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권경영 리포트’는 새로운 경영 화두로 떠오른 인권경영과 관련된 글로벌 동향과 모범사례를 살펴봅니다. 해외 주요 선진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인권경영을 의무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지평의 인권경영 전문가들이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2017년 프랑스는 이른바 ‘실사의무화법(French Duty of Vigilance Law)’을 제정하면서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을 제도화했다. 이는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의 인권실사를 법제화한 것이다. 이는 유럽연합 내 ‘공급망 실사의무화법’에 관한 활발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법 제정 후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프랑스 내에서 기업이 관련 법에 규정된 의무를 충족하라는 ‘공식경고(mise en demeure)’를 받았거나 소송에 연루된 사례는 2021년 7월까지 7건에 불과했다.

프랑스 실사의무화법이 그동안 크게 활용되지 못한 까닭은 실사의무위반에 관련한 청구 심리 관할권 문제 때문이었다. 시민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공식경고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또한 이와 관련한 소송을 어느 법원에서 맡아야 하는지 등 법 해석에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이후 2021년 말 프랑스 대법원에서 프랑스 에너지기업 토탈을 상대로 소를 제기한 시민단체가 청구인 자격을 갖는다고 판단했다. 또 민사법원이나 상사법원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시민단체가 민사법원을 통해 실사의무와 관련된 손해배상책임을 기업에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 이후 2022년 초부터 프랑스 법을 기초로 한 공식경고 및 법적 소송 사례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3월 22일 그린피스는 프랑스 국영 전력공사(EDF)와 프랑스 원전그룹 오라노(Orano)를 상대로 러시아와의 핵에너지 사업 관계 중단을 요구하는 공식경고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유럽연합의 제재가 최근 해제됐으나, 프랑스 국영 전력공사와 오라노는 프랑스의 기업실사의무화법을 준수할 법적 의무가 있다. 이에 따라 그들의 공급망 내 인권 및 환경에서 부정적 영향을 방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달 프랑스 시민단체인 쉐르파(Sherpa)와 액션에이드 프랑스 지부(ActionAid France), 터키 노동조합과 터키 소재 이브로쉐 자회사의 근로자 34명이 이브로쉐 본사를 상대로 파리최고재판소에 소를 제기했다.

이브로쉐는 기업실사의무화법이 요구하는 실사계획을 2020년에 공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터키 소재 자회사 근로자의 권리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 청구인은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이브로쉐가 실사의무화법을 위반했으므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근로자와 노조가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청구했다.
지난 3월 30일 맥도날드의 프랑스와 브라질 노조는 맥도날드를 상대로 기업실사의무화법을 준수하라는 공식경고를 보냈다. 구체적으로는 맥도날드가 세계 최대 습지인 브라질 판타날(Pantanal)과 아마존 열대 우림의 삼림 벌채 및 강제 노동 등에 연루된 공급업체들과 사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중단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인권과 환경 위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최근 증가한 프랑스 인권실사의무화법 관련 공식경고와 법적 소송은 이제 인권·환경 경영이 결코 한시적인 도덕적 캠페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유럽연합 기업실사의무화법 특별보고관인 라라 볼터스가 밝힌 것처럼 실사의무화법의 핵심은 기업의 처벌과 규제가 아닌 피해의 예방에 있다.

즉, 실사의무화법은 기업과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경제를 보장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 지속가능한 세계경제를 구축하는 데 적극 동참하려면, 진화하는 인권경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정현찬 법무법인 지평 전문위원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인권경영위원회 외부위원
한국어촌어항공단 인권경영위원회 외부위원
주한유럽연합대표부 인권분야 운영위원회 운영위원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