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역 배후에는 작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을지로나 종로 같이 대규모 밀집은 아니지만 ’한 개성‘하는 식당들이 많다. 한옥을 개조해 노포 분위기가 나는 식당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폼나게 인테리어를 한 식당들까지 다양하다. 식당 주변 한옥들을 보면 마치 196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출근할 때 종종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려 골목을 지나 신문사로 향하곤 했다. 아침 일찍 인적 드문 골목길을 걷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점심시간이 되면 오피스맨들이 삼삼오오 골목으로 모여든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보약과 같은 시간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은 직장인들의 행복한 특권일 터. 이 골목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충정각,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식당 앞 마당에 쌓여있는 와인병들이다. 그 앞에는 오래된 석등, 탑, 돌 조형물들이 술병들과 부조화 속에 개성을 연출한다. 전편에 소개한 충정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다. 나이로 치면 120살이 훌쩍 넘은 건물, 90대의 충정아파트가 ’아버지 건물‘이라면 이 건물은 ’할아버지 건물‘이다. 낡았지만 외관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기품있는 어르신의 모습과 같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오래된, 외관상 손상이 없는 건물을 찾기는 힘들다. 서대문 형무소가 마주 보이는 ’딜쿠샤‘ 정도라면 견주어 볼 수 있을까?충정각, 일제강점기 때 주소는 ’죽첨정 360번지‘이다. 최근 서양식 저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자료들을 뒤져보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소설가 이호철이 이 아파트와 인연을 맺기 전, 아파트에서 살았던 유명인이 있다. 한국 화가 중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을 그린 사람, 김환기이다. 1971년 작 '우주'가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됐다. 그 전의 기록은 85억에 거래된 '붉은 점화'다. 그 작품도 김환기가 그렸다. 김환기의 기록을 김환기가 깼다. 값비싼 작품 순위 10개 중 9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이 아파트에 살았던 기록은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5월 22일 도교의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제 4회 자유미술가전’에 참여한 김환기는 전시 도록에 주소를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다. 왜 주소를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을까? 그의 고향은 알려진대로 신안군 안좌도라는 섬이다. 190cm에 육박하는 자신의 키에 대해 섬사람이어서 육지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 그리 되었다는 싱거운 소리를 했던 그였다. 그가 소설가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에게 준 자신의 다른 이름 ’향안(鄕岸)‘은 멀리 육지의 언덕을 그리워한 마음이 실려 있다. 이곳에 살았다는 흔적은 1940년 4월에 발간된 문학잡지 '문장'에도 보인다. 김환기는 삽화를 자주 그렸지만 청록파가 대거 등단했던 이 잡지에 수필도 많이 썼다. 섬 생활이 울적해 서울로 올라왔다고 하며 "종일 여관방에 드러누워 지내면서 영화 한편 만들거나 자비로 시집 200부 정도를 낸다거나…그림 100점 정도를 장곡천정(지금의 소공로)에서 개인전을 열거나…(중략) 나중에 여관비를 치르고 나갈 일이 은근히 걱정"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글에 등장하는 ’여관‘은 이 아파트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에는 ‘여관’과 ‘아파트’를 구별해 사
오늘부터 ‘성문 밖 첫 동네’는 충정로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림동을 이야기하면서 중림동의 지역적 특색으로 단연 만초천을 거론했다. 만초천이 중림동으로 흘러 조선시대에 서소문 처형장의 입지가 용이했고, 이곳의 순교자들로 인해 중림동 약현성당이 들어섰다. 만초천의 흐름으로 염천교, 윤동주의 자화상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리고 충정로에는 ‘전차’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과는 다른 ‘전차’이다. 이 전차는 1907년 서대문에서 출발해 마포를 종착역으로 했다. 왕년의 인기 가수 은방울 자매의 노래인 ‘마포종점’은 충정로를 지나 아현 고개를 넘어 공덕, 마포까지 갔던 이 전차의 종점 이야기이다. 지금도 마포에 가면 당시 운행했던 전차를 볼 수 있다. 마포구간을 운행한 이 전차는 강화도에서 황포돛단배로 운반해 온 새우젓 항아리도 수없이 날랐을 것이다. 전차의 개통으로 충정로 일대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성문 밖 첫 동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쇠바퀴의 굉음이 진동하는 첨단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60년대에도 서울에는 초가집들이 있었고 변두리에는 논밭이 즐비했다. 필자도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대방동 논밭길을 어릴 적 누나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있다. 하물며 백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논밭 사이로 만초천이 흐르고 그 옆에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미근동)가 이곳 아니었던가? 천에서 조개를 잡는 조무래기들 사이로 순박한 농부는 소를 몰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 전차의 굉음이 진동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전차가 들어서니 역사(驛舍)가 생기고 역사가 들어서니 역세권이 되었다. 역세권하면 무엇이
