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든 관리자든 사람 위에 서는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점점 구름 위로 추켜올려지기 쉬운 법이다. 나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스스로 아래로 내려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경영의 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히구치 히로타로 아사이맥주 전 회장

몇 년 전 일본 저자이자 기업인이 방한한 적이 있어 그를 만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진짜 존경을 받는 인물인가요?” 일본 기업인은 실제로 그가 일본 내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고 답변해 주었다. 마쓰시타는 2008년 기업명을 파나소닉으로 변경했다.

1989년 4월에 타계한 마쓰시타그룹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노스케를 ‘경영의 신’으로 부르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첫째로 세계적 기업을 단 1대(代)만에 거의 무일푼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고, 둘째 마쓰시타 발전의 원동력은 단일 제품이나 기술이 아니라 뛰어난 경영이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이 기본적으로 적용하는 사업부제(事業部制)를 일본에서 가장 먼저 확립했는데, 세계에서 사업부제를 처음으로 실시한 듀폰과도 몇 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셋째는 이런 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경영자로 키우고 그들의 지혜와 창의력을 경영이라는 활동에 끌어들인 점이다.

세계의 경영자들 가운데 마쓰시타 고노스케만큼 많은 책을 쓴 사람은 없다. 창업자 저서가 청소년, 대학생에게 귀감이 되고 배울 점을 시사 한다는 의미에서는 한국의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 창업자들이 고노스케의 발자취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경영은 예술이며 경영자는 경영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이다.”

고노스케는 경영이라는 행위의 사회적 가치를 신봉했다. 그는 이익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결코 경영의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익은 사회 공헌의 척도’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마쓰시타는 뛰어난 경영을 통해 사회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기업이라는 작품을 남긴 것 뿐 아니라, 일본적 경영의 진수인 경영사상을 실천하고 남겼다.

그는 경영자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짐과 동시에 마음을 열고 외국을 배우라고 당부한다. 이미 마쓰시타 전기는 우리가 한창 한국전쟁 상황일 때 벌써 글로벌 기업 필립스와 합작기업을 설립했다. 패전 후 일본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했는데, 고노스케는 승전국인 미국으로 건너가 마음을 열고 미국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해 온 일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이러한 그의 자세를 꼭 배웠으면 한다.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딛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에 와카야마 시에서 동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와사무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마을 의회와 지방 관청에서 일을 했다. 그는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6살이 되던 해에 그의 가정에 불행이 찾아왔다. 부친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쌀 거래를 시작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했다. 순식간에 조상이 물려준 집과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지경이었다. 부친은 나막신 가게를 시작했으나 이 가게도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고노스케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가을에 부친은 편지를 통해 이런 얘기를 전했다. “너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알지만, 미야타라는 마음씨 좋은 화로 가게 주인이 점원을 구한다니 오사카로 갔으면 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화로 가게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화로 중에서 좋은 물건은 속새(목재기구 등을 닦을 때 쓰는 속샛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하루 종일 닦아야 하기 때문에 손은 순식간에 살갗이 벗겨졌고, 아침에 걸레질을 할 때마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 쓰라렸다.

이런 점원 생활이 세 달 즈음 계속 되었을 때 가게의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자전거가 막 유행하기 시작한 때였는데, 주인의 소개로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고노스케는 밤낮으로 걸레질을 하고 자전거 수리를 도와가며 뭐든지 열심히 배웠다. 자전거 수리는 대장간 일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좋아하는 그는 날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전기와 만나다

자전거 점원을 시작한 지 6년이 지나 열일곱 살이 되었다. 이 무렵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노스케는 매형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 놓고 전등 회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러던 중 오사카전등의 지방 영업소 내선계에 빈자리가 생겼으니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기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의 첫 번째 일은 옥내 배선 담당자의 조수였다. 석 달 정도 열심히 일한 덕분에 담당자로 승진할 수 있었다. 당시 석 달 만의 승진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그는 회사 동료의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동료는 야학에 다니는 학구파였다. 고노스케는 이 모습에 자극을 받아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스무 살에 접어들었지만, 좋아하던 전기학을 배우고 싶은 욕심에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스물두 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때 검사원으로 승진했다. 검사원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꿈꿔보는 자리였다. 검사원은 하루에 15채에서 20채의 집을 도는데, 두세 시간만 일하면 끝났기 때문에 매우 편했다.

