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특별한 한역시를 준비하며…. 이번 가을학기에 역자는 학생들에게 다소 엉뚱한 과제를 하나 부과하게 되었다. 지난 칼럼에서 잠깐 언급했던 바이지만 학생들에게 4행으로 된 한글 영물시(詠物詩)를 지어 제출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아 참, 역자의 칼럼을 오늘 처음으로 대하는 분이 계시다면, 다른 것은 차치하고 지난주의 칼럼 “병든 짐승-도종환” 만큼은 꼭 일독해주시기 바란다. 애초에 역자는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잘 된 작품 몇 편은 한시로 번역해주겠노라는 약속을 하였더랬다. 그런데 막상 과제를 받고 보니 우열을 정한다는 게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젊은 청년들의 싱싱한 생각들을, 우와 열로 나누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 학기 수업 기념으로 학생들의 모든 작품을 한시로 만들어주겠노라는 다소 무모한 약속을 덜컥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듯 역자의 강의가 다소 빡세었던 관계로 줄줄이 수강 취소를 한 뒤에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이 겨우 열다섯 명…… 그리하여 마침내 15수의 학생들 영물시와 한역 영물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역시는 몇몇 구절에 대해 제법 큰 폭으로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로 표시] 총명한 청년들을 단지 약간 더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선생이라는 자격으로 만날 때, 아! 그 때 느끼게 되는 기쁨은 정말이지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기쁨이 역자가 앞으로 소개할 영물시의 한역(漢譯)에도 얼마간은 묻어있지 않을까 여겨본다. 맹자(孟子)도 그런 기쁨을 제대로 느껴 저 유명한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명제를 완성하여 세상에 남기게 되었을
병든 짐승 도종환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태헌의 한역(漢譯)] 病獸(병수) 山獸忽有病(산수홀유병) 靜靜踞而蹲(정정거이준) 植耳林間風(식이임간풍) 己舌舐傷痕(기설지상흔) 忍待痛日過(인대통일과) 吾亦今安存(오역금안존) [주석] * 病獸(병수) : 병든 짐승. 山獸(산수) : 산짐승. / 忽(홀) : 문득, 갑자기. / 有病(유병) : 병이 있다, 병이 들다. 靜靜(정정) : 고요히, 가만히. / 踞而蹲(거이준) : 웅크리고 있다. ‘踞’나 ‘蹲’ 모두 웅크린다는 뜻이다. 植耳(식이) : 귀를 세우다, 귀를 기울이다. / 林間風(임간풍) : 숲 속의 바람. 己舌(기설) : 자기 혀. / 舐(지) : ~을 핥다. / 傷痕(상흔) : 상흔, 상처. 忍待(인대) : ~을 참고 기다리다. / 痛日過(통일과) : 아픈 날이 지나가다. 吾(오) : 나. / 亦(역) : 또한, 역시. / 今(금) : 이제. / 安存(안존) : 편안히 있다, 가만히 있다. [직역] 병든 짐승 산짐승은 문득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 속의 바람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날이 지나가길 참고 기다리나니 나도 이제 가만히 있자 [漢譯 노트] 역자가 출강하는 대학에서 ‘영물시(詠物詩)’에 대해 강의를 한 후에 학생들에게 4행으로 된 한글 영물시를 지어 제출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당(唐)나라 시기에 굳어진 일반적인 영물시의 양식은, 음영(吟詠)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물상을 나타내는 글자는 물론 그것과 직접적으
