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年 수십억 지원에도 '반도체학과' 막은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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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들 "특정기업 위한 학과 안돼"
서울대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해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전문 인력을 키우려던 정부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구상이 서울대 교수들의 강한 반대로 사실상 무산됐다.
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은 지난 25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학부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려면 전체 단과대 학장들이 참여하는 대학본부 학사위원회에서 학칙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의사 타진 결과 통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학칙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4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우수 대학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전문 인력 양성을 중점 추진 과제로 제시했다. 계약학과란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연 20억~30억원)를 지원하고, 졸업생을 100% 채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과다. 서울대 공대는 반도체 계약학과 대신 공대에 반도체 전공트랙을 개설하는 방안을 마련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협의 중이다.
"특정기업 인력 양성소냐" 서울대 자존심에 막힌 '非메모리 육성'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도약대 삼아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30일 경기 화성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한 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이날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확실한 1등을 하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적극 육성하겠다는 정부와 삼성전자의 구상에 차질이 생겼다. 서울대에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이 사실상 무산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서울대에 매년 20억~30억원의 학과 운영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50~100명 규모의 반도체 계약학과를 개설하고, 전공을 이수한 학생을 전원 채용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 내부에서 “지식의 상아탑인 대학에서 특정 기업 취업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과 개설은 부적절하다”는 반발이 집중 제기됐다.
상아탑 논리에 막힌 계약학과
26일 서울대에 따르면 서울대 공과대학은 반도체 계약학과 개설을 위한 다른 단과대 동의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부 과정에 계약학과를 개설한 전례가 없는 서울대가 채용보장형 계약학과를 설립하기 위해선 학칙을 개정해야 한다. 학칙을 개정하려면 공대 학사위원회와 교수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이후 다른 단과대 교수들이 참여하는 △대학본부 학사위원회 △평의원회 △이사회에 차례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서울대 공대 학사위원회와 교수회의에선 반도체 계약학과 의제가 통과됐다. 그러나 본부 차원의 통과 절차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공대 측 설명이다. 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은 “학생의 미래를 특정 기업에 맞춰 가르치는 것이 서울대의 교육철학과 전통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았다”며 “학과를 개설할 수 없는 만큼 ‘플랜B’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학과 신설이 무산된 서울대가 추진 중인 플랜B는 ‘반도체 전공 트랙’(가칭) 운영을 말한다. 컴퓨터공학부, 전기·정보공학부, 재료공학부, 화학생물공학부, 물리학부 등의 이공계열 학과가 협업해 반도체 전문 융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협의해 트랙과목을 운영하고, 기존 학부생이 이 트랙을 이수하면 두 기업이 채용하는 방식이다. 계약학과와 비교하면 학비 지원이 없는 대신 졸업생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반드시 취업할 필요가 없다. 트랙 신설은 학칙을 개정하지 않아도 돼 비교적 손쉽게 운영할 수 있다. 차 학장은 “서울대의 교육철학을 지키면서도 산업계 요구를 반영한 최선의 대안”이라며 “총장에게 보고를 마쳤고, 트랙 운영비 지원에 대해 삼성전자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트랙 과정은 새로 전공을 신설하는 것보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이수 학점이 적을 수밖에 없어 안정적인 인력 수급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이 기업 필요 외면”
서울대의 반도체 계약학과 무산 소식에 업계에선 허탈해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대학이 연구개발과 함께 인재양성 역할도 해야 하지만, 산업현장에 필요한 인력 양성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며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조차 인력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 산업현장의 어려움이 크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계약학과가 아니라도 반도체 인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학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매번 기업에 금전적 지원을 요구하지만 정작 기업이 필요로 할 때에는 외면하고 있다”며 “반도체가 한국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대학들의 책임있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건학이념과 교육철학의 문제라고 설명하지만 공대가 더욱 팽창하는 것에 대한 다른 단과대의 ‘우려’와 ‘시샘’도 적잖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대 공대는 경영대, 법대 등 다양한 단과대가 계약학과 개설에 함께 참여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왔지만 내부 반발을 넘지 못했다. 서울대 내부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로 한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의진/김동윤/좌동욱 기자 justjin@hankyung.com
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은 지난 25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학부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려면 전체 단과대 학장들이 참여하는 대학본부 학사위원회에서 학칙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의사 타진 결과 통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학칙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4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우수 대학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전문 인력 양성을 중점 추진 과제로 제시했다. 계약학과란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연 20억~30억원)를 지원하고, 졸업생을 100% 채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과다. 서울대 공대는 반도체 계약학과 대신 공대에 반도체 전공트랙을 개설하는 방안을 마련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협의 중이다.