15,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의 대표적인 건물은 누가 뭐래도 약현성당이다. 성당의 정확한 이름은 ‘중림동 약현 성당’이다. ‘약현성당’이라고 해도 되고 ‘중림동성당’이라고 해도 될 텐데 중림동이라는 근대의 행정동명과 약현이라는 조선시대의 지명을 같이 붙인 것은 성당이 위치한 지역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당의 지역 사랑이랄까? 신문사에서 일할 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직원들과 성당에 들러 차를 마셨다. 성당은 번잡하지 않아서 잠깐의 머뭄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북적이는 카페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 맛도 모르는 커피를 들이켜고 부리나케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대부분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네 직장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성당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마음을 식히자. 복잡한 일상사, 꼬였던 일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안 풀리면 또 어떠랴. 언제 우리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있었던가. 성당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운동 한 셈 치자. 성당에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며 오르는 좁은 계단이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에 올라서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올라 갈수록 보이는 것은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정약용의 조카이자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성도 갓 쓴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200년 전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 그의 넉넉한 품이 참 좋다. 언덕 위 작은 전망대에 오르면, 이곳이 성문 밖 첫 동네, 교통의 요지라는 것을 실감한다. 숭례문이 눈 앞에 있다. 숭례문에서 봉래동과
내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복학한 해는 유난히도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다. 대학 캠퍼스는 말할 것도 없고, 명동성당 주변은 최루가스로 인해 눈을 뜨고 다닐 수 없었다. 전방 부대에 근무한 나는 목요일이면 정치색 짙은 이념 교육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제대는 민간인으로의 신분변화와 ‘주입된 이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민주화의 바람 앞에 모든 것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한국은 긴 독재의 터널을 통과해 민주화의 햇살 속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에서 하사교육을 하던 군인정신 투철한 분대장이 민주 열사의 장례 행렬에서 군중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공을 역사로 택한 나는 캠퍼스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학우들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위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는 1987년이다. 우리 역사의 분기점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해방된 1945년, 4.19가 있던 1960년 등이다. 그러나 영화 ‘1987’이 말해주듯 민주화가 정점을 이룬 1987년도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된다. 시작은 1987년 1월 14일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정국은 정초부터 뒤숭숭했다. 코미디언 김형곤은 이를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코미디 소재로 사용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사춘기 소녀처럼, 뭔가 어수선하고 들떠 있었다. 학생들의 집회에 넥타이 부대가 합류해 민주화운동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4월13일, ‘지금의 헌법대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안’이 발표됐다.
