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3) 16세기 유럽 가격혁명‥상인들의 탐욕이 물가 4배 올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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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서 금·은 유입…불량화폐 유통으로 화폐가치 '뚝'
인구는 2배 늘어난 반면 농업생산 한계로 식량가격 폭등
인구는 2배 늘어난 반면 농업생산 한계로 식량가격 폭등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는 언제,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16세기를 그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어떻게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개인이 소유한 기업들이 시장 확보를 위해 경쟁을 하고 무제한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양상이다. 일찍이 독일의 막스 베버는 이러한 양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이 네덜란드 영국 등 칼뱅주의가 널리 퍼졌던 지역임에 착안해 예정설,소명,금욕과 같은 칼뱅주의 교리가 만들어낸 독특한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물론적 역사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16세기 가격 혁명이 가져온 경제 · 사회적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격 혁명은 16세기 유럽의 물가가 4배 가까이 오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1.4% 정도이니 1970년대 내내 매년 두 자릿수의 물가 인상이 이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은 그 정도 가지고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가당하기나 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에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은 거의 없었다. 13세기에 물가가 오른 적이 있고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1760~1815년)에도 물가가 오르기는 했으나 16세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그러므로 미증유의 경제현상을 목격한 동시대인들의 당혹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프랑스의 장 보댕은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금,은 때문에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즉 화폐량이 늘어나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의 토머스 스미스는 처음에는 영국 정부에 의한 불량화폐 발행(debasement)을 주범으로 생각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영국 튜더조의 국왕들이 정부의 재정적자를 손쉽게 메워 보려고 화폐의 액면은 그대로 둔 채 금,은의 양을 줄이는 편법을 동원했는데 이 때문에 통화량이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토머스 그레셤의 유명한 말도 이때 나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의 편법 발행을 중지했으나 물가는 계속 올랐다. 스미스가 생각을 바꿔 보댕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은 상인들의 탐욕 때문에 물가가 올라간다고 생각했고 각국 정부도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규제하기에 바빴다.
현대의 학자들이 16세기 가격 혁명의 원인을 보는 시각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보댕이나 스미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은 또는 불량화폐 발행 때문이라고 보는 총통화 이론이다. 어빙 피셔의 교환방정식(MV=PT)을 준용해 화폐의 유통속도(V)와 재화의 거래량(T)이 일정하다면 결국은 통화량(M)이 가격 수준(P)을 결정한다는 설명이다.
스페인이 멕시코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 본격적으로 귀금속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였다. 특히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 개발 이후 스페인의 세비야에 입항하는 은의 규모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1560년대 후반 이미 83t에 달했던 연간 은 수입량은 1590년대 전반기에는 무려 274t에 이르렀다. 총통화론의 가장 큰 약점은 아메리카 은의 유입이 본격화하기 훨씬 전인 1520년대부터 물가가 오르기 시작한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은 인구론적 해석이다. 16세기 유럽의 인구는 2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 데서 가격 혁명이 일어났다는 생각이다. 재화에는 그 특성상 공급이 수요에 비탄력적인 것이 있는데,대표적인 것이 식량이다. 늘어난 수요를 맞추려면 경작지를 늘리거나 생산성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론적 해석은 16세기 식량 가격이 산업재에 비해 최소한 2배 이상 많이 올랐다는 사실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비약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는 반론에 대해 취약한 면이 있다.
우리는 결국 이 두 가지 해석을 모두 수용하는 복합적인 설명을 취해야 할 것이지만 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격 혁명의 원인보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이는 다음 주에 짚어보기로 한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16세기를 그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어떻게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개인이 소유한 기업들이 시장 확보를 위해 경쟁을 하고 무제한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양상이다. 일찍이 독일의 막스 베버는 이러한 양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이 네덜란드 영국 등 칼뱅주의가 널리 퍼졌던 지역임에 착안해 예정설,소명,금욕과 같은 칼뱅주의 교리가 만들어낸 독특한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물론적 역사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16세기 가격 혁명이 가져온 경제 · 사회적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격 혁명은 16세기 유럽의 물가가 4배 가까이 오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1.4% 정도이니 1970년대 내내 매년 두 자릿수의 물가 인상이 이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은 그 정도 가지고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가당하기나 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에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은 거의 없었다. 13세기에 물가가 오른 적이 있고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1760~1815년)에도 물가가 오르기는 했으나 16세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그러므로 미증유의 경제현상을 목격한 동시대인들의 당혹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프랑스의 장 보댕은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금,은 때문에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즉 화폐량이 늘어나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의 토머스 스미스는 처음에는 영국 정부에 의한 불량화폐 발행(debasement)을 주범으로 생각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영국 튜더조의 국왕들이 정부의 재정적자를 손쉽게 메워 보려고 화폐의 액면은 그대로 둔 채 금,은의 양을 줄이는 편법을 동원했는데 이 때문에 통화량이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토머스 그레셤의 유명한 말도 이때 나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의 편법 발행을 중지했으나 물가는 계속 올랐다. 스미스가 생각을 바꿔 보댕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은 상인들의 탐욕 때문에 물가가 올라간다고 생각했고 각국 정부도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규제하기에 바빴다.
현대의 학자들이 16세기 가격 혁명의 원인을 보는 시각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보댕이나 스미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은 또는 불량화폐 발행 때문이라고 보는 총통화 이론이다. 어빙 피셔의 교환방정식(MV=PT)을 준용해 화폐의 유통속도(V)와 재화의 거래량(T)이 일정하다면 결국은 통화량(M)이 가격 수준(P)을 결정한다는 설명이다.
스페인이 멕시코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 본격적으로 귀금속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였다. 특히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 개발 이후 스페인의 세비야에 입항하는 은의 규모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1560년대 후반 이미 83t에 달했던 연간 은 수입량은 1590년대 전반기에는 무려 274t에 이르렀다. 총통화론의 가장 큰 약점은 아메리카 은의 유입이 본격화하기 훨씬 전인 1520년대부터 물가가 오르기 시작한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은 인구론적 해석이다. 16세기 유럽의 인구는 2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 데서 가격 혁명이 일어났다는 생각이다. 재화에는 그 특성상 공급이 수요에 비탄력적인 것이 있는데,대표적인 것이 식량이다. 늘어난 수요를 맞추려면 경작지를 늘리거나 생산성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론적 해석은 16세기 식량 가격이 산업재에 비해 최소한 2배 이상 많이 올랐다는 사실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비약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는 반론에 대해 취약한 면이 있다.
우리는 결국 이 두 가지 해석을 모두 수용하는 복합적인 설명을 취해야 할 것이지만 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격 혁명의 원인보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이는 다음 주에 짚어보기로 한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