첫눈 목필균 까아만 밤에 내리는 함박눈 바라만 보아도 순결해지는 가슴 속에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하나 한 겹, 두 겹, 세 겹 덮히고 덮히고 덮혀서 아득히 지워졌던 기억 선명하게 다가오는 얼굴 하나 [태헌의 한역] 初雪(초설) 誠如漆黑夜(성여칠흑야) 鵝毛從天落(아모종천락) 望則爲潔胸臆裏(망즉위결흉억리) 毫無聲息留足跡(호무성식류족적) 一層一層又一層(일층일층우일층) 積後復積埋記憶(적후부적매기억) 倏忽有一顔(숙홀유일안) 鮮然自近迫(선연자근박) [주석] * 初雪(초설) : 첫눈. 誠如(성여) : 진실로 ~와 같다. / 漆黑夜(칠흑야) : 칠흑같이 어두운 밤. 鵝毛(아모) : 거위 털. 함박눈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한자어이다. / 從天落(종천락) : 하늘로부터 떨어지다. 望則爲潔(망즉위결) : 바라보면 깨끗해지다. / 胸臆裏(흉억리) : 가슴 속. 毫無(호무) : 전혀 ~이 없다. / 聲息(성식) : 소리와 숨, 기척. / 留足跡(유족적) : 발자국을 남기다, 남겨진 발자국. 一層(일층) : 한 층, 한 겹. / 又(우) : 또, 또한. 積後(적후) : 쌓인 후. / 復積(부적) : 다시 쌓이다. / 埋記憶(매기억) : 기억을 묻다. 倏忽(숙홀) : 문득. / 有一顔(유일안) : 얼굴 하나가 있다. 鮮然(선연) : 선연히, 분명히. / 自(자) : 스스로, 절로. / 近迫(근박) : 다가오다. [직역] 첫눈 정말 칠흑 같은 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 바라보면 순결해지는 가슴 속에 아무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한 겹, 한 겹, 또 한 겹 쌓인 후에 다시 쌓여 기억 묻었는데 문득 얼굴 하나 있어 선연히 절로 다가오네 [漢譯 노트] 그 많고 많은 ‘첫눈’ 시 가운데
공짜 박호현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 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 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태헌의 한역(漢譯)] 免費(면비) 師曰天下無免費(사왈천하무면비) 然而免費眞正多(연이면비진정다) 呼氣吸氣免費呀(호기흡기면비아) 出語答語免費呀(출어답어면비아) 鼻聞花香免費呀(비문화향면비아) 目看天空免費呀(목간천공면비아) 身加歲數免費呀(신가세수면비아) 耳聽風聲免費呀(이청풍성면비아) 顔作微笑免費呀(안작미소면비아) 夜入夢鄕免費呀(야입몽향면비아) 晝觀螞蟻免費呀(주관마의면비아) [주석] * 免費(면비) : 공짜, 무료. 師曰(사왈) : 선생님이 ~라고 말씀하시다. / 天下(천하) : 하늘 아래, 온 세상. / 無(무) : 없다. 然而(연이) : 그러나. / 眞正多(진정다) : 정말로 많다. 呼氣吸氣(호기흡기) : 공기(空氣)를 내보내는 숨을 쉬고 들이키는 숨을 쉬다. / 呀(아) : 어세(語勢)를 돕기 위하여 문장의 끝에 사용하는 감탄 어기(語氣) 조사. 出語答語(출어답어) : 꺼내는 말과 답하는 말. 鼻聞花香(비문화향) : 코로 꽃향기를 맡다. 目看天空(목간천공) : 눈으로 하늘을 보다. 身加歲數(신가세수) : 몸에 나이를 더하다. 耳聽風聲(이청풍성) : 귀로 바람소리를 듣다. 顔作微笑(안작미소) : 얼굴에 미소를 짓다. 夜入夢鄕(야입몽향) : 밤에 꿈나라에 들어가다. 晝觀螞蟻(주관마의) : 낮에 개미를 보다. [직역] 공짜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내쉬고 들이쉬
낙엽 한 잎 홍수희 나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낙엽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여윈 가지 부르르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무수한 것들 비단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아직 내 안에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마음가지 끝 빛 바랜 잎새들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집착과 애증과 연민을 두고 이제는 안녕, 이라고 말해볼까요 물론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태헌의 한역] 落葉一片(낙엽일편) 於樹亦難事(어수역난사) 葉落瘦枝戰(엽락수지전) 及時棄應多(급시기응다) 何獨在樹邊(하독재수변) 吾內飄飄而騷亂(오내표표이소란) 思葉退色懸心枝(사엽퇴색현심지) 執着愛憎及憐憫(집착애증급연민) 與彼告別何容易(여피고별하용이) [주석] * 落葉(낙엽) : 낙엽. / 一片(일편) : 한 조각, 한 잎. 