그런데 그렇게 편하게 일을 하니 이상하게 일에 열의가 생기지 않고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검사원이 되기 전부터 소켓 개량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가 만든 소켓을 회사 주임에게 보여주었는데 ‘이런 건 못 써’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러자 어떻게든 제대로 된 소켓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그는 주임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표를 냈다.

창업을 시작하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 두고 나니 소켓을 만드는 데 쓸 자금이 부족했다. 전 직장 동료들에게 같이 일하자고 부탁했고, 그가 사는 집을 공장으로 이용했다. 1917년 마침내 소량의 소켓을 완성했다. 열흘 동안 다리품을 팔아가며 오사카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손에 쥔 돈은 10엔도 채 안 되었다. 겨우 100개를 팔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켓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었다. 넉 달 동안 번 돈이 겨우 10엔이라 일단 소켓 사업을 포기했다. 당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와 아내의 옷을 모두 전당포에 맡겨야 할 정도였다.

1918년에 본격적으로 전기 기구의 연구와 제작을 시작했다. 먼저 연결 플러그 개발에 손을 댔다. 시중 가격보다 30퍼센트 저렴한 가격과 현대적인 디자인 덕분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불경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의 공장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당시 다소 무리를 해서 7천 엔을 들여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마쓰시타 전기의 기초가 된 자전거 램프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전열부서를 신설하고 다리미를 생산했다. 그 때 고노스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불황이었다. 돌이켜 보면 불황이야말로 그에게 좋은 기회였다.

1929년 경제는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 때 설상가상으로 그는 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 때 지인이 찾아와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그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는데, 당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오늘부터 생산을 반으로 줄인다. 그러나 직원은 한 명도 줄이지 않는다. 따라서 반일 근무를 실시한다. 그리고 월급은 전액 지급한다. 대신 종업원 모두 휴일을 반납하고 재고품 소진을 위해 노력한다.” 즉시 직원들에게 이 방침을 전했고 직원들은 전원 찬성했다. 이렇게 해서 열심히 제품을 판매한 결과, 불과 두 달 만에 재고를 모두 처리해 공장을 예전처럼 가동할 수 있었다. 1930년이 되자 자전거 램프의 수요가 점점 증가했다. 라디오 업계에도 진출하면서 건전지 회사도 직영하게 되었다. 한 달에 램프는 20만 개, 전지는 1백만 개가 팔렸다.

14년 늦은 창업 기념일

이 무렵 그는 지난 온 길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생산자의 사명은 무엇일까?” 매일 밤늦게까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그는 한 가지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 신념이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가난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1932년 5월 5일을 회사 창업 기념일로 정했다. 1917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면서 14년이 지난 후에 새로 창업 기념일을 정한 이유는 바로 사명을 깨달은 날이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에 지인이 그에게 “아무리 해도 사업이 잘 되지 않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사란 손해도 보고 이익도 보면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사는 진검승부와 같아 베이면서 성공할 수 없어. 노력한 만큼 성공하는 법이지.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면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경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불경기일수록 돈을 더 버는 것이야.”

일본은 통제기를 거쳐 전시 상황에 돌입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그는 ‘PHP’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번영을 통해 평화와 행복을)’의 약자인데, 혼탁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로 잡고 올바른 자의 편이 되어 함께 번영의 길을 걷자는 염원에서 시작한 연구였다. 1950년에 27억 엔이던 판매액은 5년 후 220억 엔으로 증가했고 종업원의 수도 1만 3천명이 되어 거의 옛 수준을 회복했다.

