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송명순 예비역 준장 "주위 만류에도 선택한 여군, 후배들에게 꿈 심어줘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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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돌 맞은 여군…전투병과 첫 여장성
송명순 예비역 준장
기절하고 토하던 '못난이 신참'
"군인 되겠다" 폭탄선언에 어머니 혼절…주위에선 "네가 가장 먼저 전역할 것"
결국 별까지 달고 가장 늦게 군 떠나
길 만드는게 먼저 가는 사람의 역할
2년후 예편 조건 진급 조금 섭섭했지만 후배들 희망 키워준 것에 만족
실천 가능한 목표 갖고 한발씩 나아가길
송명순 예비역 준장
기절하고 토하던 '못난이 신참'
"군인 되겠다" 폭탄선언에 어머니 혼절…주위에선 "네가 가장 먼저 전역할 것"
결국 별까지 달고 가장 늦게 군 떠나
길 만드는게 먼저 가는 사람의 역할
2년후 예편 조건 진급 조금 섭섭했지만 후배들 희망 키워준 것에 만족
실천 가능한 목표 갖고 한발씩 나아가길
“여기 있다고 한참 손을 흔들었는데 못 알아보더라고요.”
여군 창설 65주년(9월6일 ‘여군의 날’)을 사흘 앞둔 지난 3일 서울 대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명순 예비역 준장(대구가톨릭대 교수·57·사진)이 건넨 첫 마디였다. 따뜻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목걸이를 한 그에게선 ‘2010년 전투병과 사상 첫 여성 장성’이란 타이틀이 주리라 상상했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송 교수는 “동네에서 내가 군인이었단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군을 떠난 지 벌써 3년 됐으니 이젠 그냥 동네 아줌마”라고 웃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며 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하자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해도 30년 넘게 군인이란 외길을 걸은 사람의 예리하고 강건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역시 ‘한 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었다.
‘못난이’였던 초임 시절
송 교수가 처음부터 군인을 꿈꿨던 건 아니었다. 그는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76학번이다. “군인이 안 됐다면 외무고시를 쳐서 외교관이 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아주 개방적인 분들이었어요. 위로 오빠가 둘 있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는데도 나까지 대학 등록금을 다 대 주셨지요. 늘 ‘앞으로 여자도 배워야 제대로 산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학교에 여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남학생들과 늘 경쟁하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환경이었어요.”
졸업 무렵 우연히 접한 여군 사관후보생 모집 공고문은 그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꿨다. “남성들과 실력으로 대등하게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고 송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집안에선 여군이 되고자 하는 딸을 강력히 말렸다. 그의 어머니는 “군인이 되고 싶다”는 딸의 말을 듣자마자 혼절했다. “지금은 여군이 되려면 경쟁이 아주 치열하죠. 그런데 30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정반대였어요. 그땐 여군들을 보고 ‘사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갔을 것’이라고 손가락질했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육군 공병 대위로 전역한 군인 출신이었어요. 월급도 적고, 이사를 하도 많이 다니다 보니 결국 군 생활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셨죠.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어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1년 사관후보생이 된 그의 앞엔 험난한 훈련의 길이 펼쳐졌다. 그해 9월 여군 29기 소위로 임관할 때까지 6개월 동안 훈련받으면서 토하거나 기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악착같이 버텼다. “동기 중 체격이 제일 작았어요. 체중이 43㎏밖에 안 됐죠. 군대에서 정부미로 쪄서 한 ‘짬밥’ 냄새가 역해 식당에서 쓰러진 적도 있어요. 훈련 강도도 남자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때 같이 훈련받던 사람들이 ‘명순이 네가 제일 먼저 전역할 것 같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반대로 제일 늦게 전역했지 뭐예요. ‘별’까지 달고. 세상일 아무도 모른답니다.”
‘별’이 되기까지 흘린 땀방울
그가 본격적으로 군대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시기는 소속 병과를 전투병과인 보병으로 옮긴 뒤부터였다. 1990년부터 여군이 육·해·공군 모든 병과에 지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 이전엔 여군은 여군병과에 별도로 속해 있었다. “입대 전엔 여군도 당연히 총 잡고, 전투부대에 속할 줄 알았어요. 막상 와 보니 완전히 착각한 것이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 여군이 주로 맡는 업무는 행정 쪽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송 교수가 군에서 경력을 쌓은 분야는 스스로 “천운이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편이었다. 그는 특전사 여군 대장, 육군참모총장 비서실 대외의전 장교, 육군 여군대대장, 육군 여군담당관, 육군 훈련소 제25교육연대장, 제2작전사령부 민사심리전 과장, 한미연합사령부 민군작전계획과장, 한미연합사령부 민군작전처장 등 야전과 기획·지원 업무를 섭렵했다. 그리고 이것이 준장으로 승진할 때 결정적 도움이 됐다. “남성들은 전투 분야 보직을 선호하다 보니 비전투 부문은 꼭 필요한 보직이라 해도 한직이라 여겼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걸 기회로 삼았습니다. 전쟁의 성격이 과거 전투 위주에서 군인 복지 강화, 전쟁 예방, 피해지역 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요구하는 업무가 많아졌죠.”
