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 사진=넷플릭스 제공
학교 폭력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 사진=넷플릭스 제공
한 누리꾼이 과거 학교폭력(이하 학폭) 피해 사실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폭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연을 전했다. 일각에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더 이상 가해자에게 '무기'처럼 쓰이지 않도록 '범죄 피해자의 사실적시'일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도록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폭 공론화했다가 가해자에게 고소당했습니다"

학폭 피해를 주장하는 A씨가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사진은 A씨가 공개한 고소장.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학폭 피해를 주장하는 A씨가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사진은 A씨가 공개한 고소장.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상에 학폭 피해를 폭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고소당했다는 A씨는 지난 10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입장이 바뀐 사실을 토로했다.

A씨와 가해자는 초등학교 동창인 것으로 전해졌다. A씨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열람한 고소장에 따르면 가해자는 A씨가 사실적시를 통한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허위 사실적시'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소장에 적었다. A씨는 "수사 중 학폭의 실체가 인정될 경우 허위 사실적시라도 엮어보고 싶은 의지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A씨는 2021년 1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포털 사이트, 청와대 국민청원 등에 학폭 피해 사실 관련글을 올렸다. 그는 "저는 객관적 사실에 따라 일체 허위나 과장 없이 글을 올렸다"며 "(가해자의 고소로) 힘이 빠지지만, 일단 조사는 받아야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조사 시 목격자 명단과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입증에) 유리할 자료들을 제출할 생각이기 때문에 학폭 실체를 밝히는 데에는 걱정이 없다"면서도 "피해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 그로 인해 가해자와 그 가족들이 의기양양해질 것을 생각하면 좌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A씨는 2021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 심판에서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5(합헌)대 4(일부 위헌)로 아슬아슬하게 합헌 결정한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그때 위헌 결정이 났다면 저 같은 피해자가 늦게라도 공론화를 통해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해당 글을 읽은 누리꾼들은 댓글을 통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범죄자를 위한 법", "응원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헌재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헌법 위반 아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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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5일 사실을 공개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형법 307조와 310조가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헌재 판단이 나온 바 있다. 두 조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공개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진실'이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예외를 뒀다.

헌재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정보의 전파 속도가 빨라지고 파급 효과도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입법 목적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개인의 명예, 즉 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반면 당시 일부 위헌 결정을 내린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사실적시로 손상되는 것은 '과장된 사실'인 만큼, 적시된 사실이 사생활의 비밀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표현의 자유 보장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최초의 결정이다.

"범죄 피해자 사실적시는 처벌하지 말아야" 法 개정 움직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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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조항에서 규정하는 '공공의 이익'에 대한 판단이 법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모호한 기준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A씨처럼 범죄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가 고소당하는 억울한 사건도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일례로 최근 흥행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이 박연진(임지연) 일당으로부터 당한 학폭을 온라인상에 폭로했다고 가정하면 문동은이 되레 고소당할 여지가 발생하는 것. 이에 '범죄 피해자의 피해 사실적시'일 경우 처벌하지 않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2월 26일 정보통신망에서의 사실적시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범죄 피해자가 그 피해 사실에 관해 적시하거나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동법은 기본법인 '형법 개정안' 의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함께 제출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애초부터 없거나 폐지되는 추세다. 현재까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적용되는 나라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이들 나라도 진실한 사실이거나 피의자가 진실로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명예훼손으로 처벌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유엔(UN) 역시 2011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