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주택가. 한경 DB
서울 시내 주택가. 한경 DB
인천 계양구의 한 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는 김모씨는 최근 결혼을 준비하며 주민등록 등본을 확인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김씨의 주소가 현재 거주지인 계양구 주택이 아니라, 처음 보는 울산 남구의 집으로 등록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소가 인천에서 울산으로 바뀐 겁니다. 알고 보니, 김씨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인 송모씨가 김씨 몰래 김씨의 주소지를 옮긴 것이었습니다.

세입자 몰래 주소 인천→울산 옮기고 담보대출 받아

21일 인천 계양경찰서에 따르면 계양구 주택에 사는 전세 세입자 김모씨는 지난 11일 사기 혐의로 집주인 송모씨를 고소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집주인 송씨는 계양구 주택을 2억500만원 가량에 사들인 뒤 보증금 2억원에 전세를 내놨습니다. 단 돈 500만원만 들인 ‘갭 투기’로 2억원 상당의 주택을 산 거죠. 전세가와 매매가의 갭(차이)이 작거나 아예 없는 매물을 고르고, 세입자의 전세금만을 이용해 부동산을 늘리는 수법입니다.

김씨가 이 ‘깡통주택’에 전세 계약을 체결한 뒤 7개월 쯤 지났을 때, 집주인 송씨는 김씨의 신분증 사본을 요구했습니다. 화재보험에 들려면 세입자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신분증 사본을 확보한 집주인은 김씨의 주소를 울산 남구로 옮기고, 김씨가 살던 집에는 본인이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은 송씨가 주택담보대출을 노리고 세입자의 주소지를 옮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값과 전세값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어 담보 대출을 받기 어려워지자 마치 전세권이 설정되지 않은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는 겁니다. 실제로 전입 신고를 조작한 다음 송씨는 대부업체에서 1억원 가량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습니다.

전세권 주장 못해

문제는 김씨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를 위협 받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김씨가 송씨에게 보증금 2억원을 주고 계양구 주택에 세들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등기부등본 상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세금을 지급하고 타인의 부동산을 일정기간 동안 사용한 후, 부동산을 반환하면 전세금을 돌려받을 권리, 즉 전세권을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김씨의 주소지가 울산으로 옮겨지면서, 김씨가 송씨로부터 전세보증금 2억원을 돌려받을 권리는 대부업체가 송씨로부터 1억원의 대출금을 돌려받을 권리보다 뒤로 밀려나게 됐습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소송이나 경매를 진행하더라도 어렵습니다.

이 집을 팔아서 돈이 나오면, 등기부등본상의 순위에 따라 관련자들이 돈을 가져가기 때문인데요. 집주인은 김씨의 전세권이 삭제된 것처럼 꾸민 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등기부등본 상 대부업체의 근저당권은 설정돼있는데, 김씨의 전세권은 설정돼있지 않은 상태인 거죠.
다른 등기부등본을 예시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등기부등본은 갭투기로 80여채의 부동산을 보유한 임대사업자 한모씨 남매의 주택 중 하나의 등본입니다. 소유권을 기록한 ‘갑구’ 4순위에 6930만4609원의 ‘가압류’가 기록돼있습니다. 채권자 고모씨가 집주인 한모씨에게 청구한 금액입니다. 근저당권과 전세권을 기록한 ‘을구’에는 1순위로 서서울농업협동조합에서 설정한 7억800만원이 있습니다. 4순위에는 근저당권자 전모씨가 3000만원이 있고요. 가장 마지막 5순위로 세입자 윤모씨가 설정한 임차보증금 6000만원이 있습니다.

나중에 경매를 통해 이 부동산을 강제로 처분하더라도, 순위가 앞서는 채권자와 근저당권자가 돈을 가져가는 게 먼저입니다. 같은 건물의 비슷한 매물은 경매 과정에서 6100만원으로 감정됐습니다. 선순위 채권자와 근저당권자가 돈을 가져가면 남는 돈이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시의 윤씨는 후순위라도 임차권 설정이 돼있는데, 김씨의 경우 집주인이 몰래 김씨의 주소를 옮겼기 때문에 임차권 설정도 돼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송씨의 2억500만원짜리 집이 강제로 처분되더라도, 그 중 1억원은 대부업체에서 먼저 가져가게 됩니다. 김씨가 전세보증금 2억원을 다 돌려받기 어렵게 되는 겁니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세입자가 계양구 주택에 전입신고를 한 상태여야 대부업체나 은행 등 제3자에게도 대항할 수 있다”며 “전입신고가 돼있지 않다면, 세입자가 대부업체보다 우선해서 전세보증금을 가져갈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집주인과 김씨는 서로 임대인과 임차인으로서 계약을 했기 때문에, 김씨가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청구할 권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둘 사이에만 유효한 계약으로, 김씨가 대부업체와 같은 선순위채권자에게 우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신분증 사본, 사기에 악용될 수 있어

집주인이 김씨의 신분증을 도용해 멋대로 김씨의 주소를 바꿨기 때문에, 경찰 수사와 소송을 통해 김씨 피해가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선 신분증 사본을 타인에게 건넬 때 주의해야 합니다. 엄 변호사는 “전월세 계약을 맺을 때 임대인과 임차인이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면서도 “하지만 신분증 사본을 건네주는 행위는 필요도 없고,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만약 신분증 사본이 유출된다면 다른 금융사기에도 활용될 수 있다. 현재 금융회사들은 모바일 뱅킹 등에서는 신분증 원본이 아니라 이를 촬영한 사본만 있어도 비대면으로 신원을 확인해주고 있다. 신분증 사본만 가지도고 다른 사람 명의로 몰래 대출을 받거나 돈을 빼갈 수 있는 것이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