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昭君怨(소군원), 東方虬(동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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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昭君怨(소군원)
東方虬(동방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주석]
* 昭君怨(소군원) : 왕소군(王昭君)의 원망(怨望). 왕소군의 본명은 왕장(王嬙)이지만, 자가 소군(昭君)이어서 보통 왕소군으로 부른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있다가 흉노족(匈奴族)의 추장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흉노 땅에서 생을 마쳤다. 훗날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자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또는 명비(明妃)로 일컫기도 하였다.
* 東方虬(동방규) : 당대(唐代)의 시인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용문(龍門)에 나아가 노닐 때 수행한 관원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는 먼저 지은 자에게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는데, 좌사(左史)로 있던 동방규가 시를 가장 먼저 지어 도포를 하사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胡地(호지) : 오랑캐의 땅. 흉노족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중원 (서)북쪽의 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 無(무) : ~이 없다. / 花草(화초) : 꽃과 풀.
* 春來(춘래) : 봄이 오다. / 不似(불사) : ~와(과) 같지 않다.
* 自然(자연) : 자연히, 저절로. / 衣帶(의대) : 옷 입은 위에 매는 띠, 허리띠. / 緩(완) : 느슨해지다.
* 非是(비시) : ~이 아니다. / 爲(위) : ~을 위하다. / 腰身(요신) : 허리품, 허리둘레, 몸매. [번역]
왕소군의 원망
오랑캐 땅에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자연스레 허리띠가 느슨해진 거지
(가는) 허리둘레 위한 게 아니라네
[번역노트]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무엇인가 일이 있는 봄이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언급되던 이 시구를 이태백(李太白)의 시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기실은 중국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시절의 시인이었던 동방규(東方虬)가 지은 위의 시에서 유래한 명구(名句)이다.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제목의 세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 가운데 마지막 편이 되는 이 시는, 이 시의 내용만으로는 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하여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왕소군(王昭君)에 얽힌 아래와 같은 이야기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서시(西施) · 초선(貂蟬) ·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 사대(四大) 미녀 가운데 한 명으로 칭해지는 왕소군은 본래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후궁이었지만, 흉노족(匈奴族)의 추장이 화친(和親)의 명목으로 한나라 황실의 여인을 요구했을 때 그 추장에게 보내졌던 인물이다. 왕소군과 같은 절세의 미녀가 흉노의 땅으로 가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애초에 원제는 후궁이 많아 궁정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초상화를 보고는 마음에 드는 후궁을 골라 동침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에 후궁들은 황제의 은총을 받고자 화가들에게 경쟁적으로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주기를 간청하였는데, 왕소군만이 뇌물을 바치지 않아 그녀의 초상화가 가장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흉노족이 황실의 여인을 요구했을 당시에 원제가 주저없이 왕소군을 보내라고 명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할 즈음에야 비로소 절세의 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원제는 안타까움과 분노감을 주체하지 못해 당시 담당 궁정 화가였던 모연수(毛延壽)를 바로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후대에 왕소군과 관계되는 다양한 장르의 비극적인 문학작품이 수도 없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야사(野史) 덕분이었다.
