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산업혁명 일으킨 인도産 면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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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고급 천 '캘리코'
인도, 고대부터 면직물 수출
18세기 캘리코로 유럽시장 점령
산업혁명 이후 원면 공급처로 전락
인도, 고대부터 면직물 수출
18세기 캘리코로 유럽시장 점령
산업혁명 이후 원면 공급처로 전락
인류 역사를 수놓은 3대 직물 재료로는 중국의 비단,유라시아 유목 민족들의 양모,세계 각지에서 재배한 면을 든다. 이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아마와 대마,사이잘삼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의복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면직물이다.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면직물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입은 의류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화를 재배해 그 꽃에서 얻은 섬유로 직물을 짜는 일은 세계 각지에서 시행됐다.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뿐 아니라 아프리카,콜럼버스가 도래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문명권에서도 면직물을 직조했다. 고려 말에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종자 몇 개를 붓대 속에 몰래 넣어가지고 돌아온 이후 목화가 널리 전파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최근에는 그보다 800년 전인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이 수입 직물인지 우리나라에서 직접 짠 직물인지 밝히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가장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면직물을 짠 곳은 인도였다. 인도의 면직물은 고대로부터 주변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멀리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쪽까지 수출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인도 면직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모슬린과 같은 고급 직물도 일부 수입됐다. 로마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이 직물을 벤투스 텍스틸리스(ventus textilis),즉 '바람으로 짠 직물'이라 불렀다.
유럽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경제가 후퇴하고 아시아와의 교역이 위축되면서 오랫동안 면직물을 잊고 살았다. 유럽의 풍토는 목화 재배에 맞지 않아 원료를 자체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원면을 수입해 직조하거나 완제품을 들여와야 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 접촉하면서 다시 원면이 들어오긴 했지만,면과 리넨을 섞어 짠 퍼스티안(fustian) 직물을 만드는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 유럽은 오랫동안 순면 제품을 모르고 살았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항해해 들어가서 인도의 면직물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인도에서는 가볍고 시원한 면직물이 크게 발달했다. 최고급 모슬린 천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만큼 섬세한 품질을 자랑했다.
무굴제국에서 모슬린은 '시트라비랄리'(왕의 모슬린)라 알려졌지만 '샤브남'(아침이슬) 혹은 '아브라완'(찰랑이는 물결) 같은 시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는 직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다는 의미다. 인도 불상에 표현된 거미줄처럼 가벼운 의상이 그런 천이었다. 후일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 직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1783)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남겼다.
어떤 도시들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직물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데,인도 남부의 캘리컷(Calicut · 인도식 지명은 Kozhikode)에서 유래한 캘리코(Calico)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직물들은 인도양 세계에서 중요한 상품으로 아시아 상인들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유럽 상인들이 아시아에 진출했을 때 그들 역시 현지의 면직물 거래에 뛰어들어 수익을 올렸다.
사실 유럽 상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중세 이래 늘 최고의 품목으로 쳤던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거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차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참혹한 무력 경쟁에서 네덜란드 측에 밀린 영국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주력하게 된 것이 인도 면직물 거래였다. 그나마 현지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져 아시아 시장 확보가 힘들었던 영국 상인들은 모험 삼아 캘리코를 유럽 시장에 판매했다.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쟁에서 밀려 할 수 없이 취했던 조치가 영국 동인도회사의 승리를 낳은 이 현상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추는 갈수록 가격이 떨어져 수익성이 희박해진 반면 캘리코는 조만간 '광풍'을 일으켰다.
