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입행해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 퇴근해 여행 가려고 준비할 때였다. 어머니가 “장남이 돼서 넌 대체 생각이 그렇게 없니? 아버지가 낚시 가신 지 일주일이 넘었다. 궁금하지도 않으냐?”라고 눈물을 훔치며 타박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행을 바로 취소하고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 뒤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늘 혼자 낚시를 다녔다. 한번 길을 떠나면 사나흘은 기본이고 때로는 열흘을 넘기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안 계시면 나는 그저 낚시 가셨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낚시 간 지 며칠 지나면 어머니는 으레 잠을 주무시지 못했다. “양평으로 간다”라고 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들은 터라 기차를 타고 양평역에 내렸다. 역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낚시터로 가자고 했다. 출발한 택시 기사가 “개군에 있는 향리 낚시터죠?”라고 물었다. 강변에서 하신다더라고 하자 기사는 양수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참 달리던 기사에게 강변에 낚시 온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고 하자 대뜸 “지팡이 짚으시는 조 회장님 말씀이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시 차를 돌려 다리를 건너 강상면 쪽으로 차를 돌렸다. “자주 오셔서 여기 기사들은 다들 압니다”라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좁은 둑길을 굽이굽이 돌아 강가에 내려줬다. 아버지는 거기 혼자 계셨다. 뜻밖에 나를 본 아버지는 “그러잖아도 오늘 돌아가려 했다”라며 반가워했다. 텐트를 걷고 낚시 도구를 챙겼다. 잡은 고기를 담는 살림망은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다 살려줬다. 세월만 낚은 거지”라며 웃었다. 짐 정리가 끝날 때쯤 아버지가 지팡이로
둘째 애가 태어나고서다. 손주들 보러 부모님이 집에 오셨다. 동생이 생겨 시샘하는 큰아이가 낮에 본 장난감을 사달라며 떼를 썼다. 시부모님께 민망했던 아내가 서둘러 “내일 사줄게”라고 했다. 아이는 울음마저 멈췄다. 지켜보던 아버지가 내게 “내일 꼭 그 장난감을 사주거라”라며 들려준 고사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아내가 시장에 갈 때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가려 울었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돌아오면 돼지를 잡아주겠다”라며 달랬다. 아이를 떼놓고 장에 다녀오니 남편이 돼지를 잡으려고 했다. 아내가 “아이한테 농담했을 뿐이에요”라며 제지했다. 증자는 “아이는 당신이 한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소. 아는 것이 없는 아이는 부모를 따라 배우고 부모의 가르침을 듣는데, 지금 당신은 아이를 속였으니 이는 속이는 걸 가르치는 일이오. 어머니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은 부모를 믿지 못할 것이니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오[母欺子 子而不信其母 非所以成敎也].” 남편은 끝내 돼지를 잡아 삶았다. 이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돼지를 잡아서 자식을 가르친다’라는 ‘살체교자(殺彘敎子)’다.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말로 하는 훈육보다 중요하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준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外儲說左) 상편에 나온다. 아버지는 그날 “‘살체교자’의 ‘체’ 자가 낯설 거다. ‘돼지 체(彘)’자”라며 고사성어보다 돼지 얘기를 더 많이 했다. 한나라 고조 유방 부인 여태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인 해제가 황위에 오르자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첫 번째 한 일이 남편 유방이
군 복무는 하루를 더 한 셈이다. 제대 신고하고 영외 장교 숙소에서 이튿날 사단장 부대 방문 브리핑 차트 만드는 일을 밤새 거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 나오는 부대 차를 타고 집에는 다음날 왔다. 흐뭇해하는 아버지께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집에 데려다주니 고맙죠”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인정받은 네 군대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고마운 마음이 사그라지기 전에 편지를 써서 표현하라”라고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썼지만, 아버지가 찾은 아침까지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라면서 “부대장님 앞으로 지금 네 마음을 ‘고맙습니다’로 시작해서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깨워줬다. 