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해도 기분 좋을 때가 있다. 군에서 휴가 나온 날 아버지가 시골 큰댁에 계시는 할머니께 꿀에 잰 인삼을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시켰다. 군에 입대한 뒤로는 처음 가는 길이어서 기분 좋았다.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세 분께 인사드리자 여느 때와 달리 더욱 반가워하셨다. 군대에서 잘 지낸다는 얘기를 영웅담처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떠들었다. 집에 돌아와 잘 다녀왔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끊임없이 이것저것을 물었다. “할머니 건강은 어떠시더냐? 식사는 잘하시더냐. 음식 씹는 건 어떠시냐. 몇 번 만에 삼키시더냐. 가져간 인삼은 드셨냐. 뭐라 하시더냐. 걷는 거는 어떠시냐. 잠은 잘 주무시더냐. 중간에 몇 번이나 깨시더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모두 건강하시냐?” 쏟아지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한 건 한마디도 없었다. 묻는 말에 답을 제대로 못 하자 질문을 멈춘 아버지는 “한심한 놈”이라며 역정을 냈다. “심부름하려면 시킨 사람이 간 것처럼 일해야 한다”며 “심부름을 핑계 삼아 네 할 일을 하고 다닌 거다”라고 질타했다. “사람이 살면서 내 사업을 하지 않는 한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남의 일을 맡아 한다. 너처럼 일한 거라면 평균점 이하”라고 평가하며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하라”고 주문했다. 아버지는 남의 일이라도 내 일처럼 해야 하는 이유로 다양한 관점을 습득할 좋은 기회라는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더 넓은 시야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물건을 탈 없이 전달한 것만으로는 높은 점수 따기 어렵다. 게다가 심부름 빌미잡아 네 생
아버지가 가장 많이 해준 말씀 중 하나다. 처음 들었던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중학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새벽 통학 기차를 눈앞에서 놓쳤다. 늦잠 잔 때문이었다. 비 맞으며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이발소에 나가 있던 아버지에게 알렸다. 보던 신문을 접은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발사를 트럭 운전사 숙소로 심부름 보냈다. “아직 현장에 안 나갔으면 우리 애를 삼거리에서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주라고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삼거리까지 빗길을 걸어나가 기다렸다. 아버지 석재회사 운전사는 뒷산 현장에서 이미 육중한 화강암 원석을 싣고 산길을 내려왔다. 한참을 기다려서 트럭을 타고 학교에 갔다. 실은 원석이 워낙 무거워 트럭은 내가 뛰어가는 거보다 느렸다. 교문에서 내려달라고 했으나 운전사는 “사장님이 교실까지 데려다주어라”라고 했다며 정문을 통과해 비 내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 앞까지 태워다줬다. 수업 시작 시간은 맞췄으나 운전사의 배려가 일을 키웠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다. 비가 그친 운동장은 내가 탔던 트럭이 큰 타원형을 그리며 움푹 팼다. 항의받은 아버지는 며칠 뒤 인부와 장비를 동원해 운동장 보토(補土)와 평탄화 공사를 했다. 인척인 당시 국회의원까지 내세운 아버지는 공사를 마친 뒤 학교 교장 등과 교분을 오래 유지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관심 학생으로 분류됐다. 공사가 마무리된 날 밤 아버지가 한 첫마디가 “위기 안에 기회 있다”였다. 위기(危機) 한자를 파자해가며 길게 설명한 내용은 이랬다. ‘위(危)’자는 기슭 아래에 사람이 굴러떨어진 모습을 그린 ‘재앙 액(厄)’자와 ‘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교실 바닥 청소하다 싸움이 벌어졌다. 내가 일방적으로 맞은 폭행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책걸상을 한쪽으로 밀치고 마루를 물걸레질할 때 우리는 모두 오른쪽부터 병렬로 늘어서서 닦아나갔다. 전학 온 아이 혼자만 반대쪽인 왼쪽부터 닦아나갔다. 무릎을 꿇어 엉덩이를 들어 걸레를 힘껏 밀고 가다 중간에서 우리 둘은 머리를 맞부딪쳐 뒤로 나자빠졌다. 몸을 먼저 일으킨 그 아이가 내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치자 코피가 터졌다. 나도 팔을 뻗어 쳤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이들 싸움은 코피 터진 쪽이 바로 진다. 싸움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콧구멍을 종이로 틀어막고 집에 오자 어머니가 놀랐다. 집에 막 돌아온 아버지가 코피 묻은 종이를 빼내라고 하고 물었다. 