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직업군인하다 홧김에 사표"…새벽 편의점 알바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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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기간 아내·아들 못만나자 결심
낮엔 중소기업 다니면서 새벽엔 편의점 일
글 쓰면서 행복에 대한 의미 되찾아
"단지 힘듦 피하기 위해 '사직'하지 마세요"
가슴 속에 언제나 사직서 한 장쯤은 품고 다닌다는 직장인들. '퇴사 마렵다' '조용한 퇴사(quiet-quitting)'와 같은 유행어는 희망도, 여유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웃픈' 자화상의 단면이다.
직장인들은 힘들 때마다 누구나 한 번쯤 '퇴사'라는 글자를 떠올린다. 궁극적으로 회사에서 성공을 일궈낸 이들조차 힘든 시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은 드물 것이다.
지난 11년간 직업군인으로 지내다 홧김에 조직을 떠난 정성화 씨(38). 그는 "모두가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퇴사를 고려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 씨는 퇴사 이후의 삶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는 뼈아픈 조언을 한다. "퇴사 이후 행복해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했다.
그는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지속되는 업무에 지쳐 있던 와중에 미사일 버튼 누르듯 자신의 마음을 푹 찌른 상사의 말 한마디에 사표를 냈다. 후련한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직장을 잃은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과 불안을 쏟아내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내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퇴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백수 예정자들에게 정 씨는 말한다. "당장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직을 떠나면 무조건 행복해지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 씨는 행복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간 미뤄뒀던 운동, 사교활동, 유튜브, 자기 계발 등에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는 데서 시작해볼 것을 권한다. 어차피 언젠가 떠날 직장이라면 눈치 보며 하던 일을 조금 줄이고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정 씨는 퇴사 후 얼마간 방황하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제야 조금씩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편의점 새벽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 계발하러 간다는 생각에 편의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고 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실을 사는 짠 내 나는 아재라고 자신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제는 행복하고 멋있는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사는 38살 정성화라고 합니다.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업군인으로 11년간 생활했습니다. 강원도 철원군에서 7년, 경남에서 4년 근무했습니다. GOP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병력을 관리하는 중대장도 했고, 퇴사 직전에는 인사과장을 했습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요?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가잖아요. 단순하게 병사보다 간부로 가면 처우가 나으니까 간부로 입대했습니다. 3년 근무하고 전역해야 했는데 직업군인 생활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조직에 남았습니다. 군대가 첫 직장생활이었고 조직의 문화, 업무수행 방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녔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야근하는 생활을 3년간 했습니다. 토요일에 잠을 몰아서 자고 일요일에는 월요일 자 업무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또 출근하곤 했어요.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야근, 나루토 분신술처럼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생기는 신기한 업무에 지쳐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화 한 편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훗날 행복하기 위해 지금의 불행을 매일매일 견디고 있다면 그건 과연 행복일까 불행일까."
당장 행복해지는 게 '나'를 위한 선택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조직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퇴사는 언제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나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인 2020년도에 사표를 냈는데요, 당시 부대 출타자를 확인하고 통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 시작하던 2020년 2월 대구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집단 감염으로 인해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면서 부대도 감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하던 때였습니다.
부대 출입과 퇴소를 엄격히 관리하는 제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와 아내는 대구에 있는 처가댁에서 떨어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연일 발생하는 상황에서 어디를 가든 지뢰밭일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에 아내는 제가 있는 부대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사정했습니다. 저는 지휘관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방적 격리' 조치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 일부 대원들을 부대 안으로 들여 별도 공간에서 2주간 격리한 후 상태를 관찰하는 제도였습니다. 몇몇 부대원들에게는 적용되던 규정이 제 가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물론 나라를 지켜야 하는 상급자 입장에선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건 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일 수 있으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퇴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나요?
물론 이전부터 업무 스트레스, 피로 등이 누적되면서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증폭돼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발생하면서 말로만 되뇌던 '사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의 안전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라를 지킬 수 있겠냐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당일 상급자는 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걸 승인해주지 않았지만, 아내는 이미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아내는 수화기 너머로 “집에서 출발했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뒤늦게 오라고 했습니다.
퇴근 후 저녁 8시쯤 위병소 앞 주차장으로 나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아내와 아이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혹여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까 아내는 우는 아이를 막 달랬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관사에 가족을 두고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퇴근 전에 전역 지원서를 공문으로 보냈습니다.