송 교수는 “군대에선 의외로 여성의 ‘유리천장’이 일반 기업보다는 얇다”며 “철저히 계급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실력을 인정받으면 여성이란 굴레를 오히려 덜 씌우고 계급에 맞는 대우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보직 순환 때 여전히 전투 관련 병과엔 여군을 잘 배치하려 하지 않고, 영관급 이상 장교가 현저히 적다”며 “여군 1만명 시대가 눈앞에 왔다 해도 여전히 여군은 소수란 현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각 병과에 여군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다”며 “여군은 스스로 군인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쉽사리 외부 비리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작전 수행 능력도 남성과 대등한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준장 진급 당시 상황을 묻자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장성급 승진 심사는 보통 매년 10월에 있어요. 그래도 대령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연초가 되면 하마평에 오르죠. 영관급일 때 남녀 선배들 모두 ‘너희 기수에서 여군 장성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어요. 2년 뒤 예편하는 조건으로 준장 승진 대상자가 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무척 벅찼고, 한편으로는 임기제 진급이란 게 아주 조금은 섭섭했어요. 그래도 여군의 역사를 바꾸는 주인공이 되고, 후배들은 정상 진급 형식으로 ‘별’을 달 것이란 희망이 생겼어요. 군에서도 여군의 위상을 그만큼 인정한 것이니까요. 먼저 앞으로 가는 사람의 역할은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길을 닦아 내어 주는 것 아니겠어요.”
준장으로 임명된 날, 송 교수는 딸과 아들에게 큰절을 했다. 중령으로 예편한 뒤 외조해 준 육군 헬기조종사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편과는 군대에서 만났어요. 천성이 고지식하고 속 깊은 사람이죠. 늘 근무지를 옮겨 다녀야 해서 부부가 함께 지낸 일이 별로 없고, 아이들도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했어요. 너무 많이 희생했는데 아이들이 참 착하게 잘 커 줬어요. 가족이 없었으면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허무한 꿈’ 대신 ‘실천 가능한 목표’ 가져야
송 교수는 여군 지원자들과 현직 여군 후배들에게 각각 다른 조언을 했다. “여군이 되길 원한다면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군인은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희생해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또 현역 후배들에겐 “너무 크고 허황한 꿈 대신 실천 가능한 목표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잡아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초임 시절 ‘난 꼭 장군이 되겠다’던 여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사람 모두 중도 포기하고 전역했어요. 처음부터 높은 꿈만 잡아서 쉽게 좌절했거든요. 위치에 맞는 능력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억지로는 닿지 못할 것 같던 곳에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있을 겁니다.”
女軍 1만명 시대
사관학교·학사장교·부사관…학사 경쟁률 작년 6대 1 넘어
한국에서 병역 의무는 남성에게만 있다. 여군은 100% 자원입대며, 병사 계급은 없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여군은 9700여명이다. ‘여군 1만명 시대’가 눈앞에 온 것이다.
여군이 되는 경로는 크게 학사장교(대학·대학원 졸업 이상 학력)와 부사관(고교 졸업 이상 학력), 고교 졸업 후 사관학교 입학 등 세 가지가 있다. 학사장교와 부사관은 학력 요건을 충족하고, 나이 제한 및 응시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있다. 학사장교는 만 20세부터 만 27세, 부사관은 만 18세부터 만 27세까지 응시할 수 있다. 사관학교는 1997년 공군사관학교를 시작으로 1998년 육군사관학교, 1999년 해군사관학교, 지난 2월엔 육군3사관학교가 여성 입학을 허용했다.
여군 지원자가 가장 많이 택하는 방식은 학사장교다. 지난해 여군 학사장교 경쟁률은 육·해·공군 전 병과 평균 6.4 대 1이었으며, 해마다 경쟁률이 치솟고 있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 체력검사, 신원조회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선발한다. 필기시험엔 지적 능력과 국사, 직무성격, 상황판단, 다면적 인성검사 등이 포함된다. 체력검사에선 1.5㎞ 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을 본다.
