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署 악성사기전담팀 김미선 경사
강남署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제가 아저씨 딸 같은 사람이에요. 아저씨 뭐 힘든 일 있으세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김 경장과 선배 형사 2명의 계속된 설득에 이 남성은 인질을 먼저 제과점 밖으로 내보낸 뒤 자수했다.
‘여성 경찰은 내근’이라던 경찰 내부의 관행이 점점 옛말이 돼가고 있다. 마약수사반, 감식반은 물론이고 악성사기전담팀, 형사팀, 강력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 부서에서 여경들이 뛰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업무 영역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데다 각종 현장을 담당하는 부서에 여성 경찰관 배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경찰 내부의 여경 임용자 및 승진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여경들이 경찰서 건물보다는 각종 범죄 현장에서 맹활약하게 된 배경이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 449명(전체 임용자의 16.3%)에 불과했던 여성 경찰 임용자는 지난해 1231명(20.2%)까지 늘어났다. 경위 이상의 여경 승진자도 2010년 68명(전체 경위 이상 승진자의 5.4%)에서 올해 354명(6.7%)으로 증가했다.
서울 시내의 한 경찰서 형사과장은 “예전에는 형사과 등 현장근무 부서에선 여경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지금은 웬만한 경찰서 형사과엔 여경이 두세 명씩 포함돼 있다”며 “여경 숫자 자체가 늘어난 것도 이유지만 현장근무를 원하는 여경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녀 구분 없이 근무…‘형님’ 호칭도
강호남 강북경찰서 형사4팀장(51)은 1986년 임용된 이후 30년 가까이 근무한 ‘베테랑’이다. 하지만 ‘외근의 꽃’이라 불리는 형사과에서 근무한 것은 2008년부터였다. 강 팀장은 “처음 경찰에 임용됐던 1980년대엔 여성은 무조건 내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현장근무를 할 수 없었다”며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간 뒤 경찰서장에게 간곡히 요청한 끝에 형사팀장 자리에 배치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막연하게 현장 부서를 지망하는 여경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 해당 부서에 배치되기 위해서는 강인한 의지와 체력 등을 갖춰야 한다. 원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압구정 인질극’ 사건 현장에 나갔던 김은지 경장은 ‘강력형사’가 되기 위해 고향인 경남의 남해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서울로 발령 신청을 했다. 부모의 반대도 ‘현장의 경찰’이 되겠다는 김 경장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는 설명이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배치되는 현장근무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도 크다. 수십년간 남성 중심이었던 현장 부서에서 적응하려면 기존의 남성 경찰 못지않은, 때론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과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영등포경찰서 악성사기전담팀의 김미선 경사(37) 역시 그런 생각으로 현장에서 ‘맏누나’ 역할을 하고 있다. 팀장을 제외한 나머지 4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팀 내에선 가장 고참이다. 지난달 3월 중고거래사기로 수천만원을 챙긴 사기범을 잡아 구속하기까지 보름여를 일에만 매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체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법원으로 달려가 영장을 챙겨오기도 했다. 김 경사는 “언제나 범인보다 한발 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호남 팀장은 ‘남자 선배 같은 여자 선배’를 근무 신조로 삼고 있다. 같이 밥을 먹고 편하게 대화하는 등 가능한 한 모든 생활에서 팀원들과 함께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그것이 가장 빨리 남성 팀원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김은지 경장은 다른 남성 팀원들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남동생 취급’을 자처한다. 팀의 막내지만 ‘힘들다’는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다. 김 경장은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여자 강력형사 ‘어수선’을 보며 ‘저렇게 어리바리해서는 강력형사를 할 수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현장에선 장점
여성 경찰관들은 현장에서 근무하는 여경의 장점으로 ‘용의자나 피해자의 마음을 여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꼽았다.
강호남 팀장은 “여성 특유의 공감능력으로 남자 경찰보다 용의자·피해자와 수월하게 소통하고 타이르는 편”이라며 “특히 여성 피해자와 피의자는 극도로 예민해 여성 경찰이 상담하고 심문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다”고 전했다.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는 사람에겐 물을 한 잔 건네며 진정시키고, 가정폭력 피해를 입고 경찰서를 찾은 여성을 안심시키는 노하우가 생겨 별로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은지 경장 역시 “용의자나 피해자를 설득할 때 여경이 나서면 더 좋은 성과가 날 때가 있다”며 “다른 경찰들의 목소리엔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용의자나 피해자의 집 문이 내가 말하면 열리곤 할 때 ‘아 이런 장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현장근무, 특히 범인을 검거할 때는 팀 내 남성 경찰과의 협업이 ‘생명’이다. 여경들은 때론 용의자를 유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고의로 용의자 차와 추돌 사고를 낸 뒤 용의자를 차량 밖으로 유인하거나 도시가스 점검원인 척하면서 용의자 집에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김미선 경사는 “남자 경찰이 나서면 용의자가 금방 눈치채고 도주하는데, 여자 경찰이면 용의자들이 상대적으로 긴장을 늦춘다”고 했다.
◆결혼·출산·육아는 여전한 걸림돌
더욱 많은 여성 경찰이 현장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경찰 내부에선 ‘남자만큼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의 시선이 여전한 게 사실이다.
기업에 다니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여경들의 최대 고민도 결혼·출산·육아와 관련된 문제다. ‘아이를 낳고 오면 육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현장근무를 하는 데 지장을 준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자의 반 타의 반 결혼을 미루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김미선 경사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현장에서 뛰고 싶은 욕심이 강해 계속 결혼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지 경장 역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고, 아직은 결혼 계획이 없다”고 비슷한 생각을 내비쳤다.
여기에 체력적인 부담과 남성 중심 부서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여경들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최근 형사과 등 현장 부서에 배치되는 사례가 나오긴 했지만 그 수가 기대만큼 크게 늘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호남 팀장은 “1980년대 경찰 근무를 시작할 때는 한 경찰서에 여경이 4~5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 수가 10배 정도 늘었다”면서도 “더 다양한 영역에서 여경이 활약하려면 지금보다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형사과에 오고 싶다”며 상담해오는 여경 후배들이 많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배치되지 못하는 상황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