내가 신문사에 처음 출근할 무렵, 중림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노량진에서 전철을 타고 출근했는데, 서부역을 통과해 비린내 나는 이곳을 지나야 신문사로 출근할 수 있었다. 인근 은행 지점에서는 은행원들이 손수레를 밀며 상인들에게 지폐와 거스름용 잔돈을 바꾸어 주었고, 바빠서 은행에 오지 못하는 상인들의 돈을 예치해 가기도 했다. 아침마다 상인들의 악다구니 소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효과음처럼 들렸다. 새벽 3시에 열어 오전 10시에 닫는 시장. 겨울에는 생선을 담은 궤짝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쬤다. 인근 식당에서 배달해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좌판에서 먹는 것은 생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위로였다. 그들 사이를 오가며 믹스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들, 싱싱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물건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큰소리로 호객하는 사람들로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장사가 일찌감치 파하면 악다구니는 사라지고 웃고 농담하며 새벽의 피로를 풀었다. 바삐 출근하느라 아침을 못 챙긴 나도 상인들 틈에 끼여 라면이나 국수를 사 먹었다. 값은 모두 천원이었다. 토스트는 계란에 야채를 버무려 철판에 꾹꾹 눌러 속을 만든 뒤, 마가린이 스며 노랗게 된 식빵을 반 접어 그 안에 넣었다. 기호에 따라 설탕이나 케찹을 쳐 주었다. 오전 10시쯤 외근을 위해 회사에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판의 상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상점이 있는 주인들만 가게를 지켰다. 중림시장은 새벽에만 장사를 하는 도깨비시장이다. 중림 시장의 연원은 조선시대까지 올라간다. 성문 밖 최대의 난전인 칠패시장은 어물이 유통되는 시장이다. 전국 각지에서 마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하늘나라로 간 조세희 선생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생활은 전쟁과 같았’고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던 난장이 가족. 아무리 전쟁터라도 가끔은 이기는 날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세월은 흘러 소설이 출간된 지 어느덧 반세기다. 격동의 70년대를 지나 새천년을 훌쩍 넘은 21세기에도 ‘난쏘공’이 늘 회자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평론가 김현이 '난쏘공'을 밤새워 읽고 흥분해 8천 부는 나갈 거라고 작가에게 장담했다고 한다. 이후 소설로 200쇄를 최단시간 내에 돌파하고, 300쇄가 넘는 초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유가 뭘까? 난장이 가족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지기만 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억울한 자들은 난장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난장이 가족들이 날마다 졌다는 소설 속 공간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그들의 삶이 지옥일 망정, 작가는 난장이가 사는 삶의 공간을 그렇게 명명했다. 조세희는 지옥과 같은 전쟁터가 낙원으로 바뀌어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1편의 제목이 '뫼비우스 띠'인지 모르겠다. 안과 바깥이 고정돼 돌고 돌아도 겉은 겉대로 바깥은 바깥인 채로 존재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이
퇴근할 때 청파로를 따라가다 용산 넘어가는 고가를 타면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가 아래 오리온제과 공장에서 풍기는 과자 굽는 냄새다. 과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소환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고소한 과자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 공장은 과자 틀 없이 오븐에 반죽을 적당히 올려 구웠기 때문에 과자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굽다가 깨진 것, 모양이 이상한 것, 너무 오래 구운 것 등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바가지를 들고 가면 이런 과자들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살 수 있었다. 모양은 안좋아도 방금 구운 과자는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았다. 검게 탄 과자는 되레 식감도 좋았고 맛도 구수했다. 센베이 과자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굵은 설탕을 입힌 과자를 먹고나면 혀가 까칠해지기도 했다. 10여년 전 ’국희‘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희는 우리 토종 과자 회사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다. 드라마 종영 후 극 중 과자를 본떠 ’크라운 국희 땅콩샌드‘라는 과자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크라운제과의 오늘을 있게 한 과자가 산도다. 산도는 샌드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드는 샌드위치의 줄임말로 산도는 비스켓 사이에 크림을 바른 ’과자 샌드위치‘인 것이다. 산도는 먹는 방법이 있다. 두겹의 비스킷을 분리하면 달콤한 크림이 나오는데 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 맛을 보고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자 공장은 모두 용산에서 시작했다. 용산역을 기준으로 왼쪽 모토마치(元町,원효로)에 일본인이 모여 살았고 오른쪽, 지금의 미군기지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다.'라고 결정해버렸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중림동의 골목 안 풍경을 찍은 김기찬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의 사진집, 은 6집까지 발간됐다. 사진집에는 중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풍속화가 김홍도가 이 시대에 사진사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의 작품과 같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피사체가 되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얻기까지 수년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을 찍기 위해 그들과 같아져야 했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말을 걸고 웃으며 점차 그들과 동화돼 갔다. 만 2년이 되어서야 덩치 큰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골목을 걸으면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뭐 찍을 게 있냐?’며 먹던 부침개를 나눠주었고, 김치 부스러기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아저씨들도 잔을 내주었다. 더 이상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것은 삶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붙잡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장장 33년의 세월이었다. 왜 하필 중림동이었을까? 그는 왜 중림동을 사랑한 것일까? 그가 사는 곳이 중림동이라면 퇴근길에 카메라를 들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의 집은 사직동이다. 사직동은 그가 중림동을 찍기 전, 이미 망가지