"특정기업 인력 양성소냐" 서울대 자존심에 막힌 '非메모리 육성'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도약대 삼아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30일 경기 화성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한 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이날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확실한 1등을 하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적극 육성하겠다는 정부와 삼성전자의 구상에 차질이 생겼다. 서울대에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이 사실상 무산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서울대에 매년 20억~30억원의 학과 운영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50~100명 규모의 반도체 계약학과를 개설하고, 전공을 이수한 학생을 전원 채용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 내부에서 “지식의 상아탑인 대학에서 특정 기업 취업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과 개설은 부적절하다”는 반발이 집중 제기됐다.
상아탑 논리에 막힌 계약학과
26일 서울대에 따르면 서울대 공과대학은 반도체 계약학과 개설을 위한 다른 단과대 동의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부 과정에 계약학과를 개설한 전례가 없는 서울대가 채용보장형 계약학과를 설립하기 위해선 학칙을 개정해야 한다. 학칙을 개정하려면 공대 학사위원회와 교수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이후 다른 단과대 교수들이 참여하는 △대학본부 학사위원회 △평의원회 △이사회에 차례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서울대 공대 학사위원회와 교수회의에선 반도체 계약학과 의제가 통과됐다. 그러나 본부 차원의 통과 절차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공대 측 설명이다. 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은 “학생의 미래를 특정 기업에 맞춰 가르치는 것이 서울대의 교육철학과 전통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았다”며 “학과를 개설할 수 없는 만큼 ‘플랜B’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학과 신설이 무산된 서울대가 추진 중인 플랜B는 ‘반도체 전공 트랙’(가칭) 운영을 말한다. 컴퓨터공학부, 전기·정보공학부, 재료공학부, 화학생물공학부, 물리학부 등의 이공계열 학과가 협업해 반도체 전문 융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협의해 트랙과목을 운영하고, 기존 학부생이 이 트랙을 이수하면 두 기업이 채용하는 방식이다. 계약학과와 비교하면 학비 지원이 없는 대신 졸업생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반드시 취업할 필요가 없다. 트랙 신설은 학칙을 개정하지 않아도 돼 비교적 손쉽게 운영할 수 있다. 차 학장은 “서울대의 교육철학을 지키면서도 산업계 요구를 반영한 최선의 대안”이라며 “총장에게 보고를 마쳤고, 트랙 운영비 지원에 대해 삼성전자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트랙 과정은 새로 전공을 신설하는 것보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이수 학점이 적을 수밖에 없어 안정적인 인력 수급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이 기업 필요 외면”
서울대의 반도체 계약학과 무산 소식에 업계에선 허탈해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대학이 연구개발과 함께 인재양성 역할도 해야 하지만, 산업현장에 필요한 인력 양성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며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조차 인력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 산업현장의 어려움이 크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계약학과가 아니라도 반도체 인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학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매번 기업에 금전적 지원을 요구하지만 정작 기업이 필요로 할 때에는 외면하고 있다”며 “반도체가 한국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대학들의 책임있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건학이념과 교육철학의 문제라고 설명하지만 공대가 더욱 팽창하는 것에 대한 다른 단과대의 ‘우려’와 ‘시샘’도 적잖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대 공대는 경영대, 법대 등 다양한 단과대가 계약학과 개설에 함께 참여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왔지만 내부 반발을 넘지 못했다. 서울대 내부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로 한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의진/김동윤/좌동욱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