여군에게 보병과 포병 등 모든 병과를 개방한 건 1990년대부터다. 그 이전엔 ‘여군병과’가 별도로 편성돼 있었다. 과거엔 여군을 전투 관련 병과에 거의 배치하지 않고, 행정 업무를 주로 맡겼다. 2002년 여군 최초 전투기 조종사가 탄생하고, 2003년엔 여군도 해군 전투함에 승선하는 등 각 병과에 존재했던 ‘금녀(禁女)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여군 창설 65주년(9월6일 ‘여군의 날’)을 사흘 앞둔 지난 3일 서울 대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명순 예비역 준장(대구가톨릭대 교수·57·사진)이 건넨 첫 마디였다. 따뜻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목걸이를 한 그에게선 ‘2010년 전투병과 사상 첫 여성 장성’이란 타이틀이 주리라 상상했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송 교수는 “동네에서 내가 군인이었단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군을 떠난 지 벌써 3년 됐으니 이젠 그냥 동네 아줌마”라고 웃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며 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하자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해도 30년 넘게 군인이란 외길을 걸은 사람의 예리하고 강건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역시 ‘한 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었다.
‘못난이’였던 초임 시절
송 교수가 처음부터 군인을 꿈꿨던 건 아니었다. 그는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76학번이다. “군인이 안 됐다면 외무고시를 쳐서 외교관이 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아주 개방적인 분들이었어요. 위로 오빠가 둘 있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는데도 나까지 대학 등록금을 다 대 주셨지요. 늘 ‘앞으로 여자도 배워야 제대로 산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학교에 여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남학생들과 늘 경쟁하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환경이었어요.”
졸업 무렵 우연히 접한 여군 사관후보생 모집 공고문은 그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꿨다. “남성들과 실력으로 대등하게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고 송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집안에선 여군이 되고자 하는 딸을 강력히 말렸다. 그의 어머니는 “군인이 되고 싶다”는 딸의 말을 듣자마자 혼절했다. “지금은 여군이 되려면 경쟁이 아주 치열하죠. 그런데 30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정반대였어요. 그땐 여군들을 보고 ‘사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갔을 것’이라고 손가락질했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육군 공병 대위로 전역한 군인 출신이었어요. 월급도 적고, 이사를 하도 많이 다니다 보니 결국 군 생활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셨죠.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어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1년 사관후보생이 된 그의 앞엔 험난한 훈련의 길이 펼쳐졌다. 그해 9월 여군 29기 소위로 임관할 때까지 6개월 동안 훈련받으면서 토하거나 기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악착같이 버텼다. “동기 중 체격이 제일 작았어요. 체중이 43㎏밖에 안 됐죠. 군대에서 정부미로 쪄서 한 ‘짬밥’ 냄새가 역해 식당에서 쓰러진 적도 있어요. 훈련 강도도 남자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때 같이 훈련받던 사람들이 ‘명순이 네가 제일 먼저 전역할 것 같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반대로 제일 늦게 전역했지 뭐예요. ‘별’까지 달고. 세상일 아무도 모른답니다.”
‘별’이 되기까지 흘린 땀방울
그가 본격적으로 군대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시기는 소속 병과를 전투병과인 보병으로 옮긴 뒤부터였다. 1990년부터 여군이 육·해·공군 모든 병과에 지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 이전엔 여군은 여군병과에 별도로 속해 있었다. “입대 전엔 여군도 당연히 총 잡고, 전투부대에 속할 줄 알았어요. 막상 와 보니 완전히 착각한 것이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 여군이 주로 맡는 업무는 행정 쪽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송 교수가 군에서 경력을 쌓은 분야는 스스로 “천운이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편이었다. 그는 특전사 여군 대장, 육군참모총장 비서실 대외의전 장교, 육군 여군대대장, 육군 여군담당관, 육군 훈련소 제25교육연대장, 제2작전사령부 민사심리전 과장, 한미연합사령부 민군작전계획과장, 한미연합사령부 민군작전처장 등 야전과 기획·지원 업무를 섭렵했다. 그리고 이것이 준장으로 승진할 때 결정적 도움이 됐다. “남성들은 전투 분야 보직을 선호하다 보니 비전투 부문은 꼭 필요한 보직이라 해도 한직이라 여겼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걸 기회로 삼았습니다. 전쟁의 성격이 과거 전투 위주에서 군인 복지 강화, 전쟁 예방, 피해지역 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요구하는 업무가 많아졌죠.”
