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인 '아트부산'에 알렉스 카츠, 아니쉬 카푸어,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이 총출동한다. 아트쇼부산은 다음달 4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7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아트부산 2023'을 연다고 12일 밝혔다. 아트부산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와 함께 국내 최대 아트페어 중 하나로 손 꼽힌다. 올해 아트부산은 단일 아트페어로는 국내 최대 면적이다. 벡스코 제1전시장(2만6508㎡)을 통째로 빌렸다. 지난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던 프리즈서울(1만7629㎡)이나 키아프(1만8378㎡)보다 전시장이 넓다.참여 갤러리 수는 소폭 늘어났다. 올해는 국내 111개, 해외 35개 등 총 146곳의 갤러리가 부스를 차린다. 지난해보다 13곳 늘었다. 아트부산 관계자는 "쾌적한 관람을 위해 참가 갤러리 규모를 단순 확대하기보다 편의시설 확충, 부대 프로그램 마련에 집중했다"고 말했다.참여 갤러리와 작품도 화려하다. 국내 대표 화랑인 국제갤러리는 '현대미술의 거장' 카푸어의 '그린 앤 블랙 미스트'(2019)를 들고 나온다. 아시아 최대 갤러리인 탕 컨템포러리는 '스타작가' 우국원의 신작 '빌리지'(2023)를 선보인다. 오페라갤러리는 미국 작가 카츠, 갤러리우는 독일 작가 리히터의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다.대형 설치·영상 작업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특별 전시인 '커넥트(CONNECT)'에선 로버트 테리엔, 나난, 장세희, 필립 콜버트, 아트악센트 등 12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아트부산이 열리는 기간 부산의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부산관광공사와 함께 '부산 아트위크'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왕위 계승 순위'라는 꼬리표가 붙여진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예절 교육을 받고, 왕을 보면 언제나 무릎과 머리를 굽혀 인사해야 한다. 식사를 할 땐 왕이 식사를 마치면 음식을 더 먹을 수 없다. 결혼을 할 때도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옛 절대왕정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영국의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국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왕가다. 물론 왕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왕은 여전히 영국 시민들에게 '영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다.새로운 왕실 일원이 생기면 영국 시민들도 버킹엄궁 앞에 몰려와 함께 축하하고, 반대로 왕실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시민들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슬퍼하는 이유다. 군주제에서 벗어난 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자연스레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영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왕실을 아끼고 따르는 걸까. 왜 왕실의 일을 자기 일과 동일시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걸까.작년 12월 나온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해리와 메건'은 이런 궁금증을 일부분 풀어준다. 한국에는 영상등급 심의를 거치느라 올해 1월 초 공개됐다.이 다큐는 나오자마자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영국 왕실을 뛰쳐나온 해리 왕자와 그의 아내인 메건 마클이 '왕실의 민낯'을 폭로하는 게 주 내용이라서다. 보수적인 왕실의 삶, 뿌리 깊은 인종차별 등 왕실의 내밀한 속사정을 거침없이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래서 이 다큐는 역설적으로 영국에서 왕실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를 엿볼 수 있다. 고발과 폭로가 힘을 얻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1980년대는 ‘민중미술의 시대’로 기억된다. 민주화 운동이 확산하면서 작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작가가 급격히 늘어난 시절이다. 정치의 과잉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어느 화가는 평생을 빛의 본질에 천착했고, 어느 화가는 철사와 실을 통해 고유의 작품 세계를 열었다. 서울 통의동 아트스페이스3가 갤러리 개관 10주년 특별전 ‘컬러풀 한국 회화-조화에서 정화까지’로 이들 작가 여덟 명을 조명한 이유다. 이숙희 아트스페이스3 대표는 “시류와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들”이라고 했다. 전시는 네 가지 섹션으로 마련됐다. 전시를 기획한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이 작가를 두 명씩 엮어 구성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고(故) 하동진과 원로 작가 강하진의 작품이 그 시작이다. 이들 작품은 ‘컬러풀 한국 회화’라는 전시 제목을 실감 나게 한다. 다채로운 색과 빛의 향연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하동진 작품은 색깔의 농도가 일정하게 바뀌는 그러데이션이 돋보인다. 작가 생활 대부분을 빛의 특성을 탐구하는 데 바친 그의 삶을 가늠하게 한다. 트위드 패턴이 떠오르는 강하진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여러 가지 색깔이 보인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면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추상화들이 걸려있다. 그동안 절제의 미를 추구해왔던 이봉열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에서 목화 봉오리를 캔버스에 담았다. 고향 황해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울퉁불퉁한 표면 위 목화꽃과 목화솜으로 나타냈다. ‘한국스러운 추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박재호 작가의 파스텔톤 추상화에선 특유의 서정성이 느
