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못 버티고… > 3일 서울 용산구 선인상가 앞에서 한 시민이 문 닫힌 조립 PC 상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따르면 최근 두 달 동안에만 이곳 상인들이 내놓은 점포가 30개를 넘었다.   김병언 기자
< 결국 못 버티고… > 3일 서울 용산구 선인상가 앞에서 한 시민이 문 닫힌 조립 PC 상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따르면 최근 두 달 동안에만 이곳 상인들이 내놓은 점포가 30개를 넘었다. 김병언 기자
“유나 아빠가 폐업하고 코인에 뛰어들었던 심정이 이해돼요. 조립 PC 시장 다 죽었는데 돈은 갚아야 하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30년째 컴퓨터 조립 대행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신모씨(50). 3일 만난 그는 “조립 PC 구매 문의가 코로나19 이전의 절반도 안 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전남 완도 바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조유나 양(10)의 아버지는 광주 서구의 한 전자상가에서 5년가량 조립 컴퓨터를 판매하다가 지난해 7월께 폐업했다. 이후 암호화폐에 투자하다 실패해 생활고를 겪은 그는 아내, 딸 유나양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립 PC업계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코로나19로 최대 고객인 PC방 수가 줄면서 매출이 급감한 탓이다. 지난해부터 그래픽 카드를 비롯한 부품 가격이 불안정해 개인 고객 발길도 뚝 끊겼다. 노트북 태블릿PC 등 휴대가 간편한 PC가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데스크톱 비중이 감소해 조립 PC업계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선인상가 매물 두 달 새 30개 넘어


용산 전자상가 먹여 살리던 조립 PC의 몰락…"두달새 점포 30곳 문닫아"
조립 PC 상점들이 밀집한 서울 용산 선인상가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따르면 최근 두 달간 상인들이 내놓은 점포가 30개를 넘었다. 지난 2년 동안 1개도 없었다가 최근 급증했다. 이날 상가에서 만난 상인들은 “수요가 줄어들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간 것”이라며 “코로나19 초기엔 재택근무 증가로 반짝 수요가 있었지만 PC방들이 줄폐업하고 그래픽 카드 등 게임용 PC 부품난으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자 수요가 급감했다”고 입을 모았다. PC방 통계서비스 더 로그에 따르면 전국 PC방 총사용시간은 2019년 6월 2850만 시간(넷째주 기준)에서 올해 6월 1612만 시간으로 쪼그라들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거의 반토막 났다. 업계에 따르면 대다수 조립 PC업체들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PC방에 의존해왔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 4월 전국 PC방 수는 9315개로 100대 생활 업종 중 전년 동월 대비 감소율이 다섯 번째로 높았다. 4월 기준 2019년 1만387개였던 PC방 수는 2020년 9976개, 지난해엔 9730개로 계속해서 줄고 있다. PC방을 대상으로 조립 PC를 판매하는 이모씨(43)는 “코로나19 이전보다 구매 문의 건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며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는 PC방들이 방학을 맞이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는 성수기인데도 문의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부품 가격은 개인 고객의 수요 감소로 이어졌다. 지난해 그래픽 카드 가격은 비트코인 채굴 열풍으로 수요가 증가하며 3배가량 급등했다. 출시 직후 90만원대였던 에이수스 RTX3080 그래픽 카드는 지난해 270만원을 넘겼다. 이에 그래픽 카드가 쓰이는 고사양 게임용 조립 PC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반도체 공급난에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CPU(중앙처리장치) 등 반도체 기반 장치 가격이 20~30% 급등했다”며 “조립 PC도 고객들이 생각하는 가격을 뛰어넘었다”고 전했다.

게임도 모바일로…설 자리 잃는 조립 PC


최근 비트코인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그래픽 카드 가격은 떨어지는 추세다. 채굴 사업이 시들해진 까닭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설계 및 생산되는 그래픽카드, CPU, 파워서플라이 등 부품 가격은 고환율 탓에 예년보다 여전히 높다. 주로 개인 고객에게 조립 PC를 판매하는 안모씨(44)는 “부품 가격은 최근 많이 떨어졌지만 변동이 심하다”며 “점포 앞에 붙여놓던 가격 안내표도 다 떼었다”고 전했다.

급변하는 PC업계 상황도 조립 PC업계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한국IDC에 따르면 국내 PC 수요는 올해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13.4% 증가했지만 노트북 PC 수요가 19.9% 늘 때 데스크톱 수요는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데스크톱 판매량 비중은 2020년 약 40%에서 올해 30%로 하락했다. 게임 소비자들이 주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태블릿으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모바일 게임 시장 비중이 50% 이상”이라며 “이 때문에 게임사들도 PC 게임 출시를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데스크톱 PC 시장에서조차 조립 PC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완제품 PC 시장에 뛰어든 부품 제조사들이 안정적인 부품 수급을 바탕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춰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조립 PC업체는 부품을 수입사 등 여러 중간유통사를 거쳐 받기 때문에 가격 경쟁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며 “발을 돌린 소비자들이 다시 돌아올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최세영/김주완 기자 seyeong202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