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봄날, 김용택
봄날



김용택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매화 꽃 보러 간 줄 알아라



[태헌의 한역(漢譯)]


春日(춘일)



君訪吾廬尋吾迹(군방오려심오적)


場圃唯有帶泥鋤(장포유유대니서)


應爲吾伴一美女(응위오반일미녀)


携手暫看梅花去(휴수잠간매화거)



[주석]


* 春日(춘일) : 봄, 봄날.


君訪吾廬(군방오려) : 그대가 나의 집을 방문하다. / 尋吾迹(심오적) : 나의 자취를 찾다.


場圃(장포) : 텃밭, 채마밭. / 唯有(오직 ~이 있다. / 帶泥鋤(대니서) : 진흙이 묻은 호미.


應爲(응위) : 응당 ~라고 여기다, 응당 ~라고 생각하다. / 吾伴一美女(오반일미녀) : 내가 한 미녀와 짝하다.


携手(휴수) : 손을 잡다. / 暫(잠) : 잠시. / 看梅花去(간매화거) : 매화를 보러 가다.



[직역]


봄날


그대가 내 집 방문해


내 자취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내가 예쁜 여자랑 짝해


손잡고 매화 꽃 보러


잠시 간 줄로 여겨라



[한역 노트]


지금은 바야흐로 매화의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화를 마음 편히 즐길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하는 이 엄중한 시기에 한가하게 꽃 타령 한다고 흉볼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역자가 이 시를 고른 이유는 지금이 바로 매화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역병(疫病)에 매실(梅實)을 쓴 역사소설이 불현듯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고한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을 보면 허준(許浚)이 역병을 매실로 다스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대목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쓴 것인지, 아니면 매실의 효능을 바탕으로 개연성 있게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소설 속의 매실처럼 효과적인 기능을 하여 이 실락(失樂)의 시기를 하루라도 빨리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매화는 꽃과 향이 좋아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전통 시기에 ‘매화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북송(北宋)의 임포(林逋)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는다’는 뜻의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성어까지 남기기도 하였다. 매화의 향기를 뜻하는 ‘암향(暗香)’과 매화꽃이 핀 가지의 성긴 그림자를 뜻하는 ‘소영(疎影)’은 바로 그의 시에서 유래한 말들이다. 역자가 보기에, ‘섬진강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김용택 시인은 달리 이 시대 우리의 ‘매화 시인’이라고도 할 만하다. 오늘 소개한 시 뿐만 아니라, <매화>나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와 같은 다른 시편들까지 보면 역자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가 좌장으로 있는 시회(詩會) 멤버인 야은(野隱:오수록 시인)께서 일전에 일이 있어 하동(河東) 악양(岳陽)에 다녀오는 길에 꽃망울이 보일 듯 말 듯한 매화 가지를 하나 꺾어와 역자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그냥 주신 게 아니라 “시 한 수 지으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으니 기실 선물이라기보다는 숙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쨌거나 역자는 정말 감사해 하며 호리병에 꽃아 두고, 방안에서 초봄의 정수(精髓)를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역자는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 역시 마음 따스한 야은께서 내게 주신 또 다른 선물인 셈이다.



書案甁梅卽事(서안병매즉사)


野隱自南携春到(야은자남휴춘도)


靜揷一枝書案前(정삽일지서안전)


半開花圖能寄友(반개화도능기우)


滿室暗香不可傳(만실암향불가전)



책상 앞 병매를 즉흥으로 읊다


야은이 남쪽에서


봄을 가지고 오셨기에


가지 하나 고요히


책상 앞에 꽂아 두었네


반쯤 핀 꽃그림은


벗님에게 부칠 수 있지만


방안에 가득한 매화 향기는


전할 수가 없구나



연 구분 없이 6행으로 이루어진 원시(原詩) <봄날>을 역자는 칠언 4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원시에는 없는 내용을 몇 글자 보태기도 하였다. 한역시의 압운자는 ‘鋤(서)’와 ‘去(거)’이다.


2020. 2. 2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