아버지는 읽던 신문 칼럼을 내주며 참고하라고도 했다. 그날 읽은 칼럼이다.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았다. 때마침 한 화가가 그림을 시작 못 하고 하얀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째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수행원이 귀띔하자 엘리너는 화가의 붓을 달라고 해 하얀 캔버스에 점을 하나 찍었다. 그걸 본 화가는 깜짝 놀라 붓을 빼앗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럼은 ‘아마추어는 걸작을 만들려다 기회를 놓치지만, 프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시작해 걸작을 골라낸다’라고 마무리했다. 말씀대로 편지를 써 부치고 나자 아버지가 불러 “잘 하려다 시작도 못 하는 것보다 잘못되더라도 도전해본 게 더 낫다”고 했다. 그날 아버지는 ‘잘했다’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다’라는 표현으로 ‘억(億)&rs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두 번 집을 지었다. 우리가 살던 집을 작은 아버지에게 넘기고 새로 집을 지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내가 봐도 집 짓는 일이 순탄치 않았다. 지대가 낮은 무논에 잡석을 깔고 객토(客土)를 진흙에 섞어 며칠째 지반 다지는 일을 봤기 때문이다. 터다지기가 시작된 날 아버지와 나는 지붕에 씌울 기왓장을 사러 충주에 기차를 타고 갔다. 아버지 회사 트럭은 기와 상차(上車)를 위해 하루 전날 떠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버지는 충주까지 기와를 사러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와공장 김 사장은 아버지보다 두 살 위였지만, 소학교에 같이 다닌 동창생이다. 8.15해방으로 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뒤로 서로 연락 없었으나, 6·25전쟁 중 전상을 입어 같은 군 재활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를, 김 사장은 오른팔을 잃었다. 전역 후 아버지가 상이군경회 진천군지부장 시절 그는 기와공장을 인수해 더욱 친하게 지냈다. 공장에 들어서자 김 사장은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동창생이라던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큰아버지와 외삼촌들 외에 그런 호칭을 쓰는 걸 처음 봤다. 사장님은 의수(義手)인 오른손을 내밀다 왼손으로 바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 한잔할 시간이 지나고 기와를 다 실었다고 할 때 김 사장은 보자기에 싼 걸 풀어 보였다.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막새(瓦當)에 아버지와 김 사장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대금을 치렀다. 차에 오를 때 김 사장은 "제천에서 사도 되는데 먼 길 찾아와 고맙네. 차비 좀 넣었네"라며 봉투를 아버지
갈까 말까 망설일 때는 간다. 할까 말까 머뭇거릴 때는 한다. 줄까 말까 미적댈 때는 준다. 내가 지키는 원칙이다. 실패에 따른 후회가 해보지 않은 후회보다 적기 때문이다. 실패 후회는 뼈저린 자책과 극심한 절망감을 안겨주어서다. 더욱이 후회는 오래가고 다른 일에도 절망감이 이어진다. 그러나 살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사지 않는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멈칫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 먹을까 말까 주저할 때에는 먹지 않는다. 쓸까 말까 주춤할 때는 쓰지 않는다. 후회가 적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하지 말라는 쪽이었고 아버지는 ‘먼저 저질러라’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서슴다’였다. 서슴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망설이다’라는 뜻이다. 말끝마다 아버지는 ‘서슴지 말고 먼저 저질러라’라는 말씀을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이 했다. 저 말씀을 내가 기억하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2학년쯤부터다. 동네 부인 계모임에 다녀온 어머니는 만취 상태여서 여럿이 부축해 집에 오셨다. 술주정이 심했다. 처음 보는 일이라 동생들도 놀랐지만, 아버지는 더 놀랐고 곤혹스러워했다. 자리를 펴고 눕게 했지만, 어머니는 바로 일어나 토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래도 했다가 울기도 하고 안 보이는 동생이나 아버지를 찾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버지는 내게 저녁밥을 하라고 했다. 부엌에 들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릴 때 아버지가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고 소리쳤다. “서슴지 말고 먼저 저질러라.” 그래도 우두커니 있자 “밥하는 거 그동안 봤지 않느냐? 그대로 해라. 머릿속으로 밥 짓