삼각형 모양 지붕과 그 위에 달린 앙증맞은 굴뚝, 네모난 몸통과 창문. 어린아이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으레 이런 모습으로 그린다.미국 작가 테일러 화이트(45)가 그린 집도 그렇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엉성한 드로잉으로 집을 그려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어떤 집들은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고, 어떤 집들은 균형을 잃은 채 과하게 한쪽으로 쏠려 있다. ‘안락하고 포근한 공간’이라는 일반적인 집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최근 서울 청담동 지갤러리에서 만난 화이트는 “재난 속에서도 땅에 발을 붙이고 똑바로 서 있는 집을 통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세계적인 갤러리 데이비드 즈위너가 직접 꼽은 ‘떠오르는 젊은 작가’ 중 하나다. 지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전시 ‘하우스 마인드’는 화이트가 국내에서 여는 두 번째 개인전이다.그는 미술을 늦게 시작했다. 35세가 다 돼서야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 화이트는 바다를 누비는 해군이었다. “10년 가까이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이라크전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어요. 매일매일 죽음을 마주하다 보니 항상 첫 번째 목표는 생존이었죠. 그러다 보니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전역 후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했죠. 그때 ‘내 본모습’을 알게 해준 게 미술이었어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취약한 모습을 다 내보여야 가능한 것이거든요.”이번에 선보인 ‘집 시리즈’는 그의 삶과 닮았다. 화이트가 오랜 방황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은 것처
2021년 경기 의왕 백운호수 근처에 문을 연 '타임빌라스'는 롯데백화점이 수년간 공들인 프리미엄 아울렛이다. 기존 아울렛과는 완전히 다른 '체험형 쇼핑공간'을 만들겠다는 롯데백화점의 야심이 담겼다. 착공 전 설계만 여러 차례 갈아엎었을 정도다.아울렛 입구에 있는 연두색 스케이트파크는 그 상징이다. 쇼핑센터와 다양한 체험공간을 한 곳에 구현하겠다는 롯데백화점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면적 260㎡(80평)짜리 초대형 스케이트파크는 서로 다른 크기와 깊이의 6개 원으로 이뤄져있다. 누구나 와서 스케이트 보드를 탈 수 있다. 최근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초보 보더'들도 자주 찾는 '보드 성지'가 됐다. 그런데 이 스케이트파크가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지. 바로 구정아 작가(56)의 설치작품 '내가모(NEGAMO)'다. 구정아는 해외 무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세계적 작가다. 유럽 최대 현대미술관인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다.한국인이 퐁피두에서 전시를 연 건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 이후 처음이다. 최근엔 '미술계 올림픽'으로 꼽히는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국가대표' 격인 한국관 대표 작가로 뽑혔다.하지만 구정아의 작품 앞에 서면 궁금증이 생긴다. 형광 연두색 페인트로 칠한 스케이트파크가 뭐 그리 특별하길래 '예술'이란 건지. 단지 유명한 작가가 만들었다고 해서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건지.그 답을 찾으려면 구정아의 이전 작품을 알아야 한다. 구정아의 작품엔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200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선 사람들이 누워있는 잔디밭에 지름 1㎝의 반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후폭풍을 겪어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여성에겐 더 가혹한 시기였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전쟁까지 겹쳐 여성이 자기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건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 스위스의 하이디 부허(1926~1993)와 한국의 김윤신(1935~)이 바로 그런 예술가들이었다.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여성 예술가의 개인전이 지금 각각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와 남현동 남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두 여성 작가가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다. 한쪽은 단단한 재료로, 다른 한쪽은 말랑말랑한 재료로…. 그러나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세상의 편견에 맞섰다는 것이다.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나무·돌 찾아 전 세계 누빈 조각가딱딱한 재료를 내세운 쪽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이다. 지난 2월부터 남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를 열고 있다. 김윤신은 홍익대 미대 출신에 1960년대 이응노, 한묵, 문신 등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들과 함께 프랑스 유학 시절을 보낸 ‘엘리트 예술가’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복한 집안에서 평탄한 삶을 걸어온 듯 싶지만, 최근 그를 만나 들은 88년간의 삶은 ‘안락’과는 거리가 멀었다.“강원 원산에서 태어나 해방 때 38선을 건넜어. 맨몸으로 강을 건너고, 수용소도 가보고 별일을 다 겪었지.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무서운 게 없어졌어. ‘내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데, 죽는 날까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1980년대는 ‘민중미술의 시대’로 기억된다. 민주화 운동이 확산하면서 작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작가들이 급격히 늘어난 시절이다. 정치의 과잉이 불가피했던 상황이었지만 어느 화가는 평생을 빛의 본질에 천착했고, 어느 화가는 철사와 실을 통해 고유의 작품 세계를 열었다. 서울 통의동 아트스페이스3가 갤러리 개관 10주년 특별전 ‘컬러풀 한국 회화-조화에서 정화까지’로 이들 작가 8명을 조명한 이유다. 이숙희 아트스페이스3 대표는 “시류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들”이라고 했다. 전시는 4가지 섹션으로 마련됐다. 전시를 기획한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이 작가들을 두 명씩 엮어 구성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고(故) 하동진과 원로 작가 강하진의 작품은 그 시작이다. 이들 작품은 ‘컬러풀 한국 회화’라는 전시 제목을 실감나게 한다. 다채로운 색과 빛의 향연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하동진 작품은 여러 가지 색깔의 농도를 일정하게 바꾸는 그라데이션이 돋보인다. 작가 생활의 대부분을 빛의 특성을 탐구하는 데 바쳤던 그의 삶을 가늠케한다. 트위드 패턴이 떠오르는 강하진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여러 가지 색깔이 보인다. 캔버스 위에 점을 찍고 지우는 행위를 통해 자연의 근원을 나타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면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추상화들이 걸려있다. 그동안 절제의 미를 추구해왔던 이봉열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에서 목화 봉오리를 캔버스에 담았다. 고향 황해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울퉁불퉁한 표면 위 목화꽃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1964년·1억9504만달러),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1982년·8500만달러),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61년·7970만달러)…. 