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반갑게 맞아준 곳은 숯불돼지갈비집이었다. 경복궁 근처에 있어 다양한 사람이 찾는다는 가게다. “여긴 전경들도 오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시위자들도 오고,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도 오고, 보험 아주머니도 옵니다. 표정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합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할 때 이 자리에 있던 설렁탕집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설렁탕집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들어선 이 가게가 김 전 위원장의 새 단골집이 됐다. 30일 서울 창성동 흥부골숯불돼지갈비에서 만난 김 전 위원장은 교수 시절부터 한국당 비대위원장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거쳐온 여정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자신이 그리는 정치의 미래도 또렷하게 말했다.

암벽 등반에 빠졌던 청년

자리에 앉자 두툼한 돼지갈비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구워져 나왔다. 김 전 위원장의 권유대로 한 점을 집어 양파채와 함께 씹었다. 고소한 육즙이 터져나왔다. 고기 육즙을 살리는 이 가게만의 숙성 방식이 있다고 했다. 갈비 한 점을 먹은 뒤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청량한 탄산에 돼지갈비 기름기가 가시면서 궁합이 잘 맞았다. “예전에 청와대 직원들과 편하게 와서 식사하던 곳입니다. 지금 그 설렁탕집은 없어졌지만….”

김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초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두 달 뒤 돌아왔다. 한국당 전당대회에서 황교안 대표가 선출돼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놓은 뒤였다. 미국에서 무엇을 했냐고 묻자 ‘여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국에 머무른 60여 일 중 35일을 부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밴쿠버 등을 렌터카로 돌았다.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를 땐 두 딸을 위한 에세이도 썼다.

국민대 행정대학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대통령 정책특보, 한국당 비대위원장…. 여러 중책을 맡았던 김 전 위원장이지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상고 출신인 김 전 위원장이 영남대 정치학과에 간 것도 “집안에 대학생 한 명은 나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산악회 친구들과 어울렸다. 한때는 프로 산악인을 꿈꿀 정도로 산에 빠지기도 했다. “정말 좋아했는데, 대학 3학년 때 산 타는 걸 그만뒀습니다. 리더가 되면 군기를 잡아야 하는데, 후배들 때리는 걸 못 하겠더라고요.”

돼지갈비를 양파채 대신 쌈장에 찍어 먹으니 다른 맛이 느껴졌다. 전북 고창에서 가져온 콩을 갈아 만들었다는 쌈장이다. 달지 않은 고기와 잘 어울렸다. 김 전 위원장이 왜 단골이 됐는지 알 법했다.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수로 임용된 뒤 한참은 먹고사는 데 바빴다고 했다. 그가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건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때였다.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차 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한창 심란할 때 호헌조치 반대에 서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자신이 없었습니다. 겨우 먹고살 만해졌는데 학교에서 잘리면 어떡합니까. 그때 집사람이 잘리면 자신이 먹여 살릴 테니 하고 싶으면 그냥 서명하라고 하더군요.” 학교 교수 중 여섯 번째로 서명했다. 그게 사회적·정치적 활동의 시작이 됐다.

분노, 또 희망을 좇다 보니…

김 전 위원장은 한창 산을 타던 대학생 시절 빙벽 등반을 위해 겨울 한라산에 갔던 얘기를 꺼냈다. 당시 안개가 자욱해 1m 앞도 보기 힘들었다. 백록담을 가로지르기 위해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안개가 걷혔다. 백록담인 줄 알고 내려가던 방향은 까마득한 남벽 절벽이었다. 단 1초라도 늦었다면 일행 모두 절벽으로 추락해 큰 사고를 당할 상황이었다. 떨어지기 직전 겨우 멈춰서 살았다. 그는 “요즘 대한민국이 그때 남벽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의 경제와 안보 상황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청와대를 보고 “정책 라인이 다 죽었다”고 평가했다. 정책은 늘 열려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것 같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청와대에서 정무라인보다 정책라인이 셌습니다. 반대로 지금 정부는 이념에 닫혀 있고, 과거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정책 토론은 필요가 없어지지요.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철학을 이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김 전 위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노 전 대통령은 시장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했다. ‘노무현의 책사’로 불리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주도하던 입장에서 봤을 때 현 정부 모습에 아쉬움과 답답함을 느끼는 듯했다.

