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함께 묻힌 16세 소녀… 국가 모습 갖추며 순장 풍습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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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4) 국가의 성립
영생 믿은 자연종교 반영
신라선 王 죽으면 남녀 10명 순장
502년 되어서야 지증왕이 금지
국가의 시대 여는 삼국
고구려, 4세기 불교 수용·율령 반포
신라는 6세기 중반 왕이 단독교령
백제는 中서 선진 문물 받아들여
(4) 국가의 성립
영생 믿은 자연종교 반영
신라선 王 죽으면 남녀 10명 순장
502년 되어서야 지증왕이 금지
국가의 시대 여는 삼국
고구려, 4세기 불교 수용·율령 반포
신라는 6세기 중반 왕이 단독교령
백제는 中서 선진 문물 받아들여
2004~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가운데 제15호 고분에서는 순장(殉葬)을 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다. 2명은 남자, 2명은 여자였다. 순장의 추정 연도는 420~560년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중 유골 상태가 온전한 인물의 생시를 복원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나이는 16세, 키는 154㎝,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소녀였다. 평평한 얼굴, 큰 광대뼈, 찢어진 눈매 등에서 현대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금동 귀고리를 하고 있어서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소녀의 이 몇 개는 충치인데,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종아리뼈와 정강이뼈에는 충격이 반복해서 가해진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소녀는 주인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었던 시종이었다고 짐작된다.
4명의 순장자가 무엇을 섭취했는지는 인골에서 추출된 콜라겐에 대한 탄소 및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탄소 열량으로 쌀, 맥류, 두류, 견과류 등 C3계 식료를 주로 섭취했다. 제1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기장, 조, 피, 수수 등 C4계가 주요 식료였다. 이로부터 철기 보급과 함께 농사의 중심이 쌀, 맥류, 두류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원과 관련해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유적에서 나온 인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5~6세기까지도 남자는 수렵에 종사하고 농사는 주로 여자가 담당한 초기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문화에 그 기원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순장은 사람이 사후에도 현세의 신분으로 영생한다는 자연종교의 단순한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보편종교, 율령, 관료제, 조세제도의 성립과 더불어, 다시 말해 문명과 국가의 시대가 열리면서 순장의 풍습은 폐지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했는데, 502년 지증왕(智證王)이 이를 금지했다.
열린 한반도
전회에서 강조한 대로 2~5세기 한반도 각지에서 무리지어 생겨난 국(國)은 족장사회(chiefdom)에 해당했다. 한국사에서 국가(state)는 4세기 이후 여러 국이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족장사회의 전개와 국가의 성립은 일정한 시차를 두고 병행했다. 후술하듯이 초창기의 국가체제는 여전히 족장사회 특질을 강하게 보유했다. 국가로 이행하는 데 성공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한정됐다. 가야는 그 문턱에서 좌절했다. 국가의 성립에는 자연, 자원, 교통, 국제관계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6세기 한반도는 크게 열려 있었으며, 그 같은 환경에서 삼국의 성립과 발전은 국제적 과정이기도 했다.
220년 한(漢)이 망한 뒤 중국은 남북조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그 와중인 313년에 한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쫓겨났다. 한 군현의 남부 영역과 그들이 주도한 국제적 교역로는 백제의 차지가 돼 백제를 번성케 했다. 360년께 백제는 왜와 접촉해 교역을 개시했다. 373년 백제는 남조의 동진(東晉)과 조공 관계를 맺고 불교를 수용했다. 396년 고구려가 남하해 한강 이북의 백제 영토를 빼앗았다. 위기에 몰린 백제는 왜(倭)에 인질을 보내 도움을 구했다. 백제와 왜의 이 같은 관계는 이후 백제 멸망까지 250년간이나 이어졌다.
4세기 말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者)는 고구려였다. 392년 왜가 가야와 협동해 신라를 침공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군사 5만 명을 파견해 왜군과 가야군을 대파했다. 이후 가야와 그의 연맹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낙동강 동쪽의 가야를 흡수했다. 가야 연맹의 지배세력과 장인(匠人) 집단은 대거 왜로 이주했다. 왜는 그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 불렀다. 왜의 중심부에는 도래인 기지가 형성됐다. 도래인을 통해 전해진 한반도 문화는 왜의 정치와 경제를 새롭게 하는 충격이었다. 동시에 한반도 남부와 왜의 관계는 한층 긴밀해졌다.