모두 지난해 열린 경매에서 낙찰된 작품이다. 불황 속에서도 세계 미술시장의 성장을 이끈 건 이런 ‘초고가 작품’들이었다.글로벌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과 글로벌 금융투자회사 UBS가 4일(현지시간) 공개한 ‘아트마켓 2023’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미술시장 규모는 678억달러(약 89조원)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644억달러)보다 3% 늘었다.아트바젤과 UBS는 “가격·지역별로 성장세가 분화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특히 경매시장에서 ‘가격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1000만달러 이상 초고가 작품의 매출은 전년보다 12% 늘어났다. 같은 기간 1000만달러 이하 가격대의 작품 매출이 모두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국가별 미술시장 순위에도 변동이 있었다. 미국은 전체 시장의 45%를 차지하며 1위를 지켰다. 영국(18%)은 중국(17%)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한국은 프리즈 서울 등의 영향으로 아트딜러 매출이 40% 넘게 늘며 점유율 1%를 기록했다. 한국이 집계에 잡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이선아 기자
지난해 5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낙찰을 뜻하는 경매봉 소리가 '땅'하고 울려퍼지자, 기립박수 소리가 경매장 안을 가득 채웠다. 박수를 받은 주인공은 미국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1964). 1억9504만달러(약 2500억원)에 낙찰되면서 20세기 작품 중 최고 경매가를 새로 쓴 순간이었다.지난해 경매에서 신기록을 쓴 건 워홀 작품뿐만이 아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르네 마그리트 등 거장의 작품이 잇따라 초고가에 판매됐다. 바스키아의 '무제'(1982)는 작년 5월 필립스 경매사상 최고가인 8500만달러(약 1100억원)에 팔렸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61)은 작년 3월 소더비 경매에서 7970만달러(약 1000억원)에 낙찰됐다. 마그리트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이다.불황 속에서도 전세계 미술 시장의 성장을 이끈 건 바로 이런 '초고가 작품'들이었다. 글로벌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과 글로벌 금융투자사 UBS가 지난 4일(현지시간) 공개한 '아트마켓 2023'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미술시장은 678억달러(약 89조원)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644억달러)보다 3% 늘어났다.아트바젤·UBS는 "가격·지역별로 성장세가 분화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특히 경매 시장에서 '가격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1000만달러 이상의 초고가 작품들의 매출은 전년보다 12% 늘어났다. 같은 기간 1000만달러 이하 가격대의 작품 매출이 모두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1000만달러 이상의 작품이 전체 경매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28%에서 2022년 32%로 증가했다.국가별 미술시장 순위에도 변동이 있었다. 미
삼각형 모양의 지붕과 그 위에 달린 앙증맞은 굴뚝, 네모난 몸통과 창문. 어린 아이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으레 이런 모습을 그리곤 한다. 미국 작가 테일러 화이트(45)가 그린 집도 그렇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엉성한 드로잉으로 집을 그려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어떤 집들은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고, 어떤 집들은 균형을 잃은 채 과하게 한쪽으로 쏠려있다. '안락하고 포근한 공간'이라는 일반적인 집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최근 서울 청담동 지갤러리에서 만난 화이트는 "재난 속에서도 땅에 발을 붙이고 똑바로 서 있는 집을 통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세계적인 갤러리 데이비드 즈위너가 직접 꼽은 '떠오르는 젊은 작가' 중 하나다. 지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전시 '하우스 마인드'는 화이트가 국내에서 여는 두 번째 개인전이다. 그는 미술을 늦게 시작했다. 35세가 다 돼서야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 화이트는 바다를 누비는 해군이었다. "10년 가까이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이라크전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어요. 매일매일 죽음을 마주하다보니 항상 일순위 목표는 생존이었죠. 그러다 보니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어요. 전역 후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했죠. 그 때 '내 본모습'을 알게 해준 게 미술이었어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스스로 솔직해지고, 취약한 모습을 다 내보여야 가능한 것이거든요." 이번에 선보인 '집 시리즈'도 그의 삶과 닮아있다. 화이트가 오랜 방황 속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트페어인 ‘화랑미술제’가 이달 12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한다.4일 한국화랑협회에 따르면 ‘2023 화랑미술제’는 12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16일까지 코엑스 B·D홀에서 열린다. 1979년 시작된 화랑미술제는 올해로 41회째다. 국내 최장수 아트페어(미술품 거래 시장)다.올해 화랑미술제에선 국내 갤러리 156곳이 1만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참여 작가만 900명이 넘는다. 지금껏 열린 화랑미술제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국제갤러리, 가나아트, 갤러리현대, 학고재, 아라리오갤러리 등 대형 갤러리뿐 아니라 도잉아트, 아뜰리에 아키, 히든엠갤러리 등 신생 갤러리도 참가한다.화랑협회 관계자는 “갤러리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부스의 크기가 같기 때문에 중대형 갤러리 위주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신진 작가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형 화랑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참가비도 최소한으로 낮췄다”고 설명했다.신진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줌인(ZOOM-IN)’ 특별전도 연다. 470여 명의 후보 가운데 선발된 10명의 작가가 회화·미디어·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기간에 현장투표를 거쳐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가 세 명에게 상을 수여할 계획이다. 