아버지가 위로해 준 일이 처음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친구가 사줘 그날 처음 먹은 술이었는데도 취하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처음 보는 일이어서 많이 놀라셨다. “교복 입은 학생이 술 처먹고 다니냐? 아버지 아시면 어떡하려고 그러냐”며 타박하면서 끌다시피 아버지 방에 꿇어 앉혔다. 내가 쓴 글을 선배가 난도질해 화나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구겨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원고를 펴서 드리자 원문과 교정본을 읽은 아버지는 화가 난 이유를 묻지 않고 “화낼 만하구나”라고만 했다.며칠 지나 저녁 먹을 때 아버지는 “글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써야 한다”며 “그만한 고민도 없이 쓴 글은 쓰지 않는 것만 못 하다”고 핀잔을 줬다. 지난번 보여드린 원고를 아버지가 내줬다. 얼른 넘겨 봐도 붉은 글씨로 거의 모두 고쳐져 있었다. 살아남은 검은 글씨는 몇 자 되지도 않았다. 붉은 종이에 까만 점을 찍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짧고 긴 공문과 개인 글을 평생 쓴 경험을 바탕으로 글에 관한 독자의 태도를 세 가지로 평가했다. 첫째는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다. 3분의 1쯤 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네가 쓴 글이라고 해도 읽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두 번째, 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네 글이라고 해서 읽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 사람만이 공감할 뿐이다. 그것도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네 선배처럼 글을 고쳐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3분의 1쯤 되는 이들이 그나마 네 글과 재주를 아껴준다.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이다”라며
상사가 서울 출장을 간다고 할 때 집에 일이 있다고 얘기해 외박증을 받아 같이 부대를 빠져나왔다. 제대를 몇 달 남겨둔 말년 병장 때다. 시내서 여럿을 만나다 집에는 늦게 들어왔다. 밖에서 한참은 기다렸을 어머니가 “아이고. 왜 인제 오냐? 과장님이라는 소령님이 전화하셨다. 일이 늦어져 내일까지 계셔야 한다며 너는 먼저 귀대하라고 하시더라”라고 했다. 나는 대뜸 “그 사람 참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서울만 나오면 일을 일부러 만드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바깥 얘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뭔 소리를 하는 거냐”며 냅다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부대에서도 윗사람을 그렇게 부르냐? 상사는 상사다. 가까운 사람과 있을 때 네 말이 새나간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습관이 무섭다. 상사를 존경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사석에서도 반드시 경어를 써야 한다. 경어를 쓰지 않는다 해서 네가 대단하다고 아무도 여기지 않는다. 높임말을 썼다고 네 인격이 깎이는 것 또한 아니다”라며 책망했다. 이어 “불과 두서너 달 전에 새로 부임한 과장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며 네 입으로 얘기했는데, 네 인물 평가가 채 일 년도 못 간다는 말이냐? 그분이 그 자리까지 승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발견 못 한 너는 대체 나이 먹어도 어찌 그리도 경박하냐?”라고 나무랐다. 아버지는 이내 태도를 바꿔 “그동안 잘 참고 견뎌냈다”라고 운을 뗀 뒤 “제대를 앞둔 지금이 권태기”라고 진단했다. 일반적으로 권태는 반복적이고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느낀다. 일상적인 활동이나 업무가 반복되면 자
술에 취해 늦은 밤에 귀가하며 집이 보이는 골목에서 노상 방뇨를 했다. 대학 다닐 때다. 함박눈이 쏟아져 오줌 눈 자리는 바로 덮여 사라졌다. 술도 깬 듯 머릿속도 맑았다. 몇 발짝 떼서 집에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본 이는 없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 계단을 오르다 눈 내리는 골목길을 내려다 보고 서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나를 보자 아버지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아버지 방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내 행동을 아버지가 평소처럼 그 자리에서 나무라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해 아버지 방을 내내 지켜봤다. 불안해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새벽 일어나자마자 어젯밤 오줌 눈 자리에 가 봤지만, 눈이 너무 쌓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나를 아버지가 방으로 불렀다. “어젯밤에 대여섯 발자국만 더 걸어오면 되는 집을 놔두고 골목에다 왜 오줌을 누었느냐?”