 만난 실레가 쭈뼛쭈뼛 다가가 자신의 그림을 내민 게 시작이었습니다. “저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에곤 실레라고 합니다. 평소 선생님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선생님의 드로잉을 제 드로잉과 좀 교환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 물론 제 드로잉 여러 점에 선생님 드로잉 한 점을 교환하자는 얘기입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클림트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띠고 찬찬히 소년의 그림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직감했습니다. ‘천재다.’ 클림트는 씩 웃으며 실레에게 말했습니다. “왜 나랑 작품을 교환하자는 건가요? 자네 드로잉
같은 화가의 그림도 제작 연대와 스타일에 따라 천차만별의 평가를 받는다. 한국 현대미술 대표 화가 김환기의 대표적인 연작 ‘전면점화’(全面點畵) 중 최상급으로 꼽히는 것은 말년인 1970년대 초반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색이 푸른색이면 더 좋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2억원(수수료 포함 153억원)에 낙찰된 1971년작 ‘우주’(원제 05-IV-71 #200)가 단적인 예다. 한국 미술품 최고 낙찰가 기록이었다.그 기록이 깨질 수 있을까. 11일 크리스티에 따르면 ‘우주’와 같은 해 제작된 작품 ‘9-XII-71 #216’(사진)이 오는 26일 홍콩에서 열리는 ‘20세기/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에 나온다. 추정가는 77억5000만원에서 112억원으로 설정됐다. 2019년 ‘우주’의 경매 시작 전 추정가(73억~95억원)보다 높다.작품성은 김환기의 전면점화 중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반원형 소용돌이 패턴의 깊이감, 물감의 농담과 번짐 등이 절정에 오른 기량을 보여준다는 이유다. 희소성도 높다. 이때까지 경매 시장에서 거래된 1970년대 초 푸른색 전면점화는 총 20점도 되지 않는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약 20년 동안 개인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경매에는 처음 나온다”며 “5년 만에 푸른색 전면점화 걸작을 선보이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크기는 두폭화 ‘우주’(254x254㎝)의 절반 수준(127x251㎝)이지만 소장자에겐 이 정도가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우주’는 크기가 너무 커서 역대 소장자 중 대부분이 원래 모습대로 작품을 전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김환기의 대표작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하면 국내 ‘큰손’들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사진)가 12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에 임명됐다.김 신임 실장은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20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하며 근대미술 연구와 전시 등 다양한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프로그램을 총괄하며 선보인 이중섭, 유영국, 윤형근 등의 전시는 덕수궁관에 ‘명품 근대미술 전시’라는 선명한 색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펴낸 <살롱 드 경성>은 한국 근대미술 관련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종합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미술관의 학예연구실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임기 2년의 전문임기제 가급 공무원이다. 2022년 5월 김준기 전 실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 2년4개월 동안 공석이었다. 이번 임명은 공개모집과 심사를 거쳐 이뤄졌다. 임기는 2년이다.성수영 기자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12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에 임명됐다.김 신임 실장은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20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하며 근대미술 연구와 전시 등 다양한 업무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프로그램을 총괄하며 선보인 이중섭, 유영국, 윤형근 등의 전시는 덕수궁관에 ‘명품 근대미술 전시’라는 선명한 색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월간미술대상(2022) 등 여러 상을 받았고, 그가 펴낸 <살롱 드 경성>은 한국 근대미술 관련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종합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미술관의 학예연구실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임기 2년의 전문임기제 가급 공무원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전시를 기획하고 소장품 구입과 교육 등 미술관 운영 관련 업무까지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기도 하다. 하지만 2022년 5월 김준기 전 실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 미술관이 내홍과 여러 논란을 겪으며 2년 4개월동안 공석이었다. 이번 임명은 공개모집과 심사를 거쳐 이뤄졌으며 김 신임 실장의 임기는 2년이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가 마크 로스코(1903~1970)다. 미술 애호가의 로스코 사랑은 그야말로 열렬하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한국 추상미술 거장 김환기 등 수많은 유명 인사가 그의 열광적인 팬이다. 작품값은 기본이 수백억원대. 1000억원을 넘긴 작품도 있다.