퇴사 후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나요?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파이어족(FIRE·조기 은퇴자)'과 '백수'는 다른 거거든요. 멋있는 백수가 되려면 '파이어'가 돼야 하는데 저는 그냥 '백수'가 됐으니까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웠던 건 아내의 실망감이었습니다. 저를 바라보며 아내는 얼마나 걱정했겠어요. 무엇보다도 아내는 군복을 입은 제 모습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군이라는 조직으로부터 마음이 이미 떠난 제게 결정을 번복하라고 수백번도 더 권한 아내였습니다. 아내의 마음은 보이지 않았고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독단적으로 전역했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 나름대로 했던 도전들이 있다면요?
소파·TV와 혼연일체 돼 백수 생활을 하던 제게 아내는 평생 이렇게 살 거냐며 눈치를 줬습니다. 밥벌이하기 위해 택배 회사, 건설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습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지금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새롭게 구한 직장에선 어떤 일을 하나요?
아파트나 학교에 경비원과 미화원분들을 용역을 맡는 중소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중고 신입’의 자격으로 각 작업장에서 일할 신입사원들을 뽑고 배치하는 일을 합니다. 직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등 조직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은 역할입니다. 과거 제가 하던 업무와 꽤 맞닿아 있습니다.
퇴사가 아름다워지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선 돈이 많아야겠죠.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그래야 불안한 실직 상태를 견디기 조금 수월해지거든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글쓰기를 추천합니다. 실업자가 된 이후 매주 글을 썼는데 1년도 안 돼서 50편 정도 쌓였습니다. 쓸 때는 몰랐는데 글 모음을 전부 훑어보니까 "아, 내가 이때까지 행복해지기 위한 글을 써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글을 읽고 있는 저 자신도 행복해져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글을 쓰면서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퇴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백수 예정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퇴사 이후의 삶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힘듦을 피하기 위해 '사직'이라는 도박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나중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그동안 미뤄온 운동, 악기 연습, 동호회, 유튜브, 캠핑, 자기 계발, 여행 등에 시간을 쏟아보시길 바랍니다. 퇴사하지 못해서 이런 것들을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연코 틀렸습니다. '퇴사하지 못해서'라는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불행한 이유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그때 돼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을 내려놓아도 늦지 않았습니다. 모두 행복해지시길 응원합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
낮엔 중소기업 다니면서 새벽엔 편의점 일
글 쓰면서 행복에 대한 의미 되찾아
"단지 힘듦 피하기 위해 '사직'하지 마세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까. 생애주기별 ‘숙제’에 발목 잡힌 대한민국 청년들. 대입, 취업, 연애, 결혼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낙오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가슴 속에 언제나 사직서 한 장쯤은 품고 다닌다는 직장인들. '퇴사 마렵다' '조용한 퇴사(quiet-quitting)'와 같은 유행어는 희망도, 여유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웃픈' 자화상의 단면이다.
직장인들은 힘들 때마다 누구나 한 번쯤 '퇴사'라는 글자를 떠올린다. 궁극적으로 회사에서 성공을 일궈낸 이들조차 힘든 시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은 드물 것이다.
지난 11년간 직업군인으로 지내다 홧김에 조직을 떠난 정성화 씨(38). 그는 "모두가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퇴사를 고려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 씨는 퇴사 이후의 삶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는 뼈아픈 조언을 한다. "퇴사 이후 행복해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했다.
그는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지속되는 업무에 지쳐 있던 와중에 미사일 버튼 누르듯 자신의 마음을 푹 찌른 상사의 말 한마디에 사표를 냈다. 후련한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직장을 잃은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과 불안을 쏟아내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내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퇴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백수 예정자들에게 정 씨는 말한다. "당장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직을 떠나면 무조건 행복해지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 씨는 행복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간 미뤄뒀던 운동, 사교활동, 유튜브, 자기 계발 등에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는 데서 시작해볼 것을 권한다. 어차피 언젠가 떠날 직장이라면 눈치 보며 하던 일을 조금 줄이고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정 씨는 퇴사 후 얼마간 방황하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제야 조금씩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편의점 새벽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 계발하러 간다는 생각에 편의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고 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실을 사는 짠 내 나는 아재라고 자신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제는 행복하고 멋있는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사는 38살 정성화라고 합니다.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업군인으로 11년간 생활했습니다. 강원도 철원군에서 7년, 경남에서 4년 근무했습니다. GOP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병력을 관리하는 중대장도 했고, 퇴사 직전에는 인사과장을 했습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요?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가잖아요. 단순하게 병사보다 간부로 가면 처우가 나으니까 간부로 입대했습니다. 3년 근무하고 전역해야 했는데 직업군인 생활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조직에 남았습니다. 군대가 첫 직장생활이었고 조직의 문화, 업무수행 방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녔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야근하는 생활을 3년간 했습니다. 토요일에 잠을 몰아서 자고 일요일에는 월요일 자 업무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또 출근하곤 했어요.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야근, 나루토 분신술처럼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생기는 신기한 업무에 지쳐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화 한 편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훗날 행복하기 위해 지금의 불행을 매일매일 견디고 있다면 그건 과연 행복일까 불행일까."