송 교수는 “군대에선 의외로 여성의 ‘유리천장’이 일반 기업보다는 얇다”며 “철저히 계급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실력을 인정받으면 여성이란 굴레를 오히려 덜 씌우고 계급에 맞는 대우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보직 순환 때 여전히 전투 관련 병과엔 여군을 잘 배치하려 하지 않고, 영관급 이상 장교가 현저히 적다”며 “여군 1만명 시대가 눈앞에 왔다 해도 여전히 여군은 소수란 현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각 병과에 여군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다”며 “여군은 스스로 군인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쉽사리 외부 비리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작전 수행 능력도 남성과 대등한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준장 진급 당시 상황을 묻자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장성급 승진 심사는 보통 매년 10월에 있어요. 그래도 대령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연초가 되면 하마평에 오르죠. 영관급일 때 남녀 선배들 모두 ‘너희 기수에서 여군 장성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어요. 2년 뒤 예편하는 조건으로 준장 승진 대상자가 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무척 벅찼고, 한편으로는 임기제 진급이란 게 아주 조금은 섭섭했어요. 그래도 여군의 역사를 바꾸는 주인공이 되고, 후배들은 정상 진급 형식으로 ‘별’을 달 것이란 희망이 생겼어요. 군에서도 여군의 위상을 그만큼 인정한 것이니까요. 먼저 앞으로 가는 사람의 역할은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길을 닦아 내어 주는 것 아니겠어요.”
준장으로 임명된 날, 송 교수는 딸과 아들에게 큰절을 했다. 중령으로 예편한 뒤 외조해 준 육군 헬기조종사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편과는 군대에서 만났어요. 천성이 고지식하고 속 깊은 사람이죠. 늘 근무지를 옮겨 다녀야 해서 부부가 함께 지낸 일이 별로 없고, 아이들도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했어요. 너무 많이 희생했는데 아이들이 참 착하게 잘 커 줬어요. 가족이 없었으면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허무한 꿈’ 대신 ‘실천 가능한 목표’ 가져야
송 교수는 여군 지원자들과 현직 여군 후배들에게 각각 다른 조언을 했다. “여군이 되길 원한다면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군인은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희생해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또 현역 후배들에겐 “너무 크고 허황한 꿈 대신 실천 가능한 목표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잡아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초임 시절 ‘난 꼭 장군이 되겠다’던 여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사람 모두 중도 포기하고 전역했어요. 처음부터 높은 꿈만 잡아서 쉽게 좌절했거든요. 위치에 맞는 능력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억지로는 닿지 못할 것 같던 곳에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있을 겁니다.”
女軍 1만명 시대
사관학교·학사장교·부사관…학사 경쟁률 작년 6대 1 넘어
한국에서 병역 의무는 남성에게만 있다. 여군은 100% 자원입대며, 병사 계급은 없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여군은 9700여명이다. ‘여군 1만명 시대’가 눈앞에 온 것이다.
여군이 되는 경로는 크게 학사장교(대학·대학원 졸업 이상 학력)와 부사관(고교 졸업 이상 학력), 고교 졸업 후 사관학교 입학 등 세 가지가 있다. 학사장교와 부사관은 학력 요건을 충족하고, 나이 제한 및 응시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있다. 학사장교는 만 20세부터 만 27세, 부사관은 만 18세부터 만 27세까지 응시할 수 있다. 사관학교는 1997년 공군사관학교를 시작으로 1998년 육군사관학교, 1999년 해군사관학교, 지난 2월엔 육군3사관학교가 여성 입학을 허용했다.
여군 지원자가 가장 많이 택하는 방식은 학사장교다. 지난해 여군 학사장교 경쟁률은 육·해·공군 전 병과 평균 6.4 대 1이었으며, 해마다 경쟁률이 치솟고 있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 체력검사, 신원조회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선발한다. 필기시험엔 지적 능력과 국사, 직무성격, 상황판단, 다면적 인성검사 등이 포함된다. 체력검사에선 1.5㎞ 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을 본다.
여군에게 보병과 포병 등 모든 병과를 개방한 건 1990년대부터다. 그 이전엔 ‘여군병과’가 별도로 편성돼 있었다. 과거엔 여군을 전투 관련 병과에 거의 배치하지 않고, 행정 업무를 주로 맡겼다. 2002년 여군 최초 전투기 조종사가 탄생하고, 2003년엔 여군도 해군 전투함에 승선하는 등 각 병과에 존재했던 ‘금녀(禁女)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