화랑미술제 협력사인 포르쉐가 선정한 특별상 수상자에게는 포르쉐와 협업할 기회도 준다. 황달성 화랑협회장은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침체돼 있는 한국 미술시장에 화랑미술제가 새로운 활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선아 기자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예술가들이 있다. 해외 미술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설치미술가 구정아(56)가 그렇다. 1991년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로 유학을 떠난 뒤 줄곧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해왔다. 한국 작가로는 백남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구정아는 소리, 향기, 빛, 온도 등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을 공간에 덧입힌다. 2009년 ‘세계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선 고목나무가 웅웅대는 소리를 전시하는가 하면, 2010년 미국 뉴욕 댄 플라빈 아트 인스티튜트에선 전시장 1개 층을 통틀어 형광 분홍색 빛을 쐈다.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도무지 작품 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거꾸로 구정아만의 특색이 됐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가상,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흐린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이 구정아의 작품세계 속에선 예술로 변화하는 것이다.최근 구정아는 내년 4월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한국 국가대표’로 뽑혔다. 비엔날레의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됐다. ‘한국 향기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한국의 여러 도시를 대표하는 향기를 전시할 계획이다.이선아 기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트페어인 '화랑미술제'가 이달 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한다. 주최 측인 한국화랑협회에 따르면 '2023 화랑미술제'는 오는 12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16일까지 코엑스 B·D홀에서 열린다. 올해 화랑미술제에선 156개 국내 갤러리가 1만 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지금껏 열린 화랑미술제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국제갤러리, 가나아트, 갤러리현대, 학고재 등 대형 갤러리뿐 아니라, 도잉아트, 아뜰리에 아키 등 신생 갤러리들도 참여한다. 황달성 화랑협회장은 "갤러리 규모와 관계 없이 모든 부스의 사이즈가 같기 때문에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나 프리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신진작가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바느질 하나로 세계 미술계를 홀린 김수자의 오색 보따리가 전시장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한국의 대표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푸른색 실크로 제작한 높이 3m짜리 한옥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사진) 그 뒤엔 깨진 도자기 조각을 퍼즐처럼 이어 붙인 이수경의 설치작품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국가대표급’ 예술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신림동 서울대미술관의 풍경이다.‘시간의 두 증명-모순과 진리’라는 이름의 이번 전시는 서울대미술관이 한국의 전통을 조명하기 위해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준비했다. 아름지기는 재계 오너 일가를 중심으로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01년 구성된 비영리 문화단체다. 아름지기 일원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이 이번 전시의 축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전시는 아름지기 소장품 100여 점과 서울대미술관이 확보한 작품 75점으로 꾸려졌다. 아름지기는 백남준부터 김수자, 서도호, 양혜규 등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서울대미술관은 전시 취지에 맞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더했다. 관람은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조해리 작가는 정간보(국악 악보)에 만화를 그려 넣었고, 김보민 작가는 전통 산수화 밑에 빽빽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의 풍경을 결합해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전시는 5월 28일까지.이선아 기자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박물관이었다. 규모와 소장품 수준은 물론 연간 방문객 수를 고려해도 그랬다. 2019년 기준 이곳을 찾은 사람은 648만 명.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페이퍼가 집계한 결과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960만 명), 중국국립미술관(739만 명), 바티칸박물관(688만 명)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랐다.그랬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작년엔 세계 8위로 주저앉았다. 최근 아트뉴스페이퍼가 발표한 ‘2022년 세계 박물관 방문객 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은 321만 명에 그쳤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방문객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방문객 집계 기준을 바꿨다는 점을 감안해도 회복 속도가 늦다는 설명이다. 아트뉴스페이퍼는 “미국 박물관들이 여전히 코로나19의 후폭풍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영국 대영박물관과 테이트모던은 그 틈을 치고 올라섰다. 2019년 세계 5위였던 대영박물관은 작년엔 3위, 6위였던 테이트모던은 4위를 차지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방문객이 30%가량 줄긴 했지만 직전 해에 비해서는 2배 이상씩 늘었다.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부동의 1위’를 지켰다. 지난해 773만 명이 방문하면서 2위인 바티칸박물관(508만 명)을 큰 차이로 제쳤다. ‘제로 코로나’를 선언하며 강도 높은 봉쇄 조치를 취한 중국의 박물관들은 이번 집계에서 빠졌다. 중국 정부가 방문객 수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시아 박물관으로는 유일하게 ‘톱5’ 안에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상위 10개 박물관 가운데 유일하게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방문객이 2% 늘
