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자산운용사 블랙록 소속 선물 투자 전문가라고 속이고 고령의 초보 투자자들에게 접근해 돈을 뜯어낸 일당이 기승을 부리자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모의 선물 거래를 실제 거래로 믿은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잃은 돈(사이버 머니)만큼의 현금을 사기꾼 일당이 빼갈 때도 “내가 실력이 없어 잃었다”고 자책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돈이 다 털릴 때까지 사기 자체를 깨닫기 힘든 가스라이팅 형태의 신종 금융 범죄”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모의 거래를 진짜 거래처럼 속여

24일 한국경제신문 취재 결과 사기범들은 SNS 오픈채팅방을 돌며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관계자인 것처럼 자신들을 소개했다. 범행 타깃은 주로 투자에 관심은 많지만 정보가 없는 고령자층으로 한정했다. 일당은 우선 이들에게 ‘블랙록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깔도록 했다. 프로그램 첫 화면에 미국 국기가 펄럭이는 ‘블랙록’ 간판이, 화면 하단에는 ‘JP모간’ ‘골드만삭스’ 등 유명 금융회사 로고 등이 박혀 있자 피해자들은 의심 없이 실제 HTS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단이 만든 모의 HTS로, 실제 선물을 거래하기 전 위험을 줄이기 위해 게임처럼 연습할 수 있게 한 가짜 프로그램이었다. 거래 결과로 포인트가 차감될 뿐 실제 현금이 정산되진 않는 훈련용 프로그램이라는 게 특징.

인천에 사는 권모씨(65)는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10개월 동안 2억5000만원 정도를 사기단에 뜯겼다. 선물 투자 첫날 수익 700만원, 둘째날 손실 1200만원, 셋째날 수익 1500만원 등 투자 결과가 널뛰듯 요동쳤다. 권씨는 낮에는 홍콩, 밤에는 미국 상품을 거래하는 등 세계 각국 선물에 투자했다.

특히 사기단은 수십 명이 속해 있는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 권씨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 방에는 아침마다 “고급 정보 덕분에 큰 수익을 벌었다”는 식의 감사 글과 함께 ‘수익 인증 샷’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 이 단톡방에 올라온 내용은 모두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기단은 권씨를 속이기 위해 수많은 유령 회원 계정을 만들어 조작한 사진을 유포했다.

특히 사기단은 피해자들이 ‘컴맹’인 점을 악용했다. HTS를 노트북에 까는 것조차 어려워하자 원격으로 접속해 대신 깔아주고, 권씨가 사기단의 대포통장에 현금을 입금하면 프로그램에 투자금을 충전해주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풀었다.

권씨가 선물 거래에서 잃으면 그만큼 현금 계좌에서 빼갔고, 종종 권씨가 돈을 따 환급을 요구하면 사기단은 권씨 계좌에 돈을 입금해줬다. 권씨는 “대포통장 계좌주가 ‘블랙록’이 아니라 찜찜했지만, 실제 돈을 벌면 환급해줘 얼마 후 의심이 없어졌다”고 했다.

권씨에게 사기 친 일당은 총 4명 정도다. 이 가운데 상담 직원 여성 2명은 번갈아 가며 상담을 했고, 권씨가 돈을 잃자 “결국 버티면 따지 않겠느냐”며 선심 쓰듯 수백만원을 입금해주기도 했다. 모두 피해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끼였다.

경찰 수사 시작해서야 피해 사실 알아

권씨는 경찰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 자신이 사기를 당했는지 몰랐다. 지난해 10월 일당은 권씨가 수중에 돈이 모두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경찰 관계자는 “선물 투자의 경우 돈을 벌 확률이 낮기 때문에 초보자 대부분이 돈을 잃는다”며 “사기단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내가 투자 실력이 없어 돈을 잃었다’고 자책하도록 만들어 범행을 숨겼다”고 설명했다. 세뇌를 통해 피해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한 셈이다.

경찰 측은 ‘블랙록 일당’과 비슷한 수법으로 활동하는 사기단이 약 20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관계자는 “선물 투자를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접근하면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며 “유사 사례를 당한 피해자가 있다면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했다.

조철오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