於樹(어수) : 나무에게, 나무에게 있어. / 亦(역) : 또, 또한. / 難事(난사) : 어려운 일. 葉落(엽락) : 잎이 떨어지다. / 瘦枝戰(수지전) : 파리한 나뭇가지가 떨다. 及時(급시) : 때가 되다. / 棄應多(기응다) : 버릴 것이 응당 많아지다. 何獨(하독) : 어찌 다만. / 在樹邊(재수변) : 나무 쪽에 있다, 나무 편에 있다. 吾內(오내) : 내 안, 내 안에서. / 飄飄而騷亂(표표이소란) : 나부끼며[팔랑이며] 소란스럽다. 思葉(사엽) : 생각의 잎, 곧 생각. 역자가 원시(原詩)의 뜻을 고려하여 만든 말이다. / 退色(퇴색) : 빛이 바래다. / 懸心枝(현심지) : 마음 가지에 매달리다. ‘心枝’ 역시 역자가 원시의 뜻을 고려하여 만든 말로 마음을 가리킨다. 執着(집착) : 집착. / 愛憎(애증) : 애증. / 及(급) : 그리고. / 憐憫(연민) : 연민. 與彼(여피) : 저들과, 저들과 더불어. 저들은 앞 구절에 나온
귀 정현정 입의 문 닫을 수 있고 눈의 문 닫을 수 있지만 귀는 문 없이 산다 귀와 귀 사이 생각이란 체 하나 걸어놓고 들어오는 말들 걸러내면서 산다. 【태헌의 한역】 耳(이) 口門可閉眼門亦(구문가폐안문역) 兩耳無門過一生(양이무문과일생) 縱掛思篩兩耳間(종괘사사양이간) 隨時入語濾而生(수시입어려이생) 【주석】 * 耳(이) : 귀. 口門(구문) : 입의 문. / 可閉(가폐) : 닫을 수 있다. / 眼門(안문) : 눈의 문. / 亦(역) : 또한, 역시. 여기서는 ‘또한 그렇다’는 의미로 쓰였다. 兩耳(양이) : 두 귀. / 無門(무문) : 문이 없다. / 過一生(과일생) : 일생을 보내다, 평생을 살다. 縱掛(종괘) : 세로로 걸다. / 思篩(사사) : ‘생각이라는 체’의 뜻으로 역자가 만든 말이다. / 兩耳間(양이간) : 두 귀 사이. 隨時(수시) : 때에 따라, 수시로. / 入語(입어) : 들어오는 말. / 濾而生(여이생) : 걸러내며 살다. 【직역】 귀 입의 문 닫을 수 있고 눈의 문도 그렇지만 두 귀는 문 없이 평생을 산다 두 귀 사이에 생각이란 체 세로로 걸어 놓고 수시로 들어오는 말들 거르면서 산다 【漢譯 노트】 사람의 얼굴을 구성하는 4대 요소를 한글로는 “눈코입귀”나 “눈코귀입” 등의 순서로 얘기하고, 한자로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순서로 칭한다. 이 순서를 가지고도 문화적 차이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가운데 눈과 입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코와 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귀와 귀 사이에는 생각을 하는 ‘머리’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단풍 복효근 저 길도 없는 숲으로 남녀 여남 들어간 뒤 산은 뜨거워 못 견디겠는 것이다 골짜기 물에 실려 불꽃은 떠내려 오고 불티는 날리고 안 봐도 안다 불 붙은 것이다 산은, 【태헌의 한역】 丹楓(단풍) 彼處無蹊深林內(피처무혜심림내) 男女十餘人入後(남녀십여인입후) 山知太熱不堪耐(산지태열불감내) 火花泛水火星飜(화화범수화성번) 自不送目亦可知(자불송목역가지) 山卽當今正火燃(산즉당금정화연) 【주석】 * 丹楓(단풍) : 단풍. 彼處(피처) : 저기, 저곳. / 無蹊(무혜) : 길이 없다. / 深林內(심림내) : 깊은 숲 속. 男女(남녀) : 남자와 여자. / 十餘人(십여인) : 10여 명. / 入後(입후) : 들어간 후. 山知(산지) : 산은 ~을 알다. / 太熱(태열) : 너무 뜨겁다. / 不堪耐(불감내) : 견딜 수 없다, 견디지 못하다. 火花(화화) : 불꽃. / 泛水(범수) : 물에 뜨다. / 火星(화성) : 불티. / 飜(번) : 날다. 自(자) : 스스로, 직접. / 不送目(불송목) : 눈길을 보내지 않다, 보지 않다. / 亦(역) : 또, 또한. / 可知(가지) : 알 수 있다. 山卽(산즉) : 산은 곧 ~이다. / 當今(당금) : 지금. / 正火燃(정화연) : 막 불이 붙다, 한창 불이 타다. 