아버지 질문은 집요했다. “그 애는 너희와 다르게 왜 왼쪽부터 닦았느냐. 그렇게 한 이유를 들어봤느냐. 너를 왜 때렸다고 하더냐? 너희는 왜 오른쪽부터 닦느냐.” 한 마디도 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네가 잘못한 거다”라고 판정하면서 그 애 집에 찾아가서 사과하고 물어보고 오라 했다. 집에 없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내게 아버지는 “네가 아는 게 다 맞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 아이가 맞을 수도 있다. 네가 맞다는 걸 증명해 보이자면 먼저 까닭을 물어보는 게 우선이다”라고 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그 아이가 왼손잡이일 수도 있다. 그래서 편한 왼쪽부터 닦아나갔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 10%는 왼손잡이다”라며 그 아이를 두둔했다. 설명을 이어간 아버지는 “왼손잡이의 ‘외다’는 ‘그르다’의 옛말이다. 여성복 단추는 왼쪽에
전방부대 후반기 교육대는 논산 신병훈련소에 시설이나 교육 운영이 미치지 못했지만, 군기는 더 셌다. 이번에 입소한 병력은 모두 접적 지역 최전방부대 소총수로 배치된다는 얘기가 돌았다. 자대 배치 날짜가 다가오면서 초조했다. 몇몇은 쉬는 시간에 교육대 철조망을 통해 먹을 것들을 사 먹으면서 은밀하게 편지를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도 최전방부대로 가지 않게 해달라는 인사청탁 편지를 써 집에 보냈다. 훈련 동기 여럿이 중부 전선 전방부대에 배치되었으나 나는 연대 본부대 행정병으로 남았다. 편지로 집에 알렸으나 답장은 없었다. 얼마 안 있어 후임병이 전입해오자 막내 신세를 면할 때쯤 첫 외박을 나왔다. 아버지 회사에 먼저 들렀다. 결재를 기다리는 직원들과 접견실에 같이 앉았을 때 사장실에서 아버지 전화 통화가 들렸다. 집안사람의 인사청탁을 거절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안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큰소리가 나면서 통화는 끝났다. 결재를 마친 아버지가 불렀다. 방에 들어서 모자를 벗고 인사하자 아버지는 모자 쓰고 거수경례하라고 했다. 앉아서 거수경례로 인사받은 아버지는 내가 앉자마자 대뜸 “군대도 사람 사는 동네다. 네가 힘들면 다른 사람들도 힘들다. 내가 좀 편해지자고 하면 같이 있는 사람들은 두 배로 더 힘들게 된다. 그런 결정을 윗사람이 할 리 없다”라며 청탁을 넣어달라는 내 부탁 편지는 그렇게 무시했다고 했다. 좀 전에 친척과 통화한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편지를 집에 보낸 일을 ‘바보 같은 짓’이라며 꾸짖었다. 사람 뽑는 일이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 가장 신경 쓰는 일이라며 공자가 한 말
학교에서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 방에 불쑥 들어가 읍내 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방 안의 손님들이 더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가 끌 듯이 데리고 나왔다. 며칠 지나서야 아버지가 불러 전학 가려는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이 수업 중에 “읍내 학교 애들은 이 정도 문제는 다 푼다. 너희들 실력으로는 읍내 중학교 못 간다”라고 했다며 말씀드렸다.그날 아버지는 즉답하지 않은 채 석수장이 얘기를 들려줬다. 바로 얼마 전에 교과서에 나와 배운 얘기여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그 동화를 알고 있는 게 도리어 신기했다. 동화는 이랬다. 석수장이가 뙤약볕 아래서 정과 망치로 바위를 쪼고 있을 때 저 멀리 화려한 마차 행렬이 지나고 있었다. 임금님 행차였다. 한없이 부러웠던 그는 혼잣말로 “나도 임금이 되어보았으면…”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이제부터 너는 임금이 되어라”라는 큰소리와 함께 석수장이는 임금이 되어 황금빛 깃발이 펄럭이는 대열의 한 가운데에서 마차를 타고 갔다.무더운 여름날이라 땀이 흘러내렸다. 하늘을 보니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타고 있었다. 임금보다 태양이 더 나을 것 같아 “나도 태양이 되었으면…”하고 중얼대자 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작열하는 태양이 되었다. 두루 세상을 구경하고 빛을 비추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얼마쯤 지나 난데없는 구름이 몰려와 시야를 가려버렸다.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지 않자 “나도 구름이 되었으면…”하고 말하자 순식간에 이번엔 구름으로 변했다. 거침없이 나다니고 구경하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마당에 심을 나무를 캐러 간다고 아버지가 따라나서라고 했다. 인부 둘과 트럭을 타고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지금은 무릉도원면) 아버지가 경영하던 채석공장 뒷산으로 갔다. 임도(林道)를 따라 한참 올라가서야 트럭이 멈췄다. 