당장 행복해지는 게 '나'를 위한 선택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조직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퇴사는 언제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나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인 2020년도에 사표를 냈는데요, 당시 부대 출타자를 확인하고 통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 시작하던 2020년 2월 대구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집단 감염으로 인해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면서 부대도 감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하던 때였습니다.
부대 출입과 퇴소를 엄격히 관리하는 제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와 아내는 대구에 있는 처가댁에서 떨어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연일 발생하는 상황에서 어디를 가든 지뢰밭일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에 아내는 제가 있는 부대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사정했습니다. 저는 지휘관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방적 격리' 조치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 일부 대원들을 부대 안으로 들여 별도 공간에서 2주간 격리한 후 상태를 관찰하는 제도였습니다. 몇몇 부대원들에게는 적용되던 규정이 제 가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물론 나라를 지켜야 하는 상급자 입장에선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건 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일 수 있으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퇴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나요?
물론 이전부터 업무 스트레스, 피로 등이 누적되면서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증폭돼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발생하면서 말로만 되뇌던 '사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의 안전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라를 지킬 수 있겠냐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당일 상급자는 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걸 승인해주지 않았지만, 아내는 이미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아내는 수화기 너머로 “집에서 출발했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뒤늦게 오라고 했습니다.
퇴근 후 저녁 8시쯤 위병소 앞 주차장으로 나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아내와 아이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혹여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까 아내는 우는 아이를 막 달랬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관사에 가족을 두고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퇴근 전에 전역 지원서를 공문으로 보냈습니다.
퇴사 후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나요?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파이어족(FIRE·조기 은퇴자)'과 '백수'는 다른 거거든요. 멋있는 백수가 되려면 '파이어'가 돼야 하는데 저는 그냥 '백수'가 됐으니까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웠던 건 아내의 실망감이었습니다. 저를 바라보며 아내는 얼마나 걱정했겠어요. 무엇보다도 아내는 군복을 입은 제 모습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군이라는 조직으로부터 마음이 이미 떠난 제게 결정을 번복하라고 수백번도 더 권한 아내였습니다. 아내의 마음은 보이지 않았고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독단적으로 전역했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 나름대로 했던 도전들이 있다면요?
소파·TV와 혼연일체 돼 백수 생활을 하던 제게 아내는 평생 이렇게 살 거냐며 눈치를 줬습니다. 밥벌이하기 위해 택배 회사, 건설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습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지금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새롭게 구한 직장에선 어떤 일을 하나요?
아파트나 학교에 경비원과 미화원분들을 용역을 맡는 중소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중고 신입’의 자격으로 각 작업장에서 일할 신입사원들을 뽑고 배치하는 일을 합니다. 직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등 조직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은 역할입니다. 과거 제가 하던 업무와 꽤 맞닿아 있습니다.
퇴사가 아름다워지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선 돈이 많아야겠죠.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그래야 불안한 실직 상태를 견디기 조금 수월해지거든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글쓰기를 추천합니다. 실업자가 된 이후 매주 글을 썼는데 1년도 안 돼서 50편 정도 쌓였습니다. 쓸 때는 몰랐는데 글 모음을 전부 훑어보니까 "아, 내가 이때까지 행복해지기 위한 글을 써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글을 읽고 있는 저 자신도 행복해져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글을 쓰면서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퇴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백수 예정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퇴사 이후의 삶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힘듦을 피하기 위해 '사직'이라는 도박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나중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그동안 미뤄온 운동, 악기 연습, 동호회, 유튜브, 캠핑, 자기 계발, 여행 등에 시간을 쏟아보시길 바랍니다. 퇴사하지 못해서 이런 것들을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연코 틀렸습니다. '퇴사하지 못해서'라는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불행한 이유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그때 돼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을 내려놓아도 늦지 않았습니다. 모두 행복해지시길 응원합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