흉노족 추장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소군 덕분에 그 당시 변방이 꽤나 오랫동안 평화로울 수 있었다는 것은 팩트[Fact]이다. 왕소군은 추장의 아들 하나를 낳고 왕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으며, 그 추장이 죽은 후에는 흉노족의 수계혼(收繼婚) 관습에 따라 추장직을 승계한 추장의 장남에게 다시 시집을 가, 딸 하나를 낳고 편안한 여생을 보냈던 모양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한나라 황궁에 있었다면 어쩌면 평생토록 황제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을 운명에 비하면 엄청 행복하게 산 것이라고 보는 논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중원(中原) 땅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인들은 대부분 그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어 문학작품을 양산하였다. 오늘 역자가 소개하는 이 시 역시 그러한 비극성을 모티브로 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오랑캐로 칭해진 흉노의 땅이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기 때문에 중원의 절기로 따지면 봄이어도 아직 꽃도 풀도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그러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은 것이다. 꽃이 피고 풀이 돋아나는 아름다운 봄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얼마간 시름을 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은, 피어난 꽃과 돋아난 풀이 세상에 가득하여도 봄이 봄일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3구에서 허리둘레가 줄어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허리둘레가 줄어든 것은 천지에 봄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봄일 수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왕소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볼 수조차 없다는 절망감과 거기에서 길어올려진 슬픔들이 차곡차곡 고뇌로 쌓였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고뇌로 인해 어찌 허리둘레가 줄어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어는 바로 “自然”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럽게”나 “저절로”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머나먼 오랑캐 땅에서 왕소군이 인간적으로 느껴야만 했을 모든 고뇌가 그 안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다르고 풍광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데서 느꼈을 그 많은 고뇌를, 시인이 “自然”이라는 말 한 마디로 슬쩍 넘어간 것은 무성의나 능청스러움이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문학 기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自然”이라는 말은, 왕소군의 허리둘레가 줄어든 것은 고뇌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뜻이지, 총애를 받기 위하여 음식을 줄여가며 인위적으로 힘을 쓴 결과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간 있을 것이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몸이 봄의 한복판에 있어도 느낌은 살을 에는 한겨울 같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만 해도 겨울 한복판에 있다 한들 마음은 봄 속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논리로 역자가 예전에 한겨울 중에 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노래해본 어쭙잖은 시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우리들 하루하루가 언제나 따뜻한 봄과 같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冬日遣懷(동일견회)
歡交無舊亦無新(환교무구역무신)
但恨事多逢不頻(단한사다봉불빈)
天凍地氷何足嘆(천동지빙하족탄)
含杯共樂是陽春(함배공락시양춘)
겨울날에 울적한 회포를 풀다
기쁜 교분이야 오랜 사귐 새 사귐 구분이 없지만
그저 한스럽기는 일이 많아 만날 때가 잦지 않다는 것.
하늘 얼고 땅 어는 게 무어 탄식할 것이랴!
술잔 들고 즐거움 함께 하는 것이 곧 따뜻한 봄이거늘…
오늘 소개한 동방규 시인의 시는 오언절구이며 압운자는 ‘春(춘)’과 ‘身(신)’이다.
2023. 3. 28.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昭君怨(소군원)
東方虬(동방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주석]
* 昭君怨(소군원) : 왕소군(王昭君)의 원망(怨望). 왕소군의 본명은 왕장(王嬙)이지만, 자가 소군(昭君)이어서 보통 왕소군으로 부른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있다가 흉노족(匈奴族)의 추장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흉노 땅에서 생을 마쳤다. 훗날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자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또는 명비(明妃)로 일컫기도 하였다.
* 東方虬(동방규) : 당대(唐代)의 시인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용문(龍門)에 나아가 노닐 때 수행한 관원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는 먼저 지은 자에게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는데, 좌사(左史)로 있던 동방규가 시를 가장 먼저 지어 도포를 하사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胡地(호지) : 오랑캐의 땅. 흉노족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중원 (서)북쪽의 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 無(무) : ~이 없다. / 花草(화초) : 꽃과 풀.
* 春來(춘래) : 봄이 오다. / 不似(불사) : ~와(과) 같지 않다.
* 自然(자연) : 자연히, 저절로. / 衣帶(의대) : 옷 입은 위에 매는 띠, 허리띠. / 緩(완) : 느슨해지다.
* 非是(비시) : ~이 아니다. / 爲(위) : ~을 위하다. / 腰身(요신) : 허리품, 허리둘레, 몸매.