저 나무다 싶을 정도로 운치 있는 소나무였다. 벼랑에 매달리듯 누운 와송(瓦松)이었다. 길을 반쯤은 가리며 길손을 반기듯 산을 지키던 소나무는 반나절은 걸려 산채(山採)해 우리집에 왔다. 소나무는 바로 심지 않았다. 대문 안쪽 마당 끝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 옆에 놔뒀다. 아버지는 하루 몇 번씩이나 아이 엉덩이처럼 밑동을 싼 가마니를 두들겨줬다. 때로는 목을 축일 수 있게 물을 조금씩 흘려주며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며칠 지나 머리카락 다듬듯 솔을 쓰다듬던 아버지는 인부들을 불러 비로소 심었다. 식혈(植穴) 속에 앉힌 뿌리분과 그 주위에 채워진 새로운 흙이 잘 밀착되도록 반나절이나 걸쳐 심었다. 내가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우고서야 소나무는 이튿날 번듯하게 살아났다. 아버지는 “소나무를 옮겨심을 땐 뿌리를 가마니로 싸서 묶어뒀다가 아픈 기운이 좀 없어지면 옮겨 심어야 한다”고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이어 “대문 앞에 큰 나무는 한자로 표현하면 ‘한가할 한(閑)’으로 가난하다. 현관 앞의 큰 나무는 ‘곤란할 곤(困)’으로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해 피한다”다고도 했다. 우리집 소나무는 대문 들어오는 다리를 반쯤은 가려 마치 손님을 반기는 환영수(歡迎樹)가 됐다. 허리를 굽힌 소나무는 눈비를 대신 맞아주기도 했고 뙤약볕을 가려주기도
중학교 진학해서는 집에서 30리 떨어진 읍내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잠꾸러기에게 새벽 기차 타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챙겨주는 책가방을 들고 기차 기적이 들려야 뛰어가 간신히 타는 일이 빈번했다. 때로는 먼저 타고 온 여학생들이 나서서 뛰어오는 나를 가리키며 열차 출발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여중 3학년 누나 둘이 유독 챙겨줬다. 모자를 바로 씌워주기도 하고 교복 단추도 끼워줬다. 열린 가방을 알뜰하게 닫아주기도 했다. 속으로 키 큰 누나, 예쁜 누나로 불렀다. 자장면을 사주기도 했고, 숙제도 가르쳐줬다. 기차가 기다려졌다. 집에도 놀러 와 자고 가기도 하고 나도 두 누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두 누나가 읍내에서 자취하기로 해 기차에서는 만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키 큰 누나가 같이 자취해도 된다고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아버지는 “생각 좀 해보자”라고만 했다. 저녁을 거르고 버티자 아버지가 불러 “조바심내지 마라. 조바심낼 일이 아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을 “조마조마해 졸이는 마음이다”라며 길게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바심’은 타작을 뜻하는 말이다. 곡식 이삭을 비비거나 훑어서 낟알을 털어내는 탈곡(脫穀)을 뜻한다. 조 이삭을 털어내는 일이 조바심이다. 조는 이삭이 질겨서 잘 떨어지지 않아 비비고 문지르면서 애써야 간신히 좁쌀을 얻을 수 있다. 조바심할 때는 당연히 힘만 들고 좀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진다는 데서 이 말은 유래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설
손자가 태어나 집에 오자 아버지는 바빴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자는 동침(東枕)을 고집했다. 아버지는 창과 벽 사이로 스며드는 웃풍이 심하자 머리맡에 둘러칠 머리 병풍(頭屛風)을 만들었다. 흔히 가리개라 부르는 침병(枕屛)은 대개 두 폭이다. 미뤄뒀던 일이라며 방 귀퉁이에 한동안 밀쳐둔 종이상자를 풀었다. 목공소에 진즉에 주문한 홍송(紅松) 병풍 틀을 만드는 나무가 가득 들어있었다. 끌로 파고 사포로 문질러 결대로 짜 넣는 데만 며칠 걸렸다. 아버지는 “배접(褙接)은 왜놈들 용어”라며 다시 며칠 걸려 두 번에 걸쳐 배첩(褙貼)했다. 밀가루로 풀을 쑤고 녹말을 완전히 내린 후 말려서 가루로 두었다가 묽게 쑤어 풀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풀로 삼베로 병풍 기둥을 싼 뒤 비단으로 다시 싸 돌쩌귀로 붙여 연결했다. 곁눈으로 지켜만 봐도 정성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 매달리던 아버지가 불렀다. 종이를 잘라 놓고 기다리던 아버지는 먹을 갈아달라고 했다. 더는 말하지 않고 한 번에 써 내려간 시가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다. 주희가 책을 읽다 든 생각을 쓴 시다. “작은 사각 연못에는 큰 거울이 펼쳐지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일렁인다. 묻노니 이 연못은 어찌 이리도 맑을까. 발원지에서 쉬지 않고 새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시는 두 편이다. 저 시는 첫 편이다. 아버지는 행서체로 두 연을 한 폭씩 썼다. 그래서 병풍은 모두 네 폭이 됐다. 며칠 뒤 아버지는 작품을 배첩한 뒤 외선을 둘러 병풍을 마무리했다. 붙인 병풍 제목이 고사성어 ‘원두활수(源頭活水)&rsq