【직역】 단풍 저기 길도 없는 깊은 숲 속으로 남녀 십여 명이 들어간 뒤에 산은 알았다, 너무 뜨거워 못 견딘다는 걸 불꽃은 물에 뜨고 불티는 날리니 직접 눈길 안 주고도 알 수 있는 것, 산은 이제 한창 불이 붙은 것이다 【漢譯 노트】 19금 계열의 시(詩)인 복효근 시인의 이 <단풍>은, 단풍을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에 비유한 고두현 시인의 <내장산 단풍>이나 무지개의 피에 비유한 김태인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태헌의 한역(漢譯)】 吾獨開(오독개) 勿謂吾獨開(물위오독개) 草田何改變(초전하개변) 汝開吾亦開(여개오역개) 終竟草田爲花田(종경초전위화전) 勿謂吾獨染(물위오독염) 一山何變轉(일산하변전) 吾染汝亦染(오염여역염) 終竟萬山若火燃(종경만산약화연) 【주석】 * 吾獨開(오독개) : 나 홀로 꽃피다. ‘開’는 단독으로 쓰여도 꽃이 핀다는 뜻이 있는 한자이다. 勿謂(물위) : ~라고 말하지 말라. 草田(초전) : 풀밭. / 何改變(하개변) : 어찌 바뀌겠는가,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汝開(여개) : 네가 꽃피다. / 亦(역) : 또, 또한. 終竟(종경) : 마침내, 결국. / 爲花田(위화전) : 꽃밭이 되다. 吾獨染(오독염) : 나 홀로 물들다. 一山(일산) : 하나의 산, 산 하나. / 何變轉(하변전) : 어찌 바뀌겠는가,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汝亦染(여역염) : 너 또한 물들다. 萬山(만산) : 수많은 산, 온 산. / 若火燃(약화연) : 불타는 것과 같다, 불처럼 타다. 【직역】 나 홀로 꽃피어 말하지 말아라, 나 홀로 꽃피어 풀밭이 뭐 달라지겠냐고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느니 말하지 말아라, 나 홀로 물들어 산 하나가 뭐 달라지겠냐고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불처럼 타리니 【漢譯 노트】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뀌지만, 내가 바뀌지 않으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태헌의 한역(漢譯)】 不歸家(불귀가) 幼年時節有頭熱(유년시절유두열) 沸如湯水不缺席(비여탕수불결석) 但恐朋友除吾練(단공붕우제오련) 酒樓主媼聽所歷(주루주온청소력) 笑曰余亦無缺課(소왈여역무결과) 只恐朋友外余樂(지공붕우외여락) 老去無事多閑日(노거무사다한일) 吾人頻尋此酒樓(오인빈심차주루) 近來躊躇不歸家(근래주저불귀가) 唯恐朋友暗罵吾(유공붕우암매오) 【주석】 * 不歸家(불귀가) : 집에 돌아가지 못하다, 집에 못 가다. 幼年時節(유년시절) : 유년 시절, 어린 시절. / 有頭熱(유두열) : 머리(에) 열이 있다. 沸如(비여) : ~처럼 끓다. / 湯水(탕수) : 뜨거운 물. / 不缺席(불결석) : 결석하지 않다. 但恐(단공) : 다만 ~을 걱정하다. / 朋友(붕우) : 친구, 친구들. / 除吾練(제오련) : 나를 제외하고 ~을 익히다, 나를 빼고 공부하다. 酒樓(주루) : 술집. /主媼(주온) : 주인 여자, 여주인(女主人). / 聽所歷(청소력) : 겪은 바를 듣다, 겪은 일을 듣다. 笑曰(소왈) : 웃으면서 ~라고 말하다. / 余(여) : 나. / 亦(역) : 또, 또한. / 無缺課(무결과) : 결석이 없다, 결석하지 않다. 只恐(지공) : 다만 ~을 걱정하다. / 外余樂(외여락) : 나를 제외하고 ~을 즐기다, 나를 빼고 놀다. 老去(노거) : 늙어가다. / 無
또 다른 사랑 곽재구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 피고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무슨 사랑이 필요 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하고 가을이 운다 【태헌의 한역(漢譯)】 別外情人(별외정인) 愈得自由花開綻(유득자유화개탄) 愈得自由人食飯(유득자유인식반) 相與居人盈四垠(상여거인영사은) 何須別外有情人(하수별외유정인) 忽拔一星投靑冥(홀발일성투청명) 作音響亮素秋鳴(작음향량소추명) 【주석】 * 別外(별외) : 따로, 별도의. / 情人(정인) : 사랑하는 사람, 사랑. 