왕소군의 원망
오랑캐 땅에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자연스레 허리띠가 느슨해진 거지
(가는) 허리둘레 위한 게 아니라네
[번역노트]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무엇인가 일이 있는 봄이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언급되던 이 시구를 이태백(李太白)의 시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기실은 중국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시절의 시인이었던 동방규(東方虬)가 지은 위의 시에서 유래한 명구(名句)이다.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제목의 세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 가운데 마지막 편이 되는 이 시는, 이 시의 내용만으로는 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하여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왕소군(王昭君)에 얽힌 아래와 같은 이야기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서시(西施) · 초선(貂蟬) ·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 사대(四大) 미녀 가운데 한 명으로 칭해지는 왕소군은 본래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후궁이었지만, 흉노족(匈奴族)의 추장이 화친(和親)의 명목으로 한나라 황실의 여인을 요구했을 때 그 추장에게 보내졌던 인물이다. 왕소군과 같은 절세의 미녀가 흉노의 땅으로 가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애초에 원제는 후궁이 많아 궁정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초상화를 보고는 마음에 드는 후궁을 골라 동침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에 후궁들은 황제의 은총을 받고자 화가들에게 경쟁적으로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주기를 간청하였는데, 왕소군만이 뇌물을 바치지 않아 그녀의 초상화가 가장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흉노족이 황실의 여인을 요구했을 당시에 원제가 주저없이 왕소군을 보내라고 명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할 즈음에야 비로소 절세의 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원제는 안타까움과 분노감을 주체하지 못해 당시 담당 궁정 화가였던 모연수(毛延壽)를 바로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후대에 왕소군과 관계되는 다양한 장르의 비극적인 문학작품이 수도 없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야사(野史) 덕분이었다.
흉노족 추장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소군 덕분에 그 당시 변방이 꽤나 오랫동안 평화로울 수 있었다는 것은 팩트[Fact]이다. 왕소군은 추장의 아들 하나를 낳고 왕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으며, 그 추장이 죽은 후에는 흉노족의 수계혼(收繼婚) 관습에 따라 추장직을 승계한 추장의 장남에게 다시 시집을 가, 딸 하나를 낳고 편안한 여생을 보냈던 모양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한나라 황궁에 있었다면 어쩌면 평생토록 황제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을 운명에 비하면 엄청 행복하게 산 것이라고 보는 논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중원(中原) 땅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인들은 대부분 그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어 문학작품을 양산하였다. 오늘 역자가 소개하는 이 시 역시 그러한 비극성을 모티브로 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오랑캐로 칭해진 흉노의 땅이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기 때문에 중원의 절기로 따지면 봄이어도 아직 꽃도 풀도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그러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은 것이다. 꽃이 피고 풀이 돋아나는 아름다운 봄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얼마간 시름을 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은, 피어난 꽃과 돋아난 풀이 세상에 가득하여도 봄이 봄일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3구에서 허리둘레가 줄어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허리둘레가 줄어든 것은 천지에 봄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봄일 수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왕소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볼 수조차 없다는 절망감과 거기에서 길어올려진 슬픔들이 차곡차곡 고뇌로 쌓였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고뇌로 인해 어찌 허리둘레가 줄어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어는 바로 “自然”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럽게”나 “저절로”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머나먼 오랑캐 땅에서 왕소군이 인간적으로 느껴야만 했을 모든 고뇌가 그 안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다르고 풍광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데서 느꼈을 그 많은 고뇌를, 시인이 “自然”이라는 말 한 마디로 슬쩍 넘어간 것은 무성의나 능청스러움이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문학 기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自然”이라는 말은, 왕소군의 허리둘레가 줄어든 것은 고뇌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뜻이지, 총애를 받기 위하여 음식을 줄여가며 인위적으로 힘을 쓴 결과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간 있을 것이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몸이 봄의 한복판에 있어도 느낌은 살을 에는 한겨울 같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만 해도 겨울 한복판에 있다 한들 마음은 봄 속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논리로 역자가 예전에 한겨울 중에 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노래해본 어쭙잖은 시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우리들 하루하루가 언제나 따뜻한 봄과 같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冬日遣懷(동일견회)
歡交無舊亦無新(환교무구역무신)
但恨事多逢不頻(단한사다봉불빈)
天凍地氷何足嘆(천동지빙하족탄)
含杯共樂是陽春(함배공락시양춘)
겨울날에 울적한 회포를 풀다
기쁜 교분이야 오랜 사귐 새 사귐 구분이 없지만
그저 한스럽기는 일이 많아 만날 때가 잦지 않다는 것.
하늘 얼고 땅 어는 게 무어 탄식할 것이랴!
술잔 들고 즐거움 함께 하는 것이 곧 따뜻한 봄이거늘…
오늘 소개한 동방규 시인의 시는 오언절구이며 압운자는 ‘春(춘)’과 ‘身(신)’이다.
2023. 3. 28.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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