마루 유리문 깨지는 소리에 놀라 깼다. 건넌방에서 일찍 잠들었던 내가 급히 뛰어나갔다. 안방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놀라 마루로 나왔다. 마당에 불을 켜자 눈 내리는 밤에 늦게 귀가하던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다 미끄러져 웅크리고 있었다. 무릎을 찧어 일어서지 못한 아버지가 불 켜진 안방에 소리를 질렀으나 기척이 없자 돌을 던져 마루 유리문을 깬 거였다. 내가 얼른 부축해 방안으로 옮겼다. 숨돌린 아버지는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못 듣느냐”며 심하게 나무랐다. 바로 큰 망치를 가져오라고 한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 벽체를 힘껏 쳐내 구멍을 냈다. 내가 건네준 망치로 구멍 난 벽을 더 내려치자 낡은 한옥이라 쉽게 허물어졌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가는 미닫이문 옆 벽면은 원래 창이 나 있었는지 위아래에 모두 통나무를 건너질러 마감이 돼 있었다. 눈 쌓인 마당이 대문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찬바람 들어오는 창은 신문지로 가려 막았다. 이튿날 새벽부터 목공소에 주문해 밖으로 열리는 두 쪽 여닫이 창문을 달고 창호지를 발랐다. 부엌으로 통하는 창문 바깥에는 쪽마루도 깔았다. 부엌에서 마루를 통해 안방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야 했지만, 소소한 물건은 창문을 열고 바로 안방에 들여올 수 있게 됐다. 안방에 앉아 창을 열고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쪽마루로 부르는 게 쉬워진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인 머름(遠音)에 팔을 걸치고 밖을 내다보는 걸 아버지는 무척 즐겼다. 창을 낸 그 날 저녁 아버지는 하루 만에 낸 창을 ‘눈꼽재기창’이라고 알려줬다. 여닫이 옆에 작은 창을 내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창을 일컫는
중학교 다닐 때 IQ(intelligence quotient) 검사를 했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 결과를 발표했다. 130점 넘는 학생이 1명, 120점과 110점대는 네다섯 명쯤 불렀다. 나머지는 개별적으로 점수를 알려줬다. 나는 108점이었다. 선생님은 점수 발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아이큐 테스트를 설명했다. “이 지능지수(知能指數) 검사는 지능의 발달 정도를 나타내는 거라 상대적이다. 잠재력을 나타내는 거니만큼 점수에 상관없이 노력이 중요하다”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다른 학생들은”이라고 말문을 열자 아버지는 “다른 학생들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중심이다. 괴금(塊金) 이로구나”라며 큰소리 내 웃었다. 곧바로 “괴금이란 덩어리 상태의 금이란 말이다. 그거면 됐다.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가장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원소가 금이다. 머리가 비상하구나. 할아버지와 아비를 닮았으니 그럴 거다”라고 흡족해했다. 기분 좋은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런데 하필이면 108이냐? 하긴 인생이 온통 백팔번뇌(百八煩惱) 덩어리긴 하다”고 해 기억이 생생하다. 이어 “네가 받은 그 점수는 금덩어리를 깎은 정도를 뜻한다. 지능이 완전히 발달한 성취물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한 수준이다. 앞으로 연금술을 써서 가공해야 한다. 금반지를 비롯해 장신구를 만드는 이외에도 치과, 의료 등 여러 분야에 요긴하게 쓰일 거다. 뭐로 만들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귀한데 쓰일 머리다”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 손님이 오자 절을 시킨 뒤 “큰아들입니다. 자식 자랑 같지만, 애가 머리가 비상합니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 자기는 그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피눈물을 쏟으면서 저 말을 배웠다. 은행에 다닌 지 오래지 않아 내 이름으로 집 매매계약을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돈은?”하고 빤히 쳐다봤다. 집 담보로 대출해준 기업체가 부도나 연체됐다. 대출이 나간 지 1년도 안 돼 연체가 되자 승진을 앞둔 담당자들이 곤란해졌고 경매로 가기 전에 내가 매입해 연체 정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해 인수했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대금은 은행 대출을 받아 처리할 거다”란 말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담배 재떨이를 내던졌다. 