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법원 어디?…헌재-대법원 갈등 '재점화'
사법주도권을 놓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직접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헌법상 최고 법원이 어디냐’를 놓고 종종 대립해온 두 기관이 급기야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 결정을 내놓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들로서는 자칫 정당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받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7일 “법원의 법해석이 잘못됐다”며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법원의 앞선 판결을 뒤집은 ‘한정위헌’ 결정을 내놓았다. 법해석은 법원의 몫이고, 헌재는 법률이 헌법에 위반됐는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역할이 나뉘어져 있는데 마치 헌재가 대법원 위의 상급심 같은 4심 역할을 한 것이다.

○“공평에 반해” vs “조세법률주의 위배”

사건은 GS칼텍스가 1990년 10월 주식을 상장한다며 조세감면규제법에 따른 자산재평가를 실시한 뒤 2003년 상장이 어렵게 되자 재평가를 취소하면서 부과된 세금 문제에서 비롯됐다. 당시 국세청은 상장을 전제로 깎아준 법인세 707억원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GS칼텍스는 “과세 근거가 된 부칙을 포함해 관련 법률이 전부 개정됐기 때문에 세금을 낼 수 없다”며 불복소송을 제기했다. 2심과 달리 대법원은 2008년 12월 국세청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 주심이 ‘독수리5형제’로 불린 진보성향의 전수안 대법관이었던 점도 흥미롭다.

재판부는 “상장기한 내에 상장한 법인에 비해 우대하는 결과가 된다”며 공평에 반하는 이익을 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법률이 전면 개정돼도 관련 부칙은 실효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했지만 이 재판에 대해 헌재는 조세법률주의에 위배된다고 봤다.

○4심제 도입되나

GS칼텍스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따라 최종 과세 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에 조만간 재심을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고등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이면 이 모든 갈등이 일거에 해소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 고등법원이 재심을 기각하면 대법원으로 올라가는데 대법원 역시 스스로의 판결을 뒤집을 이유가 없다.

대법원 관계자는 “한정위헌은 법률조항이 아니라 법률의 해석이나 관련 조처를 위헌으로 선언하는 것이어서 법원이 반드시 따를 필요(구속력)는 없다”며 내부기류를 전했다. 이렇게 되면 GS칼텍스는 대법원 판결을 헌재로 다시 가져올 수 있는데, 이는 헌법재판소법(68조)이 금지한 ‘재판 소원’(판결내용에 대한 헌법소원)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한 헌법재판소법을 헌재가 위헌결정할 경우 한국도 4심제를 도입하는 결과가 된다. 법원 관계자는 “독일처럼 4심제가 인정되면 어떤 혼란이 올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대법원과 헌재가 판결로 마찰을 빚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에도 양도소득세 과세 기준을 놓고 헌재가 대법원 판결을 취소한 적이 있는데 과세관청이 세금을 환급해 주면서 사건이 유야무야됐다.

○이강국 헌재 소장이 ‘키맨’

법조계에서는 “문제 해결의 키는 이강국 헌재 소장이 쥐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독일 유학파인 이 소장은 독일 헌재 연구로 박사학위를 땄다. 이 소장은 대법원장의 헌법재판관 3명 지명권에 대해서도 “폐지돼야 한다”며 각을 세워왔다. 따라서 이번에 헌재와 대법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기회에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헌재 쪽의 분석이다. 다만 이 소장이 내년 1월 퇴임을 앞두고 있는 점은 또 다른 변수다. 법원 관계자는 “헌재의 기류가 심상치않아 조심조심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양측 간 원만한 해결책 모색을 주문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