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에 '性인지 감수성' 적용 1년…57건 중 56건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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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법원 첫 기준 제시
판사 재량 커 '복불복' 우려도
판사 재량 커 '복불복' 우려도
대법원이 성범죄 재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지 1년 만에 전국 각급 법원에서 이를 적용한 판결이 57건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단 한 건을 제외하고 모든 가해자가 유죄 취지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란 기준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라 성범죄 관련 재판 결과가 판사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1년간 57건 중 56건 피해자 勝
법원 판결문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등장한 건 1년 전이다.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가 대구의 한 사립 전문대학 A교수가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차례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자 이에 불복한 소송의 상고심을 선고하면서다.
해당 사건의 원심은 A교수로부터 볼 뽀뽀나 포옹을 강요당했다거나 “엄마를 소개해달라”는 등 모욕적 발언을 들었다는 학생들의 주장을 믿지 않고 A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이 같은 성희롱을 당하고도 학생들이 A교수의 수업을 계속 수강하고 그를 향해 좋은 강의평을 남긴 점 등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범죄 피해자가 놓인 취약한 상황이나 처지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학생들의 취업에 중요한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뤄진 정황 등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해야 한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 판결은 하급심에 곧바로 영향을 줬다.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성인지 감수성을 판단 기준으로 적용한 판결 10개가 선고됐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이른바 ‘논산 성폭행 피해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심리하며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강간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며 성인지 감수성을 재차 언급하자 지난해 11월부터 현재까지 45건의 하급심 판결이 쏟아졌다.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실형으로 뒤집힌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도 그중 하나다.
판사 재량 너무 커져
법조계에선 성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개별 판사 재량이 너무 커져 판결의 예측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여성학 용어인 성인지 감수성이란 낯선 단어를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건 상당히 전향적”이라면서도 “어느 정도의 감수성과 예민함을 지닌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판단 기준이 달라질 수 있어 ‘복불복’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온라인에선 성범죄 재판에서 별다른 증거 없이 피해자 진술만으로 무조건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될 수 있다며 ‘킹(king)인지 갓(god)수성’이란 조롱이 유행 중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및 ‘증거재판주의’와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판사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대법원이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정립해줘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재판장 전원이 모인 워크숍에서 ‘성희롱·성폭행 사건에서의 성인지 감수성’을 주제로 발표를 했다. 대법원 산하 젠더법연구회 등 법원 내부 각종 연구회에서도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지 감수성
gender sensitivity.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일상생활에서 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내는 민감성.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에서 사용된 후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정책 입안이나 공공예산 편성 기준 등으로 활용됐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1년간 57건 중 56건 피해자 勝
법원 판결문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등장한 건 1년 전이다.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가 대구의 한 사립 전문대학 A교수가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차례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자 이에 불복한 소송의 상고심을 선고하면서다.
해당 사건의 원심은 A교수로부터 볼 뽀뽀나 포옹을 강요당했다거나 “엄마를 소개해달라”는 등 모욕적 발언을 들었다는 학생들의 주장을 믿지 않고 A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이 같은 성희롱을 당하고도 학생들이 A교수의 수업을 계속 수강하고 그를 향해 좋은 강의평을 남긴 점 등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범죄 피해자가 놓인 취약한 상황이나 처지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학생들의 취업에 중요한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뤄진 정황 등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해야 한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 판결은 하급심에 곧바로 영향을 줬다.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성인지 감수성을 판단 기준으로 적용한 판결 10개가 선고됐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이른바 ‘논산 성폭행 피해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심리하며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강간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며 성인지 감수성을 재차 언급하자 지난해 11월부터 현재까지 45건의 하급심 판결이 쏟아졌다.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실형으로 뒤집힌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도 그중 하나다.
판사 재량 너무 커져
법조계에선 성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개별 판사 재량이 너무 커져 판결의 예측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여성학 용어인 성인지 감수성이란 낯선 단어를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건 상당히 전향적”이라면서도 “어느 정도의 감수성과 예민함을 지닌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판단 기준이 달라질 수 있어 ‘복불복’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온라인에선 성범죄 재판에서 별다른 증거 없이 피해자 진술만으로 무조건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될 수 있다며 ‘킹(king)인지 갓(god)수성’이란 조롱이 유행 중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및 ‘증거재판주의’와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판사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대법원이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정립해줘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재판장 전원이 모인 워크숍에서 ‘성희롱·성폭행 사건에서의 성인지 감수성’을 주제로 발표를 했다. 대법원 산하 젠더법연구회 등 법원 내부 각종 연구회에서도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지 감수성
gender sensitivity.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일상생활에서 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내는 민감성.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에서 사용된 후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정책 입안이나 공공예산 편성 기준 등으로 활용됐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