정수리에서 바로 피가 났고 눈물도 났다. 그때 피눈물을 흘리는 내 머리 위로 아버지가 쏟아낸 말이다. 부도로 경영하던 기업을 은행이 강권해 넘긴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옛일을 떠올리며 “그게 은행이 욕먹는 이유다”라며 그때 하지 못했던 험한 말들을 마구 퍼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버지의 질타다. “은행원이 옹졸하다. 잔혹하기 그지없다. 야비한 집단이다. 협잡꾼들 집합소다. 편협하기 이를 데 없다. 상처 난 데 소금 뿌리는 놈들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한다. 지네들도 장사하는 놈들인데 상도(商道)란 게 없다”라며 그런 걸 강요하는 직장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내가 손수건으로 피눈물을 찍어내는 걸 개의치 않고 야단치던 아버지는 “집은 제2의 옷이다”라고 정의했다. 설명을 이어나갔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거기 사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누구인지를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내가 뉴욕에 살던 1999년 11월의 일이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남동생이 전화했다. 응급 처치를 해 의식은 돌아왔으나 말씀을 못 하신다면서 전화를 바꿔 달라시는 거 같다고 했다. 전화기를 통해 아버지는 ‘악!’ ‘악!’ 하는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만 질렀다. 말이 되지 않자 전화기를 내던졌는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끊어졌다. 나는 아버지의 그 두 마디를 “손주들을 보고 싶다”라는 말로 얼른 알아들었다. 두 달 전에 뉴욕 집에 다녀간 아버지가 툭하면 국제전화를 걸어 손주들과 통화했다. 통화를 못 하면 아쉬워하며 으레 저 말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한집에서 같이 지내다 내가 뉴욕 주재원으로 발령 나자 아버지는 손주들을 유독 찾았다. 김포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손주들을 양손으로 한참을 꽉 껴안았다. 다녀가라고 해도 오시지 않았다. 2년을 버티던 아버지는 “안 보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다”라며 어머니와 갑자기 미국에 와 손주들과 몇 날을 같이 지냈다. 그때 아버지는 손자와 손녀로 구분 짓지 않고 언제나 손주라고 했다. 내가 “왜색(倭色) 짙은 말이라 낯설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 과문(寡聞)을 탓했다. 손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손자 손녀를 작은 손님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아버지는 “옛날에는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집안에 작은 손님이 온 것처럼 기뻐했다. 손자 손녀를 가리키는 말에도 손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라고 일러줬다. 아버지는 손주를 길게 설명했다. 선조들은 손자 손녀가 집안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로, 집안의 대를 이어갈 후손으로, 그래서 귀한 존
은행에 근무할 때다. 미국 연수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께 출국 인사를 드리자 만년필을 고쳐오라고 했다. 매일 쓰는 파카51 만년필이었다. 1941년에 출시되어 70년이 넘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명작이다. 18K 금촉을 쓰는 ‘파카51 골드 닙’은 뚜껑에 새겨진 로고가 시그니처 디자인이다. 책상에서 뭘 쓰다 손자가 오자 껴안은 아버지는 아이가 만년필을 집어들 때만 해도 좋아라 했다. 손자가 만년필을 거꾸로 들고 책상 위 유리판에 두어번 내리 찍었다. 제지할 겨를도 없이 눈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펜촉이 심하게 구부러졌다. 아버지는 손자를 내동댕이쳤다. 손자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그 만년필을 그냥 고쳐 쓰는 줄로만 알았다. “구부러진 펜촉을 펴기만 하면 될 텐데요. 그게 미국에 있을까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몇 번을 고쳐봤는데 전처럼 부드럽지가 않다. 펜촉을 구해 와라. 미국인데 왜 없냐?”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만년필 병원(FPH,Fountain Pen Hospital)은 뉴욕시청 뒤에서 쉽게 찾았다. 만년필 수리 전문 업체인 가게는 1917년 설립돼 100년이 넘는 노포(老鋪)다. 만년필을 내밀자 점원은 바로 파카51 골드 닙 브랜드라고 했다. “오오 불쌍하다”며 펜촉을 더는 쓸 수 없어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점원이 뒤 서랍을 열자 금촉이 그득했다. 그는 지금까지 8억 개나 팔렸다고 자랑하면서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파카51 만년필을 애용해 ‘아이젠하워 만년필’이라고 불린다고 소개하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귀국해서 바로 찾아뵙고 만년필 병원 얘기 끝에 “미국 참 풍요롭더라고요”라며 고쳐온 만년필을 드렸다. 아
