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양광모 연어처럼 돌아간다 어린 새끼들을 이끌고 오래전 떠내려 왔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유년의 비늘들 빈 주머니면 어떠리 내일은 보름달이 뜨리니 가난한 마음에도 달빛은 한가득 밤이 깊을수록 송편은 점점 커지고 아비 어미 연어 얼굴에는 기쁨이 사뭇 흘렀다 [태헌의 한역] 秋夕(추석) 回歸似鰱魚(회귀사연어) 但携稚子身(단휴치자신) 往昔漂下處(왕석표하처) 溯流向上臻(소류향상진) 秋日淸...
코스모스 김진학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몸매 간밤의 바람에 행여 허리라도 다쳤나 네가 있는 강둑을 한걸음에 왔는데 거울 같은 하늘에 하늘 닮은 코스모스 내게 하는 인사말 나 괜찮아 가을이잖아 [태헌의 한역] 秋英(추영) 吹則恐飛纖弱身(취즉공비섬약신) 昨夜有風腰或辛(작야유풍요혹신) 一路直到汝居岸(일로직도여거안) 旻如鏡子汝肖旻(민여경자여초민) 却投候語向我云(각투후어향아운) 吾人尙可今秋辰(오인상가금추신) [주석] * 秋英(추영) : 코스모스. 吹則恐飛(취즉공비) : 불면 아마 날아갈 듯하다. / 纖弱(섬약) : 가녀리다. / 身(신) : 몸, 몸매. 昨夜(작야) : 어젯밤. / 有風(유풍) : 바람이 있다, 바람이 불다. / 腰或辛(요혹신) : 허리가 혹시 아프다, 허리를 혹시 다치다. 一路(일로) : 한길, 한달음. / 直到(직도) : 바로 ~에 이르다, 바로 ~에 오다. / 汝居岸(여거안) : 네가 사는 언덕. 旻(민) : 하늘, 가을 하늘. / 如(여) : ~과 같다. / 鏡子(경자) : 거울. / 汝肖旻(여초민) : 너는 하늘을 닮았다. 却(각) : 문득, 도리어.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投候語(투후어) : 인사말을 던지다, 인사말을 하다. / 向我云(향아운) : 나에게 말하다. 吾人(오인) : 나. / 尙可(상가) : (오히려) 괜찮다. / 今秋辰(금추신) : 지금은 가을(날)이다. [한역의 직역] 코스모스 불면 날아갈 듯한 가녀린 몸 간밤에 바람 불어 허리 혹시 다쳤나 네가 사는 강둑을 한걸음에 왔더니 하늘은 거울 같은데 하늘 닮은 너 도리어 인사말 던져 내게 말했지 나는 괜찮아 지금 가을이잖아 [한역 노트] 역자가 초등학교에
쉬는 날 김용택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빛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태헌의 한역] 休日(휴일) 君輩圖生費心多(군배도생비심다) 今日只休詩亦置(금일지휴시역치) 立於淸秋靑天邊(입어청추청천변) 脚蹴殘陽喫遊戱(각축잔양끽유희) [주석] * 休日(휴일) : 쉬는 날. 君輩(군배) : 그대들. / 圖生(도생) : 삶을 도모하다, 살다. / 費心多(비심다) : ...
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태헌의 한역] 自畵像(자화상) 拔草場圃上(발초장포상) 到今無所竣(도금무소준) 對鏡有一夫(대경유일부) 庶或過五旬(서혹과오순) [주석] * 自畵像(자화상) : 자화상. 拔草(발초) : 풀을 뽑다. / 場圃(장포) : 채마밭, 정원, 마당. / 上(상) : ~의 위, ~의 위에서 到今(도금) : 지금까지, 여태. ...
