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유배지 강진과 보성녹차밭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초당
1박2일의 짧은 남도여행을 통해 명량대첩 유적지 울돌목과, 장보고 기념관에 이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 도착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과거 급제 후 개혁적인 정조대왕의 신임 속에 다양한 업적을 만들며 성공적인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생애 최대의 위기와 질곡을 맞게 됩니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으로 비화하며 다산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유배형을 받게 됩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사십대 초반의 다산은 부패하고 당파적 이기주의로 가득한 조선을 실학을 통해 변화시키고 백성을 위한 목민의 의지를 가진 혁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현실정치에서 깊은 뜻을 가지고 실학에 기반해 큰 이상을 가진 다산에게 유배형이 어떤 고통을 주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빛의 세계에서 순식간에 어둠의 세계로 낙하한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에 다산이 자주 머물렀음을 기념해 만든 천일각에서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초기 지역민들의 냉담과 외면속에서 거처조차 구하지 못하고 전전했습니다. 이후 외가인 해남윤씨가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을 마련하게 됩니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는 다산초당을 복원하여 사진처럼 번듯하게 지어놓았습니다. 이대 대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선생은 다산의 유배생활을 오해하게 하는 허구라고 따끔하게 꼬집어냅니다. 일견 복원된 다산초당을 보면 그의 유배생활이 그렇게 혹독하지 않았을거라는 오해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다산 초당의 모습은 작고 허름한 초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추한 그 곳에서 생의 의지를 잃고 절망의 나날을 보냈을 테지만 다산은 그곳에서 오늘까지 영향력이 있는 수 많은 학문적 저술활동과 실학의 집대성 작업을 하게됩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성품에 의한 인간적 역경의 극복과 승리라 할 수 있겠지요. 다산을 무너뜨리는 모든 한계를 뛰어 넘어 다산은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만연한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民)을 구제하려는 그의 이상이 담긴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해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다산 선생이 자주 방문했다는 백련사 가는 길에는 수령이 600년 가량된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동백숲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깊은 뜻을 가진 다산 선생에게 위로가 되었을 듯한 특별함이 느껴지는 숲입니다. 이 길을 넘어 조금 더 가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우리 역사속의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는 여행을 통해 역사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마다 여행의 목적도 각각입니다. 저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다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을 통해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마지막 일정으로 지친 심신을 녹색의 자연으로 어루만져주는 보성 녹차밭입니다. 그곳에서 자연과 차문화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기운을 회복하고 일행은 광주 무등산 아래 이름도 친근한 보리밥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수도권에서 들은 전라도 식단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풍성한 상참림에 즐거워하며 산나물에 보리밥을 비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벽에 붙은 보리밥 가격표가 단돈 오천원이라니 놀랐습니다. 돈내고 먹는 밥이지만 이쯤되니 되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늘 벼르기만 하던 전라남도 기행을 다양한 추억과 함께 마무리하고 일행은 광주역에서 다시 용산행 KTX에 몸을 싣고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여행의 아쉬움을 여운을 품고 여행에서 만난 인물과 장소를 좀 더 탐구하리라는 생각을 하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박2일의 짧은 남도여행을 통해 명량대첩 유적지 울돌목과, 장보고 기념관에 이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 도착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과거 급제 후 개혁적인 정조대왕의 신임 속에 다양한 업적을 만들며 성공적인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생애 최대의 위기와 질곡을 맞게 됩니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으로 비화하며 다산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유배형을 받게 됩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사십대 초반의 다산은 부패하고 당파적 이기주의로 가득한 조선을 실학을 통해 변화시키고 백성을 위한 목민의 의지를 가진 혁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현실정치에서 깊은 뜻을 가지고 실학에 기반해 큰 이상을 가진 다산에게 유배형이 어떤 고통을 주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빛의 세계에서 순식간에 어둠의 세계로 낙하한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에 다산이 자주 머물렀음을 기념해 만든 천일각에서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초기 지역민들의 냉담과 외면속에서 거처조차 구하지 못하고 전전했습니다. 이후 외가인 해남윤씨가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을 마련하게 됩니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는 다산초당을 복원하여 사진처럼 번듯하게 지어놓았습니다. 이대 대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선생은 다산의 유배생활을 오해하게 하는 허구라고 따끔하게 꼬집어냅니다. 일견 복원된 다산초당을 보면 그의 유배생활이 그렇게 혹독하지 않았을거라는 오해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다산 초당의 모습은 작고 허름한 초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추한 그 곳에서 생의 의지를 잃고 절망의 나날을 보냈을 테지만 다산은 그곳에서 오늘까지 영향력이 있는 수 많은 학문적 저술활동과 실학의 집대성 작업을 하게됩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성품에 의한 인간적 역경의 극복과 승리라 할 수 있겠지요. 다산을 무너뜨리는 모든 한계를 뛰어 넘어 다산은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만연한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民)을 구제하려는 그의 이상이 담긴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해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다산 선생이 자주 방문했다는 백련사 가는 길에는 수령이 600년 가량된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동백숲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깊은 뜻을 가진 다산 선생에게 위로가 되었을 듯한 특별함이 느껴지는 숲입니다. 이 길을 넘어 조금 더 가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우리 역사속의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는 여행을 통해 역사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마다 여행의 목적도 각각입니다. 저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다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을 통해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마지막 일정으로 지친 심신을 녹색의 자연으로 어루만져주는 보성 녹차밭입니다. 그곳에서 자연과 차문화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기운을 회복하고 일행은 광주 무등산 아래 이름도 친근한 보리밥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수도권에서 들은 전라도 식단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풍성한 상참림에 즐거워하며 산나물에 보리밥을 비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벽에 붙은 보리밥 가격표가 단돈 오천원이라니 놀랐습니다. 돈내고 먹는 밥이지만 이쯤되니 되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늘 벼르기만 하던 전라남도 기행을 다양한 추억과 함께 마무리하고 일행은 광주역에서 다시 용산행 KTX에 몸을 싣고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여행의 아쉬움을 여운을 품고 여행에서 만난 인물과 장소를 좀 더 탐구하리라는 생각을 하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