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화의 걷기인문학] 럭셔리한 정신 소비 - 걷기의 영성화
정신의 럭셔리 소비
걷기의 영성화

천천둘레길, 만보산책로, 숲속 힐링길, 명상산책길, 암자순례길, 노을길, 다도의길, 회상길, 가족길, 사색길, 치유길, 행복의길, 사랑의길, 소롱콧길 …….

대한민국에 있는 걷는 길의 이름이다. 길을 걸으면 영혼이 맑아질 것 같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놀라간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지어진 최근의 길 이름도 전혀 즐겁지도 구체적 형상을 지닌 현실적 이름도 아니다. 손으로 잡기 어렵지만 걷다보면 영혼이 맑아지고 지혜로워질 것 같은 이름이 다수이다. 육체적 필요성이 줄어드는 현대 기술사회에서 당연하다.

순례는 한 발씩 육체를 움직임으로써,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혼의 목적지를 향하여 물리적으로 움직인다. 순례가 없었다면 영혼의 목적지에 닿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용서나 치유나 진리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는 영원히 어려운 문제지만, 어떻게 여기에서 저기까지 걸어갈 것인지는 알고 있다. (걷기의 인문학, 레베카 솔닛)

이제 걷기는 단순한 육체적인 활동이 아니다. 육체적 활동으로서 걷기는 자동차가 대신해준다. 과거의 하위 병사나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 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전쟁이나 노동으로서 걸었다. 하지만 현대의 걷기는 스스로의 육체적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걷는다. 걷는다고 해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시간이 절약되는 것은 아니다. 속초에서  해파랑길을 걸은 적이 있다. 대포항에서 외옹치를 지나 속초 해수욕장에서 커피 마시고, 동명항에서 건어물을 산 다음에 장사항까지 걸었다. 바닷길을 따라서 걸으며 두 눈이 시원해짐을 만끽했다. 서울에서 회색 건물만 보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파란 바다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래서 내륙에 살다가 바다를 보면 정신이 순화되는 느낌이 좋다. 하지만 같은 비용으로 서울에서 즐기면 좀 더 푸짐하고 넉넉하게 맛있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우선 속초까지의 왕복 교통비와 하루 숙박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파랑길을 걷기 위하여 이틀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였고, 앞으로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부산부터 고성까지 동해안을 종주하는 해파랑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렇게 걷기를 즐기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열풍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을 무릎쓰면서 걸을까?

웰빙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잘 사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웰빙은 자본주의의 극대화로 말미암은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러한 양식을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잘먹고 잘살자’.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급하게 자동차에 실려서 목적지에 던져지듯이 내려지면 증명사진 찍듯이 후다닥 찍고 다음 여행지로 쫓기듯이 했다. 그런 여행에서 인간의 감각은 사라지고, 새로움에 대한 전율도 상실한 채 한 장의 종이로만 보상된다. 그러나 만져지고 느껴지는 아날로그 사회에 살다가 추상적인 데이터와 가치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람들 감각이 사라지는 현실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욕망은 불안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느리고 구체적이며 감각이 살아있음을 갈구하기 시작하였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육체 활동이다. 따라서 걷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본질적 여행이기도 하다. 현대는 다양한 여행의 수단이 있다. 육체를 편하게 하는 자동차, 비행기, 캠핑카 ….. 그런데 왜 가장 힘든 여행의 형태가 다시금 우리의 관심을 끌까?

다이어트를 위해 걷는 젊은 여성들, 건강을 위한 어른들, 우울증 치료를 위해 걷는 주부들까지, 하지만 이 모든 걷기여행 붐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돌아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 것은 우리가 만질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영혼의 목적지에 대한 동경이다. 현대인에게 걷기는 그 목적지에 대한 순례지이다. 실제로 걷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이고, 그 순례자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걷는 여행이다. 그 길의 끝은 성야고보의 성골함을 보기 위함이다. 한국적 걷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의 올레길도 카미노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초는 다분히 순례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 순례의 의미가 변형되고 있다. 만지고 느껴야하는 아날로그적 인간이 추상적 데이타와 가치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에 산다. 빠르게 디지털화하는 세상에 서서히 흐르는 아날로그적 인간은 호논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런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식을 찾는 방법으로 ‘두 다리로 걷기’가 나타났다. 가상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좌표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걷기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이다. 뭔가 새로운 세계에서 익숙한 방법으로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걷기’, 일시적 유행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사회의 거대한 흐름의 변화를 ‘메가트렌드’라고 한다. 걷기트렌드는 또 다른 걷는 활동 중의 하나인 ‘등산’과는 또 다르다. 등산은 힘들지만 산에 오르는 활동에 중점을 두지만, 걷기는 ‘어디를 왜 걷는 가?’도 중요하다. 즉, 테마가 있는 길들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한산 둘레길이 각 코스마다 고유한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표현하고, 그 길을 걷는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었다.