어머니가 고등어 굽던 날 강성위 어머니가 고등어 굽던 날 할아버지 친구분께서 느닷없이 찾아오셨다 온 집안이 고등어 냄새뿐이어도 그날 난 겨우 지우개만한 고등어 토막을 먹었다 너무 작아 눈물 흘리며 먹었다 [태헌의 한역] 母親燒炙鯖魚日(모친소자청어일) 母親燒炙鯖魚日(모친소자청어일) 祖父友人忽來宿(조부우인홀래숙) 全家遍滿熏魚香(전가편만훈어향) 愚生僅食如棗肉(우생근식여조육) [주석] * 母親(모친) : 모친, 어머니. / 燒炙(소자) : (불에 사르고) 굽다. / 鯖魚(청어) : 고등어. ‘鯖魚’는 청어(靑魚)를 뜻하기도 하고 고도어(古刀魚)를 뜻하기도 하는데, ‘古刀魚’는 고등어를 우리 식으로 표기한 한자어이다. / 日(일) : 날, ~하는 날. 祖父(조부) : 할아버지. / 友人(우인) : 친구, 벗. / 忽(홀) : 문득, 갑자기. / 來宿(내숙) : 와서 묵다, 묵으러 오다. 全家(전가) : 온 집안. / 遍滿(편만) : ~이 널리 차다, ~이 꽉 차다. 熏魚香(훈어향) : 생선 굽는 냄새. 愚生(우생) : 나. 자기(自己)를 겸손(謙遜)하게 일컫는 말이다. / 僅(근) : 겨우. / 食(식) : ~을 먹다. / 如棗肉(여조육) : 대추와 같은 고기, 대추만한 고기. ‘대추’는 원시의 ‘지우개’를 대신하여 사용해본 말이다. [한역의 직역] 어머니가 고등어 굽던 날 어머니가 고등어 굽던 날 조부님 벗께서 문득 오시어 묵으셨다 온 집안에 생선 굽는 냄새 가득했어도 나는 겨우 대추만한 고기를 먹었을 뿐 [한역 노트] “여름 손님은 범보다 더 무섭다.”는 말은 전기(電氣)도 없던 농경 사회에서 만들어진 말로 보인다. 아무리 시골이라 하여도 “접빈객(接賓客)”의 문화는 소중한
어둠이 되어 안도현 그대가 한밤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한역] 爲黑暗(위흑암) 吾君誠願作華星(오군성원작화성) 的的悠悠通宵在(적적유유통소재) 吾人須欲爲黑暗(오인수욕위흑암) 廢眼掩耳立君背(폐안엄이립군배) [주석] * 爲(위) : ~이 되다. / 黑暗(흑암) : 어둠, 암흑. 吾君(오군) : 그대, 당신. / 誠(성) : 진실로, 정말.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願(원) : ~을 원하다. / 作(작) : ~이 되다. / 華星(화성) : 빛나는 별, 아름다운 별. 的的悠悠(적적유유) : 초롱초롱. / 通宵(통소) : 밤을 새다, 밤새도록. / 在(재) : 있다, 존재하다. 吾人(오인) : 나. / 須(수) : 모름지기, 마땅히.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廢眼(폐안) : 눈을 감다, 눈을 막다. / 掩耳(엄이) : 귀를 가리다, 귀를 막다. / 立(입) : ~에 서다. / 君背(군배) : 그대의 등, 그대의 뒤. [직역] 어둠이 되어 그대가 정말 빛나는 별이 되어 초롱초롱 한밤 내내 있고 싶다면 나는 마땅히 어둠이 되어 눈 막고 귀 막고 그대 뒤에 서리 [한역 노트] 세상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낮이라고 빛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밤이라고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에는 어둠의 속성을 지닌 그림자가 있고, 밤에는 빛의 속성을 지닌 달과 함께 별이 있다. 