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는 일제가 만든 나쁜 말?…조선왕조실록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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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맞아 "근로는 일제시대 단어" 주장한 노동계
'근로'는 삼국유사에도 등장
조선왕조실록에선 199회 쓰여
"반일 프레임, 또다른 정치 분쟁만 낳아"
'근로'는 삼국유사에도 등장
조선왕조실록에선 199회 쓰여
"반일 프레임, 또다른 정치 분쟁만 낳아"
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때 아닌 명칭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근로자의 날이란 명칭을 '노동절'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예 헌법과 법률에서도 근로라는 단어를 퇴출하고 노동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29일 한국노총은 "각종 법률 용어 등에서 '근로'라는 단어를 없애고 '노동'으로 변경할 것을 정부와 국회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근로'라는 말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노역 등을 미화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라며 "노동자의 자주성·주체성을 폄훼하고, 수동적·복종적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에서도 "근로(勤勞)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라고 못 박으며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헌법은 물론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에는 '노동자'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법률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법원도 근로자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다만 최근 판결에서는 특정 사업주와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특수근로형태종사자들이나, 일용직 노동자를 일컬을 때 '노동자'로 표현하는 경향이다.
노동계가 터부시하는 '근로'라는 단어는 정말 일본 강점기에 처음 정치적 목적을 띄고 등장한 단어일까. 일제의 수탈 도구였던 '근로정신대' 등의 명칭에서 쓰이면서 이런 주장은 기정사실화돼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번역본을 제공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근로(勤勞)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총 199회 쓰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도 후삼국의 견훤과 관련된 일화에서 등장한다. 문맥상 "애써 일한다" "부지런히 힘쓴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반면 노동(勞動)이라는 단어 자체는 27번 쓰인데 그쳤다.
국권 피탈 훨씬 전인 1800년대 후반 조선의 교과서 '국민소학독본' 에서도 '근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어떤 의도가 있다면 '노동자'라는 단어를 가급적 피했어야 할 조선총독부 관보에서도 '노동자'라는 단어는 수차례 쓰이고 있다. 단어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어떤 목적 하에 사용돼 왔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각에서는 단어의 어감을 문제삼는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으로 철저히 사용자에 종속된 의미며, "노동"은 노동자의 권리와 주체성을 강조한 단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국회 법률안에도 반영됐다. 앞서 법률안에서는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으로 정의되고 있어, 국가의 통제적 의미가 담긴 용어"라며 “몸을 움직여 일함이라는 의미의 '노동'이란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일하는' 게 '종속적'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한 기사(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3월 1일 무신 1번)를 보면 "(태조가)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더불어 잠저(潛邸) 때의 서로 친숙하던 정(情)과 개국(開國)하느라고 근로(勤勞)하던 일을 담론(談論)하며 술잔을 서로 주고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는 문구가 나온다.
태조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들인 노력을 '근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부지런히' 일했다는 표현에 '종속적'이고 '국가의 통제' '수동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노동계에서는 '노동'이란 단어 사용을 기피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공산주의(레드) 콤플렉스'라고 주장한다"며 "반대로 생각하면 과거부터 사용돼 오던 단어를 일제가 잠시 사용했다는 이유로 헌법까지 개정하자는 게 되레 열등감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의 노림수' '노동자 착취 목적'이라는 지나친 '프레임'은 되레 불필요한 정치적 분란만 낳을 수 있다"며 "노동자의 노고를 위로하는 기념일로서의 의미를 되새기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고용'이란 단어를 퇴출하고 '노동'으로 대체하겠다는 주장은 문재인 정부 때 유독 힘을 받았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올해 '근로자의 날'을 기점으로 노동계의 목소리에 어느정도 힘이 실릴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지난 29일 한국노총은 "각종 법률 용어 등에서 '근로'라는 단어를 없애고 '노동'으로 변경할 것을 정부와 국회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근로'라는 말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노역 등을 미화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라며 "노동자의 자주성·주체성을 폄훼하고, 수동적·복종적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에서도 "근로(勤勞)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라고 못 박으며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헌법은 물론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에는 '노동자'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법률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법원도 근로자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다만 최근 판결에서는 특정 사업주와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특수근로형태종사자들이나, 일용직 노동자를 일컬을 때 '노동자'로 표현하는 경향이다.
노동계가 터부시하는 '근로'라는 단어는 정말 일본 강점기에 처음 정치적 목적을 띄고 등장한 단어일까. 일제의 수탈 도구였던 '근로정신대' 등의 명칭에서 쓰이면서 이런 주장은 기정사실화돼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번역본을 제공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근로(勤勞)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총 199회 쓰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도 후삼국의 견훤과 관련된 일화에서 등장한다. 문맥상 "애써 일한다" "부지런히 힘쓴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반면 노동(勞動)이라는 단어 자체는 27번 쓰인데 그쳤다.
국권 피탈 훨씬 전인 1800년대 후반 조선의 교과서 '국민소학독본' 에서도 '근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어떤 의도가 있다면 '노동자'라는 단어를 가급적 피했어야 할 조선총독부 관보에서도 '노동자'라는 단어는 수차례 쓰이고 있다. 단어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어떤 목적 하에 사용돼 왔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각에서는 단어의 어감을 문제삼는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으로 철저히 사용자에 종속된 의미며, "노동"은 노동자의 권리와 주체성을 강조한 단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국회 법률안에도 반영됐다. 앞서 법률안에서는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으로 정의되고 있어, 국가의 통제적 의미가 담긴 용어"라며 “몸을 움직여 일함이라는 의미의 '노동'이란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일하는' 게 '종속적'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한 기사(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3월 1일 무신 1번)를 보면 "(태조가)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더불어 잠저(潛邸) 때의 서로 친숙하던 정(情)과 개국(開國)하느라고 근로(勤勞)하던 일을 담론(談論)하며 술잔을 서로 주고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는 문구가 나온다.
태조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들인 노력을 '근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부지런히' 일했다는 표현에 '종속적'이고 '국가의 통제' '수동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노동계에서는 '노동'이란 단어 사용을 기피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공산주의(레드) 콤플렉스'라고 주장한다"며 "반대로 생각하면 과거부터 사용돼 오던 단어를 일제가 잠시 사용했다는 이유로 헌법까지 개정하자는 게 되레 열등감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의 노림수' '노동자 착취 목적'이라는 지나친 '프레임'은 되레 불필요한 정치적 분란만 낳을 수 있다"며 "노동자의 노고를 위로하는 기념일로서의 의미를 되새기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고용'이란 단어를 퇴출하고 '노동'으로 대체하겠다는 주장은 문재인 정부 때 유독 힘을 받았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올해 '근로자의 날'을 기점으로 노동계의 목소리에 어느정도 힘이 실릴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