글로벌 경영에 시동을 걸다

고노스케는 경영사상과 기술이 가장 발달한 미국을 배우기 위해 1951년 1월 출장길에 올랐다.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시야를 넓혀 세계적인 수준의 기업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1952년 10월 세 번째 해외 출장길에 올라 네덜란드의 필립스 수뇌와 기술 제휴 계약에 조인했다. 마쓰시타 전기와 필립스의 제휴 결과 1952년 12월 마쓰시타 전기공업 주식회사가 탄생했다. 이 회사는 1954년부터 전구, 형광등, 진공관, 브라운관, 트랜지스터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쓰시타 전기사업부는 이곳에서 만든 부품을 사용해 라디오, 텔레비전 등 여러 전자제품을 생산했다. 필립스와 맺은 제휴는 일본의 전자 공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53년에는 중앙연구소를 새로 만들었다. 마쓰시타 전기는 이곳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기술혁신을 시작했다. 이 연구소에는 새로운 기술설비와 공구의 연구개발까지 일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기계제작 전문 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을 신설한 이유는 미국을 돌아보고 느낀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51년 1월에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최신식 건전지 제작 기계를 샀다. 그런데 두 번째로 미국에 가서 한 건전지 공장을 견학했을 때, 전에 구입한 최신식 기계가 그 공장에서는 가장 낡은 기계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류 업체에서는 자사에서 고안한 기계를 쓰며 그 기계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류 업체가 보유한 기계는 일반 기계 업자가 파는 기계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 사실을 안 고노스케는 ‘주체성 없어 무턱대고 배우려 하거나 자존감 없이 타인의 힘과 돈에만 의지하는 자는 나약한 자이며,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고안하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5개년 계획과 주5일제를 실시하다

마쓰시타 전기의 재건이 궤도에 오른 1956년 고노스케는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 5년 동안 판매액을 4배로 늘린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 계획을 반드시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계획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수많은 일반 대중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계획은 대중의 욕망을 그대로 숫자로 나타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계획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의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만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봉사한다는 숭고한 의무에 기인해 일하는 것이지 명예나 성공 같은 사적인 욕망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이 발표에 힘을 얻어 직원들이 모두 노력한 결과, 5개년 계획의 목표 800억 엔은 4년 만에 달성할 수 있었다.

마쓰시타 전기는 이미 1932년에 무역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무역을 시작하고 해외로 진출하고자 생각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고노스케는 자국의 수요를 다 채웠는데도 여유가 생기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것이 무역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내 배가 고프면서도 가진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행동은 그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먹지 않고 타인에게 준다면 그 행위가 지속되지 못한다. 다른 이에게 베풀고 싶다면 항상 자신의 배를 먼저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베푸는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무역도 마찬가지다. 자국의 수요를 만족시킨 다음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1959년 1월 정기 경영방침 발표회에서 무역 문제를 언급해 사원들이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고노스케는 무역을 통해 자국과 상대국이 모두 번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상대국의 처지가 되어 생각함으로써 상대국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품을 연구하고 생산해야 한다.” 그는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무역을 하지 않는 한, 일본에 아무리 여력이 생긴다고 해도 무역의 본질을 충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60년 1월 경영 방침 발표회에서는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주5일 근무를 목표로 일하자’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다. “마쓰시타 전기의 제품은 점점 해외로 진출해 외국 업체들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주5일 근무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할 일을 정확히 처리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인당 GNP는 일본보다 몇 배가 높습니다. 휴일의 절반은 높은 수준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쓰고 나머지 절반은 피로를 풀기 위해 쓸 수 있도록 토요일도 휴일로 만들지 않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진정한 성공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노스케는 직원들이 모두 이런 이상을 그리며 회사 업무에 몰입하는 것이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근간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5년 후인 1965년 4월에 마쓰시타 전기는 주5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과당 경쟁의 폐해를 강조하다