그리하여 빛과 어둠은 밤낮에 관계없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어떤 요소가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밤과 낮이 갈릴 뿐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웃음의 힘 반칠환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태헌의 한역] 笑之力(소지력) 攀緣薔薇今越牆(반연장미금월장) 身犯惡事破顔愷(신범악사파안개) 人人忘捕皆隨笑(인인망포개수소) 花朶踰垣何非罪(화타유원하비죄) [주석] * 笑之力(소지력) : 웃음의 힘. 攀緣薔薇(반연장미) : ‘攀緣’은 (다른 물건을) 잡고 기어오른다는 뜻이고, ‘薔薇’는 장미꽃이다. 역자는 ‘攀緣薔薇’를 넝쿨장미의 뜻으로 한역하였다. / 今(금) : 이제, 지금.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越牆(월장) : 담을 넘다. 身犯惡事(신범악사) : 몸이 나쁜 일을 범하다, 곧 몸이 죄를 범하다. 이 네 글자는 “현행범이다”라는 시구를 역자가 나름대로 풀어서 표현한 것이다. / 破顔愷(파안개) : 웃는 얼굴이 즐겁다, 활짝 웃다. 人人(인인) : 사람들, 사람들마다, 누구나. / 忘捕(망포) : 체포하는 것을 잊다, 잡는 것을 잊다. / 皆(개) : 모두, 다. / 隨笑(수소) : 따라 웃다. 花朶(화타) : 꽃이 핀 가지, 꽃. / 踰垣(유원) : 담을 넘다. ‘越牆’과 같은 뜻이다. / 何非罪(하비죄) : 왜 죄가 아닌가, 어째서 죄가 아닌가? [한역의 직역] 웃음의 힘 넝쿨장미가 지금 담을 넘고 있다 몸은 죄 범하는데 웃는 얼굴 즐겁다 누구나 체포 잊고 다 따라 웃는다 꽃의 월담은 어째서 죄가 아닌가 [한역 노트] 금전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 사랑의 힘, 웃음의 힘…… 심지어 힘의 힘까지 온갖 종류의 힘들이 세상에 넘쳐나도 사랑의 힘과 함께 웃음의 힘
<그림 : 김이조님> 장마 조영수 하느님도 우리 엄마처럼 건망증이 심한가 보다 지구를 청소하다가 수도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콸콸콸콸, 밭에 물이 차서 수박이 비치볼처럼 떠오르고 꼬꼬닭도 알을 두고 지붕 위에서 달달 떨고 새로 산 내 노란 우산도 살이 2개나 부러졌는데 아직도 콸콸콸콸 하느님, 수도꼭지 좀 잠궈 주세요 [태헌의 한역] 霖雨(임우) 上帝亦復有健忘(상제역부유건망) 恐與吾母可比...
사랑할 때는 윤준경 사랑할 때는 불도 끄지 못했네 사랑할 때는 잠도 들지 못했네 사랑할 때는 꽃도 못 보고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못했네 사랑 엎지를까 봐 모로 눕지도 못했네 뒤도 돌아보지 못했네 그대만 보고 가다가 넘어진 줄도 몰랐네 [태헌의 한역] 愛君時(애군시) 吾愛君時不熄燈(오애군시불식등) 吾愛君時不成睡(오애군시불성수) 吾愛君時不看花(오애군시불간화) 愛外諸事總不遂(애외제사총불수) 吾恐愛覆不側臥(오공애복불측와) 吾恐愛覆不後顧(오공애복불후고) 日日唯瞻君而行(일일유첨군이행) 全然不知吾身仆(전연부지오신부) [주석] * 愛君時(애군시) : 그대 사랑할 때(는). ‘君’은 아래의 ‘吾(오)’와 함께 시구(詩句)의 의미의 완결성을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충한 시어(詩語)이다. 