愈得自由(유득자유) : 더욱 자유를 얻다, 더욱 자유스럽게 되다. / 花開綻(화개탄) : 꽃이 피어나다. 人食飯(인식반) : 사람이 밥을 먹다. 相與(상여) : 서로 더불어, 함께. / 居人(거인) : 사는 사람, 살아가는 사람. / 盈(영) : 가득하다, 가득 차다. / 四垠(사은) : 사방의 경계, 온 세상. 何須(하수) : 어찌 반드시 ~, 어찌 꼭 ~. 忽(홀) : 문득. / 拔(발) : ~을 뽑다, ~을 빼다. / 一星(일성) : 하나의 별, 별 하나. / 投(투) : 던지다. / 靑冥(청명) : 짙푸르고 아득한 곳, 푸른 하늘. 作音(작음) : 소리를 내다. / 響亮(향량) : 소리가 맑고 낭랑하다. 쨍, 쨍그랑. / 素秋(소추) : 가을. 오행설(五行說)에서, 가을이 금(金)에 속하고 색은 흰색이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 鳴(명) : 울다. 【직역】 별도의 사랑 더욱 자유롭고자 꽃은 피고 더욱 자유롭고자 사람은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에 가득한데 어찌 따로 사랑이 있어야 하랴!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소리를 내며 가을이 운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태헌의 한역(漢譯)】 欲食素麪(욕식소면) 常曰人生世間事(상왈인생세간사) 誠如米飯毫無倦(성여미반호무권) 時時破舊飯館裏(시시파구반관리) 欲食老媼煮素麪(욕식로온자소면) 心傷人生轉角處(심상인생전각처) 步向街道獨輾轉(보향가도독전전) 賣牛歸人背影若(매우귀인배영약) 我欲與彼食素麪(아욕여피식소면) 世上固似大宴家(세상고사대연가) 何處不有欲泣人(하처불유욕읍인) 心門由是一二閉(심문유시일이폐) 黑暗如飢到夕曛(흑암여기도석훈) 淚痕不乾心自露(누흔불건심자로) 我欲與彼食溫麪(아욕여피식온면) [주석] * 欲食(욕식) : 먹으려고 하다, 먹고 싶다. / 素麪(소면) : 국수. 常曰(상왈) : 흔히 ~라고 말하다. / 人生世間事(인생세간사) :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일. 誠如(성여) : 정말 ~과 같다. / 米飯(미반) : 쌀밥. / 毫無倦(호무권) : 조금도 물리는 것이 없다. 時時(시시) : 때때로. / 破舊(파구) : 해어지고 낡다. / 飯館裏(반관리) : 식당 안. 老媼(노온) : 늙은 아주머니. / 煮素麪(자소면) : 국수를 끓이다, 끓인 국수. 心傷(심상) : 마음을 다치다, 마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태헌의 한역] 遠處祈求(원처기구) 吾人未知處(오인미지처) 君留如花笑(군류여화소) 世間有一君(세간유일군) 重新朝輝耀(중신조휘요) 吾君未知處(오군미지처) 吾留如草息(오류여초식) 世間有一吾(세간유일오) 重新夕寥寂(중신석료적) 如今秋氣動(여금추기동) 千萬君莫痛(천만군막통) [주석] * 遠處(원처) : 먼 곳, 멀리서. / 祈求(기구) : 기도(祈禱), 기도하다, 빌다. 吾人(오인) : 나[吾]. / 未知處(미지처) : (아직) 알지 못하는 곳. 君留(군류) : 그대가 머물다, 그대가 있다. / 如花笑(여화소) : 꽃처럼 웃다. 世間(세간) : 세상(世上). / 有(유) : 있다. / 一君(일군) : 한 사람 그대. 한문에서는 보통 ‘一君’이라고 하면 한 명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역자는 이 시에서 ‘한 명의 그대’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重新(중신) : 다시 한 번. / 朝輝耀(조휘요) : 아침이 눈부시다. 吾君(오군) : 당신, 그대. 吾留(오류) : 내가 머물다, 내가 있다. / 如草息(여초식) : 풀처럼 숨을 쉬다. 一吾(일오) : ‘一君’과 비슷하게 ‘한 사람 나’, ‘한 명의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이다. 夕寥寂(석료적) : 저녁이 고요하다. 如今(여금) : 지금, 이제. / 秋氣動(추기동) : 가을 기운이 움직이다. 千萬(천만) : 부디, 아무쪼록. / 君莫痛(군막통) : 그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태헌의 漢譯] 秋夕(추석) 忽憶幼年多羞慙(홀억유년다수참) 齒算五十難成眠(치산오십난성면) 雙親駕鶴遠逝日(쌍친가학원서일) 不肖孤兒省事前(불초고아성사전) 深夜盤...