“레고 블록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아이웨이웨이는 이를 아예 ‘다른 차원(another level)’으로 끌어올렸다.”오는 4월 7일부터 영국 런던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는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66)의 개인전 가운데 한 점이 최근 미리 공개되자 미술 전문지 아트넷이 보인 반응이다. 인상파 거장인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재현한 이 작품이 주목받은 건 총 65만 개의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져서다. 오로지 22개 색깔의 레고만 써서 모네 특유의 붓질을 나타냈다. 작품 길이만 15m가 넘는다.이렇게 레고를 ‘예술의 반열’로 올려놓은 아이웨이웨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설치미술가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중국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다.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드는 작품을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무거운 주제를 레고 블록이라는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나타낸다. 어린아이가 갖고 놀 법한 재료를 통해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한국에서도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서울 청담동 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에선 아이웨이웨이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십이간지 동물을 레고로 참신하게 표현했다. 송은에서 열리는 ‘울리 지그 중국현대미술 컬렉션 전’에도 그의 조형작품이 전시된다.이선아 기자
바느질 하나로 세계 미술계를 홀린 김수자의 오색 보따리가 전시장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한국의 대표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푸른색 실크로 만든 높이 3m짜리 한옥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그 뒤엔 깨진 도자기 조각을 퍼즐처럼 이어붙인 이수경의 설치작품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국가대표급’ 예술가들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 명 한 명이 지구촌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법한 주자들이다. 하지만 전시가 열리는 곳은 대형 미술관이나 상업 갤러리가 아니다. 서울 신림동에 자리잡은 서울대미술관이다. ‘시간의 두 증명 - 모순과 진리’라는 이름의 이번 전시는 서울대미술관이 한국의 전통을 조명하기 위해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준비했다. 아름지기는 재계 오너 일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01년 만들어진 비영리 문화단체다. 아름지기의 일원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이 이번 전시의 축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전시에는 아름지기 소장품 100여점과 서울대미술관이 확보한 작품 75점으로 꾸려졌다. 아름지기는 백남준부터 김수자, 서도호, 양혜규 등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서울대미술관은 전시 취지에 맞는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더했다. 전시를 ‘유명 작가들을 불러모은 기획전’으로 평가한다면 참맛을 느끼기 어렵다.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조해리 작가는 정간보(국악 악보)에 만화를 그려넣었고, 김보민 작가는 전통
덴마크 골프화 브랜드 에코골프가 여자골프 세계 1위 선수 ‘리디아 고’의 이름을 딴 스페셜 에디션을 국내에 출시했다.리디아 고 스페셜 에디션은 리디아 고가 즐겨신는 ‘바이옴 G5 보아’(BIOM G5 BOA) 시리즈에 그녀의 국적인 뉴질랜드와 한국을 대표하는 문양을 결합했다. 한 쪽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궁화가, 다른 한 쪽은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고사리풀이 새겨져있다. 리디아 고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했다. 골프화 안쪽에는 리디아 고의 사인과 로고도 있다.바이옴 G5 보아는 에코 가죽공장에서 만든 프리미엄 가죽으로 제작됐다. 기존에 출시했던 바이옴 G3, 바이옴 H4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100% 방수 기능을 제공하는 고어텍스를 적용했다. 신발 내부의 습기와 온기를 외부로 배출하는 동시에 외부 이물질을 차단해 라운드 내내 쾌적함을 유지해준다는 설명이다.이번 스페셜 에디션에는 에코골프가 개발한 여러 기능도 들어갔다. 운동 선수 2500명의 발을 스캔해서 만든 ‘바이옴 네츄럴 모션 라스트’ 기능이 대표적이다. 코스를 걷는 동안 발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접지력을 높이는 기능이다. 신발의 어퍼(윗부분)와 미드솔(쿠션 중간부)을 일체화해 유연성을 높이는 ‘에코 플루이드폼’ 기술도 적용됐다. 안정감을 향상해주는 ‘엑스 텐사(X-TENSA)’ 기술도 활용했다. 아웃솔(밑창)과 레이스(신발 끈)를 보이지 않게 연결해 발을 감싸주는 듯한 느낌을 더했다.리디아 고는 “골프화 디자인에 대한 기준이 높은 에코골프에 저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개성을 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영광”이라며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해 이 신발을 신
2019년 일본에서 한 디자이너가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일본의 특색 있는 장소를 소개하는 60초짜리 영상과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이다. 마치 낮은 고도에서 비행을 하듯이 일본의 여러 지역을 가까이서 탐험하겠다는 취지였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은 하라 켄야. 일본의 대표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이다. 국내에는 생활용품 브랜드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로 잘 알려져있다. 최근 출간된 <저공비행: 또 다른 디자인 풍경>은 그가 일본 전역을 '저공 비행' 하면서 찾은 디자인 성공 사례를 정리한 책이다. '지역성에 미래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닥 새롭지 않다.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고유성)'가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지역의 오랜 문화와 풍토, 자연환경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다른 책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참신한 건 '지역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시설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다. 그가 내놓은 답은 '호텔'이다. 여행이나 출장 때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잠깐 들리는 호텔이 그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라니,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에게 호텔은 잠을 자는 공간, 그 이상이다. "잘 만들어진 호텔은 그 지역에 대한 최상의 해석이자, 음미된 풍토 그 자체"라는 게 켄야의 설명이다.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음미하고 해석한 뒤, 건축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본 가고시마현에 있는 '덴쿠'가 그렇다. 3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에 목조 빌라