고 물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하자 아버지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너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오줌 누기 전에 주변을 살피는 걸 내가 모두 지켜봤다. 마신 술은 집까지 오는 동안에 네 알코올 분해력이면 다 깼을 것이다”라며 내 행동을 “술을 핑계 삼은 객기(客氣)다”라고 단정 지었다. 객기는 ‘객쩍게 부리는 혈기(血氣)나 용기’라고 정의한 아버지는 “손님이 주인집 일에 참견하듯 별로 귀담아들을 말이 없을 때나 쓰는 실없고 싱거운 짓이다”라고 나무랐다. “그런 행동은 오만(傲慢)함에서 나온다”라며 “잘난 체하며 남을 낮추어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옹졸하다”라고 지적했다. “술이 아니라
왼팔이 며칠 새 저리고 아파서 퇴근길에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은행에 다닐 때다. 일찍 귀가한 나를 본 아버지가 대뜸 왼쪽 팔이 아프냐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느냐고 되묻자 “왼쪽 어깨가 처지지 않았느냐?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거울에 비춰봐라. 한눈에 봐도 어깨가 내려앉은 게 보인다”라며 아픈 왼쪽 어깨를 쳤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서랍을 열어 흰색 알약을 하나 꺼내주면서 바로 먹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자 아버지는 양손으로 손깍지를 껴보라고 했다. 오른손 엄지가 편하게 위로 올라왔다. 손을 바꿔 왼손 엄지가 위로 올라오게 깍지를 껴보라고 했다. 어색했다. 이번에는 팔짱을 껴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오른손이 위로 올라왔다. 왼손이 위로 올라오게 반대로 팔짱을 껴보게 했다. 역시 어색했다. 이어 다리를 평소대로 꼬아보라고 했다. 오른쪽 다리가 익숙하게 왼쪽 다리 위로 올라가자 그 반대로도 해보라고 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 위로 올라오는 건 둔했다. 아버지는 “거울에 비춰봐서 알아챘겠지만, 네 몸은 눈에 띄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중증이다”라며 간단한 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어제오늘에 생긴 질환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비뚠 자세가 병을 키운다. 삼십수 년을 그렇게 미세하지만 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아 병이 생긴 거다. 바른 자세에서 건강이 나온다. 네 몸 네가 망친 거다”라고 질책했다. 아버지가 벼루를 내줬다. 양말을 벗고 발에 먹물을 묻혀 흰 종이 위에 앉았다가 일어서라고 했다. 난생처음 풋 프린트(Footprint), 발도장을 찍었다. 오른쪽 발
아버지와 겸상하고 숟가락을 들 때 집 전화벨이 울렸다. 결혼해 한집에서 살 때다. 거래처 대리 전화였다. 받자마자 그는 내가 퇴근할 때 물어본 일이 잘 진행되었다고 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상사에게 설명을 잘해 그 일이 성사된 거라고 공치사했다. 전화를 끊지 않고 이어 상사인 과장이 판단 실수한 때문이라며 요즘 자주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험담했다. 나도 “그렇긴 하더라구요. 내가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김 과장 결혼할 때 가서 축의금도 냈는데, 내 결혼식엔 오지도 않고 축의금도 안 보냈습디다”라고 응수했다. 그때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려쳤다. 놀라 전화를 바로 끊었다. 상을 물린 아버지는 옮기기도 어려운 욕을 하며 심하게 나무랐다.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김 과장한테 할 얘기를 아래 직원에게 하느냐는 것이고, 김 과장이 부조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섣불리 둘 사이의 일을 발설하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전화해 설명하라고 했지만, 집 번호를 모른다고 하자 내일 출근하자마자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축의금 안 냈다고 비난하지 마라. 왜 안 냈느냐고 물어보긴 뭣하지만, 그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다. 네가 100을 줬다고 상대가 반드시 100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정 서운하면 네가 그의 봉투를 만들어 축의금을 접수하면 될 거 아니냐”라며 옹졸함을 책망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네 마음과 같지 않다. 더욱이 네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네 기대에 맞춰 정형화하는 건 위험하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다르다. 천 사