고노스케는 1961년 1월 마쓰시타 전기의 사장에서 물러나 회장이 된다고 발표했다. 그 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전후 재건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 5개년 계획도 이미 달성한 상태였다. 중견 간부 3천 400명인 모인 경영 방침 발표회 때 그는 단상에 올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57년 전, 아홉 살의 나이로 오사카에서 점원 일을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사업에 종사하면서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적당한 시기가 되면 사장직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0세가 되었을 때 물러나려 했지만 마침 전쟁 중이었고, 또 전후 5년은 기업 자체가 해체의 운명에 직면했기 때문에 사장을 그만두지 못한 채 재건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끝에, 지금 사장에서 물러나 한 발짝 뒤에서 회사의 경영을 지켜보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퇴진은 회사에 커다란 이익이지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는 이런 결의와 심경을 발표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PHP 연구를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고노스케는 1963년 9월 국가경영위원회 초대로 뉴욕의 힐튼 호텔에서에서 열린 국제경영학회 모임에서 참석해서 ‘나의 경영 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외국에서 공개 연설을 하기는 처음이었고, <타임>에 소개된 그의 인생과 경영에 흥미가 있었는지 회의장은 초만원이었다. 그는 먼저 경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이라는 국가를 경영하는 것과 마을에서 작은 약국을 경영하는 것은 모두 똑같은 경영이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다시 말해 국가 경영의 목적은 그 나라 발전과 번영이며 행복이다. 한편 약국 경영은 고객을 위해 여러 가지 주의를 기울이고 서비스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둘 다 본질적으로 목적이 같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어떻게 해야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고객을 위해 최상의 서비스를 할 수 있느냐’이다. 이 경영이념과 관련해 과당 경쟁이라는 문제가 있다. 경쟁이 도를 넘어서면 파괴로 이어진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올바른 경영이념이다.”

그는 대략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하고 질의응답 순서로 넘어갔다. 그런데 질문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과당 경쟁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1억을 벌면 2억을 가지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노스케 씨와 내기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만약 말씀하신 대로 과당 경쟁을 없앨 수 있다면 저는 일본으로 가서 신발을 벗고 당신에게 절을 하겠습니다.”

그 때 고노스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면 곤란합니다. 과장 경쟁은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모두가 과당 경쟁은 죄악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깊게 생각하면 점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얘기처럼 ‘사람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더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과당 경쟁은 어쩔 수 없다’는 애매한 생각한 생각을 계속한다면 과당 경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말하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고노스케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대리점 사장을 울리다

회장이 되고 나서 업계 사람들과 만남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회사 간부에게 얘기를 해서 1964년 7월 아타미의 뉴후지야 호텔에서 마쓰시타 전기의 전국 판매회사, 대리점 사장 간담회를 열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노스케는 충격을 받았다. 모두 ‘이윤이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이 중에 이윤을 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약 30명이 손을 들었다. 나머지 170명 정도는 적자로 고생한다는 뜻이었다. 고노스케는 ‘몇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을 합시다’라고 강한 결의를 밝혔고, 원래 이틀 예정인 간담회는 하루 연장되어 사흘째로 들어섰다.

그는 ‘마쓰시타 전기가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결심하고, 사흘 째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문득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전구를 만들어 처음 팔러 다닌 시절입니다. 아직 전구의 품질이 일류가 아닌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지금 여러분이 저희 회사를 키워주지 않으면 일본에서 초일류 전구는 탄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이 전구를 키워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사정했습니다. 그러자 부탁이 통했는지 ‘좋아, 알았어. 자네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팔아주지’하고 말씀하시며 전구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 덕택에 마쓰시타 전기는 오늘날 명실상부한 최고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마쓰시타 전기가 성장한 것은 진정으로 여러분의 덕택입니다. 앞으로는 마음을 고쳐먹고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만감이 교차했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 후 신기하게도 공격적이던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도 잘못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합시다”하고 말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 때 고노스케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며 상대의 처지가 되어 솔직하게 대화하면 반드시 해결책이 생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경영자는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

앞에서 얘기한 과당 경쟁에 관한 일화이다. 1964년 10월 고노스케는 마쓰시타 통신공업이 사무용 대형 컴퓨터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회사에서는 컴퓨터 양산을 목적으로 이미 10억앤이 넘는 연구비를 투입해 5년 동안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날 미국의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부은행장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에는 컴퓨터 업체가 몇 군데나 있습니까?’ 고노스케는 7개가 된다고 했고, 부은행장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의 은행은 전 세계에 돈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회사는 어디든 거의 영업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IBM 이외에는 점점 사정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7개는 너무 많습니다.” 고노스케는 부은행장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고노스케도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돈을 빌려준 곳의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일단 결단을 내리고 발표는 했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금전이라는 유형의 손실은 물론 세간의 평가라는 무형의 손실도 컸다.