마루의 괘종시계가 멈췄다. 제때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서다. 아버지가 멈춰선 시계를 넘어뜨리자 앞 유리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집이 멈췄다"라며 새벽부터 불같이 화냈다. 대학에 다니던 때다. 건넌방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재빨리 뛰쳐나가 시계를 일으켜 태엽을 감았다. “집안의 시계가 멈추는 일은 삶의 긴장이 느슨해진 거고 게으름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며 아버지는 태엽을 감는 내 머리 위로 역정을 쏟아부었다.방으로 불려들어가자 아버지는 “집안의 시계가 멈춘 거는 우리집 지킴이의 죽음이다”라며 태엽을 감지 않은 것이 무척 큰일이라고 확대했다. 이어 “시계 태엽을 감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데 끝나지 않고 습관으로 굳어지는 일이 두렵다”라며 우려했다. 아버지는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때와 때 사이가 시간이다. 시간(時間)의 ‘간(間)’은 원래 문(門) 안에 달 월(月)을 넣어 ‘틈 한(閒)’이었다. 틈새란 뜻이다. 어두운 밤 문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온 모습을 그렸다. 밝은 낮에는 보이지 않고 어두운 밤이 되어야 달빛을 통해 문틈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으니 ‘틈새’라는 뜻을 잘 표현했다. 시간에 틈이 있어 한(閒)이 ‘한가하다’란 뜻으로 쓰이자 날 일(日)자를 써 지금의 틈새를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아버지는 “시계의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가 태엽이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돼 있고 연결된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시간은 물론 인간, 일간(日間), 천지간, 막간(幕間), 산간, 부모·자식 간처럼 둘의 연결에는 틈이 있다. 틈은 시간이 지나면 벌어진다. 그 틈
저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나 깨달았다. 군 복무를 마치던 때다. 우리 집이 빼꼼히 올려다보이는 길지 않은 골목길에 낯선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서성거렸다. 가로등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지만, 싸락눈을 맞으며 우리집 대문을 바라보는 걸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다. 어머니가 “초인종을 누르길래 나갔더니 아버지 회사 직원 부인이라며 사장님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더라”라고 궁금증을 풀어줬다. 어머니가 “들어와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저렇게 서 있다”라며 불편해했다. 늦은 밤에 귀가한 아버지를 대문 앞에서 붙잡고 그 여인이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튿날 퇴근한 아버지가 집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 들어와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는 소리가 났다. 내가 얼른 나가서 “어제 그 부인이 안 돼서 많지는 않은 돈을 넣은 봉투를 드렸으나 한사코 받지 않아 아이 업은 포대기 안에 넣어드렸다”고 자랑스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대번에 “쓸데없는 짓 했다”라며 나무랐다. 방에 불려들어가자 아버지는 어제 그 여인은 김 과장의 부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과장은 내가 몇 번 만난 일이 있는 직원이었다. 은행의 권고로 회사 구조조정을 하면서 십여 명을 감원했다며 김 과장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직원이어서 모두 그의 잔류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감원명단 맨 앞에 나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어느 곳에 가서라도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기에 명단에 첫 번째로 넣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그는 회사에 꼭 필요한 직원이지만,
