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유령 길'로 5년 방치된 창경궁 '왕의 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전시행정에 수억 낭비
집춘문~서울문묘 재조성…종로구-문화재청 다툼 탓
집춘문~서울문묘 재조성…종로구-문화재청 다툼 탓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9일 오후 3시, 창경궁 담장과 맞닿아있는 서울 와룡동의 한 주택가. 2,3층짜리 다세대주택과 단독주택 사이 골목길에 네모반듯한 화강암이 깔려있다. 길이 끝나는 곳부터는 성인 한 명이 걸어갈 정도의 나무계단이 설치돼 창경궁 집춘문까지 이어져있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듯 계단 한켠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욕조와 형광등 같은 생활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집춘문으로 통하는 계단 끝에 서있는 두툼한 나무문에는 벌겋게 녹슨 걸고리에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다.
창경궁 집춘문 개방을 둘러싼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의 다툼 탓에 수억원의 예산을 들여 단장한 종로구 ‘거둥길’이 5년간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령 길’로 방치된 사실이 드러나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나온다.
종로구는 2008년, 시비 1억7200만원을 들여 ‘창경궁 집춘문~서울문묘 재조성 사업’을 벌였다. 창경궁 집춘문부터 성균관 문묘까지 이어지는 거둥길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세자가 성균관으로 행차할 때 이용하던 길이다. 종로구는 거둥길을 새로운 관광코스로 개발하겠다며 2008년 6월부터 5개월 동안 집춘문을 가로막던 주택의 담장을 헐어낸 뒤 언덕길에 나무계단을 세우고, 화강암으로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를 벌였다. 하지만 집춘문은 2008년 12월 5일 있었던 거둥길 준공식을 끝으로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집춘문 근처 주택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용호 씨(62)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길을 만드느라 세금 몇 억을 들인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집춘문을 관리하는 문화재청 창경궁 관리사무소는 2008년 4월 종로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내줄 당시 집춘문 밖 국유지에 대한 공사만 허가했을 뿐 집춘문 개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비공개 구역 안에 위치한 집춘문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매표소를 설치하고, 산불을 예방할 수 있는 감시시스템을 갖추는 등 창경궁 관리사무소 측의 준비가 필수적이다. 창경궁 관리사무소는 종로구청이 이에 대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길만 먼저 내는 바람에 2009년 2월 집춘문을 개방할 수 없다고 공문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조송래 창경궁 관리사무소장은 “집춘문은 주택가 가운데 있어 관람객들이 다니기에 부적합하다”며 “문을 개방하려면 매표소를 운영하고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5,6명의 인력을 추가로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종로구청은 거둥길 조성 공사에 대한 허가를 내줄 때부터 집춘문 개방은 당연히 전제되어 있었다며 문화재청이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성우 종로구청 문화재관리팀장은 “사업을 계획할 때부터 문화재청에 수차례 공문을 보내 의견을 주고 받았다”며 “집춘문을 개방할 생각 없이 궁궐 문 밖 공사만 허가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거둥길이 보여주기 행정에 급급한 지자체의 문화유산 조성 사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거둥길 조성사업은 사업을 추진할 때부터 접근성 문제 등으로 무리리는 의견이 많았다”며 “지방선거를 몇 개월 앞둔 전임 구청장이 성급하게 공사를 추진하고 문화재청이 면밀한 검토 없이 이를 허가해줌으로써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창경궁 집춘문 개방을 둘러싼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의 다툼 탓에 수억원의 예산을 들여 단장한 종로구 ‘거둥길’이 5년간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령 길’로 방치된 사실이 드러나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나온다.
종로구는 2008년, 시비 1억7200만원을 들여 ‘창경궁 집춘문~서울문묘 재조성 사업’을 벌였다. 창경궁 집춘문부터 성균관 문묘까지 이어지는 거둥길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세자가 성균관으로 행차할 때 이용하던 길이다. 종로구는 거둥길을 새로운 관광코스로 개발하겠다며 2008년 6월부터 5개월 동안 집춘문을 가로막던 주택의 담장을 헐어낸 뒤 언덕길에 나무계단을 세우고, 화강암으로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를 벌였다. 하지만 집춘문은 2008년 12월 5일 있었던 거둥길 준공식을 끝으로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집춘문 근처 주택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용호 씨(62)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길을 만드느라 세금 몇 억을 들인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집춘문을 관리하는 문화재청 창경궁 관리사무소는 2008년 4월 종로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내줄 당시 집춘문 밖 국유지에 대한 공사만 허가했을 뿐 집춘문 개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비공개 구역 안에 위치한 집춘문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매표소를 설치하고, 산불을 예방할 수 있는 감시시스템을 갖추는 등 창경궁 관리사무소 측의 준비가 필수적이다. 창경궁 관리사무소는 종로구청이 이에 대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길만 먼저 내는 바람에 2009년 2월 집춘문을 개방할 수 없다고 공문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조송래 창경궁 관리사무소장은 “집춘문은 주택가 가운데 있어 관람객들이 다니기에 부적합하다”며 “문을 개방하려면 매표소를 운영하고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5,6명의 인력을 추가로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종로구청은 거둥길 조성 공사에 대한 허가를 내줄 때부터 집춘문 개방은 당연히 전제되어 있었다며 문화재청이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성우 종로구청 문화재관리팀장은 “사업을 계획할 때부터 문화재청에 수차례 공문을 보내 의견을 주고 받았다”며 “집춘문을 개방할 생각 없이 궁궐 문 밖 공사만 허가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거둥길이 보여주기 행정에 급급한 지자체의 문화유산 조성 사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거둥길 조성사업은 사업을 추진할 때부터 접근성 문제 등으로 무리리는 의견이 많았다”며 “지방선거를 몇 개월 앞둔 전임 구청장이 성급하게 공사를 추진하고 문화재청이 면밀한 검토 없이 이를 허가해줌으로써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