吾(오) : 나. / 不熄燈(불식등) : 불을 끄지 않다, 불을 끄지 못하다. 不成睡(불성수) : 잠을 이루지 못하다. 不看花(불간화) : 꽃을 보지 못하다. 愛外諸事(애외제사) : 사랑 외의 여러 일들. 편의상 ‘사랑 밖에는 아무 일도’로 번역하였다. / 總不遂(총불수) : 모두 다 하지 못하다. 吾恐(오공) : 내가 ~을 걱정하다. 의미의 완결성을 위하여 역자가 보충한 시어이다. / 愛覆(애복) : 사랑이 엎질러지다, 사랑이 쏟기다, 사랑이 무너지다. / 不側臥(불측와) : 모로 눕지 못하다. 不後顧(불후고) : 뒤 돌아보지 못하다. ‘後顧’는 ‘顧後’와 같은 의미이며, 압운 때문에 도치되었다. 日日(일일) : 날마다. / 唯(유) : 오직, 다만. / 瞻君而行(첨군이행) : 그대를 (쳐다)보며 가다. 全然(전연) : 전혀, 도무지. 역시의 행문(行文)을 고려하여 보충한 시어
밤기차 안상학 칠흑 같은 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마에 불 밝히고 달리는 것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멀리서 기다리는 너에게 쓸쓸하지 말라고 쓸쓸하지 말라고 내 사랑 별 빛으로 먼저 보내는 것이다 [태헌의 한역] 夜間列車(야간열차) 漆黑夜中向君路(칠흑야중향군로) 額上架燈力飛馳(액상가등력비치) 此決非是路不熟(차결비시로불숙) 君在遠處待人兒(군재원처대인아) 唯願吾君不蕭索(유원오군불소삭) 先送愛心以星煇(선송애심이성휘) [주석] * 夜間列車(야간열차) : 밤기차, 야간열차. 漆黑夜中(칠흑야중) : 칠흑같이 어두운 밤중에. / 向君路(향군로) : 그대에게 가는 길. 額上(액상) : 이마 위. / 架燈(가등) : 등을 달다. / 力飛馳(역비치) : 힘껏 나는 듯이 달리다. 此(차) : 이, 이것. / 決(결) : 결코. / 非是(비시) : ~이 아니다. / 路不熟(노불숙) : 길이 익숙하지 않다, 길에 익숙하지 않다. 君在(군재) : 그대가 ~에 있다. / 遠處(원처) : 먼 곳. / 待人兒(대인아) : 나를 기다리다. ‘人兒’는 친애하는 사람에 대한 애칭으로 흔히 애인(愛人)에 대하여 쓴다. 唯(유) : 오직, 그저. / 願(원) : ~을 원하다, ~을 바라다. / 吾君(오군) : 그대. / 不蕭索(불소삭) : 쓸쓸하지 않다. 先(선) : 먼저. / 送(송) : ~을 보내다. / 愛心(애심) : 사랑하는 마음. / 以星煇(이성휘) : 별빛으로. [직역] 밤기차 칠흑 같은 밤에 그대 향해 가는 길 이마 위에 등 달고 힘껏 달리나니 이는 결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대 멀리서 나를 기다리는 때문 그저 그대 쓸쓸하지 말길 바래 사랑의 맘 먼저 별빛으로 보내는 것 [한역 노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여행을 할 때마다 늘 3등 열차를 이용
강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태헌의 한역] 江水(강수) 切莫只看前方進(절막지간전방진) 江水逢壁轉身行(강수봉벽전신행) 切莫躁急亦促急(절막조급역촉급) 瀑布激流至沼平(폭포격류지소평) 無心江水到永遠(무심강수도영원) 空虛心舟達充盈(공허심주달충영...
