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9)당태종 이세민‥열린 마음으로 당제국 반석에 올린 '소통 리더십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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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군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 눈과 귀가 막히기 쉽다. 간신들이 판을 치고 올곧은 신하가 내쳐지는 이유는 의외로 자명하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칭찬보다 칭송과 아첨을 일삼는 것이 궁정의 속성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물론 창업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으니,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수나라 양제(煬帝)를 타도하고자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설득해 병사를 일으킨다.
그는 먼저 설거와 설인고 부자,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다시 강적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을 제거해 스무살 때인 617년에 장안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듬해 당나라가 탄생했고,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아 형제간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했다. 건성은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지만 세민이 선수를 쳐 건성과 입조하는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는 곧바로 626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반란 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겪어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예악(禮樂)과 인의(仁義)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면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00여칸이나 증설하고,국자(國子) 태학(太學) 사문(四門) 광문(廣文)에서도 학생을 증원했다.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고 도교를 국교로 정해 폭넓은 민심의 향방도 살폈다. 인재경영에 몰입해 자신에게 300번 이상이나 간언한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고,8대 명신이라 불리는 소신파 신하들을 곁에 두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다음과 같이 자기검증을 했다. '덕행을 쌓은 군주는 귀를 거스르는 말을 듣고,얼굴을 살피지 않고 하는 간언을 좋아한다.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 하려면 의견을 제시하는 인사를 후하게 대우하고,참언하기 좋아하는 자를 질책하며,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관정요》)
그가 제위에 오른 해부터 649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는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은 군주보다 백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제왕이었다. 그가 '창업이 쉬운가,수성이 어려운가(創業易 守成難)'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당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라고 칭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반대파를 포용한 태종은 군신관계란 신뢰로 맺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통치 말년에 태종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게 된다. 지나친 영토확장 정책과 고구려 침략 실패,후계자 선정의 난항 등을 한으로 남긴 채 그가 죽자 동요된 정권은 후궁이자 훗날 고종(高宗)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잠시 동안 거의 소멸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초심을 유지하고 민심의 향방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곧은 나무는 그림자가 굽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정관정요)고 하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는 자도 군주요,내치는 자도 군주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제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
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물론 창업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으니,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수나라 양제(煬帝)를 타도하고자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설득해 병사를 일으킨다.
그는 먼저 설거와 설인고 부자,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다시 강적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을 제거해 스무살 때인 617년에 장안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듬해 당나라가 탄생했고,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아 형제간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했다. 건성은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지만 세민이 선수를 쳐 건성과 입조하는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는 곧바로 626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반란 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겪어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예악(禮樂)과 인의(仁義)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면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00여칸이나 증설하고,국자(國子) 태학(太學) 사문(四門) 광문(廣文)에서도 학생을 증원했다.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고 도교를 국교로 정해 폭넓은 민심의 향방도 살폈다. 인재경영에 몰입해 자신에게 300번 이상이나 간언한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고,8대 명신이라 불리는 소신파 신하들을 곁에 두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다음과 같이 자기검증을 했다. '덕행을 쌓은 군주는 귀를 거스르는 말을 듣고,얼굴을 살피지 않고 하는 간언을 좋아한다.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 하려면 의견을 제시하는 인사를 후하게 대우하고,참언하기 좋아하는 자를 질책하며,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관정요》)
그가 제위에 오른 해부터 649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는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은 군주보다 백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제왕이었다. 그가 '창업이 쉬운가,수성이 어려운가(創業易 守成難)'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당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라고 칭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반대파를 포용한 태종은 군신관계란 신뢰로 맺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통치 말년에 태종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게 된다. 지나친 영토확장 정책과 고구려 침략 실패,후계자 선정의 난항 등을 한으로 남긴 채 그가 죽자 동요된 정권은 후궁이자 훗날 고종(高宗)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잠시 동안 거의 소멸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초심을 유지하고 민심의 향방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곧은 나무는 그림자가 굽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정관정요)고 하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는 자도 군주요,내치는 자도 군주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제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