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빌바오는 30년 전만 해도 ‘죽은 도시’였다. 도시를 먹여 살리던 철강·조선산업이 쇠퇴하면서 사람과 돈이 빠져나간 탓이다. 이로 인해 한때 실업률이 30%를 웃돌기도 했다. 이랬던 빌바오는 1997년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일등공신은 이때 문을 연 구겐하임미술관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멋진 건물과 그 안을 가득 채운 거장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매년 1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2020년 경북 예천군이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의 미술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빌바오 사례를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이비통이 뽑은 ‘글로벌 대표 현대미술가 6인’이자 그림 하나가 수억원에 팔리는 ‘예천이 낳은 세계적 거장’의 미술관을 세워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도 끌어들인다는 목표였다. 박 화백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최근 박 화백이 제주도 특급호텔(JW메리어트 제주)에 2024년 박서보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하면서 예천군의 꿈은 사실상 무산됐다. 그동안 예천군과 박 화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건축법에 발목 잡힌 예천군문제의 시작은 건축법이었다. 박 화백은 2020년 예천군에 미술관 건립을 승낙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스위스 건축가 피터 줌터에게 미술관 설계를 맡길 것.’ 줌터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거장이다. 하지만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은 특정인을 콕 찍어 공공건축물 설계를 맡기는 걸 금지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건축물 설계를 발주할 경우 공모 방식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캔버스에 붙잡아둘 수 있을까. 어떤 화가들은 사진과 영상을 찍은 뒤 그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카메라를 통해 기록된 순간을 회화로 재차 남기는 ‘2차 기록물’일 뿐, 그 순간 자체를 캔버스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볼리비아계 미국 작가 도나 후앙카(43)는 ‘퍼포먼스 회화’라는 참신한 방식을 통해 찰나의 순간을 남긴다. 화려한 색깔의 페인트를 온몸에 칠한 퍼포먼스 연기자들이 흰 벽에 몸을 문질러서 흔적을 남기는가 하면,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연기자의 신체를 크게 확대해 걸어두기도 한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도나 후앙카 개인전은 그 결과를 모아놓은 전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곡면의 벽에 설치된 높이 6.4m, 길이 14.4m의 대형 회화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블리스 풀’(2023)이다. 흰색 파란색 분홍색 등 여러 색깔의 페인트가 뒤섞인 추상화 12점이 빈틈없이 붙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연기자들의 신체 일부분을 확대해서 찍은 것이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확대한 사진을 프린트한 뒤 그 위에 모래와 섞은 페인트를 손으로 칠했다. 퍼포먼스, 사진, 회화라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신체의 한순간을 캔버스에 남겼다. 전시장 한쪽에 걸린 옷더미와 비닐도 과거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이다. 후앙카는 “한국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든 옷을 태우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며 “이처럼 옷을 입었던 사람의 에너지와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과거를 남겨두기도 한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상큼하면서도
연세대와 명지대 사이, 서울 연희동은 ‘보석’ 같은 가게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 사이마다 각자의 분위기를 뽐내는 맛집과 카페들이 숨어 있다.지난해 12월 이곳에 자리 잡은 타이 레스토랑 ‘사색연희’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일반 음식점과는 뭔가 다르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은 클래식과 재즈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연장이 된다. 분기에 한 번씩은 미술관처럼 여러 작품을 도슨트가 설명해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그래서인지 사색연희에 ‘공연을 즐기러’, ‘작품을 감상하러’ 온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복합문화공간이야 요즘 흔해졌지만 사색연희처럼 수준 높은 음악과 미술 작품, 미식이 한데 모이는 공간은 드물다. 이쯤 되면 질문이 나온다. ‘대체 이런 공간은 누가 만든 거야?’ 음대 나온 화학회사 CEO사색연희를 만든 건 농작물보호제 제조기업 성보화학이다. 창업주인 호림 윤장섭의 손녀이자 윤재천 전 성보화학 대표의 딸인 윤정선 대표(47·사진)가 기획했다. 화학회사가 음악·미술을 즐길 수 있는 음식점을 만들다니. 언뜻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윤 대표의 이력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대학교 때 작곡을 전공했어요. 회사를 물려받으려면 경영을 전공했을 법도 한데,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말씀해주신 아버지 덕분에 음악을 시작했죠. 2007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회사에 들어오게 됐고, 이후에도 예술과 관련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은 멈출 수가 없었죠.”그렇게 품어온 꿈은 성보화학이 ‘스마트팜’ 사업을 시작하면서 현실이 됐다. 바질, 버터