어둠이 내린 신작로를 따라 걸을 때 지나던 트럭이 저만치 가다 멈췄다. 어둠 속에서도 트럭이 뱉어낸 흙먼지가 자욱했다. 운전사 쪽 문이 열리며 타라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다닐 때다. 기차 타러 가다 같이 통학하는 친구들이 짜장면을 먹고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만두가 먹고 싶어 나만 빠졌다. 만두를 시켜 먹고 부리나케 역으로 달려갔지만, 막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30리 넘는 길을 걸어오다 중간에서 트럭을 만난 거다. 아버지 석재공장 트럭이었다. 차에 타자 아버지가 “왜 혼자 걸어가느냐?”라고 물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아버지는 “왜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았냐?”고 또 물었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이 통학하는 친구 중에 싫어하는 친구가 끼어 있어 같이 가기 싫었던 건데 그런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같이 가는 친구들은 의혹을 품게 되고 자칫하면 오해를 낳는다. 설사 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도 짜장면을 같이 먹지 않는 납득할만한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장으로 차를 보내고 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집요하게 물었다. 짜장면을 먹으러 간 친구들은 누구누구냐. 이름이 뭐냐. 같은 동네 친구가 아니면 그 애는 어디 사느냐고 캐물었다. 특히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세세하게 물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하나 모두 만나 설명해줘라. 만두 먹은 얘기 빼고 아버지 편지 심부름을 깜박 잊어버린 게
“너희들이랑 안 놀아”라고 소리치며 대문을 세게 닫고 집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마루에 올라서는 나를 아버지가 더 큰소리로 불러세우며 “공은 왜 들고 오느냐. 애들한테 당장 갖다 주라”고 야단쳤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는 두 친구에게 공을 건네주고 바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공을 가지고 온 이유를 물었다. 공은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오며 사다 준 거였다. 찰 고무로 만든 주머니에 공기를 넣어 부풀린 공은 모두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천이나 짚 뭉치로 만든 공을 찼다. 가끔은 돼지 오줌보에다 바람을 넣은 공을 발로 차면서 놀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다 준 찰 고무공은 획기적인 것이어서 친구들이 매일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라고 준 공을 네가 왜 도로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 것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제 공인데 저한테 패스하지 않고 잘 차는 지네들끼리만 공을 가지고 놀길래 가지고 왔어요”라고 설명했다. 담배를 피워 뜸 들인 아버지가 “친구들 모임에 줬으면 그 공은 더는 네 공이 아니다. 그 모임의 공이다. 네가 친구 모임에 준 공을 아직 네 공으로 여기는 건 잘못이다. 공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네가 공을 가지고 나가야 모이고 네가 공을 가지고 들어오면 흩어지는 모임이면 그건 네 모임이지 그들의 모임이 아니다. 모임을 네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며칠 지나 공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집으로 불러 다시 나무랐다. 공놀이하며 두 친구 하고만 공을 주고받는 것을 특히 지적했다. “저 공은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거다. 앞으로 네가 공을 다시
집에 새가 날아들었다. 대학 다닐 때다. 문 열린 마루로 들어온 새가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날아다녀 소동이 벌어졌다. 동생이 안방으로 새가 다시 들어오자 얼른 문을 닫아 가뒀다. 새가 이 벽 저 벽을 타고 날아다닐 때 들어온 아버지가 문을 열라고 했다. 문이 열리자 새는 방안을 두서너 바퀴 돌다 밖으로 훨훨 날아갔다. 집 주위에서 흔히 보는 새는 아니었다. 회갈색에 흰 줄이 선명한 날렵하게 생긴 새였다. 참새나 딱새보다는 크고 까치보다는 작지만, 날렵하고 매끄러운 데다 경쾌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튿날 그 새가 다시 집에 왔다. 마루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으로 날아들지는 않았다. 오동나무에 앉았던 새는 측백나무로 단풍나무로 몇 번을 옮겨 다니며 때로 밝은 울음소리를 냈다. 사흘째 그 새는 집에 찾아왔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새 울음소리가 특이해 온 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와 동생들은 먹이를 부리나케 준비해 마당에 흩뿌려 두었지만 새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정도 집에 들른 새는 더는 오지 않았다. 더는 새가 집을 찾아오지 않던 날 밤에 아버지가 불렀다. 아버지는 “그 새가 아무래도 심상찮다. 그 특유의 울음소리가 마치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이어 “옛날 네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조상님네들이 간혹 미물들의 몸을 빌려 후손들에게 나타나 깨우침을 주기도 한다’며 느닷없이 나타난 저 새가 뭔가 우리 집안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귀띔해주는 거 같다. 혹 짚이는 게 없느냐?”고 물었다. 동이 트기 전 건넛방의 아버지가 소리 질러 모두 깼다. 마당에 천막 쳐 만든 연구실에 불을 켜고