아버지가 47세 생신을 맞았다. 군에서 휴가받아 집에 온 다음 날이다. 아침 생신상을 받은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살았구나”라며 탄식했다. 상을 물린 아버지가 처음으로 밝힌 가족사다. 내 고조부는 96세, 증조부는 79세로 장수했다. 두 분과 달리 조부는 47세로 단명했다. 내 조부는 고조부가 81세, 증조부가 41세 때 태어났다. 남들이 고손자를 얻을 나이에 손자를 본 고조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젖 뗀 뒤부터는 방을 같이 쓰고 밥 먹을 땐 겸상했다. 고조부는 손자를 서당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친구를 사귀거나 바깥출입도 막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케 했다. 그랬던 고조부는 내 조부가 14살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한 훈육을 계속했다. 소학,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글자만 비판적으로 가르쳤다. ‘내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집안 유훈 때문에 과거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그러니 네 조부는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만큼 할 줄 아는 게 오직 학문뿐이었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네 조부가 형님과 내게 당신의 할아버지가 가르친 방법대로 살아가며 필요한 글자를 모두 직접 가르쳤다. 우물이 떠오르면 관련된 모든 문장을 일일이 써가며 가르쳤다. 당신이 싫어하는 글자는 가르치지 않았을뿐더러 쓰지도 못하게 했다”라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이어 “네 조부는 군에서 다리를 다친 나한테는 집을 떠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라며 더 오래 사시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해준 그 말씀이 나를 살렸다. 내가 아버지 덕에 이만큼 살았다”라
이름이 바뀐 걸 안 건 내가 고등학교 입학해서다.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서무실(지금의 행정실)에 호적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 뒤 고향의 면사무소에서 우편으로 보내온 호적등본에는 중학교 졸업장에 나와 있던 내 한자 이름 조성권(趙誠權)이 조성권(趙成權)으로 가운데 자가 ‘정성 성(誠)’자에서 ‘이룰 성(成)’자로 바뀌어 있었다. 호적등본을 앞에 놓고 주역(周易)에 밝은 아버지는 그리 길지 않게 바꾼 경위를 설명했다. 설명하기 전에 아버지는 “그 입을 다물라. 말을 삼가라”라고 주의부터 줬다. “한양조씨 26세손은 항렬자가 성(誠, 成)이다. 네 사주는 오행(五行)이 모두 들어있다. 흔치 않게 고루 갖춘 사주다. 어느 글자를 취하더라도 이름이 사주를 뒷받침하는 데 문제 될 게 없었다. 자식의 이름을 지으며 고심하다 살아가는 데 더 긴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정성 성(誠)자를 택했다.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신념은 지금도 변함없다. 자라는 너를 지켜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면서 먼저 말을 문제 삼았다. 패가망신할 말과 말하는 태도까지 5적(五賊)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나무랐던 게 이거다. 첫째 지적이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자식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말에 거짓이 드러나면 심하게 책망하고 절교하거나 거래를 끊었다. 몇 번 들키지는 않았지만, 송충이처럼 싫어하는 거짓말이 탄로 날 때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고 그에 맞는 벌을 줬다. 두 번째는 말이 많은 다언(多言)을 추궁했다. 실언과 변명했던 몇 가지 일을 들어 책망하
종합기획실 발령을 받고 출근하기 전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치챈 아버지가 어머니를 시켜 아래층으로 호출했다. 그제야 발령받은 걸 말씀드렸다. “걱정도 되겠지”라며 아버지는 술 한 잔을 따라 주며 마시라고 했다. 이어 “걱정은 내가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걱정은 사라진다. 할 수 없는 사람을 발령내는 건 인사권자가 걱정할 일이다”며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하면 된다”고 간단히 정리했다. ‘다만’이라고 허두를 잡은 아버지가 한참 뜸을 들이다 내놓은 말이다. “낯선 곳에 가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라. 그러면 떨어진 휴지나 문방구가 보일 게다. 그걸 줍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숙이면 보이고 낮추면 쉽게 주울 수 있다.” 아버지는 “어느 회사든 기획실은 그 조직의 핵심부서다”라고 전제한 뒤 ‘기획’이 뭐냐고 불쑥 물었다. 머뭇거리자 아버지의 설명은 이랬다. 기획(企劃)과 계획(計劃)은 둘 다 일을 이루기 위해 미리 생각하고 세우는 것을 의미하지만, 엄연하게 다르다. 