근현대 우리 역사에는 두 명의 이종찬이 있다. 먼저 소개할 사람은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전 국정원장, 현 광복회장인 이종찬이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얼마 전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제강점기에 ‘정부는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이때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이 사진은 해방을 맞이하고 1945년 11월5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하이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앞의 반바지 차림의 어린이가 이종찬 광복회장이다. 어린 이종찬 옆에 한 노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작은 할아버지 성재 이시영 선생(1869~1953)이다. 모두들 광복의 기쁨에 들떠 돌아갈 고국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인데…그는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나라를 빼앗기자 명동의 그 넓은 땅을 팔아 만주로 떠났던 36년 전을 생각했을까? 당시 땅 판 돈 40만 원은 지금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다. 수백억, 아니 명동의 땅값을 계산하면 조 단위가 넘을지도 모른다. 이회영 선생은 그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우리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6형제가 떠났으나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회영 선생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 여사의 증언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쌀이 없어 하루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아버님께서 처량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고 하여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딸이 어릴 적, 대화를 나누다 이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딸은 이완용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도대체 학교에서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매국노 이완용을 모르냐고 야단을 쳤다. 이 일 이후 딸이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태반이 이완용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빠에게 야단맞은 것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이완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부끄러운 과거, 수치의 역사야말로 미래를 창조적으로 빚을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1926년에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화장실의 주된 낙서가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자는 내용이어서 욕할 대상이 사라지자 낙서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필경은 붙들려 갔다. 겹겹이 있는 순사의 파수와 돈과 폐물 벽의 견고한 보호막도 저승사자의 들이닥침을 어찌하지 못했다…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이다.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1926년 2월 13일)라는 사설을 실었다. 일제 치하에서 총독부가 이완용을 지키고 감쌌더라도 민족의 배신자인 그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분출은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완용이 중림동에 살았었다.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자료를 종합해보면 지금의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주변이다. 그 앞의 몇몇 허름한 한옥자리가 이완용의 집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이완용은 우봉(牛峰) 이씨로 태어난 곳은 경기도 판교이다. 자녀가 없는 먼 친척인 이호준의 집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준은 처세술의 달인으로 고종 휘하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이완용은 양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업한 이하영 대감에 대해 들어보셨는가? 중림동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다는 것도 생소한 이야기일 텐데…이하영 대감?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의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의 사위, 경주이씨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다. 같은 항렬의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조선이 멸망할 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 이회영 선생의 동생인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귀국 후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하영의 족적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이회영 선생과는 많이 다르다. 이하영은 부산 초량에서 떡 장사를 하다 큰 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알거지가 된다. 간신히 돌아오는 배삯을 마련했는데, 배 안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알렌은 조선의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탔다. 두 사람은 1858년생 동갑내기로 이 때가 고종 21년, 1884년이었다. 1858년은 무슨 해(年)일까? 60세가 넘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이 ’1958년생 개띠‘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 첫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증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일백년 전, 1858년생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858년생 동갑내기 말띠인 이하영과 알렌, 이들은 이후 조선에서 거칠 것 없이 화려한 인생을 펼치게 된다. 알렌은 오갈 데 없는 이하영을 요리사로 채용했고 이하영은 알렌의 입이 되어 주었