아버지가 직장으로 전화해 대뜸 “장구 하나 사 와라”라고 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서둘러 퇴근해 종로3가 악기점을 들렀다. 사정을 얘기했더니 두서너 개를 골라줬다. 그중 장인의 작품이라며 북을 같이 사라고 해 할인된 가격으로 샀다. 장구를 받아든 아버지가 한참을 둘러 보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율을 마친 아버지가 바로 부른 노래가 ‘사발가’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요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없구나./ (후렴)에 에헤 에헤야 어여라난다 디여라 허송세월을 말아라.” 아버지가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도 놀라웠지만, 장구로 굿거리장단을 맞추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사발가(沙鉢歌)는 1910년 국권침탈 무렵 민족이 지닌 울분을 토로한 경기민요다. 본래의 사설에는 ‘사발’이란 말이 없고, 후에 생겨난 사설에 사발이란 노랫말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 기인하여 ‘사발가’라 지칭된 듯하다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다섯 자락을 장구로 장단을 맞춰가며 연달아 불렀다. 잠깐씩 눈을 감고 들으면 내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가 아닐 만큼 절창이었다. 흥이 난 아버지는 ‘목포의 눈물’, ‘용두산 엘레지’, ‘모정’ 등 트로트를 몇 곡 더 불렀다. 북을 잡은 아버지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사설시조(辭說時調)를 마지막으로 뽑은 뒤 북채를 내려놓았다. 음악을 모르는 내가 들어도 잘하는 이유는 군 병원에서 재활훈련 중에 아버지 표현대로는 당대 최고 명창에게 피나는 노력으로 전수한 때문이라고 했다. “다리를 잃고 마음 둘 데가 없어 밥 먹을 때 빼고는 잠 안 자고 노래를 배웠다”고
한밤중에 누가 대문을 심하게 두드렸다. 대문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아버지가 다리에서 떨어졌다고 소리쳤다. 어머니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면사무소에서 오는 길에 있는 섶다리 아래 개울에 사람이 떨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리에서 떨어진 거 같았다”며 단숨에 얘기한 그분은 “술이 많이 취해 건져 올리긴 했지만, 모시고 오려 했으나 막무가내여서 두고 왔다”라고 알려줬다. 중간쯤에서 만난 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컴컴한 밤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자전거는 앞바퀴가 휘어져 탈 수 없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 날부터 아버지는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기억을 되살린 건 내가 대학 다닐 때였다. 술 취한 나를 친구들이 부축해 밤늦게 골목에서 노래 부르며 집에 들어왔다. 마당에다 먹은 술과 음식을 토해냈다. 어머니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걸 막아선 아버지는 마루에 꿇어앉으라고 했다. 옆으로 쓰러질 때마다 대나무 막대기로 마룻바닥을 내리쳐 바로 앉으라고 했다. 필기구를 내주며 아버지는 “오늘 술 먹은 일을 빠짐없이 적으라”고 했다. 썼다가 지우고, 옆으로 쓰러졌다가 아버지가 대나무로 바닥 치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날이 밝을 때쯤에야 몇 장짜리 소위 술 먹은 그날의 보고서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읽지는 않고 내가 쓴 종이를 들고 “보태고 뺄 얘기가 더 있느냐”고 물었다. 정신이 돌아온 내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하신 말씀이다. “이기지 못할 술이면 마시지 마라. 술이 너를 이긴다. 술은 기호식품(嗜好食品)이다. 좋아하는 음식이니 즐길 줄 알아