일제로부터 독립한 1945년 8월, 한국에는 두 가지 과제가 생겼다. 하나는 정치·사회·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남아 있는 일본의 잔재를 없애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또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화단에 뿌리 깊은 ‘왜색’을 없애는 동시에 한국화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성을 기르는 게 당대 화가들의 과제였다.박생광(1904~1985)과 박래현(1920~1976)은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두 명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배웠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며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른다.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서양화의 인기에 가려져서다. 김환기 이우환 등 같은 시기에 서양화를 그린 거장들의 작품이 ‘억대’에 팔릴 때, 박생광과 박래현의 작품은 외면받은 이유다. ○한국미술 지평 넓힌 박래현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화 대가 박생광·박래현 2인전-위대한 만남, 그대로·우향’은 잊혀져 가는 한국화 대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다. 박생광 181점, 박래현 88점 등 총 269점의 작품이 출동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는 “박생광과 박래현 화백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한국화의 입지를 다진 주역들”이라며 “한국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전시장에 들어서면 박래현의 작품이 먼저 보인다. 오랜 기간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의 부인으로만 알려
가로세로 2m짜리 그림 아래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하얗고 둥근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다. 구슬 목걸이 따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비즈들이다. 바닥에 떨어진 비즈는 서너 줌은 족히 돼 보이는데 저마다 숫자가 새겨져 있다. 비즈는 누가 보더라도 작품의 일부분이다. 벽에 걸린 그림 속에 같은 재질의 비즈가 수없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이 비즈를 밟아 작품이 훼손되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다. 비즈를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작품을 만든 일본 현대미술가 미야지마 다쓰오(66)는 “성공했다”고 말했다. 뭐가 성공했다는 것일까.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 ‘무한숫자’를 열고 있는 미야지마는 최근 기자와 만나 “수많은 비즈를 통해 우주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나타내고 싶었다”며 “작품을 기획할 때부터 관람객들이 비즈를 만지고, 가져가도 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미야지마는 숫자를 통해 세상 만물을 표현하는 작가다. 그는 ‘시간’이라는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발광다이오드(LED) 판을 흐르는 숫자를 통해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런 작품으로 1999년 베네치아비엔날레를 빛내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리움미술관 입구 바닥에 있는 동그란 LED 숫자판도 그의 작품이다. 숫자로 치환된 시간을 통해 세상 만물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비즈를 바닥에 흩뿌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비즈 페인팅’ 연작은 작은 비즈를 캔버스에 무작위로 붙인 뒤, 빈 곳을 물감으로 채웠다. 눈에 띄는 것은 바닥에 뿌려진 비즈다. “처음에 캔버스
2016년 서울 마곡동. 1만㎡에 달하는 허허벌판에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땅의 이곳저곳을 한참 거닐었다. 땅을 둘러싼 초록의 나무와 울긋불긋한 꽃들을 살폈다. 그로부터 6년 뒤. 남자가 다녀간 이곳에 가로세로 100m 길이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섰다. 나무로 만들어진 실내는 한없이 따뜻한 느낌이었고, 통유리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빈 땅을 서성이던 그 남자는 일본 건축의 거장 안도 다다오(82)였다.지난해 10월 개관한 LG아트센터 서울은 문화시설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던 마곡 등 강서지역에 들어선 첫 번째 대형 공연장이다. LG연암문화재단이 ‘국내에서 가장 좋은 공연을 올리겠다’는 야심으로 2500억원을 들여 지었다. 좋은 공연을 올리려면 좋은 공간이 있어야 하는 법. 고(故) 구본무 LG 회장이 직접 나서서 안도를 아트센터의 설계자로 낙점한 이유다.안도는 일본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건축가다. 전문적 교육을 받은 ‘엘리트 건축가’는 아니지만 참신한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건축 거장의 작품이지만 LG아트센터의 겉모습은 평범하다 못해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두 개가 붙어 있는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기는 어렵기만 하다.건물의 진가는 안으로 들어가야 느낄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느낄 수 있다. 지상에서 LG아트센터를 진입할 때 터널처럼 생긴 ‘튜브’(사진)를 통과해야 한다. 참 이상하게 생긴 공간이다. 길이 80m의 타원형 모양 튜브를 걷다 보면 거대한 미로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층고(13.8m)와 폭(8.4m)의 공간감
폴란드 공상과학(SF)의 거장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소설 ‘솔라리스’(1961), 미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모비딕’(1851), 고대 그리스 영웅담을 다룬 서사시 ‘오디세이아’(기원전 약 700년).출간 시기도, 국가도 다른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바다와 치열한 사투를 벌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다룬 대작들이다.한국계 미국 작가 바이런 김(62·사진)은 이들 작품 속 등장인물의 시선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부산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마린 레이어’에서 ‘B.Q.O.’라는 제목의 회화 연작 11점을 선보였다. 세 편의 소설 속 인물들(버튼·퀴케그·오디세우스)의 이름에서 첫 번째 알파벳 글자를 딴 것이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기엔 하나의 큰 캔버스에 그린 그림 같지만 사실 세 개의 캔버스로 이뤄져 있다. 맨 위는 작가가 바다에서 바라본 하늘을, 가운데는 물의 표면을, 맨 밑은 물속에 잠수해서 본 모습이다.바이런 김은 원래 하늘을 그리던 작가다. 매주 일요일 그날의 하늘을 그린 뒤 자신의 감상을 몇 줄 적어 넣는 ‘선데이 페인팅’ 연작을 2001년부터 꾸준히 그려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인 동시에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들과 함께 연결된다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적인 경험을 통해 전체의 관계성을 얘기한다’는 평가를 받는다.그런 그가 바다와 가까워진 건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다. 2020년 초 미국에서 봉쇄조치가 내려지자 그는 고향인 샌디에이