여름방학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신창이다. 1호선의 종착역이라서 전철을 타고도 고향에 갈만한 거리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은 가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동네에 순천향대학교가 들어선 뒤로 반은 도시, 반은 농촌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은 여느 시골 동네처럼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골에 가면 ’서울에서 온 도련님‘이라고, 먼 나라에 유학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대우받았다.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사셨지만 우리 집은 셋방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시골에 내려갈 때 꽃단장을 시키셨다. 꽃단장이란 새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운동화는 '서울 사람'의 상징과 같아서 코흘리개 시골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촌 형들은 나를 동네의 만만한 꼬마들과 이유 없이 싸움 붙였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다가 원두막에서 방학 숙제도 하고 덜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기도 했다. 냇가에서 송사리와 붕어를 잡을 때 사촌 형들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이용했다. 운동화를 신은 나는 물에 젖을까 봐 한쪽 모래톱에 벗어 놓고 들어갔지만, 형들은 고무신을 신고 물에 들어갔다. 물 묻은 고무신은 뜨거운 햇빛에 말라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고무신은 작은 물고기를 넣으면 어항이 되고, 모래를 수북이 쌓으면 장난감 자동차도 되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은 우리에게 추억의 존재다. 그 고무신 공장이 모여있던 곳이 중림동이었
초등학교 시절, 잠 자던 내 머리맡에서 부모님이 뭔가 심각한 대화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목이 잘릴 것 같다"는 섬뜩한 이야기에 잠이 확 깼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물품 관리와 행정 보조 업무를 담당하고 계셨는데, 그 즈음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해고 된다는 것을 목이 잘린다고 표현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생목이 잘리는 상상을 하며 눈도 뜨지 못하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직장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조사하면 ‘목이 잘린다’는 말이 수위(首位)에 들 것이다. 직장생활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의건 타의건 직장을 떠나야 하는 현실은 진짜 목이 날아가는 것과 같은 고통의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다. 성문 밖 이곳, 서소문 역사공원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의 생목이 잘려 나간 곳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내려온 만초천은 이곳에서 아현과 약현의 높은 지형을 넘지 못하고 선회하여 염천교 방향으로 흘러갔다. 물이 흐르던 이곳, 평평한 지역은 넓은 모래밭이 형성돼 있었다. 모래밭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참수(斬首)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정확한 위치는 만초천의 여섯 개 다리 중 하나인 서소문역사공원내의 ‘이교(泥橋, 진흙다리-서소문역사공원에 이교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건너 만초천변 모래사장’이다. 당시 천주교를 믿었다 하여 바로 참수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형조, SC제일은행 자리에 있던 의금부, 동아일보 앞의 우포도청 등에서 고초를 겪다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으면 이곳으로 끌려온다. 참수가 확정된 사람은 마차에 실려 오는데, 사형
주말이면 옆구리에 핸드마이크를 달고 시민들을 몰고 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는 무리를 만나게 된다. 특히 서촌에 가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풍경 너머로 문학 향기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상기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촌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어디일까? 윤동주의 하숙집 터?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잠시 학창 시절 외운 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서촌에서 3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현재 연세대 신촌 캠퍼스의 핀슨관이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학한 그는 이 건물에서 이양하, 김송 교수 등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가 거처한 곳은 학교 기숙사였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하숙했다. 그런데 그중 한 곳이 이곳 중림동 일대, 성문 밖 첫 동네였다면 믿으시겠는가?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선생의 먼 친척인 송우혜 선생님이 쓴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입학 동기인 유영 교수의 증언이다. 송우혜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며 책의 일부를 소개한다. 유영 교수는 ‘동주는 먼저 아현동에서 하숙을 했었지요. 후에 서소문으로 이사했어요. 서소문 하숙집은 옛날 서대문구청 자리 근처였는데 그때만 해도 거긴 꼭 시골과 같은 곳이었어요. 앞에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고, 근처에는 우물도 있었어요. 바로 동주의 시의 배경이 된 우물이지요. (앞의 책 241페이지) 나는 송우혜 선생의 책을 읽으며 숨이 멎을 뻔했다. 아니 윤동주가 이곳에 살았다고? 과거 서대문구청 자리였다고?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서대문구청은 지금의 상