손주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환갑을 맞았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결혼해 첫 아이를 낳은 때라 회갑 잔치를 잘해드리고 싶었다. 동생들과 협의해 시내 호텔에 식장을 예약했다. 준비가 거의 끝나 아버지를 찾아뵙고 환갑잔치 준비상황을 처음으로 알려드리며 초대할 지인들을 말씀해달라고 했다. 잠자코 듣던 아버지가 눈시울을 적시며 “그만두라”라고 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씀드리자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냐”고 화냈다. 머뭇대자 “당장 예약 취소하라”라고 해 그 자리서 바로 취소했다. 영문 몰라 하는 내게 한참 지나 아버지는 “고맙다”고 한 뒤 “보잘것없는 삶이어서”라는 이유를 댔다. 아버지는 회갑연에 으레 밝히는 “약력이라고 소개할 게 없어서다”라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나이는 ‘가지다’가 아니라 ‘먹는다’고 쓴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써왔으니 선인들의 비유와 경계가 놀랍고 두렵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나이를 ‘먹는다’고 비유한 이유를 이렇게 유추해 설명했다. 첫째 나이가 사람의 생명 에너지 소비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성장하고 발달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둘째 나이가 사람의 경험 축적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소모했다는 뜻이다. 시간을 먹었다는 얘기다. 아버지는 “‘먹는다’가 문제가 아니라 먹으면 그에 상응한 결과가 없어서다”라며 “음식은 먹은 만큼 소화해 성장하며 잔
손주를 보러 온 부모님이 애들 재롱에 빠져 즐거워할 때 전화가 왔다. 전 부서 직원과 통화하던 내가 “그러면 그건 백지화(白紙化)하라”고 하자 아버지가 “전화 끊으라”고 호통쳤다. 손주들이 놀라 품에서 달아나자 아랑곳하지 않은 아버지는 백지화를 “자인하기 싫어 교묘하게 포장한 실패”라고 규정했다. “치졸하다”고 책망한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전 부서에서 네 손을 떠난 계획을 백지화하라는 말은 월권(越權)이다”라고 했다. “또 살펴보니 전 부서에서 계획한 자료들을 가져왔던데 그건 실행에 옮기지 않은 아이디어라도 그 조직의 재산이다. 그걸 임의로 들고나온 건 엄연한 범법행위다”라고 꾸짖었다. 이어 “전 부서, 전 직장을 욕하는 이가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걸 못 봤다. 친정 흉보는 거 아니다”라고 아버지는 나무랐다. 아버지는 “네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만 혹여라도 ‘나도 고생했으니 후임자들도 고생해봐라’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면 크게 잘못한 일이다”라며 크게 염려했다. 백지화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초기 상태로 돌려놓는다’라는 뜻이라고 정의해 설명했다. 첫째 계획이나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취소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 둘째 합의나 결정이 뒤집히거나 무효로 하여 다시 논의해야 할 때, 셋째 기존 시스템이나 구조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스템이나 구조를 구축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백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실패다. 아버지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부는 봉건 시대의 모든 법률과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백지화
우리나라 속담이다. 서양 속담은 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 그의 저서 ‘연설록’에는 ‘받은 은혜는 영원히 기억하고, 겪은 원한은 흐르는 물처럼 잊어버려라’라고 나온다. 아버지에게 저 속담을 배웠다. 직장으로 전화한 아버지가 퇴근 후 지인 모친상에 문상을 같이 가자고 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택시로 혜화동 상가에 가면서 아버지는 부의금 봉투를 가져왔느냐고 했다. 어찌 될지 몰라 봉투 두 개를 준비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향전(香奠)’이라 쓴 봉투를 내보이며 “내 것은 준비해왔다”라며 “네 것은 네가 준비하라”라고 했다. 겉봉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흰 봉투를 내밀자 직접 쓰라고 해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손을 붙잡아 ‘부의(賻儀)’라고 쓰고 내 이름을 뒷면에 썼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바로 지적했다. 부의는 반가(班家)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양반은 ‘상제(喪祭)’ 또는 ‘상금(喪金)’을 썼다. 그게 아니면 ‘향전(香奠)’을 써야 한다고 해 그 자리서 고쳐 썼다. 또 이름 마지막 자 ‘권세 권(權)’을 약자인 ‘권(权)’으로 쓰자 “제 이름을 약자로 쓰는 놈이 어딨느냐. 제 이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남이 귀하게 여기겠느냐”며 이름은 반드시 정자로 쓰라고 했다. “봉투에 돈은 얼마를 넣을까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형편대로 하라”고 했다. 이어 “형편이 안 되면 빈 봉투를 낼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위인이라면 사귀지 말라. 저쪽에서 내 경조사에 냈던 금액에 맞춰 내는 건 거래다”라고 지적했다.