연잎 문근영 살랑거리는 연못의 마음 잡아 주려고 물 위에 꽂아놓은 푸른 압정 [태헌의 한역] 蓮葉(연엽) 淵心蕩漾(연심탕양) 欲使靜平(욕사정평) 水上誰押(수상수압) 靑綠圖釘(청록도정) [주석] * 蓮葉(연엽) : 연잎. 淵心(연심) : 연못 한 가운데, 연못의 마음. / 蕩漾(탕양) : (물결 따위가) 살랑거리다. 欲使(욕사) : ~로 하여금 …하게 하다. 여기서는 ‘使’ 뒤에 ‘淵心’이 생략되었다. / 靜平(정평) : 평정(平靜). 고요하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水上(수상) : 물 위. / 誰押(수압) : 누가 눌러두었나?, 누가 꽃아 두었나? 靑綠(청록) : 청록 빛. 푸르다. / 圖釘(도정) : 압정(押釘)의 중국식(中國式) 표현. 그림 따위를 고정시키기 위한 쇠못이라는 뜻이다. [직역] 연잎 연못의 맘 살랑거려 고요하게 해주려고 물 위에 누가 꽂았나? 푸른 압정! [한역노트] 바람에 살랑거리는 수면(水面)을 연못의 마음으로, 수면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연잎을 그 마음을 잡아주는 압정(押釘)으로 비유한 이런 동시(童詩)는 주된 독자인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유쾌하고 즐겁게 하기에 충분할 듯하다. 그리고 “살랑거리는 연못의 마음”이라는 시구(詩句)는 자연스레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으로 생각의 무게중심을 옮겨가게 한다. 연못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호수(湖水)에서 무시로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잡아주어야 할까? 압정은 일종의 못인지라 아무래도 따끔거릴 테니 무엇인가 묵직한 것으로 눌러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예로부터 무엇인가를 눌러두는 돌을 ‘누름돌’로 불러왔다. 역자에게는
하루살이와 나귀 권영상 해 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 줄래? 하루살이가 나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안 돼. 내일도 산책 있어. 모레, 모레쯤 어떠니? 그 말에 하루살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섭니다. 넌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태헌의 한역] 蜉蝣與驢子(부유여려자) 予復欲逢君(여부욕봉군) 暮前能不能(모전능불능) 蜉蝣問驢子(부유문려자) 驢子卽答應(여자즉답응) 今夕固不可(금석고불가) 明日有逍遙(명일유소요) 明後始有隙(명후시유극) 君意正何如(군의정하여) 蜉蝣含淚轉身曰(부유함루전신왈) 爾汝全然不知予(이여전연부지여) [주석] * 蜉蝣(부유) : 하루살이. / 與(여) : 연사(連詞). ~와, ~과 / 驢子(여자) : 나귀. 予(여) : 나. / 復(부) : 다시. /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을 하고 싶다. / 逢君(봉군) : 그대를 만나다, 너를 만나다. 暮前(모전) : 저물기 전, 해 지기 전. / 能不能(능불능) : ~을 할 수 있나 없나?, ~이 될까 안 될까?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問(문) : ~을 묻다, ~에게 묻다. 卽(즉) : 즉시, 곧바로. / 答應(답응) : 응답하다, 대답하다. 今夕(금석) : 오늘 저녁. / 固(고) : 진실로, 정말로. 한역(漢譯)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不可(불가) : 불가하다, 안 된다. 明日(명일) : 내일. / 有逍遙(유소요) : 산보(散步)가 있다. 明後(명후) : 모레. 명후일(明後日)을 줄여 사용한 말이다. / 始(시) : 비로소. 아래의 ‘有隙’과 함께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有隙(유극) : 틈이 있다, 짬이 있다. 君意(군의) : 그대의 생각, 너의 생각. 아래의 ‘正’과 함께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正(정) :
내 안의 당신 김영재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를 버려야 하듯 당신을 만났으니 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당신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태헌의 한역] 吾中吾君(오중오군) 渡江應捨舟(도강응사주) 逢君已棄吾(봉군이기오) 吾中吾君兮(오중오군혜) 吾君卽是吾(오군즉시오) [주석] * 吾中(오중) : 내 속의, 내 안의. / 吾君(오군) : 그대, 당신. 渡江(도강) : 강을 건너다. / 應(응) : 응당. / 捨舟(사주) : 배를 버리다. 逢君(봉군) : 당신을 만나다. / 已(이) : 이미. / 棄吾(기오) : 나를 버리다. 兮(혜) : ~야! ~여! 호격(呼格) 어기사(語氣詞). 卽是(즉시) : 바로 ~이다, 곧 ~이다. [직역] 내 안의 당신 강을 건너면 응당 나룻배를 버리듯 당신을 만나 이미 나를 버렸습니다 내 안의 당신이여! 당신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한역 노트] 이 시의 제1행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를 버려야 하듯”은,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뜻의 사벌등안(捨筏登岸)이라는 성어(成語)와 일맥상통한다. 불교에서 유래한 이 성어는, 열반의 언덕에 이르면 그제까지 방편으로 삼았던 정법(正法)이라는 뗏목도 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하게 장자(莊子)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야 한다.”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을 설파(說破)하였다. 이런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모종의 근본을 확립하면 지엽적인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사소한 일에 얽매여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 시는, ‘사벌등안’이나 ‘득어망전’이 현시(顯示)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의
사랑 정호승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태헌의 한역] 愛(애) 花欲離水不可得(화욕리수불가득) 鳥欲離枝不可得(조욕리지불가득) 月欲離地不可得(월욕리지불가득) 吾欲離汝不可得(오욕리여불가득) [주석] * 愛(애) : 사랑. 花(화) : 꽃. / 欲離(욕리) : ~을 떠나려고 ...