기획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계획은 세부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기획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과 방향을 제시한다. 계획은 기획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어 “기획의 기(企)자는 ‘꾀하다’나 ‘도모하다’, ‘발돋움하다’라는 뜻이다. 파자하면 사람 인(人)자와 발 지(止)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지’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으로 ‘발’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 크게 ‘발돋움한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기’는 발돋움해서 멀리
결혼하던 해 아들을 얻고 삼 년 뒤에 딸을 얻었다. 직원회식 중에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축하 잔을 물리치지 못해 만취한 채 아내가 입원한 산부인과에 갔다. 몸을 일으키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안쓰러워 머뭇거리자 어머니가 느닷없이 “왜? 딸 낳아 서운하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며칠 지나 아버지가 호출했다. 같이 앉은 어머니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고 눈짓했다. 아버지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 “바보 같은 놈”이라고 역정부터 냈다. 아버지는 “세 여인에게 상처만 주는 못난 짓을 했다. 사내답지 못하다”라며 당신이 기대했던 자식의 행동을 일일이 제시했다. 바라지하는 어머니에게 고마운 인사를 먼저 해야 했다. 아내의 건강을 살피고 애썼다는 말을 했어야 옳다. 아이를 안아준 뒤 순산(順産)을 축하하고 소중한 딸을 얻게 돼 ‘기쁘다’라는 표현을 반드시 해야 했다. 다음에는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병원 가는 길에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뭘 생각한 거냐?”며 나무랐다. 아버지는 “‘서운하다’라는 말은 실망할 때 쓰는 말이다. 아들을 바랐던 거냐?”고 물었다. 이어 “서운한 감정은 부질없다. 그건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라며 딸을 낳아 서운해하는 이유가 잘못임을 일일이 설명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기대에서 온 남아 선호사상은 헛된 거다. 아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딸은 아들보다 약하고, 결혼해 남편의 가족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걱정은 고정관념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는 거는 사회적 편견이다. 아버지는 “너 같이 지각없는 행동을 하는 아들을 나
결혼 준비 때 벌어진 일이다. 예식장을 구하지 못해 안달 내다 지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구했다. 토요일 오후 3시와 4시 결혼식 중간에 3시 30분으로 끼워 넣었다. 30분 만에 결혼식을 끝낸다는 조건이었다. 예식장이 정해지니 일이 한번에 밀려들었다. 맘이 급해 청첩장은 전문업체에 가서 샘플을 보고 그 자리서 직접 문안을 만들었다. ‘저희 두 사람이 平素 저희를 아끼고 보살펴주시던 여러 어르신과 친지분들을 모시고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디 오셔서 축복해주시면 더없는 기쁨과 격려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장남 成權 올림.’ 그리고 욕심내 만년필로 글을 쓰고 동판으로 찍어 인쇄했다. 인쇄소는 이렇게 만드는 청첩장은 처음이라며 정성 들여 인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청첩할 지인들을 엄선했다며 300매만 달라고 했다. 인쇄된 청첩장은 드리기 전에 다시 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청첩장을 받은 아버지는 문안을 보자 바로 “이걸 나더러 보내라는 거냐”고 역정을 내며 내던졌다. 부아가 나서 내뱉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라는 말 때문에 아버지 말씀만 길어졌다.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적했다. 맨 먼저 “자식이 청첩인인 걸 아비가 보낼 수 있느냐?”며 격식성을 문제 삼았다. 두 번째는 “청첩장은 속성상 자랑하는 글이다. 그러니 완곡하게 간청하는 문투여야 한다. ‘우리 둘이 결혼식을 하니 오라’는 데 그치고 말았다. 진실성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아버지는 이어 “‘저희를’을 왜 두 번씩이나 썼냐? ‘平素’를 한자로 쓴 이유는 뭐냐?”고 캐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게 ‘글의 여울(灘)’이다. 읽는 이들은 거기서 저항을 느낀다. 글의 맥을 끊고 나