‘건강, 여행, 레져, 의미, 영성의 회복, 경제성’.

이처럼 ‘걷기’는 다양한 주제를 소화하면서 한국인의 놀이문화를 바꾸어 가고 있다. 혼자도 할 수 있고, 여럿이도 할 수 있으면서 누구에게나 부담이 가지 않는 새로운 놀이문화이다. 이제 우리는 생각이 났을 때 아무 때나, 일상생활에서 입던 옷과 신발을 신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도심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걷는 길’이라고 하지 않는다. 흙이 있고, 자갈이 있고, 낙엽이 있고, 숲이 있으면서 의미가 주어진 길을 ‘걷는 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걷는다’의 것의 지금의 한국적 의미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자연에의 본질적 회귀’라고 할 수있다. 좀 더 자연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걷기’라는 메가트렌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트렌드 속에 더 깊이 들어간 사람들 중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맨발’로 걷고 있다. 그 들은 ‘자연 즐기기와 건강 챙기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다.

걷기를 즐기는 이들을 위하여 더 많은 좋은 길들이 조성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친환경적이면서, 코로나19 대응적인 레져를 찾는 요즘 ‘걷기’처럼 알맞은 야외활동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걷기’를 단순히 신체활동으로만 여기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사교활동은 물론 숲을 거닐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찾는 ‘영성회복 활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앞으로도 ‘걷기열풍’은 그 열기를 더해갈 것이 분명하다. 이제 사람들은 ‘슬로우 레져’, 올레길 식을 표현하면 ‘놀멍 쉬멍 즐기기’가 새로운 대세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사는 종교계에서도 무관심하지 않다. 어쩌면 ‘걷기열풍’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계가 될 소지가 크다. 애초부터 걷기 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까미노’는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기독교 성지가 여러 군데 있기는 하지만, 숫자가 적을뿐더러 거리상 떨어져 있어 어떤 연관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불교계는 다르다. 예를들면 월정사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오대산 천년의 숲 옛길따라 걷기대회’는 월정사와 상원사가 가지고 있는 전설, 부처님 진신사리 그리고 천년의 숲이 어우러져 있다. 그야말로 현재의 걷기열풍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 ‘종교적 이야기, 자연친화적 도로, 자아 성찰적 명상’이 골고루 버무려져있다. 이같은 유리함은 산 속에 절이 많은 불교계로서는 활용도가 높은 새로운 이벤트의 출현이다. 현대들어서 모든 종교의 신도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계는 좀더 많은 신도, 잠재적 신도와 능동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우선 ‘자아성찰적 명상’은 불교의 기본 도리이다. 제주 올레길을 개척한 서명숙 제주올레이사장도 자아에 대한 고민 끝에 스페인의 까미노를 걸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도 역시 삶과 자아성찰이 주제이다. ‘종교적이야기’는 한국의 어느 산골엔들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을까.

또한 ‘자연친화적 도로’는 대부분의 절들이 산 속에 위치하여 도시의 지방자치단체들과는 달리 굳이 ‘걷기용 길’을 개발하지 않아도 된다. 이전까지만해도 불평거리였던 절로 연결되는 ‘비포장도로’야말로 ‘걷기 매니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연친화적 도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그저 자연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신발을 벗자’고만 하면, 더 없는 ‘걷기명상’의 근거지가 되는 것이다. 베트남의 불교승려인 ‘탁닛한’이 주장했던 ‘걷기명상’의 관념을 한국적으로 조금만 고치면 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까미노’를 유명하게 했고, 서명숙은 ‘제주 올레’를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의 ‘걷는 길’의 길이와 아름다운 풍광이 더 많이 개발될 것이다. 하드웨어는 이제 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걷기에 대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할 것이다. ‘왜 걷는가?’에 대한 성찰적 주제와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어울리면서 우리를 흥겹게 하는 이야기를 가장 잘 만들어내는 길이 앞으로 한국의 ‘까미노’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홍재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