그 후 1년이 되지 않아 세간의 평가는 ‘마쓰시타가 현명한 판단을 했다’로 바뀌었다. 그 때 깨달은 바를 고노스케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 경영을 객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일을 할 때 옳고 그름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숲 속에 있는 사람은 숲 전체를 보지 못하듯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무언가에 집착하게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을 그르치는 것이다. 역시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 특히 경영자가 판단을 내릴 때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늘 영원한 청춘이다

1966년 어느덧 70세가 되자 몸이 쇠약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마쓰시타 전기의 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육체의 노화는 피할 수 없더라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젊게 살고 싶다. 언제나 청춘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시 사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몇 년 전, 나는 강연을 위해 한 성인식에 참석했는데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보고 그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그리고 청중에게 ‘만약 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전부와 바꿔서라도 여러분의 나이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젊을 뿐만 아니라 정신으로도 끝없이 희망에 부풀고 커다란 이상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는 청춘시절은 가히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해 이런 암시를 받아 ‘청춘’이라는 좌우명을 만들었다. 그는 좌우명을 손수 붓으로 써서 액자에 담았다. 그런데 오는 손님마다 액자를 보고는 그에게 한 장 써 달라고 말했다. 일일이 써 주기 곤란해서 인쇄를 해 전국 판매점에 나눠 주었다. 그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청춘

청춘이란 마음의 젊음이다.
신념과 희망이 넘치고 용기에 차
매일 새로운 활동을 계속하는 한
청춘은 영원히 그대 곁에 있다.

경영은 예술 활동이다

1967년 2월 교토에서 열린 ‘간사이 제계 세미나’에서 고노스케는 경영의 가치에 대해서 언급한다. “일본기업을 한층 더 강하게 발전시키려면 경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평소 끊임없이 경영 능력을 갈고닦음으로써 외국기업에 이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 자체가 본래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한데, 나는 이것을 ‘경영은 예술이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경제와 상업 속에는 사람의 공동생활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는 종합 예술이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속에 진리가 담겨있고 선(善)과 미(美)가 살아 있어 국가 사회에 큰 공헌을 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종합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 50주년을 맞이했다. 1917년 작은 임대주택에서 직원 두세 명으로 시작한 사업은 5년이 지나자 약 100명으로 늘어났다. 5주년 기념행사를 남부럽지 않게 하려고 생각했지만 10주년 행사를 못하게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10주년이 되었을 때도 같은 생각에 기념행사를 뒤로 미루고 말았다. 20주년 때는 전쟁 중이었고, 30주년 때는 패전 상황이었다. 드디어 창업 50주년을 맞이해 이제는 정말 때가 됐다고 생각되어 기념행사를 성대히 열기로 했다. 이른바 창업 기념식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연 것이다. ‘지금까지 50년을 마쓰시타 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기라고 한다면 오늘에야 겨우 밖으로 나와 울음을 터뜨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후세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 고노스케는 이런 결의를 직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새로운 50년을 향해 힘차게 출항할 것을 맹세했다.

늘 다시 시작하라

1973년의 절반을 넘긴 어느 날, 그 해가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 55주년이며 고노스케 자신의 나이도 여든이 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하나의 좋은 출발점이 아닐까? 그래, 이제 물러나자.’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같은 해 7월에 회장에서 물러나 상담역이 된다고 발표했다. 그는 회장 퇴임 인사말의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그에 대처할 길이 생깁니다. 한번 일에 얽매이면, 날씨가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결코 그 사업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종전 30주년인 1975년에 앞으로 26년을 더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사는 셈이다. 그는 종전 30주년 기념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포수회(褒綬會)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직은 메이지 시대 사람들이 훈장을 받고 물러날 때가 아니다. 여러분은 내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매우 젊어진 느낌이다. 내 이력은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