코스모스 김명숙 산골 이장 집 막내딸 분홍색 원피스에 높은 하이힐 신고 후리후리한 큰 키에 낭창낭창한 허리 간들대며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마을 길섶에 버스 기다리고 서 있다. [태헌의 한역] 秋英(추영) 山村里長小女兒(산촌리장소녀아) 好著粉紅連衣裙(호착분홍련의군) 足履高鞋益瘦長(족리고혜익수장) 娉娉嫋嫋動腰身(빙빙뇨뇨동요신) 自從淸晨黎明時(자종청신려명시) 路邊佇待巴士臻(노변저대파사진) [주석] * 秋英(추영) ...
사랑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태헌의 한역】 愛(애) 非是夏炎蟬嘶噪(비시하염선시조) 卽是蟬啼夏如湯(즉시선제하여탕) 蟬知愛是傍熱哭(선지애시방열곡) 不鳴不見故蟬鳴(불명불견고선명) [주석] * 愛(애) : 사랑. 非是(비시)...
섬진강 여울물 오수록 산책 삼아 하늘을 날던 물새들 일제히 날아 내려와 모래톱을 원고지 삼아 발로 새 시를 쓴다 섬진강 여울물은 온종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소리 유장하여 바다에서도 들린다 【태헌의 한역】 蟾津灘水(섬진탄수) 水鳥飛天做散步(수조비천주산보) 一齊落下作新賦(일제락하작신부) 以沙爲紙以足錄(이사위지이족록) 蟾津灘水盡日讀(섬진탄수진일독) 讀聲也悠長(독성야유장) 海畔亦可聽(해반역가청) [주석] * 蟾津(섬진) : 섬진강. / 灘水(탄수) : 여울물. 水鳥(수조) : 물새. / 飛天(비천) : 하늘을 날다. / 做散步(주산보) : 산보로 삼다. 一齊(일제) : 일제히. / 落下(낙하) : 낙하하다. / 作新賦(작신부) : 새로운 시를 짓다. 以沙爲紙(이사위지) : 모래톱을 종이로 삼다. / 以足錄(이족록) : 발로 기록하다. 盡日(진일) : 진종일, 온종일. / 讀(독) : 읽다. 讀聲(독성) : 읽는 소리. / 也(야) : 주어나 목적어[빈어] 뒤에 쓰여 앞말을 강조하는 조사(助詞). / 悠長(유장) : 유장하다, 길고 오래다. 海畔(해반) : 바닷가. / 亦(역) : 또, 또한. / 可聽(가청) : 들을 수 있다, 들린다. [직역] 섬진강 여울물 물새들이 산책삼아 하늘 날다가 일제히 내려와 새 시를 짓는다 모래톱을 종이 삼아 발로 적자 섬진강 여울물이 온종일 읽는다 읽는 소리 유장하여 바닷가에서도 들린다 [한역 노트] 눈이 시리도록 맑은 서정시를 대하면 역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소년이 된다. 그 옛날 청담(淸談)이 권력(權力)과 금력(金力)의 얘기가 빠진 얘기였다면, 요즘에는 이런 서정시가 바로 청담이 아닐까 싶다
무더위 박인걸 당신의 뜨거운 포옹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두 팔은 힘이 쭉 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멈출 것만 같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에너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처럼 번져나간다. 잔디밭이라도 어느 그늘진 곳이라도 아무 말 없이 드러누울 테니 그대 맘대로 하시라. 【태헌의 한역】 蒸炎(증염) 吾君抱持似熱火(오군포지사열화) 吾終不拒自暴棄...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태헌의 한역】 思鷄卵(사계란) 夜起佇坐顧形影(야기저좌고형영) 他人料吾是批判(타인료오시비판) 吾人料吾卽察省(오인료오즉찰성) 他人破卵爲煎蛋(타인파란위전단) 吾人自啐作鷄雛(오인자줄작계추) 換骨奪胎也應...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태헌의 한역】 盛夏(성하) 聞說南方霖雨連(문설남방임우련) 仍慣欲打問候電(잉관욕타문후전) 嗚呼今卽親不存(오호금즉친부존) [주석] * 盛夏(성하) : 한여름. 聞說(문설) : 듣자 하니 ~이라 한다, ~라고 듣다. / 南方(남방) : 남쪽, 남녘. / 霖雨連(임우련) : 장맛비[霖雨]가 이어지다, 장마 들다. 仍慣(잉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