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또 한여름, 김종길
또 한여름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태헌의 한역]
又盛夏(우성하)

驟雨息後來蟬鳴(취우식후래선명)
重浥已濕小園庭(중읍이습소원정)

驟雨下而停(취우하이정)
蟬鳴止復生(선명지부생)
又逢一盛夏(우봉일성하)
嗚呼如此經(오호여차경)

雨聲與蟬聲(우성여선성)
猶側淸耳廳(유측청이청)
又逢一盛夏(우봉일성하)
如此黙送行(여차묵송행)

[주석]
* 又(우) : 또, 또한, 역시. / 盛夏(성하) : 한여름.
驟雨(취우) : 소나기. / 息(식) : 쉬다, 그치다. / 後(후) : ~한 후에. / 來蟬鳴(내선명) : 매미소리가 오다, 온 매미소리. ‘蟬鳴’은 아래의 ‘蟬聲(선성)’과 마찬가지로 매미소리라는 뜻이며, 압운자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重(중) ; 거듭, 다시. / 浥(읍) : ~을 적시다. / 已濕(이습) : 이미 젖다. / 小園庭(소원정) : 작은 정원. ‘園庭’은 ‘庭園’과 같은 말로, 압운 때문에 도치시킨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구절에서 ‘已’와 ‘小’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추가한 글자이다. “已濕小園庭” 전체가 ‘浥’의 목적어가 된다.
下而停(하이정) : (비가) 오다가 멈추다.
止(지) : 그치다, 멎다. / 復(부) ; 다시, 또. / 生(생) : 생겨나다, 일다.
逢(봉) : ~을 만나다. / 一盛夏(일성하) : 하나의 한여름. ※이 구절은 “또 한여름”을 역자가 임의로 한역한 표현이다.
嗚呼(오호) : 아아! 의문 내지 감탄으로 여겨지는 원시의 “이렇게 지나가는가.”를 감탄구로 간주하고, 한역시에 감탄의 어기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역자가 임의로 보탠 시어이다. / 如此(여차) : 이렇게, 이처럼. / 經(경) : 지나다, 지나가다.
雨聲(우성) : 빗소리. 이 시에서는 ‘소나기 소리’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 與(여) : ~와, ~과 / 蟬聲(선성) : 매미소리.
猶(유) ; 여전히, 오히려. / 側淸耳廳(측청이청) : 맑은 귀를 기울여 듣다. ‘淸耳’는 원시의 “아직은 성한 귀”를 역자가 나름대로 의역한 표현이다. ‘맑은 귀’는 ‘(성하여) 깨끗한 귀’로 볼 수 있다.
黙(묵) : 묵묵히, 말없이.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 送行(송행) : 가는 자를 전송하다. 원시의 “지나보내다”를 나름대로 한역한 표현이다.

[한역의 직역]
또 한여름

소나기 멎은 후에 매미소리가 와
이미 젖은 작은 뜰 다시 적신다

소나기는 오다가 멎고
매미소리는 그쳤다 다시 이나니
또 만난 하나의 한여름
아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소나기 소리와 매미소리를
여전히 말쑥한 귀 기울여 듣나니
또 만난 하나의 한여름
이렇게 말없이 지나보내는구나

[한역 노트]
시를 눈으로만 읽는 사람이 있고, 입으로만 읽는 사람이 있으며, 눈과 입은 물론 가슴으로도 읽는 사람이 있다. 같은 시를 읽더라도 사람에 따라 이해의 깊이가 천차만별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자가 보기에 이 시는 읽는 방식에 따라 깊이나 넓이가 정말로 많이 달라질 수 있는 시가 아닐까 싶다.

역자는 이 시를 감상하면서 우선 이 시에서 주된 소재로 다루어진 소나기와 매미소리에 주목하였다. 이 둘은 한여름을 한여름이게 하는 소품(小品)이면서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공통점을 간과하거나 가볍게 보아 넘긴다면 이 시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둘의 공통점을 짚어보기로 하자. 일단 둘 다 한여름의 손님으로 와서 대지를 적시는데, 하나는 물방울로 적시고 하나는 소리로 적신다. 시인이 1연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음으로 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둘 다 요란스럽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왜 둘 다 요란스러운 걸까? 소나기나 매미소리는 무엇인가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층(氣層)이 안정되지 못해 우는 것이 소나기라면, 심사(心事)가 안정되지 못해 쏟아지는 것이 매미의 울음이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소나기나 매미소리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매미소리가 그쳤다가 다시 일듯, 오다가 그쳤던 소나기 역시 또 다시 오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여름은 요란스러움의 반복이 되는 셈인데, 이 반복이 없다면 한여름은 한여름이 결코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친 후에 들려오는 매미소리는 바로 불볕이 시작된다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소나기와 불볕이 반복되는 한여름에 대해, 시인이 자신의 관점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고통의 시간’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시인이 만일 고통의 시간으로 이해했다면, “이렇게 지나가는가.”와 “이렇게 지나보내는가.”와 같은 언급이 있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언급은 또 단순히 가는 한여름을 그저 아쉬워하는 뜻만 담은 것도 아니다. 한여름은 하늘이 대자연을 담금질하는 시간이다. 불볕으로 한껏 달구었다가 소나기로 식히는 이 담금질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계절이 바로 한여름인 것이다. 대자연은 이 담금질 속에서 조금씩 성숙하여 마침내 풍요의 계절을 빚어내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하는데, 노경에 접어든 시인이 담금질의 계절에 자기 스스로를 담금질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세월을 그냥 보내고만 있기에, 얼마간의 회한의 뜻을 담아 “이렇게 지나가는가.”, “이렇게 지나보내는가.”라는 말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시인이야 말로 인생의 한여름 시기를 매우 모범적으로 담금질하여 빛나는 결실(結實)을 보여준 학자이기 때문에, 시를 통해 슬쩍 비춘 얼마간의 회한은 당연히 겸손의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것은 또 계절적으로 더더욱 나태해지기 십상인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따가운 회초리질로 다가온다. 역자에게 이 시가 부차적으로, ‘수고하는 한여름이 없다면 풍요로운 가을도 없다’는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아직은 성한 귀”로 소나기 소리와 매미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단순히 그것을 즐긴다거나 그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이 누리에 가을이 오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초라한 가을이라도 결코 거저 오는 법은 없다. 한여름의 담금질이 없다면 그 어떤 가을도 없을 것이므로, 남은 여름 불볕을 무던히 견뎌보기로 하자. 아침저녁으로 기운이 벌써 다른 것만 해도 정녕 고마운 일이 아닌가!

역자는 5연 16행으로 된 원시를 칠언 2구와 오언 8구로 이루어진 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한역시는 원시의 내용을 감안하여 3단(段)으로 구성하였는데 1단은 원시의 제1연에 해당되는 칠언 2구이며 매구에 압운하였다. 원시의 제2연과 제3연을 2단으로, 제4연과 제5연을 3단으로 구성하였다. 2단과 3단은 각각 오언 4구이며 각기 1, 2, 4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鳴(명)’·‘庭(정)’, ‘停(정)’·‘生(생)’·‘經(경)’, ‘聲(성)’·‘廳(청)’·‘行(행)’이 된다.

2021. 8. 17.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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