전방후원분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참수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동성왕(東城王)에 의해 재건됐다. 백제는 남조의 제(齊)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梁)으로부터 불교·미술·서예·건축 방면의 선진 문물을 광범하게 수용했다. 5세기 후반 고령, 합천 등 영남 서남부를 무대로 대가야(大伽倻)가 흥기했다. 그 새로운 연맹체는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 호남 서부의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의 고유한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축조됐다.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 유적은 모두 14기다. 6세기 중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와 더불어 전방후원분의 축조도 중단됐다.
로마의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
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2~3세기 한국인은 금과 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은이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다. 4세기 중엽 신라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했다. 4세기 말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 하류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가 벌인 대외교역 범위와 내용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부(部)체제
고구려의 국읍은 5부(部)로, 신라의 국읍은 6부로 이뤄졌다. 각 부는 독자의 읍락으로서 족장사회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부의 연맹체로 발족했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각 부는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 업무를 연맹체의 수장에 위임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예컨대 고구려의 각 부는 독자의 종묘, 조상신, 토지신에 제사를 지냈으며 독자 관원과 병력을 보유했다.
5세기까지 신라의 왕은 6부의 지배세력 간지(干支)들이 모인 귀족회의의 장로와 같은 존재였다. 삼국이 여러 국을 병합하거나 복속시키는 과정도 비슷했다. 백제와 신라는 그에 복속한 국을 후국(侯國)으로 봉하고 자치를 인정했다. 백제와 신라는 후국의 왕에게 금동제 관이나 신발을 위신재로 하사해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공납이나 병력 동원을 강요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초창기의 국가체제가 족장사회로부터 물려받은 특질을 가리켜 부체제(部體制)라 이름하고 있다.
율령의 반포와 중앙관제의 정비
372년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했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지방을 군과 현으로 구분하고 중앙관료를 파견했다. 중앙관료는 14등으로 그 신분과 위계가 정비됐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거의 150년이나 늦게 국가 단계로 진입했다. 503년 신라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불러온 연맹체의 수장을 왕(王)으로 칭하기 시작했지만, 형식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503년과 524년에 세워진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에 의하면 서로 다른 부 출신의 왕 2~7명이 공동으로 재판을 하거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신라의 왕이 단독으로 교령을 내리는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다. 550년에 세워진 단양적성비에서 그 같은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그 사이 신라는 중앙관제를 17등으로 정비하는 율령을 반포하고, 6부의 관원을 통일적인 중앙관제로 포섭했다. 또 기존의 읍락을 촌으로 재편한 뒤 촌주(村主)를 임명하고, 주요 거점에 중앙군과 함께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560년에 세워진 순수비(巡狩碑)에는 신라의 강역에 자신의 덕화가 두루 미친다는 진흥왕(眞興王)의 자부심이 새겨져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 단계로의 진입을 완료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4명의 순장자가 무엇을 섭취했는지는 인골에서 추출된 콜라겐에 대한 탄소 및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탄소 열량으로 쌀, 맥류, 두류, 견과류 등 C3계 식료를 주로 섭취했다. 제1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기장, 조, 피, 수수 등 C4계가 주요 식료였다. 이로부터 철기 보급과 함께 농사의 중심이 쌀, 맥류, 두류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원과 관련해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유적에서 나온 인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5~6세기까지도 남자는 수렵에 종사하고 농사는 주로 여자가 담당한 초기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문화에 그 기원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순장은 사람이 사후에도 현세의 신분으로 영생한다는 자연종교의 단순한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보편종교, 율령, 관료제, 조세제도의 성립과 더불어, 다시 말해 문명과 국가의 시대가 열리면서 순장의 풍습은 폐지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했는데, 502년 지증왕(智證王)이 이를 금지했다.
열린 한반도
전회에서 강조한 대로 2~5세기 한반도 각지에서 무리지어 생겨난 국(國)은 족장사회(chiefdom)에 해당했다. 한국사에서 국가(state)는 4세기 이후 여러 국이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족장사회의 전개와 국가의 성립은 일정한 시차를 두고 병행했다. 후술하듯이 초창기의 국가체제는 여전히 족장사회 특질을 강하게 보유했다. 국가로 이행하는 데 성공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한정됐다. 가야는 그 문턱에서 좌절했다. 국가의 성립에는 자연, 자원, 교통, 국제관계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6세기 한반도는 크게 열려 있었으며, 그 같은 환경에서 삼국의 성립과 발전은 국제적 과정이기도 했다.
