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패닉(Panic, 극심한 공포, 공황)에 빠졌다. 사람도 울고 짐승도 울고 땅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세월호 참사! 정부는 참사의 핵심에 유병언을 놓았다. 유병언만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나라전체를 들쑤셨다. 찾아 헤매기를 수개월! 국민의 의혹이 정부를 향할 즈음 유병언의 사체라며 국민들 앞에 내 놓았다. 그의 죽음에 제기된 의문에 정부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유병언과 함께 국민들의 의혹도 땅 속에 묻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로 낱낱이 드러날 뻔 한 정경유착(政經癒着)의 고리를 그렇게 보존했다. 하늘이 준 기회를 가차 없이 버렸다. 어영부영 참사 1년!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가슴은 지금도 찢어지지만 정부는 국민의 아픔을 헤아릴 겨를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정부는 지금도 불운한 심청이를 길러내며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요즘 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성완종! 2014년 윗분들의 무사안위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인물이 유병언이라면 2015년의 제물은 성완종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정부는 진실을 밝힐 의지가 없어 보인다. 망자는 말이 없다. 고맙게도 성완종도 죽었다. 그는 죽음이 자신의 억울함을 대변하고 한을 풀어 주리라 기대했겠지만 죽음을 선택한 순간 이 게임에서 졌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성완종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를 애도하는 마음은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보았을 때만 그렇다. 국민은 다시 지켜본다. 그러면서도 자포자기(自暴自棄)한다. 지켜봄은 한 낱 희망이다. 다시 붉어진 부정부패척결에 대한 기대다. 자포자기는 또 이러다 말거라는 불신(不信)이다. 언제나 민초(民草)들만 정의(正義)를 외친다. 그럼 가진 자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를까? 그럴 리가 없다. 다만 가지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아버렸을 뿐이다. 특히 권력이 그렇다. 권력은 인간 최대의 무기이고 가장 강력한 유혹이다.

이완구를 보라! 그의 비열함과 추악스러운 변명들을. 욕심이다. 그에게서는 그 어떤 철학도 보이지 않는다. 인생도 정치도. 오직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욕심뿐이다. 어쩌면 국민이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지 모른다. 가져보지 못해서 갖지 않아서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리를 지키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들에게 우리의 살길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귀찮고 불편한 소음에 불가할지 모른다.

특검을 들먹이던 문재인도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지 않고 김무성의 물귀신 작전은 더욱 힘을 얻었다. 나도 조사를 받을 테니 당신들도 받아라! 라는 식의 발언은 아이들이의 말이어도 치사한 말이다. 지켜보는 국민이 부끄럽다. 정치를 한다고 모두가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인품이 없었거나 그 자리가 그들을 망쳤거나! 차라리 신호등 없는 도로에 사고가 없듯 무정부가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그런 나라에서 정의를 가장 잘 찾아 볼 수 있는 반면, 가장 나쁘게 경영되는 나라에서는 불의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며…”

– 플라톤의 국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