은발이 흑발에게 유안진 어제는 나 그대와 같았으나 내일은 그대가 나와 같으리라. [태헌의 한역] 銀髮向於黑髮(은발향어흑발) 昨日余如汝(작일여여여) 明日汝如余(명일여여여) [주석] * 銀髮(은발) : 은발, 백발(白髮), 흰머리. / 向於(향어) : ~에게. / 黑髮(흑발) : 흑발, 검은 머리. 昨日(작일) : 어제. / 余如汝(여여여) : 나는 그대와 같다. 明日(명일) : 내일. / 汝如余(여여여) : 그대는 나와 같다. [직역] 은발이 흑발에게 어제는 내가 그대와 같았으나 내일은 그대가 나와 같으리라. [한역 노트] 이 시는 역자가 여태 한역한 시 가운데 가장 짧은 작품이다. 정확하게는 한역시 본문에 사용된 한자(漢字) 수가 가장 적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오언고시(五言古詩) 2구로 재구성한 한역시에서 중복 사용된 글자를 제외하면 단 6자로 이루어진 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는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인간 세상의 철리(哲理) 하나가 오롯이 구현(具現)되어 있다. 그러니 어찌 시가 꼭 길어야만 하겠는가? 시인은 백발에 대한 생각이나 감회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에, 색깔이 다른 머리카락끼리의 대화라는-기실은 일방적인 ‘들려줌’이지만- 색다른 설정을 통하여 백발의 비애를, 정확하게는 그런 백발을 머리에 이고 사는 이들의 비애를 에둘러 노래하였다. ‘양자강(揚子江)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는 말과 비슷하게, 어떤 흑발이든 결국 세월의 물결에 밀려 백발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역(不可逆)의 섭리를 담담하게 얘기한 것이다. 나이는 누구나 한 해에 한 살씩 더하는 것이지만, 백발이 성하는 속도는 사
부자지간 이생진 아버지 범선 팔아 발동선 사이요 얘 그것 싫다 부산해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자동차 사이요 얘 그것 싫다 육지놈 보기 싫어 그것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어머니 사이요 그래 뭍에 가거든 어미 하나 사자 [태헌의 한역(漢譯)] 父子之間(부자지간) 父邪今賣帆船買機船(부야금매범선매기선) 兒兮余惡船中聲紛繽(아혜여오선중성분빈) 父邪然則賣船買動車(부야연즉매선매동차) 兒兮余嫌車上看陸人(아혜여혐차상간륙인) 父...
행복 나태주 어제 거기가 아니고 내일 저기도 아니고 다만 오늘 여기 그리고 당신 [태헌의 한역] 幸福(행복) 不是昨日其所(불시작일기소) 亦非明日彼處(역비명일피처) 但只今日此席(단지금일차석) 而且眼前爾汝(이차안전이여) [주석] * 幸福(행복) : 행복. 不是(불시) : ~이 아니다. / 昨日(작일) : 어제. / 其所(기소) : 그곳, 거기. 亦非(역비) : 또한 ~이 아니다. / 明日(명일) : 내일. / 彼處(피처)...