김 전 위원장은 국민대 교수였을 때 야인이던 노 전 대통령을 ‘길바닥’에서 만났다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 활동 등을 하면서 실력 있는 젊은 교수로 제법 알려진 시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세운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특강을 한 뒤 저녁 식사를 같이하다가 의기투합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홀로 나설 때마다 김 전 위원장이 곁을 지켰다. 그 인연이 계기가 돼 노무현 정부 시절 정책실장으로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무엇이 돼야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달려온 삶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니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고 그는 말했다.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는 것. 산에 다닐 때는 죽어라 산을 타고, 당구 칠 때는 죽어라 당구를 쳤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할 때도 힘을 다 쏟아 공부했다. “제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하고 총리에 지명받을 거라고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어떨 때는 분노, 어떨 때는 희망, 그런 것을 좇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치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지났다”

“갈비도 맛있지만 식사도 괜찮습니다. 냉면과 설렁탕 다 맛있어요.” 갈비로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질 무렵 김 전 위원장이 식사를 권했다. 설렁탕도 그가 자주 찾는 메뉴라고 했다. 주문 후 얼마 되지 않아 뽀얗게 우려낸 설렁탕이 나왔다. 국물을 한 숟갈 떠 맛보니 느끼하지 않고 깔끔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말을 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정치로, 국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이 시대의 정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과 기업을 풀어주는 것이 돼야 한다고 했다. 정치로 직접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개인의 창의성과 혁신 역량, 기업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게 정치가 돕자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 계류된 안건만 1만 건이 넘습니다. 공무원 책상에서 출발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평균 35개월이 걸립니다. 이 빠른 세상에서 관료들과 입법부가 의사결정을 모두 감당하기엔 속도와 질이 떨어집니다.”

결국 개인과 기업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같은 개인의 영역을 넓혀주기 위해서라고 김 전 위원장은 말했다. 정치를 줄이기 위해 정치를 한다는 말. 쉽지 않지만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그는 최근 대구를 자주 찾는다. 지역 정가에선 내년 총선에서 대구 출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보가 어디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했다. “지금 대구는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늘 한국 정치의 중심이던 지역인데, 어느 날 구석으로 처박히고 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적폐, 보수꼴통이 되는 게 가슴 아픈 겁니다.” 그는 ‘포스트박근혜시대’에 대구 정치가 우리 정치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건 작업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한국당 비대위원장을 마칠 때도 한국당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겠다고 언급했다. 비대위원장을 맡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 번도 편하게 쉬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이날도 “쫓아내지 않는 이상 불러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다시 말했다. “일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이 다시 일을, 또 일이 다시 사람을 만나게 하는 길 위에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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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전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정책실장 지내…지역균형발전 '밑그림'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거쳐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국민대 교수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강연을 맡으며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해 국정과제이던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발탁돼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국무총리로 지명됐지만 박 대통령 탄핵으로 총리 지명은 무산됐다. 이후 2018년 7월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 지방선거 참패 직후 당을 맡았다.

■ 김병준 전 위원장 약력

△1954년 경북 고령 출생
△1972년 대구상고 졸업
△1976년 영남대 정치학과 졸업
△1979년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84년 미국 델라웨어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1986~2018년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1995~2002년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 지방자치위원장
△2004~2006년 청와대 정책실장
△2006~2008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2018~2019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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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전 위원장의 단골집 흥부골숯불돼지갈비

스테이크식 숙성 돼지갈비…육즙 '가득'

[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병준 "암벽 등반에 미쳐있던 열혈 청년…희망·분노 좇다보니 여기까지 왔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돼지갈비집’, 흥부골숯불돼지갈비 정문 옆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자기 집 음식을 맛없다고 하는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이라는 표현은 웬만한 자부심으로는 쓸 수 없다. 흥부골숯불돼지갈비에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메뉴는 돼지갈비 냉면 한우설렁탕 등이다. 갈비는 두툼한 스테이크식이다. 육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식탁에 오르기까지 5~6일간의 숙성을 거친다.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갈비 맛이 좀 더 부드러워진다.

냉면도 인기다. 당일 반죽한 면으로 냉면을 만든다. 텁텁하지 않은 깔끔한 국물과 직접 반죽한 쫄깃한 면을 맛볼 수 있다. 한우설렁탕은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 게 특징이다. 느끼하지 않은 깔끔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밑반찬에 쓰이는 대부분 재료는 각 지역에서 가져온다. 전북 고창에서 온 콩을 갈아 쌈장을 만들고, 경남 고성에서 온 액젓은 김치에 들어간다.

서울 해방촌, 약수사거리, 청구역 주변에서 25년 동안 고기집을 하다가 서촌에 문을 연 지 3년이 됐다. 1층으로 된 한옥으로 140명까지 받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갖춰져 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



고은이/성상훈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