17세기 중엽 유럽에 처음 캘리코가 선보였을 때는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문양은 너무 천박해 보여서 하녀들도 입기 꺼려해 주로 거실 마룻바닥에 깔거나 벽을 가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렇지만 곧 캘리코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물세탁이 가능해 편하기 그지없는 데다 그 알록달록한 프린트 무늬가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에 누워있던 천은 곧 귀족과 부르주아의 바지로 돌변했다. 너도 나도 캘리코를 찾았고 수입량이 수십 배로 늘었다. 18세기가 되자 기존 모직과 마직 공업은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렸다. 실업 위기에 몰린 직공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캘리코를 입은 여성들을 공격했다. 파리의 한 상인은 창녀에게 캘리코 직물을 입힌 다음 거리에서 옷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자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영국 의회에서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캘리코 수입 제한 혹은 사용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들을 여러 차례 가결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제 문제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산업계 내에서 나왔다. 영국 경제에 지나치게 큰 압박을 가하는 인도 직물을 어떻게 해서든 자체 생산해야 했던 것이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고급 기술을 보유한 인도 방식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는 일이니,결국 답은 기계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원면을 수입해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과정을 기계화한 데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아무리 인도의 노동력이 저렴하면서도 기술 수준이 높다한들 기계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19세기에 인도는 고작 원면만 수출하고 오히려 맨체스터의 싼 면직물을 수입해야 하는 참담한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목화를 재배해 그 꽃에서 얻은 섬유로 직물을 짜는 일은 세계 각지에서 시행됐다.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뿐 아니라 아프리카,콜럼버스가 도래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문명권에서도 면직물을 직조했다. 고려 말에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종자 몇 개를 붓대 속에 몰래 넣어가지고 돌아온 이후 목화가 널리 전파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최근에는 그보다 800년 전인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이 수입 직물인지 우리나라에서 직접 짠 직물인지 밝히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가장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면직물을 짠 곳은 인도였다. 인도의 면직물은 고대로부터 주변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멀리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쪽까지 수출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인도 면직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모슬린과 같은 고급 직물도 일부 수입됐다. 로마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이 직물을 벤투스 텍스틸리스(ventus textilis),즉 '바람으로 짠 직물'이라 불렀다.
유럽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경제가 후퇴하고 아시아와의 교역이 위축되면서 오랫동안 면직물을 잊고 살았다. 유럽의 풍토는 목화 재배에 맞지 않아 원료를 자체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원면을 수입해 직조하거나 완제품을 들여와야 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 접촉하면서 다시 원면이 들어오긴 했지만,면과 리넨을 섞어 짠 퍼스티안(fustian) 직물을 만드는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 유럽은 오랫동안 순면 제품을 모르고 살았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항해해 들어가서 인도의 면직물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인도에서는 가볍고 시원한 면직물이 크게 발달했다. 최고급 모슬린 천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만큼 섬세한 품질을 자랑했다.
무굴제국에서 모슬린은 '시트라비랄리'(왕의 모슬린)라 알려졌지만 '샤브남'(아침이슬) 혹은 '아브라완'(찰랑이는 물결) 같은 시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는 직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다는 의미다. 인도 불상에 표현된 거미줄처럼 가벼운 의상이 그런 천이었다. 후일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 직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1783)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남겼다.
어떤 도시들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직물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데,인도 남부의 캘리컷(Calicut · 인도식 지명은 Kozhikode)에서 유래한 캘리코(Calico)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직물들은 인도양 세계에서 중요한 상품으로 아시아 상인들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유럽 상인들이 아시아에 진출했을 때 그들 역시 현지의 면직물 거래에 뛰어들어 수익을 올렸다.
사실 유럽 상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중세 이래 늘 최고의 품목으로 쳤던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거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차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참혹한 무력 경쟁에서 네덜란드 측에 밀린 영국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주력하게 된 것이 인도 면직물 거래였다. 그나마 현지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져 아시아 시장 확보가 힘들었던 영국 상인들은 모험 삼아 캘리코를 유럽 시장에 판매했다.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쟁에서 밀려 할 수 없이 취했던 조치가 영국 동인도회사의 승리를 낳은 이 현상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추는 갈수록 가격이 떨어져 수익성이 희박해진 반면 캘리코는 조만간 '광풍'을 일으켰다.
17세기 중엽 유럽에 처음 캘리코가 선보였을 때는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문양은 너무 천박해 보여서 하녀들도 입기 꺼려해 주로 거실 마룻바닥에 깔거나 벽을 가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렇지만 곧 캘리코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물세탁이 가능해 편하기 그지없는 데다 그 알록달록한 프린트 무늬가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에 누워있던 천은 곧 귀족과 부르주아의 바지로 돌변했다. 너도 나도 캘리코를 찾았고 수입량이 수십 배로 늘었다. 18세기가 되자 기존 모직과 마직 공업은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렸다. 실업 위기에 몰린 직공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캘리코를 입은 여성들을 공격했다. 파리의 한 상인은 창녀에게 캘리코 직물을 입힌 다음 거리에서 옷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자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영국 의회에서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캘리코 수입 제한 혹은 사용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들을 여러 차례 가결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제 문제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산업계 내에서 나왔다. 영국 경제에 지나치게 큰 압박을 가하는 인도 직물을 어떻게 해서든 자체 생산해야 했던 것이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고급 기술을 보유한 인도 방식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는 일이니,결국 답은 기계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원면을 수입해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과정을 기계화한 데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아무리 인도의 노동력이 저렴하면서도 기술 수준이 높다한들 기계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19세기에 인도는 고작 원면만 수출하고 오히려 맨체스터의 싼 면직물을 수입해야 하는 참담한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