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대법원이 지난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간 삼성 경영권 승계를 두고 ‘묵시적 부정 청탁’이 있었다고 판결함에 따라 한국 정부에 1조원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메이슨의 승소 가능성이 커졌다.

30일 국제중재업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을 뇌물을 주고받은 청탁 관계로 인정함에 따라 엘리엇과 메이슨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작업 차원에서 이뤄졌고, 이를 부정한 청탁으로 인정했다. 엘리엇과 메이슨은 박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등으로 이어지는 ‘부당 개입’ 고리만 형사 판결로 입증되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에서 승기를 굳히게 된다는 게 국제중재업계의 분석이다.

삼성물산 주주이던 엘리엇과 메이슨은 삼성물산이 불리한 비율로 제일모직과 합병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지난해 8억7000만달러(약 1조500억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대법 '부정청탁' 인정…엘리엇·메이슨, 1兆 ISD 승기 잡아
정부, 방어 논리 무너지나


대법 '이재용 판결'에 웃는 엘리엇·메이슨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지난해 7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하면서 중재재판부에 제출한 149쪽에 달하는 소장에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6억7000만달러(약 81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부당한 간섭 때문에 양사 간 합병비율이 적절하지 않았는데도 찬성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털도 같은 이유로 지난해 2억달러(약 2400억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한국 정부와 엘리엇·메이슨은 현재 중재재판부를 상대로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며 치열한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정부는 메이슨의 실질적 투자가 미국 밖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보호받아야 할 투자자가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재판정에 대한 불복이 불가능한 단심제인 ISD는 소송 절차에 3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최종 판결은 2021년께 나올 전망이다.

엘리엇·메이슨이 1조원대의 손해배상금을 한국으로부터 받기 위해선 ‘청와대와 국민연금’ ‘청와대와 삼성’ 간 두 가지 ‘부정 청탁’의 고리를 입증해야 한다. 첫 번째 고리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은 직권남용 혐의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합병 찬성을 지시해 연금에 손해를 입힌 배임 혐의 사건이다. 2심 재판부는 2017년 11월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에게 각각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두 번째 고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재판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를 목적으로 한 청탁의 증거도 없다”고 판단하자 엘리엇·메이슨은 한때 ISD에서 어려운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9일 대법원이 ‘경영권 승계’와 ‘부정한 청탁’을 모두 인정하면서 승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확정 판결이 아니라는 점에서 엘리엇·메이슨이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게 법조계의 판단이다. 대법원이 파기환송심으로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기 때문에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부정한 청탁 여부도 다시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판결문을 자세히 보면 대법원이 이번에 2심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경영권 승계가 있다고 했을 뿐 경영권 승계와 부정한 청탁을 명확히 연결짓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연내 나올 것으로 보이는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 최종 판결에서 예상 밖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한 변호사는 “기존 판결이 전 복지부 직원의 진술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최종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