220년 한(漢)이 망한 뒤 중국은 남북조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그 와중인 313년에 한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쫓겨났다. 한 군현의 남부 영역과 그들이 주도한 국제적 교역로는 백제의 차지가 돼 백제를 번성케 했다. 360년께 백제는 왜와 접촉해 교역을 개시했다. 373년 백제는 남조의 동진(東晉)과 조공 관계를 맺고 불교를 수용했다. 396년 고구려가 남하해 한강 이북의 백제 영토를 빼앗았다. 위기에 몰린 백제는 왜(倭)에 인질을 보내 도움을 구했다. 백제와 왜의 이 같은 관계는 이후 백제 멸망까지 250년간이나 이어졌다.
4세기 말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者)는 고구려였다. 392년 왜가 가야와 협동해 신라를 침공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군사 5만 명을 파견해 왜군과 가야군을 대파했다. 이후 가야와 그의 연맹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낙동강 동쪽의 가야를 흡수했다. 가야 연맹의 지배세력과 장인(匠人) 집단은 대거 왜로 이주했다. 왜는 그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 불렀다. 왜의 중심부에는 도래인 기지가 형성됐다. 도래인을 통해 전해진 한반도 문화는 왜의 정치와 경제를 새롭게 하는 충격이었다. 동시에 한반도 남부와 왜의 관계는 한층 긴밀해졌다.
전방후원분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참수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동성왕(東城王)에 의해 재건됐다. 백제는 남조의 제(齊)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梁)으로부터 불교·미술·서예·건축 방면의 선진 문물을 광범하게 수용했다. 5세기 후반 고령, 합천 등 영남 서남부를 무대로 대가야(大伽倻)가 흥기했다. 그 새로운 연맹체는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 호남 서부의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의 고유한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축조됐다.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 유적은 모두 14기다. 6세기 중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와 더불어 전방후원분의 축조도 중단됐다.
로마의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
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2~3세기 한국인은 금과 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은이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다. 4세기 중엽 신라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했다. 4세기 말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 하류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가 벌인 대외교역 범위와 내용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부(部)체제
고구려의 국읍은 5부(部)로, 신라의 국읍은 6부로 이뤄졌다. 각 부는 독자의 읍락으로서 족장사회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부의 연맹체로 발족했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각 부는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 업무를 연맹체의 수장에 위임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예컨대 고구려의 각 부는 독자의 종묘, 조상신, 토지신에 제사를 지냈으며 독자 관원과 병력을 보유했다.
5세기까지 신라의 왕은 6부의 지배세력 간지(干支)들이 모인 귀족회의의 장로와 같은 존재였다. 삼국이 여러 국을 병합하거나 복속시키는 과정도 비슷했다. 백제와 신라는 그에 복속한 국을 후국(侯國)으로 봉하고 자치를 인정했다. 백제와 신라는 후국의 왕에게 금동제 관이나 신발을 위신재로 하사해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공납이나 병력 동원을 강요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초창기의 국가체제가 족장사회로부터 물려받은 특질을 가리켜 부체제(部體制)라 이름하고 있다.
율령의 반포와 중앙관제의 정비
372년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했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지방을 군과 현으로 구분하고 중앙관료를 파견했다. 중앙관료는 14등으로 그 신분과 위계가 정비됐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거의 150년이나 늦게 국가 단계로 진입했다. 503년 신라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불러온 연맹체의 수장을 왕(王)으로 칭하기 시작했지만, 형식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503년과 524년에 세워진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에 의하면 서로 다른 부 출신의 왕 2~7명이 공동으로 재판을 하거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신라의 왕이 단독으로 교령을 내리는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다. 550년에 세워진 단양적성비에서 그 같은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그 사이 신라는 중앙관제를 17등으로 정비하는 율령을 반포하고, 6부의 관원을 통일적인 중앙관제로 포섭했다. 또 기존의 읍락을 촌으로 재편한 뒤 촌주(村主)를 임명하고, 주요 거점에 중앙군과 함께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560년에 세워진 순수비(巡狩碑)에는 신라의 강역에 자신의 덕화가 두루 미친다는 진흥왕(眞興王)의 자부심이 새겨져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 단계로의 진입을 완료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