2005년 이명박 대통령은 1976년 청계고가 개통으로 복개가 마무리된 청계천을 복원했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다. 도심에 물이 흐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라이드를 타고 광교에서 청계고가를 올라 시내를 달리면 마치 어릴 적 어린이대공원에서 청룡 열차를 타듯 미끄러지고 올라가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그 고가를 드러내니 거짓말 같은 하천이 펼쳐졌고 지금은 머릿속에서 청계고가의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서울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사산(內四山)이라 부른다.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산이다. 산이 있으면 계곡이 생기고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도대체 물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도로 아래에 있다. 하천을 모두 도로로 복개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하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50년 전만 해도 시내에 많은 하천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하천은 1960년대에 복개되었다. 내사산에서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는 도성 안에 한 가운데로 모여 청계천을 이룬다. 청계천이 사대문 안에서 흐르는 하천이라면 사대문 밖을 대표하는 하천이 만초천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문 밖 이 일대의 지명을 가만히 살펴보면 만초천의 흔적들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인 무악에서 발원한 만초천은 서대문 영천시장 앞에서 석교(石橋)라는 돌다리 밑을 지나게 된다. 지금도 이 일대는 ‘석교’라는 지명을 사용한다. 석교 다리의 윗동네라 하여 교북동(橋北洞), 아랫동네라 하여 교남동(嶠南洞)이다. 그 주변의 평평한 동네가 평동(平洞)이다. 그 동네에 찬 얼음물이 늘 솟아나는 샘이 있다
드라마 왕초나 야인시대를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거지왕 김춘삼이다. 거지들을 모아 구걸을 시키며 중부시장 일대에서 활약한 김춘삼은 당대의 주먹 김두한, 이정재 등과 어울렸다고 한다. 거지왕 김춘삼의 근거지였던 곳이 염천교이다. 염천교는 조선시대에 화약을 만드는 염초청 근처의 다리라 해서 염초청교라 부르다 염천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역 앞의 염천교가 거지왕 김춘삼이 활약했던 그 염천교일까? 만약 일제 강점기나 제1공화국 시절로 되돌아가 김춘삼이 서울역 앞의 염천교에서 나오는 것을 김두한이나 이정재가 봤다면 아마도 ‘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했을 것이다. 거지왕 김춘삼이 맹활약했던 근거지는 이 염천교가 '아니올시다.’ 1770년에 만들어진 한양도성도를 보면 또 다른 염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김춘삼은 현재의 염천교가 아니라 청계천에 있던 염천교에서 활동했다. 청계천의 다리는 거지들의 소굴, 좋게 말하면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이 생활 하수를 버리는 곳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천 바닥에 흙과 오물들이 쌓여 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가 오면 범람하기 일쑤였고 악취가 진동하고 불결하여 전염병의 발원지였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영조는 자신의 치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청계천 준설사업으로 꼽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긁어낸 흙과 오물을 멀리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인 흙과 쓰레기를 청계천 주변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여기에 꽃을 심어 방산(芳山)이라 했다. 꽃다울 방자를 써서 ‘꽃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것이다. 을지로 4, 5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는
나는 30여 년간 중림동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중림동을 잘 모른다. 어디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2호선 충정로역 근처라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충정로역 4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한 번 꺾으면 나타나는 곳, 한국경제신문사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 50대의 모든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2호선 충정로역이 있는 곳, 중림동. 그러나 5호선이 통과하는 지역은 충정로 3가에 있다. 충정로역은 2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는 역이라서 이 일대에 넓게 포진해 있다. 이 칼럼의 대부분은 충정로역이 점유한 중림동과 충정로 일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철이 들어오기 전의 모습은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에 그 이야기의 조각이나마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땡땡거리며 지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땡땡 사거리. 스치며 지나가는 기차. 차단기 앞에 선 차들은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정차해 있다. 서울역을 지나서 수색을 통과하여 한때는 신의주까지 갔다는 경의선 철도가 부설된 지 100년이 흘렀지만, 이 일대의 풍광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철길이 서울을 동서로 갈랐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서울로 7017'에서 이 일대를 둘러보면 서울은 동과 서로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철길의 동쪽은 많은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서쪽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덜 된 곳이다. 동쪽에 중요한 시설들이 포진하여 철길의 서쪽은 상대적으로 낙후하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지형처럼 동고서저의 형태이다. 서쪽의 중심을 차지하는 곳이 중림동이다. 중림동을 통과하는 이 기차의 종착지는 신의주였다. 신의주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단둥을 지나서 수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