천문학적인 가격보다 더욱 특별한 건 “작품에 감동해서 울었다”는 증언이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 미술에 관심이 없거나 실제로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면으로 봤을 때 로스코의 작품은 그저 두세 가지 색이 뭉텅이로 칠해진 캔버스일 뿐이라서다.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 2~3층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로스코와 이우환의 2인전 ‘조응’은 그래서 드문 기회다. 갤러리 2층에서는 볼 기회가 잘 없던 로스코의 작품을 국내에서 여섯 점이나 볼 수 있다. 로스코 재단에서 빌려온 이 작품들은 함께 전시를 여는 이우환 화백(88)이 골랐다.로스코 전시가 열리는 2층 전시장은 어둡다. 이유가 있다. 로스코의 목표는 그림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관람객이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아무 모양도 없는 그림’을 그렸다. 작품에 어떤 모양을 그려 넣는 순간 관람객은 ‘그 모양이 무엇인지’만 궁금해한다는 이유에서다.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같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로스코는 작품 속 색상과 구성은 물론 작품 외적인 감상 환경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색채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조명을 어둡게 유지하는 것이다. 로스코의 유족이 기획에 참여한 이번
같은 화가의 그림도 제작 연대와 스타일에 따라 천차만별의 평가를 받는다. 한국 현대미술 대표 화가 김환기의 대표적인 연작 ‘전면점화’(全面點畵) 중 최상급으로 꼽히는 건 말년인 1970년대 초반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색이 푸른색이면 더 좋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2억원(수수료 포함 153억원)에 낙찰된 1971년작 ‘우주’(원제 05-IV-71 #200)가 단적인 예다. 한국 미술품 최고 낙찰가 기록이었다.그 기록이 깨질 수 있을까. 11일 크리스티에 따르면 우주와 같은 해 제작된 작품 ‘9-XII-71 #216‘이 오는 26일 홍콩에서 열리는 ‘20세기/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에 나온다. 추정가는 77억5000만원에서 112억원으로 설정됐다. 2019년 ‘우주’의 경매 시작 전 추정가(73억~95억원)보다 높다.작품성은 김환기의 전면점화 중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반원형 소용돌이 패턴의 깊이감, 물감의 농담과 번짐 등이 절정에 오른 기량을 보여준다는 이유다. 희소성도 높다. 이때까지 경매 시장에서 거래된 1970년대 초 푸른색 전면점화는 총 20점도 되지 않는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2019년 이후 5년만에 푸른색 전면 점화 걸작을 선보이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크기는 두폭화 ‘우주’(254x254cm)의 절반 수준(127x251cm)이지만 소장자 입장에서는 이 정도가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우주의 경우 크기가 너무 커서 역대 소장자들 중 대부분이 원래 모습대로 작품을 전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김환기의 대표작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하면 국내 ‘큰손’들이 입찰에 참가할 가능성이 높다. “미술시장 호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냄새를 전달하는 냄새 분자는 공기를 타고 사람의 코로 날아들어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단순한 감정을 넘어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 냄새’처럼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이 될 때도 있다. 작지만 중요한 존재의 예시로는 미생물을 빼놓을 수 없다. 세균이 없으면 생태계는 무너진다. 인간의 몸도 그렇다. 공생하는 세균이 모두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최근 대규모 개인전을 개막한 한국계 미국인 아니카 이(53)는 이 같은 ‘작은 것들’에 주목하는 작가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개인전을 통해 작가로 데뷔한 그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휴고보스상 수상(2016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2019년), 테이트모던 터바인홀 전시(2021년) 등으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올랐다.전시장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작업한 아니카의 대표작 33점을 만날 수 있다. 화학과 생물학, 기계공학 등 과학을 활용해 낯설지만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게 특징이다. 바다에 사는 단세포 생물인 방산충을 모티브로 한 ‘방산충 연작’이 단적인 예다. 방산충은 산소를 생산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며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 작가는 광섬유 등 첨단 재료와 모터로 방산충이 숨을 쉬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 이를 표현했다.‘공생적인 빵’은 효모를 사용해 장의 구조를 표현한 설치 작품, ‘절단’은 꽃을 기름에 튀긴 뒤 이를 부패시켜 시큼한 향을 풍기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인간과 미생물, 생물과 기계, 삶과 죽음