2016년 서울 마곡동. 면적 1만㎡에 달하는 드넓은 벌판 위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건물도, 사람도 없는 '허허벌판'을 남자는 이곳저곳 다니며 한참을 살펴봤다. 그러면서 부지를 둘러싼 초록빛 자연, 그 속에 숨쉬고 있는 나무와 꽃을 눈에 담았다. 그로부터 6년 뒤, 남자가 다녀간 이곳엔 가로세로 100m 길이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섰다. 통유리 창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과 나무로 만들어진 따뜻한 느낌의 실내. 바로 일본 건축의 거장 안도 다다오(82)가 만든 LG아트센터 서울이다.지난해 10월 문을 연 LG아트센터 서울은 '문화 불모지'였던 마곡에 들어선 첫 대형 공연장이다. LG연암문화재단이 거금 2500억원을 들여 '국내에서 가장 좋은 공연들을 올리겠다'는 야심을 담아 만들었다. 개관한 지 반 년밖에 안 지난 '신생 공연장'이지만, 서울뿐 아니라 경기·인천 지역에서도 많은 관객이 찾을 만큼 인기가 좋다.좋은 공연을 올리려면 공간부터 좋아야 하는 법. 고(故) 구본무 전 LG 회장이 직접 나서서 안도를 설계자로 낙점한 이유다. 안도는 일본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건축가다. 젊은 시절부터 전문적인 건축 교육을 받은 '엘리트 건축가'는 아니지만, 참신한 작품을 선보이며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교회 벽면을 십자가 모양으로 뚫어 그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오게 한 오사카의 '빛의 교회', 잔잔하고 고요한 수면 위에 십자가를 띄운 홋카이도의 '물의 교회'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하지만 LG아트센터의 겉모습을 보면 세계적 거장이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단박에 들지는 않는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두 개가
동양화와 서양화는 언뜻 생각하면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듯 하다. 이영실 작가는 이 둘을 하나의 작품에 녹여냈다. 캔버스 위에 도자를 부조 형태로 구워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도예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작가의 개인전 '도자기, 꽃 그리고 자연'이 서울 종로2가 공간미끌에서 열린다. 21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 작가는 회화와 도예를 결합한 작품을 통해 동양화와 서양화를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과정은 이렇다. 우선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오방색의 꽃을 그린다. 이후 도자를 캔버스 위에 얹어 입체감을 살린다. 흰 도자 위에는 꽃, 물고기, 새 등 자연의 생물을 우화적으로 표현한다.작품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이 작가에게 이상향을 꿈꾸는 시간이다. "나는 도자기와 어린 시절 맡았던 꽃의 생생한 향기를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다. 그것은 자칫 잊혀질 수 있는 순수의 세계, 젊은 날 꿈꾸던 이상의 세계다. 나는 그 세계로 돌아가는 통로를 그림에서 찾았고, 항상 여행을 떠난다."전시는 이달 26일까지.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2차 세계대전 당시 총탄이 박힌 벽을 고스란히 보존하며 건설한 독일 신(新)베를린 박물관, 강가의 나무 보트하우스에서 영감을 받은 영국 리버앤드로잉 박물관, 새하얀 조선의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이들 건물엔 공통점이 있다. 영국 건축의 거장 데이비드 치퍼필드(70)가 설계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다른 건축가와 달리 치퍼필드는 그를 대표하는 고유의 스타일이 없다. 그는 각 도시의 역사, 문화, 환경에 딱 맞춘 건축물을 짓는다.영국 데본의 한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치퍼필드는 자연스럽게 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흙, 나무, 꽃 등 자연 속에서 자란 경험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치퍼필드의 신조에 영향을 미쳤다.‘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위원회가 최근 그를 수상자로 택한 이유도 그래서다. 심사위원회는 치퍼필드를 두고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건축가”라고 했다. 세계 각국에 있는 치퍼필드의 건축물을 보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없는데, 그만큼 그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건축물이 놓이는 맥락을 존중했다는 뜻이다.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폐암 3기란 걸 처음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어쩌자고 이런 형벌을 주나’란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제가 가진 재주 중 하나가 빨리 단념하는 겁니다. 암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하던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죠.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당장은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14일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앤 스파에서 만난 박서보 화백(92)이 건넨 얘기는 언뜻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구순이 넘은 나이인데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하지 않나,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면서도 ‘당장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니…. 한 시간 남짓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수수께끼가 풀렸다. 박서보는 구순에도 ‘영원한 청년’이고,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수두룩한데, 치료를 시작하면 당장 일을 못 하니, 치료를 미룬다는 얘기였다. ○자연에 스며드는 ‘박서보의 집’지난달 23일 SNS를 통해 폐암 3기란 걸 밝힌 박 화백이 공개석상에 나온 건 이날 JW메리어트 제주 부지에서 첫 삽을 뜬 ‘박서보미술관’(가칭)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이자 ‘국내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박 화백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기는 건 이게 처음이다.박서보의 예술인생은 수신(修身), 그 자체였다. 평생을 수도승처럼 매일같이 연필을 들고 선을 그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와 동료들이 갈고닦은 단색화는 2010년대 초부터 세계가 알아보기 시작했다.내년 여름에 완공될 박서보미술관은 이런 그의 예술인생이 담긴 공간으로 꾸며진다. 설계를 맡은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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