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이영진 씨(30)가 서울 서초구 진흥아파트 사거리 일대에 멈춰 있는 차량을 구난 장비로 구조하고 있는 모습.  /독자 제공
지난 8일 이영진 씨(30)가 서울 서초구 진흥아파트 사거리 일대에 멈춰 있는 차량을 구난 장비로 구조하고 있는 모습. /독자 제공
“서울 강남역 일대가 침수됐다는 뉴스에 무작정 뛰쳐나갔습니다. 제 지프차면 침수된 차량을 충분히 빼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익근무요원 이영진 씨(30·왼쪽)는 지난 8일 오후 10시 서초구 진흥아파트 사거리로 급히 차를 몰고 나갔다. 퍼붓듯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우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침수차 수십 대가 뒤엉켜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지프차에 침수차량을 묶어 물 밖으로 끌어냈다. 경찰과 소방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강남 일대를 돌며 차량을 건져냈다. 새벽 3시까지 5시간 동안 그가 구조해낸 차량은 모두 6대. 그의 활약은 SNS 차량 동호회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침수된 차량 내부로 물이 많이 들어가 시동도 걸리지 않는 상태였고 차 문을 열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며 “도움이 필요한 시민이 많을 것 같은 생각에 구조활동을 한 것일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8일 집중 폭우로 서울 남부 전역이 침수된 가운데 평범한 이웃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많은 시민이 위기를 넘겼다. ‘시민영웅’들은 자신의 차량으로 침수차를 견인했고, 급류에 휩쓸릴 수 있는 위기 속에서 노인을 익사 직전에 구해냈다. 이날 서울 전역에는 시간당 100㎜가 넘는 역대 최고 수준의 폭우가 내렸다. 동작구 신대방동엔 시간당 141.5㎜의 비가 내리며 서울 강수량 최고 기록(118.6㎜)을 80년 만에 넘었다.

이씨는 서초구는 물론 관악구까지 차량을 몰고 가 홀로 밤샘 구조활동을 펼쳤다. 당시 도로에는 수십 명의 시민이 물에 잠긴 차량을 버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이씨의 도움을 받아 침수 직전에 탈출한 이모씨(40)는 “우성아파트 사거리를 지나다 5분도 안 돼 차량이 침수돼 도로 한복판에 차가 멈췄다”며 “나 때문에 도로 교통이 마비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자포자기하던 찰나에 차를 옮겨줘 진짜 구세주 같았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구조 행렬은 이어졌다. 바이오 회사에 재직 중인 고호 씨(28·오른쪽)는 8일 오후 11시 지하철 7호선 신대방삼거리역 인근을 지나다 급류에 떠내려가는 할아버지의 ‘살려달라’는 소리에 본능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주변 행인 3명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할아버지를 물속에서 구조했다. 이날 신대방삼거리역에는 물이 1m 넘게 차올라 급류 속에 성인 남성도 제대로 서 있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긴 퇴근길이었다”며 “순간 할아버지를 놓쳤다가 다른 시민분들의 도움으로 구조에 성공했는데 당시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라고 했다.

관악구 삼성동시장에도 시민 영웅이 나타나 침수 피해를 막았다. 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박종진 씨(63)와 문변석 씨(56)가 9일 새벽 2시 도로 위 맨홀 뚜껑을 빼내자 무릎까지 찬 물이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며 사라진 것이다. 박씨는 “위험한 건 알고 있었지만, 과거 관악소방서에서 의용소방대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시민을 도와야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전했다.

권용훈/이광식/장강호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