봄이 간다커늘 무명씨 봄이 간다커늘 술 싣고 전송 가니 낙화 쌓인 곳에 간 곳을 모르노니 유막(柳幕)에 꾀꼬리 이르기를 어제 갔다 하더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태헌의 한역] 今春云將去(금춘운장거) 載酒欲送行(재주욕송행) 落花處處積(낙화처처적) 不知在何方(부지재하방) 柳幕黃鳥曰(유막황조왈) 昨日離此鄕(작일리차향) [주석] 今春(금춘) : 금년 봄, 올 봄. / 云(운) : ~라고 말하다, ~라고 하다. / 將去(장거) : 장차 가려하다, 장차 떠나려 하다. 載酒(재주) : 술을 싣다. /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 送行(송행) : 전송하다, 배웅하다. 落花(낙화) : 낙화, 떨어진 꽃. / 處處(처처) : 곳곳에. / 積(적) : 쌓다, 쌓이다. 不知(부지) : ~을 알지 못하다. / 在(재) : ~에 있다. / 何方(하방) : 어느 쪽, 어느 방향. 柳幕(유막) : 버들막. 휘늘어진 버들가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버들 숲을 가리키기도 한다. / 黃鳥(황조) : 노란 새, 꾀꼬리. / 曰(왈) : ~라고 말하다, ~라고 하다. 昨日(작일) : 어제. / 離(리) : ~를 떠나다. / 此鄕(차향) : 이 고을, 이 마을, 이곳. [직역] 올 봄이 곧 갈 것이라 하여 술을 싣고 전송하려 했더니 낙화는 곳곳에 쌓여 있는데 봄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네 버들 숲에서 꾀꼬리 말하길 어제 이곳을 떠났다고 하네 [漢譯 노트] 다음 주면 벌써 6월이니 지금이 봄이라 하더라도 가장 막바지 봄이겠다.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 봄을 돌아보면서 역자는 특별히 현대시가 아닌 옛 시조 한 수를 한역해 보았다. 오늘 소개하는 이 시조가 가는 봄을 노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송춘(送春)’을 노래한 시편(詩篇)과는 사뭇 다른 정서
우주를 껴안다 김세연 꽃을 보듯 그대를 보고 그대를 보듯 꽃을 본다 봄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그 향기 다할까 문 활짝 열어 와락 우주를 껴안는다 꼼짝 마라, 그대 이제 내 안에 있으니 [태헌의 한역] 擁太空(옹태공) 看君若看花(간군약간화) 看花若看君(간화약간군) 花香乘春風(화향승춘풍) 暗暗敲心門(암암고심문) 開門憐香盡(개문련향진) 猛然擁太空(맹연옹태공) 千萬勿欲動(천만물욕동) 君今在吾中(군금재오중) [주석] * 擁(옹) : ~을 껴안다. / 太空(태공) : 먼 하늘, 우주(宇宙). 이 시에서는 우주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看君(간군) : 그대를 보다. / 若(약) : ~과 같다. / 看花(간화) : 꽃을 보다. 花香(화향) : 꽃향기. / 乘(승) : ~을 타다. / 春風(춘풍) : 봄바람. 暗暗(암암) : 몰래. / 敲(고) : ~을 두드리다. / 心門(심문) : 마음의 문. 開門(개문) : 문을 열다. / 憐香盡(연향진) : 향기가 다할까 아까워하다. 猛然(맹연) : 갑자기, 와락. 千萬(천만) : 절대로, 결코. / 勿欲動(물욕동) : 움직이려고 하지 말라. 今(금) : 이제, 지금. / 在吾中(재오중) : 내 속에 있다, 내 안에 있다. [직역] 우주를 껴안다 꽃을 보듯 너를 보고 너를 보듯 꽃을 본다 봄바람을 탄 꽃향기가 몰래 마음의 문 두드린다 향기 다할까 아까워 문 열고 와락 우주를 껴안는다 절대 움직이려 하지 마라 그대 이제 내 안에 있으니 [漢譯 노트] 노래가 가수의 전유물이 아니듯 시 역시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위의 시를 쓴 김세연씨는 시집을 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문학잡지 등에 시를 게재한 적도 없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