포상휴가 나왔을 때다. 친구들을 만나고 귀가하자 아버지가 마루에서 기다리다 “왜 인제 오느냐? 부대에서 ‘급한 일이니 전화해 달란다’는 전화가 왔었다”라고 했다. 인사드리고 난 뒤 부대에 전화했다. 상황실 당번병이 받아 “내일 군단에서 높은 분이 방문하신답니다. 부대가 난리입니다. 나중에 포상휴가 다시 보내준다며 바로 복귀하시랍니다. 브리핑 차트 밤새워 만드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아버지께 통화내용을 말씀드리자 “얼른 들어가라”면서도 꺼낸 말씀이 “그렇게 상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라”였다. 아버지는 “네가 상사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았다”며 기분 좋아 길게 말씀했다. 그렇게 인정받기까지 네가 겪었을 숱한 노력이 눈에 선하다. 잘 자라준 모습이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칭찬도 모처럼 했다. “군대는 명령과 복종이 생명이다”라고 한 아버지는 “군대 생활의 신조는 ‘상사 만족’이다”라고 단정하며 너를 찾는 것이 그 증거라고 다시 강조했다. 이어 “상사가 일을 시킬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원은 업무 능력, 책임감, 협력성, 성장 가능성, 상사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택된다”면서 사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상사가 일을 시킬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하가 되자면 능력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며 방법 몇 가지를 일러줬다. 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과거에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경험이 상사의 신뢰를 얻고 일을 맡길 가능성이 크다. 예상치 못한 문제나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스스
중학교 2학년 때다. 학교 가려고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편지 심부름을 시켰다. “군청 뒤에 사시는 어르신을 찾아뵙고 편지를 전해드리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편지를 받아든 채 “군청이 어디 있어요?”라고 되물었던 일 때문이다. 기차 놓친다고 성화 부리는 어머니 말씀에 떠밀리듯 집을 나섰지만, 내 말을 듣자 그때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 아버지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서다. 동급생들이 가르쳐준 군청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은 더 쉽게 찾았다. 편지를 받아든 인척은 먹을 것을 내줬다. 돌아와 아버지께 받아온 답신을 드리자 펴보지 않고 책상에 밀어둔 채 “한심한 놈”이라고 야단부터 쳤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처음으로 오래 꿇어앉아 야단맞았다. “1년이나 지났는데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옆에 있는 군청을 모른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라고 말문을 연 아버지에게 “학교 가는 길만 다니니까요”라고 한 내 대답이 화를 돋웠다. 바로 하신 말씀이 “익숙해야 하지만 거기 빠지면 독이 된다. 익숙함에서 탈피해라”였다. 아버지는 “사람은 먹고 싸고 자는 일이 불편할 때 가장 바쁘다. 너는 그게 해결되자 이내 적응해버렸다”라고 진단하며 “불편한 환경을 맞닥뜨리면 인간은 거기에 바로 적응하게 된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불편함이 체화돼 불편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 환경을 개선할 더 나은 방법이 나타나도 그걸 활용하려는 욕구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네가 군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게 익숙함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라고 우려했다. 이어 “익숙함은 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