‘여성 화가의 초현실주의 그림’은 2020년대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종류다. 2022년 베네치아비엔날레 제목이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의 작품에서 따온 ‘꿈의 우유’였던 게 단적인 예다. 당시 베네치아비엔날레는 캐링턴을 비롯한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세계인들에게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이 다소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알게 됐다.지금 가장 ‘핫한’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가 서울 한남동에 있는 한화손해보험 한남사옥에서 열리고 있다. 성수동으로 이전하기 전 디뮤지엄이 위치했던 건물이다. 프리다 칼로, 레오노라 캐링턴, 레메디오스 바로, 브리짓 베이트 티체노르, 마리아 이즈키에르도, 소피아 바시, 엘리스 라혼 등 작가 7명의 걸작 16점이 이 전시에 나왔다. 프리다 칼로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더비의 기획으로 마련된, 그야말로 ‘역대급’ 전시다.프리다 칼로의 익숙한 유화는 없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른 작품 하나하나가 수준급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즈키에르도는 멕시코 거장인데, 그의 작품은 1970년대부터 ‘국보급’으로 분류돼 멕시코 밖으로 반출이 금지됐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1946년작)은 그전에 외국으로 나온 작품이다. 캐링턴은 지난 5월 다른 작품이 소더비 경매에서 386억원에 작가 최고가를 쓰며 주목받기도 했다. 그만큼 작품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다시 한국
서울과 미국 뉴욕에서 같은 시기 열린 아트페어 두 개가 ‘정면 승부’를 벌였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9월 5~8일)과 30년 전부터 ‘세계 미술의 수도’ 뉴욕을 대표해온 아모리 쇼(9월 4~8일) 얘기다. 둘 중 승자는 놀랍게도 서울이었다.두 아트페어에 모두 참가 허가를 받은 갤러리 대다수가 ‘레드 오션’인 뉴욕 대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서울을 택했다. 그 결과 KIAF-프리즈가 상업성과 예술성 모두에서 아모리 쇼를 눌렀다는 게 글로벌 미술계의 평가다. 뉴욕 기반 미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의 평가는 단호했다. “아모리 쇼는 프리즈 서울에 밀려서인지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서로 구별하기도 힘든 그저 그런 수준의 그림이 넘쳐났다. 반면 프리즈는 출품작과 판매 분위기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한국의 학구열에 놀랐다”그만큼 올해 KIAF-프리즈의 분위기는 좋았다. 프리즈는 8일 행사 결산 자료를 내고 올해 방문객이 7만 명가량이었다고 발표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관람객은 평년보다 조금 적었다는 게 참가 갤러리들의 얘기다. 하지만 미술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작품 판매는
“5년 후 버림받으면 어쩌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의 공동 개최가 확정된 2021년, 미술계 안팎에서는 이런 걱정의 목소리가 높았다. 두 행사를 함께 열기로 하고 5년 뒤 프리즈 서울이 KIAF를 버리고 단독 개최를 선언하면 KIAF는 ‘동네 장터’로 전락하고 국내 화랑들은 고사할 것이라는 게 화랑가의 우려였다.세 번째 KIAF-프리즈가 8일 막을 내리며 5년 공동 개최의 반환점을 돈 지금, 이런 우려는 기우로 결론 나는 분위기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계속 KIAF와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를 만들어 나가고 싶고, 아마도 5년 더 계약을 연장할 것 같다”고 했다. 국내 미술계엔 자신감이 붙었다. 미술계 관계자는 “프리즈가 서울에서 빠져도 상관없다”며 “그렇게 되면 라이벌 아트바젤이 즉시 서울에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분위기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KIAF 행사의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8일 KIAF에 따르면 올해 관람객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7만여 명)이었다. 하지만 부스 크기가 커지고 동선이 최적화돼 체감 혼잡도는 확 떨어졌고 갤
“어, 형이야. 오늘도 좀 부탁해. 지나갈게.”“아, 한두 번도 아니고…. 통금시간에 자꾸 이러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미안하다니까 그래. 형이 또 다음에 술 한잔 살게.”그림 속 18세기 조선 한양(서울) 길거리에서는 이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한양에는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순찰하는 군인)에게 들키면 감옥에 갇히거나 곤장을 맞아야 했지요.하지만 그림 속 갓을 쓴 양반은 이런 통행금지 따윈 개의치 않습니다. 털로 만든 방한용 토시,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소년이 들고 있는 모피 풍차(방한용 모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돈깨나 있는 집안이거든요. 양반 옆에 있는 여인을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아주 여유롭습니다. 소년도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빨간 옷을 입은 순라군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여인을 가리키며 양반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보면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반면 양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슬쩍 갓을 내리며 양해를 구하고 있지요. 힘세고 돈 많은 사람이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에 수록된 30개 그림 중 하나인 ‘야금모행’.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이 그림을 보다가, 혜원 신윤복(1758~?)의 섬세한 표현과 재치, 그 속에 숨겨진 스토리에 새삼 감탄이 나왔습니다. 좀 더 많은 분이 이런 작
기자를 구독하려면
로그인하세요.
성수영 기자를 더 이상
구독하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